[전자책] 미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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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불호가 갈리는 소설이다. 아무리 예술과 외설이 한 겹 차이라고 해도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미실에 등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색공지신'이라는 것도 생소하기 이를 데가 없다. 왕이나 왕족의 계승을 위해 색(色)으로 섬기던 신하라니...조선시대 왕실의 '후궁'이나 사가의 '처첩제'와도 사뭇 다르다. 일단 족보로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실이 직접 모신 왕만 법흥, 진흥, 진지, 진평으로 4명이나 되고, 왕족까지 세면 부지기수이고,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신국(新國: 신라)의 도'를 행하였으니 미실의 치맛폭이 스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인 탓이다.

 

  그렇다고 신라를 '색의 나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미실의 경우가 특별한 경우이지 대다수는 남녀 모두 정절을 '사랑의 으뜸'으로 여기며 도덕적 규범(유교사상)이 널리 행해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만, 인도의 <카마수트라>, 중국의 <소녀경>처럼 색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비법'이 있듯 왕실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색공지신(혹은 왕비)'을 업으로 삼은 '대원신통'의 독보적인 비결을 온몸으로 타고난 미실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다만, 후대로 넘어오면서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진골정통'의 계보는 뚜렷이 전해지는데 반해서, '대원신통'의 계보는 명맥부터 흐지부지한 것으로 보아, '색공지신'의 활약이 가히 넘사벽이었던 것으로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탓에 <화랑세기 필사본>의 등장은 학계의 논란을 넘어서 일반독자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여질 정도라고 평가하면 좋을 듯 싶다.

 

  하지만 미실을 보는 관점을 넓혀보면, '진정한 양성평등시대의 표본'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치마폭을 거치지 않고서는 왕은 왕답지 않았고, 왕족은 왕족답지 않았으며, 화랑도 진정한 화랑이 아니었고, 남자는 남자가 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누구 하나 '미실의 행실'을 부도덕하다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있었기에 신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여자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시절'이었음에도 미실은 모든 것을 해냈다. 심지어 너무 잘 했다. 왕가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왕위쟁탈전'도 미실의 치맛폭 아래서 잠잠해졌으며,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제도'도 그녀의 탁월한 안목과 드넓은 애욕으로 인재를 발탁하고 화랑들을 통솔하였다. 화랑의 존재만 놓고 보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집단 아니던가. 이런 젊은이를 통솔할 '풍월주' 가운데 미실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 적잖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여자, 아니 엄청난 위인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미실이 존재하지 않았던들 삼국통일의 기틀이었던 화랑들은 전국산천을 누비며 낭도(화랑을 따르던 젊은남자)와 유화(화랑을 쫓던 젊은여자) 풍류나 즐기던 유약한 집단이나, 혈기왕성한 치기로 말썽, 난리, 소란이나 피우고 돌아다니는 패거리로 전락해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화랑이 있기 전에 '원화'가 있어 두 패거리로 나뉘어 서로 시샘하고 질투하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 죽이는 사건까지 벌어져 유명무실해졌던 선례를 보아도 그렇다. 그 '원화제'를 해체하고 '화랑도'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데 미실의 역할이 컸으며, 화랑도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미실, 스스로 원화가 되어 화랑의 분열을 막고 화랑의 명맥을 잇는 것으로 모자라 더욱 활약을 펼칠 수 있도록 안배한 것도 모두 미실의 공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모든 업적이 그녀의 원래 직업(?)인 '색공지신'으로 이뤄낸 업적이며, 때로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색으로써 '신국의 도'를 완성하고 신라의 평안과 안녕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참 낯선 인물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왕조 500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전통이 우리 본연의 정신이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신념까지는 아닐지라도 남자나 여자나 색을 드러내는 일은 삼가야 할 교양으로 알고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실의 존재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렇다면 작가 김별아가 그려놓은 '미실'은 어떨까? 역사속의 사실을 그대로 그려냈을까? 개인적으로는 '반반'이라고 본다. 김별아의 다른 소설인 <채홍>과 <어우동>에서처럼 '사랑'을 전반적으로 깔아놓으며 '문제적 여성'을 다루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채홍>에선 문종의 둘째 부인 순빈 봉씨의 동성애를, <어우동>에서는 사대부의 부인의 자유로운 사랑을 다루면서 '억압된 조선사회'에 일침을 놓는 면이 있다면, <미실>에서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가없는 사랑과 애욕을 불태우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통점이라면 작가의 '에로틱한 필력'일 것이다. 그래서 실제 역사속 미실과 소설속 미실의 간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작가의 필력으로 잊혀진 인물이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김별아의 필력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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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2 - 1916-1920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2
박시백 글.그림 / 비아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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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의 취지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사실(史實)'을 열거하는 것뿐일까? 그래서 친일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기는 기회로 삼는 것일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102년을 맞이한 지금, '사실'을 밝히는 것에 만족한다면 너무 밋밋한 책읽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보다는 좀더 깊은 울림으로 책을 읽어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 세계 열강의 식민지였던 나라가 3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없으며, 불과 100년 만에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이 된 사상 최초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발전은 눈부신 정도이고, 민주주의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시민의식이 고취되어 있다. 물론 빠른 성장과 변화가 마냥 좋은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선진국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아니라 더 나은 결과만 보여주고 있으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져도 부끄러울 것이 하나 없다고 해도 넘치는 찬사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독립이 우리 스스로의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것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우리 나라는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탓에 미국과 소련(러시아), 중국, 심지어 일본의 눈치만 볼 뿐, 아무 것도 독자적으로 해낼 수 없는 약소국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마냥 틀린 말도 아니다. 30년 전만 해도 쉬이 반박할 수 없는 '팩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30년만에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말았다. 숱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어냈으며,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맺은 '촛불혁명'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전세계에 한류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각 분야에서 당당한 대한민국의 역량을 눈부시게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가 불과 100년 전에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망국의 역사'를 간직했다고 믿겠느냔 말이다. 한편, 그러한 '아픔'을 알고나면 이 나라가 더욱 위대해져 보일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가 더욱 값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친일의 길'을 걸은 이들을 발본색원, 일벌백계해야 겠다는 다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5년>의 두 번째 책은 1916년부터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사실'을 밝혀내었다. 크게 보아 '3·1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사건을 펼쳐보였고, 폭발적인 3·1혁명의 결과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과정을 낱낱이 밝혀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 가운데 '사회/공산주의 진영의 독립활동'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교과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그저 몇몇 '낱말'만 익숙할 뿐, 지난한 과정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과 역동적인 모습을 교과서에서는 전혀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책읽기가 될 것이다.

 

  먼저, '3·1혁명'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절대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하고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필연적인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필연적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일제치하의 한민족들이 '한마음 한뜻'이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따라서 '3·1혁명 이후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참뜻이요, 참된 실천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3·1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끝내 독립을 일궈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독립을 했더라도 '다른 나라 덕분에' 이뤄낸 독립이라 지금의 멋진 대한민국은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정은 어땠나. 1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다다르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승전국은 패전국들의 전후처리를 결정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된다. 민족자결주의란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라는 내용을 간단히 표현한 말인데, 그 당시 식민치하의 민족들에게는 '하나의 민족은 마땅히 독립국의 지위를 가진다'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허나 승전을 쟁취한 국가들에 속한 식민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윌슨의 발뺌으로 그 취지가 퇴색하고 말았다. 허나 나라 잃은 설움에 독립의 의지를 활활 태우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바람 앞의 촛불일망정 불꽃을 살리기 위해 앞장 섰다.

 

  허나 위험천만한 행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도 '승전국의 지위'를 갖췄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일본의 위상'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견고한 것이었고, 승전국들의 이기적이고 뻔뻔한 행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치졸한 것이었다. 얼마나 치졸한 결과물을 내놓았으면 20년만에 '또 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졌느냔 말이다. 그런 놈들끼리의 결말이 예상되는 와중에 '대한민국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도착했다.

 

  허나 대표가 도착했다고 달라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에 속해 있던 식민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표자격부터 박탈 당했고 발언은 묵살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 반전을 준 '일대사건'이 바로 '3·1혁명'이다. 2000만 동포 가운데 절반이 혁명에 참여했으며,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까지 시위가 이어져 연일 전세계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로 장식되었으며 일제치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나며 일본의 식민통치가 전세계의 지탄을 받게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값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의 의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숨죽여 지냈지만 서로의 속마음은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품고 있었음을 백일하에 드러낸 셈이다.

 

  이런 혁명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으로 멸망을 하였는데, 왕조가 아닌 '민국'으로 거듭난 형태로 '정부 수립'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 '민주주의 정신'을 꽃 피울 수 있다는 저력을 확인하는 대사건이다. 이런 전차로 '3·1운동'은 운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당당히 '3·1혁명'으로 완성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저력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서 당당히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그 결과로 '임시정부'를 내세움으로써 전세계에 '독립국'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위대한 혁명을 부정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은 '친일적폐'임을 스스로 밝히는 셈이 된다. 우리의 역사는 반만년의 유구함을 간직하였고, 현재의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의 의지를 천명하며 건국을 했음을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증명한 셈이다. 그런 까닭에 2021년인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102년'으로 셈해야 마땅하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명백한 사실이며, 우리의 거룩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부정하고서 '지금, 대한민국의 영광'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소비에트 공산혁명'도 착착 진행중에 있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당시 식민치하에 놓인 혁명가(독립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당시 세계열강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낱낱이 밝혀내며 '공산혁명'을 주장했는데, 제국주의(자본주의)에 치를 떨던 전세계인들에게 '마르크스 이론'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상당수는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공산주의 계열'이었다. 이들이 꿈꾸던 독립국은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였지, '지금의 북한'과는 사뭇 다른 나라였음이 분명하고,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들이 '해방이후 월북과정'에서 대다수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도 해방직후 남한에서는 이들에 대해 눈 감아 버렸고, 상당기간 동안 눈 가린 채하고 있었던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남북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라고 치부한다면, '이념적 갈등'을 넘어선 지금에라도 당당히 밝혀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던 멋진 독립국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도 알려줘야 할 것이다.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지만 '지금'은 훌훌 털어버리고 세계속에 당당하고 멋진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멋진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 민족 스스로 보여준 역량 덕분이다. 늘 세계 최고는 아니지만 위기에 닥칠수록 빛나는 업적을 보여주며 어느 나라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국민들이 만든 나라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든 손은 자랑스러워야만 한다. 총칼로 위협해도 물러서지 않고, 하나뿐인 목숨을 잃는 위기속에서도 당당히 펼쳐보였던 태극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손으로 이뤄낸 나라를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3·1혁명'때처럼 태극기를 펼쳐라. 그 손으로 만든 나라이고, 그 손으로 만들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이 그 손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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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디어, 너 때는 말이야 청소년 미래 생존 프로젝트 1
정동훈 지음 / 넥서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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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어릴 적 꿈이 '무작정 과학자'였기에 아무 거리낌없이 고딩때 '이과'를 선택했고, 아무 생각없이 대학진학은 '공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서야 나에게 '문과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뒤늦게 '인문학(문사철)'를 접하고서는 지금껏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내 학문적 성향을 곰곰이 따져본다면, 좋게 말하면 '통섭'스럽고, 흔한 말로는 '잡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까닭에 공대출신인데도 '기술학'쪽은 쑥맥에 가깝고, 'IT'쪽은 컴맹보다 못하다고 할 정도다. '블로그'만 16년 넘게 쓰면서도 변변한 '사진'조차 편집해서 올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딱 그렇다.

 

  하지만 시대가 이러하니만큼 'IT 관련서적'은 읽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끔씩이라도 챙겨서 읽는 편이다. 물론 '이해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말이다. 그래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꽤나 중요한 분야라는 것만큼 피부로 느끼고 있는 편이다. 특히 '미디어의 변화'는 엄청난 속도로 변신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왜냐면 올 상반기를 끝으로 'TV시청'을 아예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원인은 직장이 바뀐 탓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재택근무를 하던 작년과 달리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TV를 볼 수 있는 '시간대'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퇴근 후에는 피곤함이 몰려와서 곧장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마니 'TV시청'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컴퓨터를 이용할 시간에 '티빙'과 같은 'OTT' 기반의 미디어를 주로 시청한다. 좋아하던 영화와 드라마도 '극장개봉'을 기다리거나 '본방사수'를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몰아보기'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굳이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카카오TV'로 시청범위를 넓히면서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즐기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TV덕후'였던 나의 변화를 보더라도 '미디어환경'이 얼마만큼 변화되었는지 실감하고 있다.

 

  이처럼 '미디어 변화'가 한 템포 빨라진 까닭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데이터를 다룰 줄 알고,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며, 콘텐츠를 생산할 수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시급해졌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펼쳐질 미래는 지금과는 '또 다른 세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에는 'QR코드'로 관련 정보나 동영상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종이책으로 읽을 때에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손쉽게 열람할 수 있지만, eBook으로 보니 훨씬 더 편했다. '클릭'만 하면 '바로보기'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이젠 독서도 '글자(텍스트)'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삽화와 도식을 넘어 '유튜브'와 같은 콘텐츠를 활용한 능동적인 독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텍스트'가 쓸모없어졌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동영상시청'이 '책읽기'를 대신하는 시대가 찾아올지는 몰라도 '텍스트 읽기(문자해석)' 자체가 사라질 까닭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서 귀로 듣거나, 온몸으로 체험하는 등등 '텍스트 읽기'의 방법이 달라질 수는 있어도 '문해력의 중요성'은 더욱 심오해질지언정 소홀해질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은 'MZ세대'의 필독서일테지만 '기성세대'도 읽어야만 할 책이 틀림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시장에 적응하며 살기 위해서라고 까닭을 달고 싶지만, 그러면 주류에서 밀려나기 싫은 기성세대들의 절박함만 드러나고 말테니, 변화하는 '미디어 시장'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하고 싶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다름 아닌 '일상생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기억해보면 이런 일상의 변화는 기성세대들이 이미 겪었다. 핸드폰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길거리마다 즐비하던 '공중전화'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1인 1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집전화'마저 빠르게 없어지고 말았다. 아직도 쓰고 있다는 구차한 변명보다는 '차마 버리지 못했다'는 말이 더욱 그럴듯하다고 느낄 것이다. 익숙했던 일상이 변하고 있다고 느껴졌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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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 자유와 희망을 위해 현실의 장벽을 넘다 파란클래식 1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원작, 김남길 지음, 김용달 그림 / 파란자전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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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집구석을 뒤지다보니 <돈 키호테> 책이 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과 논술수업을 하면서 구비한 책들인데, 정작 책 내용이 가물가물해져서 다시금 꺼내들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구성은 '세르반테스의 생애'를 다룬 내용과 '돈 키호테의 대강 줄거리'가 수록되어 있다. 구성만 놓고 봤을 땐, '가성비'가 참 좋은 책이면서 동시에 '배경지식'을 쌓기에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청소년용으로 편집된 덕분에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이때 어울리는 속담이 '수박 겉핥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돈 키호테>가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꽤나 효율적인 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면 원작을 뒤쳐(번역) 놓은 '완역본'이 700여 쪽에 육박하는 벽돌책이므로 웬만해서는 완독조차 힘든 책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400년 전에는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긴책'이 분명하지만, 21세기에서는 당최 무엇이 웃기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난해한 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책인데도 '명문대 필독서'라면서 <고전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책만 읽어서는 요즘 청소년들이 이해하기도 힘든 내용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알맞은 <안내서>가 필요하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돈 키호테>가 400년 전 대중의 배꼽을 쏙 빼놓은 까닭은 르네상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중세의 기사'가 등장하여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라떼는 말이야"라면서 왕년의 스타가 옛일을 회상하면서 요즘 세태를 까발리고, 대개는 엉뚱한 일을 벌이고 말지만 가끔씩 현실비판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 싶다. 그렇다. <돈 키호테>가 명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까닭은 바로 '세태를 비판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근대가 시작할 정도로 시민들의 의식은 깨어있는 판국에 왕년에 한가닥 하던 '중세기사'로 분장한 주인공이 등장해서 하는 짓마다 엉뚱하고 한바탕 말썽을 피우니 우스웠던 것이다. 마치 옛날 코미디인 '(행동이나 몸짓으로 웃기는) 슬랩스틱'의 한장면을 그 당시 사람들이 떠올렸던 거라고 보면 좋을 듯 싶다. 이런 장치는 '신분계급'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사계급은 중세시대에서는 한가닥 하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기사계급'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엉뚱한 기사'가 등장해서 난장을 피우니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돈 키호테>가 명작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명작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돈 키호테가 때때로 명쾌할 정도로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기사계급'은 몰락했지만, 여전히 왕이 존재했고, 귀족과 성직자가 떠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돈 키호테가 이런 '권력층'을 향해서 가감없는 한방을 통쾌하게 날렸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런 돈 키호테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의 독자들에겐 어떤 메시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걸까? 현대의 독자들에게 '돈 키호테의 매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무모한 도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돈 키호테의 행동이 미치광이로 보일지는 몰라도 '엄청난 거인'을 향해 용감히 돌진할 수 있는 용기만큼은 박수갈채를 아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풍차'였을지라도 말이다. 돈 키호테에만 보였던 거인과 용, 그리고 풀 수 없는 마법과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둘레시아 공주 따위가 바로 '무모한 도전의 원천'인 셈이다. 세속의 눈으로 보았을 땐 성공 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돈 키호테만의 시선으로 보면 '희망'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넘어서 '가능성'을 활짝 열어버리는 마법이 펼쳐져버린 셈이다.

 

  그 '가능성'이 중요한 까닭은 오늘날의 '메타버스'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싶다. 현실에서는 초라한 자신일지라도 '가상현실' 속에서는 엄청난 재능을 뽐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또 다른 나'가 존재하며, 원한다면 '무한한 자신'을 갖게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에서 '무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현실의 돈 키호테는 풍차를 향해 뛰쳐드는 무모한 인물이지만, '메타버스'가 구현한 세상에서는 무시무시한 용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돈 키호테는 더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그는 꿈을 실현하는 몽상가로 불리워야 마땅할 것이다. 비록 몽상가의 꿈이 실현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몽상가의 꿈'이 실현되는 그 순간에 세상은 언제나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고, 에디슨이 그랬으며, 라이트 형제가 그랬다. 세상은 언제나 '실현가능성 제로'였던 몽상가의 꿈이 실현되는 그 순간부터 새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다음 <돈 키호테> 책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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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 초판본 비밀의 화원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박혜원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소공녀>와 <소공자>의 감성에 푹 빠졌다면 절대로 빼놓지 않고 읽어야 할 책이 바로 <비밀의 화원>이다. 세 작품 모두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소녀와 소년 들이고 말이다. 또한 그녀의 소설은 '기승전결'이나 '위기절정결말' 따위로 읽을 필요가 전혀 없다. 먹물을 함뿍 찍어 화선지 위에 점을 찍듯 감동이 점점 커지는 경험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공통점은 바로 '해피엔딩'이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어린이 독자들을 한 번 읽으면 푹 빠지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나름의 아픔과 난관에 봉착해 있지만 '선한 마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결국 행복한 결말로 끝맺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꿈꾸는 꿈과 희망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래서 어린 독자들은 그녀의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어릴 적 추억을 간직한 채 성장한 어른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추억을 선사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에게 또다시 권해줄 테고 말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부모에게 버림받듯 홀로 남겨진 메리 레녹스는 못된 망아지처럼 버릇없이 자란다. 애정과 돌봄을 받지 못한 어린이가 착하고 배려심도 많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므로 레녹스는 부모에게 외면을 받으면서 하녀들에게 '갑질'하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은 듯 제멋대로 굴기 일쑤였다. 그러다 레녹스가 사는 마을에 콜레라가 유행했고, 부모도 콜레라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다. 집안의 어른이 죽자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레녹스는 대저택에 홀로 남겨진 채 유행병이 잠잠해지고 난 뒤에야 군인들에게 발견된다.

 

  다행히 레녹스는 사촌이 사는 영국 요크셔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황무지를 만나게 된다. 집안에서 성깔 사납게 굴기만 했던 꼬마 숙녀가 대자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황무지를 만나자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무지를 사랑하는 이들과 만나면서 레녹스는 달라지게 된다. 못난이 꼬마아가씨가 성장통을 한껏 겪은 뒤에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숙해질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녀 마사와 정원사 벤, 그리고 하녀의 남동생 디콘을 만나면서 레녹스는 점점 변해가는 자신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그러다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화원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에 부치기도 한다. 이 책에서 감동의 원천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괜히 '비밀의 화원'이 아니다. 그 비밀은 직접 책을 읽으면서 느껴보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비밀의 화원'을 중심으로 세 소녀소년의 성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레녹스, 디콘, 그리고 콜린이다. 이 가운데 디콘은 이미 성장이 완료된 채 등장하지만, 레녹스와 콜린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선생님 역할을 하면서 '긍정의 에너지'를 무한하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굉장히 중요한 배역이다. 레녹스와 콜린의 성격이 처음에는 아주 개차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디콘의 긍정에너지는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디콘 같은 친구를 얻을 수 있다면 세상을 얻을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스로 디콘과 같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엄청난 행운아일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세 소녀소년을 밝고 건강하게 만들어준 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밀의 화원>의 주된 배경인 '황무지'와 저택의 '화원'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연상된다. 이 소설에서도 알프스를 배경으로 마음껏 뛰어노는 소녀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이디와 친구 먹은 클라라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발 한발 내딛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경험하게 되고 말이다. 그리고 <비밀의 화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은 적중하였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던 콜린이 화원에서 뛰놀면서 새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가슴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두 소설 모두 자연이라는 환경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인지 깨닫게 해준다. 비록 코로나 판데믹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마저 앗아가버리고 말았지만, 언젠가 다시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게 된다면 꼭 '비밀의 화원'에서처럼 자연과 함께 숨쉬는 소중한 경험을 만끽하길 바랄 뿐이다. 우리 어른들은 반드시 마련해야 하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투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영국의 요크셔는 지방색이 아주 강한 지역으로 소개되고 있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해서 거칠고 투박하지만 인정은 아주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영어권'에서는 그 느낌 그대로 전달할 수 있겠지만, '문화권'이 다른 우리말로 뒤쳐낼 때 사소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만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도대체 어느 지역 사투리로 감성을 전달하느냔 말이다. 척박한 지형에 강한 어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북 사투리'가 딱 어울릴 테지만, 아직까지 우리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들테고, 강원도 지역 사투리는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정서와 감동을 옮겨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제주도사투리를 쓸 수도 없고...그래서 '뒤친이(번역가)의 선택'은 충청도 사투리였다. 개인적으로는 옳은 선택 같다. 다만 '사투리의 진하기'를 적절히 조절해야 하는 어려움이 남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다른 뒤친책을 참고한다면 분명 '실패작'들도 꽤나 있다. 너무 과한 설정으로 '어린이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강한 지역색을 드러낸 책들은 어른이 읽기에도 불편한 점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딱 적당하다고 본다.

 

  끝으로 이 책의 감동을 무엇으로 전하면 딱 좋을까? 개인적으로 한 번 손에 잡으면 술술 넘기는 동화책 가운데 으뜸은 <빨간머리 앤>이다. 그 다음으로 꼽는 책이라고 소개하면, 내가 느낀 감동이 전해지려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동이 밀려오고, 그래서 다음 장이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말이다. 나만 그럴까? 아닐 것이다. 비밀의 화원이 너무 좋아서 날마다 찾아가고 하루종일 뛰어놀고, 그 속에서 쑥쑥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정말정말 사랑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쁜 꽃들이 가득한 그곳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게 만들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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