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산책 7 - '뜨거운 전쟁'과 '차가운 전쟁' 미국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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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I / 인물과사상사 14번째 리뷰] 이 책의 구성은 '미국사'를 중심으로 한 편년체 방식(연월일 시대순)으로 기술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 사이사이에 벌어졌던 '주요사건들'을 기사본말체(사건별로 역사서술) 방식으로 풀어낸 역사책이다. 특히, 미국과 관련된 '한국사'에 대한 비중도 깊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사에 대한 서술이 일품인 책이다. 7권에서 다룬 내용 가운데 한국사와 관련이 깊은 내용은 '해방 뒤에 분단된 한국'과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즈음에 미국은 이미 패권국가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으며 '가공할 만한 힘'을 전세계에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히틀러'를 찍어 누를 때와 '히로히토 일왕'을 압박할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일이 패망할 즈음에 히틀러는 '자살'을 할 지경이었지만, 일제가 패망할 때에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랜 친구를 배려(?)하듯 최대한 양보하는 듯한 뉘앙스가 엿보일 정도였다. 이는 전범을 다루는 '방향'에 대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독일은 그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특히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에 대해서 추호의 용서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일제의 처우는 달랐다.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에 대해서 관대하기 짝이 없게 단 7명에 대해서만 사형을 집행했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머지 잡범(?)들은 석방되었고, 심지어 과거의 경력을 높이 사서 일본의 주요관직에 속속 복귀할 수 있었다. 조선인을 비롯해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부대 관련자들은 '연구자료'를 미국에 고스란히 넘기는 조건으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강연에 초빙을 받아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발표할 정도로 안락한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누구도 불명예를 받지 않았고 유명 대학과 제약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호의호식을 받으며 살아갈 지경이었단다.

  오히려 해방 이후 일제의 범죄에 대한 죄값을 받은 건 '한국'이었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패망하고 분단되었어먀 마땅했는데, 오히려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맥아더의 호의(?) 덕분에 분단이 아닌 '통일'을 유지했는데, 한국은 북쪽으론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군사정권'을 만들어 신탁통치를 강요받은 것이다. 이유는 한국에서 일어날 소요사태를 단속하고 통일정부를 이끌어나갈 정도로 막강한 단체나 지도자를 내세울 수 없을 정도로 '지도부의 분열'과 더불어 '국민들의 사상적 분열'이 매우 심각했다는 분석 때문이었단다. 이는 해방이 되자 서로 일제로부터 '정권 이양'을 받겠다는 인물이 스무 명도 넘게 등장했고, 단체 또한 너무 많았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이 때문에 한국 분단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에서 찾는 경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국의 철저한 '한국 무관심'에서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국은 분명 제국주의의 피해당사자인데도 미국 행정부는 이를 '완벽한 무지'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무시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서 입국할 때 환영하는 한국인들이 치안을 맡은 '일제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한국인을 죽인 일제경찰에 대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팩트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군은 한국을 '해방' 시킨 것이 아니라 '점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렇게 주둔하게 된 미군은 한국을 다스리면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보다 더욱 가혹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일본인들을 철저히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뒤에 쥐 죽은듯이 얌전한 일본인들 부드럽게(?) 다스린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초지일관' 무관용으로 대응하며 '공산주의의 확산'만을 면밀히 주시하며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런 미군정의 자세는 일제가 물러난 한국에 비극의 씨앗을 남겨주었다. 바로 독립운동을 한 이들에게는 모욕감을 주고, 친일행적을 일삼았던 무리에게는 영예를 안겨 준 것이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했던 나라는 한반도의 조선 뿐만이 아니었다. 만주국을 세워 수많은 만주인과 몽골인 들도 일제의 식민통치로 억압을 받았으며, 대만도 총통을 둘 정도로 철저한 관리를 했고, 유럽 열강의 통치를 받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제도의 식민지들을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점령을 하고 억압하고 수탈했었다. 그 가운데 일제에 끈질긴 항거를 하고 전투를 일삼고 끝까지 저항을 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조선인들에게 치열한 투쟁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한국인'들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강제 점령(?)을 강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게 적절한 어필을 못한 탓으로 봐야할까? 유럽과 태평양이라는 '양대 전선'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쥔 초강대국에게 우리가 어필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38선을 긋는 것도 고작 '30분간의 회의' 끝에 일방적으로 그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개무시를 하는 미국에게 우리의 어필이 통하기나 했을까?

  물론, 미국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을 것이다. 바로 '공산주의와의 대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에 곧바로 '냉전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뜨거운 전쟁에서 차가운 전쟁으로의 전환은 이미 독일과 일제가 패망하기 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북쪽에 '소련군'이 진군하였고, 이미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발빠른 진격(?)'은 미국으로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 몰랐던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한 것부터 오판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일제가 허무하게 항복할 줄도 몰랐고, 소련군이 일본 본토가 아닌 한반도로 진격해갈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소련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도선'으로 한반도를 양분하기로 통보한 것이고, 이는 두 나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단다. 미국은 소련이 순순히 받아들일 줄 몰랐고, 소련은 미국이 이처럼 후하게 남하할 수 있도록 배려(?)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그어져버린 '38도선'은 지금까지 한반도를 '분단'시켜 버린 원흉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미국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미국 사회는 온통 '자신감'으로 넘쳐났고, 그런 자신감은 '힘의 과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에 '고립주의'를 외치던 미국은 이제 본격적인 '세계화'에 나서며 국력을 과시하고 국익이 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1945년 이후 미국은 '자본주의'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전세계를 주름잡으려는 포부를 공공연하게 내비쳤다. 반면에 소련은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뽐내며 초강대국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존심을 넘어 '압도'할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미국적인 세계화에 번번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른바 '냉전시대'다. 그리고 그 냉전의 종착점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미국내에서는 '매카시 광풍'이 불면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데 열을 올리며,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가릴 것이 없이 탄압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그 광란의 분출구를 빠르게 한반도로 '유도'하는 양상이었다. 그에 반해 소련은 한국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탄탄히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며 미군에게 무기를 달라고만 요구했다. 이승만에게 그럴 듯한 대안이라도 있었다면 미국이 '무기'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 못지 않게 '반공주의' 노선을 확고히 했던 이승만이 고마워서라도 도와주는게 인지상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언제나 말로만 앞세웠고, 실제로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를 간파한 미국은 오히려 '미군철수'와 동시에 쓸만 한 무기로 일체 회수해가버렸다. 무기를 남겨두었을 때 이승만이 저지를 무모함을 우려한 탓이다. 거기에 '애치슨 라인'까지 그으며 한국에서 철저히 발을 빼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냉전'이 새로운 '열전'으로 전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할 수만 있다면 소련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은 참전했고 '노근리 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적 행태는 한국전쟁을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었다'는 언론의 보도보다 더 끔찍하게 한반도를 달구었다. 그 참혹한 전황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으로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다. 당시 트루먼 미대통령은 '38도선의 회복'으로 전쟁을 일단락 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선넘는' 무모함은 전쟁을 장기화 시켰으며 중공군의 참전을 불렀고, '흥남철수'와 '일사후퇴'로 전황은 더욱 급박해졌고 전투는 더더욱 치열해졌다. 서로 물고 물리는 악전고투 속에 양측의 '희생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전선은 사나운 맹수의 아가리처럼 들쭉날쭉 하길 반복했다. 이런 와중에 맥아더는 중국본토에 원자탄 26발을 투하하여 공산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이미 세워두었단다. 이를 내심 바랐던 것이 이승만이고 말이다. 허나 맥아더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을 통해 전세계 공산세력을 궤멸시켜 냉전까지 종식시키겠다는 야심에 있었다. 이에 반해 트루먼은 전쟁은 '한반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입장이어서 둘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승자는 맥아더가 아니었다.

  만약, 맥아더의 야심대로 중국 본토와 만주에 원자탄을 떨어뜨리고, 대만의 장제스가 본토 진격을 했다면, '한국전쟁'은 곧바로 종전을 했고, 이승만은 통일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기 때문이라는 환상(!)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일제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매일 반복되는 미군의 '대공습'으로 이미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서두른 것도 아니었다. 항복을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미군에 피해를 안겨 유리한 고지를 점한 뒤에 '협상 테이블'에서 항복을 조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서둘러 미국에 항복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속셈으로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중공군을 지휘하는 모택동(마오쩌둥)은 항복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원자탄 26발을 얻어 맞으면 전쟁이 종식되고, 전세계 공산세력도 함께 궤멸할 것이라는 환상은 빨리 깨는 것이 다행이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구상은 오히려 소련의 한국전쟁 참전을 불러 일으켰을 공산이 크며, 그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와중에 '한반도'는 어땠을까?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이 되어 한반도는 조금이나마 평화로웠을까?

  이와 더불어서 맥아더를 '한국전쟁의 우상'으로 삼는 것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백인우월주의자였다. 실제로 그는 항복문서를 조인한 '일왕'을 대신해서 일본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즐기던 고루한 인간이었다. 전근대적인 정복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을 넘어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수호받는 것이 마땅한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단 말이다. 만약 그가 '한국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면 일본에 이어 한국마저 '자신의 왕국'으로 삼았을 것이다. 무능한 이승만은 그런 맥아더의 뒤치닥거리나 하면서 콩고물 얻어 먹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과거에 젖어서 현재를 망각하고 미래를 망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 곤란하다. 남북분단에 이어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도 아픈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정'을 걷어찰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다시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은 '지상천국'으로 여겨질 것이다. 절대로 전쟁만큼은 두 번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선 안 된다. 우리에게 '미국사 공부'가 필요한 까닭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닌 대한민국의 이익을 우선하기 위해서다. 철저히 공부해서 우리가 당한 만큼(?) 미국을 이용해먹자는 거다. 그들이 우릴 이용해 먹는 것이 '국제관계의 민낯'일텐데, 우리라도 당하고만 있어야겠느냔 말이다. 제대로 빨대 꽂고 쪽쪽 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버릴 수 없다. 대한민국을 잃으면 미국도 잃을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갑질'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역사를 꿰뚫어보면 그 방법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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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협려 1 - 활사인묘
김용 지음, 이덕옥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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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 / 김영사 31번째 리뷰] 이 책 <신조협려>는 김용이 쓴 '영웅전 3부작'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부에 해당하는 <사조영웅전>의 주제가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면, <신조협려>는 '정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정(情)을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신조협려>의 무협영웅들은 하나 같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애정에 집착하고 목숨까지 걸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신조협려>의 주제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 도입부는 너무도 유명해서 '홍콩영화'를 즐겨본 이들이라면 한 번만 들어도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원래는 금나라 시인 원호문의 '안구사'의 한 대목인데, 김용은 이 시를 통해서 <신조협려>를 통으로 써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조협려>의 등장인물들은, 특히 젊은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조협려>의 시대배경은 금나라와 몽골이 한창 싸우던 '남송시대'지만, 칭기스칸이 죽은 뒤에 몽골이 금을 멸한 뒤에 남송까지 차지하려 야욕을 드러는 때다. 이에 한족(남송인)들은 몽골의 군대에 맞서 결사항전을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몽골이 중원을 차지한 뒤 '원나라'를 세우기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소설속에서는 곽정과 황용이 한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끝까지 항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곽정과 황용이 승승장구하는 반면에 전세는 기울어 남송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고 만다. 이런 시기인데도 젊은 남녀들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려 싸우기보다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살짝 의아스럽기까지 하지만, 피비린내나는 전장터에서도 사랑은 꽃을 피우기 마련(?)이라는 것인지 김용은 과연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과 사를 같이하느냐?'고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신조협려>의 주인공은 단연 '양과와 소용녀'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양과는 <사조영웅전>에서 곽정과 의형제를 맺었던 '양강의 아들'이다. 양강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를 아버지로 섬기는 패륜을 일삼다 비명횡사한 탓에 양강의 아내였던 목염자는 아비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를 낳고 외롭게 살아간다. 이를 딱히 여긴 곽정과 황용이 목염자를 돌봐주려 하지만 거절하고 만다. 하지만 의형제 사이였던 곽정의 호의마저 거절할 순 없었기에 양강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되는데, 이름은 '과', 자는 '개지'로 한다. 아비의 과오를 잊지 말고 잘못을 고치라는 뜻을 담았다. 우리식으로 이름을 지으면 '양잘못', '뉘우침' 정도가 될텐데, 외국의 이름은 이렇게나 '직설적'이라서 황당한 경우가 많다. 아무리 아비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이름을 '부정적'으로 짓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굳이 우리식으로 이름을 말하자면, '양바름'이른 뜻을 담아 '양정(楊正)'이라고 지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소용녀는 양과보다 두 살 많은 설정이지만, 어릴 적부터 무덤속에서 살아온 터라 피부가 새하얗고 청순가련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20대가 넘어서도 소녀 같은 미모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허나 무덤에서 적막하게 살았고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는 탓에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성미라서 아이돌급의 미소녀인데도 냉랭하기 그지없..좋게 말해 차분한 미녀다.

  결국,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소용녀가 젊은 나이에 죽기 때문인데, 양과는 팔 한 쪽을 잃고 외팔이가 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키고 싶었던 첫사랑의 여인이 죽자 평생을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잘생김'은 떨쳐내지 못한 탓에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고 마는데, 그 가운데 곽정의 둘째딸인 '곽양'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용녀를 잃고 아파하는 양과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양과 때문에 곽양도 평생을 홀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홀로 무예를 닦아 '아미파'를 창시하게 되니, 훗날 3부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아미파의 여검사 주지약의 오랜 선배가 된다. 이렇듯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야기'가 <신조협려>의 이야기는 수많은 '무협지'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만들게 된 '암연소혼장'이란 무술에서 따온 고한우의 <암연>이라는 노래는 그 쓸쓸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하겠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늘만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와
   마주댄 그대 볼에 눈물이 느껴질 때는 나도 참지 못하고 울어 버렸어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은 이렇듯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런 둘의 사랑을 멀찍이 바라보던 '곽양'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픔에 빠져버렸고 말이다. 어쩌면 <신조협려>에서 사랑에 성공한 이들은 '찐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닌 것처럼 가슴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협려> 1권에서 이야기의 서문을 여는 것도 바로 사랑이다. 적련선자 이막수와 육전원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외모를 지닌 청춘남녀였는데, 둘은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냐면 육전원의 앞에 '하원군'이라는 절세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육전원과 하원군은 서로 첫 눈에 사랑에 빠져서 만나자마자 혼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막수는 육전원과 썸만 타다가 '사랑고백'을 하기도 전에 사랑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렇게 첫사랑에 실패한 이막수는 '악독한 미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살생을 저지르는 악행을 일삼는데, 그 첫 번째 행패가 바로 육전원과 하원군의 혼례식이었다. 그때 대리국 천룡사의 고승에게 제압 당한 이막수는 앞으로 10년간 이 부부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났는데, 시간을 훌쩍 지나 바로 10년 째 되는 그날에 이막수가 찾아와 육전원 부부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진즉에 틀어져 육전원과 하원군은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일찍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런데도 이막수는 육전원의 동생 내외를 비롯해서 그 집의 식솔들을 전부 살육하겠다고 쳐들어오니, 과연 사랑에 눈 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서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도 있고, 사랑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미워하고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마저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분노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음..여자 손목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총각은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다(--)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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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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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 / 파람북 1번째 리뷰] 나는 학창시절에 '작문시간'이 가장 싫었다. 책읽기를 딱히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읽으라고 나를 내모는 것이 너무 싫어 책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참 싫어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쓴 글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늘 낮은 평가만 받고 질책만 받으니 쓰기 싫었던 거다. 내가 쓴 글이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합당'했다. 지금의 나라도 어린 내가 쓴 글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내가 쓴 글에 '내 생각'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 글에 낮은 점수를 주면서 '느낀점(생각)'을 함께 쓰라고 한결같이 지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좀처럼 '느낀점'을 쓸 수가 없었다. 왜냐면 책속의 내용은 다 기억이 나고 줄거리도 줄줄 읊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데, 뭘 더 '생각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펀지, 그 자체'였다. 줄줄 외우고 따라하는 것들은 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을 표현하라는 것에는 늘 빵점이었다. 이를 테면, '이것'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물음에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그런 나를 다그치면 난 늘 '이것'에 대한 '사실적인 답변(정보)'만 줄줄 말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런 거' 말고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다! 라고 다그쳤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이란 걸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각'만 나에게 강요할 뿐, '내 생각'을 말하면 버릇 없다, 발칙하다, 그런 걸 도대체 누구에게 배웠느냐 면서 늘 혼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눅이 든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길 꺼렸었다. 아니, '내 생각' 따위를 표현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자기방어'를 먼저 배운 나는 그저 '어른들의 생각'을 외워서 얘기할 뿐이었다. 그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책속의 내용을 달달 외워서 글로 옮겨 적을 뿐, 내 생각을 담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던 나는 학창시절 내내 고통스런 작문시간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도 나는 '학력고사 세대'였다. 그래서 달달 외운 것만으로도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저마다 다른 것에 대해 나는 깜짝 놀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들을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이 나에겐 너무도 낯설었다. 도대체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마다 생각을 줄줄 읊어대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꽤나 흥분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나는 말 한마디 뻥긋할 수 없었다.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여서 나는 그 후로도 10여 년간 '표현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으며, 아기가 '첫 단어'를 내뱉는 것과 같은 긴 기다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 즈음이 되어 만난 쥐스킨트의 <향수>를 리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그 책을 소개했다. '그루누이는 사람들의 정과 사랑에 굶주린 절대고독에 빠진 존재이다'라고 말이다. 그루누이는 살인자다. 최고의 향수를 제작하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만을 골라 '그녀들의 채취'만을 뽑아내 절대적인 매혹의 향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맡으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을 못차리고 오직 '본능적인 인간, 그 자체'가 되게 만드는..그야말로 '냄새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매우 흡족해하며 '냄새'로 온갖 것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는 권능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 그루누이는 공포심에 깃들게 된다. 온갖 냄새를 구분하고 심지어 부릴 줄(?)도 알게 된 자신에게서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루누이는 채취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루누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어깨라도 부딪히면 부딪힌 상대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분명히 '느끼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딪혔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래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마저 제조해버린다. 달리 '냄새의 신'인가. 그루누이는 땀냄새를 비롯해서 구취, 암내, 발꼬랑내까지 손수 만들어서 알맞은 부위에 적절하게 뿌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루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냄새를 풍기는 그루누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루누이는 그 평온한 일상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자신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찰나에 그루누이는 자신이 벌인 '엽기적인 살해 행각'이 발각되고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그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결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 슬퍼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향수병을 열고 향수를 뿌린다. 자신이 제조한 최고의 향수를 말이다.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제정신을 못차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행복감에 충만한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루누이는 또다시 '군중속의 고독'을 절감하게 된다. 자신은 또다시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다. 제정신을 차린 군중을 자신을 죽이려 들테고, 제정신 못차린 군중은 자신을 추앙할테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은 설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느라 광란에 빠진 광장을 벗어난 그루누이는 한때거리의 사람들을 만나자 자신의 온몸에 '그 향수'를 뿌리고 만다. 향기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고 향기에 취해 그루누이를 탐하고 그자리에서 그루누이를 먹어버리고 만다. 그루누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평생을 외롭고 쓸쓸한 절대고독자로 살아온 그루누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뱃속에서나마 존재감을 드러냈다. '포만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내용으로 <향수>를 리뷰하게 되면서 나는 '나만의 표현법'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리뷰를 했지만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은 분명히 '이때'부터였다.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나만의 글'을 쓰는 첫발을 내민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리뷰어가 되었다. 돈벌이가 되지 않아 '본업'이 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내 목표가 있다면 내가 쓴 글로 엮은 책을 내는 것이다. 아직 그럴 정도로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으며 실력은 더욱 형편이 없지만 말이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을 읽으며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글쓴이 김미옥의 글을 읽으며 한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도 했더랬다. 글쓴이와는 달리 나에겐 책을 읽고 '책이야기'를 나눌 지인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책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가족 가운데 책을 읽는 이가 아무도 없고, 절친이라고 할만한 친구들도 '책이야기'라면 쥐똥만큼도 듣지를 않으며, 책모임 같은 곳을 찾아다닌 적도 있지만, 책은 핑계일 뿐 뒷풀이로 즐기는 술을 마실 생각뿐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나도 글쓴이만큼 '활자중독자'로 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변엔 '나의 생각'을 공감해줄 사람이 거의 없다. 딴에는 내가 <향수>에 흠뻑 빠진 것도 이런 환경탓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루누이처럼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은..아직 '냄새의 신'에 버금가는 '리뷰의 신'이 되지 못한 형편없는 내 글빨 덕일지도...

  서론은 이쯤하고,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쉽게 말해 '독후감 모음집'이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에세이 형식'으로 옮겨 적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난 수필보다 '독후감'이란 표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김미옥 글쓴이가 쓴 글은 분명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글'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뭉뚱그려 '신변잡기적인 글모음'이라는 수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독후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글쓴이가 이 책에서 밝힌 '책목록'과 '내가 여태껏 읽은 책목록'이 사뭇 달라 '독후감'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글쓴이가 읽은 책의 '주제'는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이 언급하는 내용과 '상통'하는 주제들이 많았기에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독후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사실 '독후감'과 비슷한 용어로 '서평'이나 '리뷰'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솔직히 '서평, 리뷰'따위는 '독후감'에 비하면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전자는 '홍보, 광고효과'를 노리고 마켓팅의 일환으로 쓰여지는 일이 빈번하지만, 후자인 '독후감'은 직접 책을 사서 읽고 느낀점을 썼다는 느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표현'에 연연하지 않고 쓰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분류법'으로 나누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리뷰'가 더 정진을 해야만 '나의 독후감'으로 승격될 것이라고 본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암튼, 글쓴이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책을 읽되 책의 내용을 '옮겨' 적는 수준을 넘어 '나만의 느낌이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써야 제대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갈고 닦아나가면 '내 글(독후감)'을 읽는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것을 글쓴이의 표현에 빗대자면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것일테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김미옥 글쓴이는 수많은 팬들에게 "어떻게 하면 글쓴이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어요?"라는 질문도 상당히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이는 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물음에 답을 알고 있다. "읽지만 말고 쓰세요." 글쓴이도 똑같은 답변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읽으면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멤돌게 하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 생각을 말과 글로 비로소 '표현'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서로의 생각을 비교분석하면서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책속의 명문장을 '베껴 적는 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법적으로 '표절'이며,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굶어죽는 현실에서 '남의 글을 베껴서 옮기는 일'만큼은 좀 자제했으면 싶다. 물론 널리 알리고픈 순수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굶어죽는 비극은 여전하다. 그러니 감동스런 책을 읽었다면 '그 감동'을 자신만의 느낌을 살려 표현해서 '그 책'을 직접 사서 읽게 해주면 비극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모르겠다. 쨌든, 그렇게 글을 차곡차곡 써나가다보면 어느새 '김미옥' 글쓴이처럼 독후감을 써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글쓴이도 답을 달았을 것이다. 왜? 내가 바로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정말 글을 못쓰는 잼병이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을 소개하는 한 문장을 남기고 글을 마치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한데, [읽거나 죽거나(Read or Die)]다. 수많은 활자중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독서가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읽는 것'은 행복이다. 그 행복에 충분히 젖어야 비로소 글도 써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 된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바로 그 '또 다른 행복'을 전해주는 책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다.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지만 오직 '읽힌 책'만이 행복을 전할 수 있고, 그 행복을 만끽한 독자만이 '또 다른 행복'을 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찐한 행복을 담은 독후감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이 된다. 앞으로 '활자중독자'가 아닌 '예술가 김미옥'을 만나고 싶다.

파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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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3 : 세계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LXXIV / 엘릭시르 7번째 리뷰] 세계편의 결말이 드러났다. 퇴마사들은 지옥을 다스리는 '아스타로트의 재림'을 완성하고 온세상을 파멸로 이끌려는 블랙서클의 마스터와 최후의 결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최후의 결투를 하기까지 '3명의 승정'과 대결을 해야만 한다. 각각 '증오', '공포', '고통'의 주술을 이용해 퇴마사들과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살짝 아쉬운 점은 저자 이우혁이 '세계편의 말미'를 써나갈 당시에 대단히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상황이었는지, '3대 승정과 마스터'와 싸우는 이 장면을 대단히 휘뚜루마뚜루 써내려간 흔적을 지우지 못한 것이다. 물론 '국내편'에 비해 세계관이 엄청나게 확장되어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탓도 있겠지만, '세계편'을 읽을 때마다 드는 느낌은 '용두사미'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으로 스토리를 정리하면서 약간이나마 깔끔하게 이야기가 정리된 듯 싶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계편'의 엔딩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첫번째 까닭은 '3대 승정을 다룬 분량의 차이'가 극명하다는 점이다. 원래 '단계'가 거듭 될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이 당연한데, '증오의 승정, 코제트'를 물리치고서 만난 '공포의 승정, 젠킨스'는 허나 허탈할 정도로 쉽게 클리어하고, 그 분량 또한 너무 짧다. 그 뒤를 장식한 '고통의 승정, 히루바바'는 대단히 강력한 힘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를 제압하기 위해서 '현암, 홀로' 대적하고는 대결이 마무리 되는 전개방식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대결을 치루고서 마주한 '마스터와의 대결'은 더욱더 장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또한 분량이 너무 짧다. 그런 뒤에 등장하는 '악마, 아스타로트의 등장'은 기대한 것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전 '국내편'에서 보여준 '사악한 뱀, 브리트라의 등장'보다 초라했다고나 할까? 암튼 '세계편'은 <퇴마록>의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와 함께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리즈다.

  그럼에도 퇴마사들은 '세계편'을 마주하며 그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으니 나름 흡족한 부분이다. 박신부의 기도력은 '베케트의 십자가'를 얻게 되어 아우라를 막으로 펼치는 것 뿐만 아니라 '공모양'으로 발사하는 등 공격력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현암의 기공력은 '승희의 도움'을 받아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탄'자 계열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되어서 더욱 강력한 공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장준후의 주술력은 애초부터 '완성형 신동'이었으나 아직 어린 나이라서 발휘할 수 없던 힘이 '성장기'를 거치며 자연스레 봉인해제가 되는 느낌으로 점점 거센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승희는 '애염명왕'을 몸속에 깃들고 있기에 '신, 그 자체의 힘'을 발휘해야 마땅하지만, 그 힘이 철저히 봉인된 상태라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의외로 꾸준히 성장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의 생각을 읽는 '투시력'은 점점 컨트롤이 정확해졌으며, 퇴마사들에게 전해주는 힘을 '역이용'해서 상대를 폭주하게 만드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힘'을 주체할 만한 정신력이 따라주지 않아 퇴마사들 가운데 가장 약한 캐릭터로 보이고 있는 점이 살짝 아쉽다. 그밖에도 여러 '서브 캐릭터들'의 능력도 향상이 되면서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를 테면, '윌리엄스 신부의 이블 파워', '서연희의 심연의 눈' 등으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으로 '세계관'을 확장시키지 않았고, 독자들의 막연한 기대감만 부풀린 셈이었다.

  <퇴마록>의 주된 주제는 '악령을 물리쳐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세계편'에서 강력한 악의 무리는 '블랙서클'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지옥문을 열어 '악마, 아스타로트'를 이 세상에 재림케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블랙서클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모두를 미워하라"는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 제각각의 재주를 발휘해 온 세상을 향해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의 행적은 각국의 고위급 인사를 '좀비'로 만들어 저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대한민국에 이집트의 망령인 '세크메트'를 부활시켜 전쟁위기를 고조시켰고, 영국에서는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을 불러내어 캘트족의 영광을 위한다며 온세상에 저주를 퍼부으려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네트워크 저주를, 독일에서는 늑대인간의 출몰을 부추겨 대혼란을 불러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서 마주한 '3대 승정' 코제트, 젠킨스, 히루바바를 차례로 격파한 퇴마사들은 블랙서클의 마스터와 최종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지옥문'은 이미 열려 있는 상태였고, 그 지옥문을 통해서 '악마, 아스타로트'가 재림하게 된다.

  아스타로트는 루시퍼, 벨제부브와 지옥을 다스리는 '3대 악마'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악행을 활발하게 저지르는 루시퍼와 벨제부브와는 다르게 아스타로트는 '참모 역할'로 주로 하며 본격적인 활동(?)은 자제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스타로트의 원'과 같은 저주의 흑마술 주문에는 자주 거론되지만, 직접 등장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악명 높은 악마는 아닌 셈이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스터에 의해 '재림'한 아스타로트는 별다른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서 순순히 지옥문을 닫고 물러나는 모양새를 보인다. 물론 악마가 선행을 베푼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아스타로트가 원하던 것은 따로 있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퇴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고통'이었다.

  아스타로트가 말한 '영원한 고통'은 무엇일까? 그건 인간들끼리 싸우면서 생기는 '부산물'이었다.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피를 흘리고, 끝없이 죽고 죽이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인간 스스로 파멸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로 인해 인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한없이 기쁘게 즐기는 악마가 바로 '아스타로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공급해주는 퇴마사들의 활동이 아스타로트는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면서 말이다. 이게 과연 무슨 말일까? 왜 악마가 퇴마사들의 활동을 환영하냔 말이다. 그건 '악의 힘'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따르고 마는 나약한 인간들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울부짓는 인간들의 외침만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고통의 쾌락'을 퇴마사들이 악령과 맞서 싸우면서 '악마의 진정한 힘'을 깨우쳐 나가는 퇴마사들 덕분에 '고통의 강도'는 더욱더 강력해지고 순수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모르고 저지르는 악행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악행 때문에 '죄책감'에 휩싸여 더욱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퇴마사들은 악령들을 물리치고 '순수한 영혼'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악령'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악령은 그때문에 더욱 인간에게 달라붙길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악령은 악행을 저지르는 일보다 '인간이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에 더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스스로 반성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악마는 즐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악의 힘'에 빠져서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마 같은 인간'은 어찌해야 할까? 그들도 '인간'이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기에는 '악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선의 힘'이 너무 초라해보여 답답해지게 된다. 그렇기에 퇴마사들의 고민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한 셈이다. 퇴마사들이 왜 좀비나 흡혈귀에게 물어 뜯길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좀비와 흡혈귀를 파괴하지 않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망설이는 것인지, 답답해 미칠지경에 이를 지라도 우리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못말리는 악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처형'을 하면 속시원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악당 하나를 처단하는 것으로 '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또 다른 악당'이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당이 등장할 때마다 처단하는 방법으론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악당'이 만들어지는 원인을 찾아 발본색원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악당들의 변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변명은 듣되, 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아야 한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악당에게 일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높은 도덕성을 갖춘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닌 '죄 많은 사람'이 따끔한 일침을 놓아봐야 악당의 조롱거리만 늘어날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퇴마사'를 등장시켰다. 악령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말이다. 이들의 행보는 '혼세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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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홀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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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II / 한빛비즈 146번째 리뷰]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젊었을 때는 단연코 '돈'이 최고였다. 물론 '명예'도 있으면 좋고 말이다. 그래서 죽어라 공부했고, 돈 되는 일이라면 날밤을 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가 '지천명'에 이르고 보니,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건강'에 비해서 말이다. 돈도 건강해야 쓸 수 있는 것이고, 명예도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야 품위 있게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수천억 자산가일지라도 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면 '수천억'을 쏟아부어서라도 건강해지고 싶어진다. 만인지상의 '일인자'가 되는 명예를 얻은들, '건강'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 명예를 탐하는 무리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게 뻔하고, 건강을 다 잃은 '일인자'는 품위조차 지키지 못해 망신살만 뻗치고 말 뿐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바로 '건강'이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돈'도 얼마든지 벌 수 있고, '명예'도 언제든 되찾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몸'과 '정신' 가운데 어떤 건강을 더 챙겨야 할까? 이 또한 젊은 시절에는 '육체적인 몸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정신줄 놓치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아버님이 '치매'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신 모습을 보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정하시고 명석하시던 분이 '기억'을 점점 잃어버리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저 '과거의 기억'만 잃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판단력'까지 떨어지니 점점 '아기'처럼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면 혼자만 아픈 것이 아니라 주위 가족 모두가 아플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정신 건강'은 꼭 챙겨야 한다. 설령 '몸 건강'을 잃는다해도 '정신'만 말짱하다면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 <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은 정신줄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일상생활속 소중한 습관을 마련해주는 '두뇌개발서'다.

  그렇다고 해서 최신 '뇌과학'을 다룬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읽다보면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내용'이라 반갑기 그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뇌건강을 지키기 위한 실천 하나 '땀을 흘릴 정도로 운동을 즐겨라', 둘 '뇌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엔돌핀을 뿜뿜하라', 셋 '뇌를 다시 일깨우는 글림프 시스템을 활성화시켜라', 넷 '뇌건강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지킬 수 있으니, 인지적 상호작용을 일상화하라', 다섯 '뇌건강을 위한 특별한 것은 필요없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주의사항은 '과유불급'이다'. 이렇게 다섯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뇌세포'만 따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적절한 신체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란다. 이를 테면,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뇌세포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물론 더 간단한 운동으로도 얼마든지 뇌건강을 지킬 수 있지만 '춤'을 추면 자연스럽게 온몸을 움직일 수 있고, 다음 동작을 기억함과 동시에 눈은 상대방과 교감하고, 입은 기쁨으로 한껏 치켜올라가며, 호흡은 거칠어지며, 심장은 미친듯이 펌프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손과 허리 등으로 '스킨십'을 하며 온몸의 신경세포를 한껏 긴장시켜 '뇌신경전달물질'인 DOSE, 다시 말해, 즐거움의 호르몬인 '도파민',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 자신감 호르몬 '세로토닌', 그리고 천연 진통제이자 면역 호르몬인 '엔돌핀'을 폭포수처럼 쏟아내 뇌를 비롯해서 온몸을 적시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듯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만으로도 충분하단다. 하릴없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억지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쓸 필요도 없단 말이다.

  여기에 '글림프 시스템'을 챙겨주면 금상첨화가 된다. '글림프 시스템'이란 뇌의 대사 폐기물과 함께 뇌척수액을 빼내는 혈관 네트워크를 일컫는데, 쉽게 말해, 적절한 수면을 취하란 말이다. 다시 말해, 잠을 자면 뇌를 청소할 시간을 주는 셈이란 말이다. 얼마의 시간을 잠을 자야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생체리듬'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평균 8시간의 수면시간을 권장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낮잠의 효능'이다. 밤에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 별도의 '낮잠'을 자는 것이 뇌건강에 아주 이롭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성과에서도 이를 확연하게 증명할 수 있었단다. 그렇다고 낮잠을 오래 자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된단다. 특히 3시간 이상의 낮잠은 본격적인 수면시간인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주원인인 까닭에 30분~1시간 정도의 낮잠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낮잠'을 자려고 하지 말고, 그저 '평온한 휴식의 개념'으로 눈만 붙이고 잡생각을 하지 않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단다. 낮잠 이외에도 효과적인 것은 '초록식물'을 가깝게 두고 자주 바라보기, 두들링이라고 하는 공책에 끄적이며 낙서하기, 껌 씹기 등도 뇌에 불필요하게 쌓여 있는 해로운 물질을 걸러주는 효과를 내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킨십'이 최고다. 사랑하는 이와 애무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굳이 그렇게 '격렬한 스킨십'이 아니어도 좋단다. 쓰담쓰담만으로도 충분히 설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통(대화)'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일만으로도 뇌건강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요가의 호흡법' 따위로 명상을 하면 더 효율이 좋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요가가 아니어도 '비디오게임'을 통해서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겠다. 한마디로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 '비싼 강좌'를 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뇌건강을 지킬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화'를 만들어서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으로 뇌건강을 지키려다 도리어 '스트레스(또는 강박증) 폭발'로 인해 뇌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단다. 일상 습관을 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격렬한 운동과 너무 짜릿한 승부욕을 추구하다 도리어 '뇌건강'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적절함'으로 적당히 뇌건강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할 것이냔 말이다. 이를 테면 적절한 비디오게임이 뇌건강에 유익하다면서 '일상생활 습관'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치자, 그런데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의 비디오게임을 즐기다보면 도리어 뇌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게임의 속성상 '밋밋하면' 금새 질리기 마련이다. 기껏 '뇌건강'을 지키고자 만든 습관인데 매일매일 '심플'하고 '덜 자극'적인 게임만 하다보면 식상해서 금새 지루해져서 안 하게 될 거란 말이다. 비단 게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춤도 밋밋하고, 섹스도 '했던 것'만 계속 반복해서 하고 '시간'과 '코스(?)'를 정해서 의무적으로 하고 끝내면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건강을 위해서 일상생활속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음'을 알고, 꾸준히 뇌운동을 하되,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밋밋하지 않게 적절히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굳이 일상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단짠단짠'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다시 말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뇌건강'이 최고다. 뇌건강을 위해 돈도 적절하게 벌고, 명예도 주눅들지 않을 정도로 챙겨라. 그래야 '뇌건강'을 지켰을 때 아름다운 인생을 누릴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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