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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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 / 파람북 1번째 리뷰] 나는 학창시절에 '작문시간'이 가장 싫었다. 책읽기를 딱히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읽으라고 나를 내모는 것이 너무 싫어 책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참 싫어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쓴 글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늘 낮은 평가만 받고 질책만 받으니 쓰기 싫었던 거다. 내가 쓴 글이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합당'했다. 지금의 나라도 어린 내가 쓴 글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내가 쓴 글에 '내 생각'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 글에 낮은 점수를 주면서 '느낀점(생각)'을 함께 쓰라고 한결같이 지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좀처럼 '느낀점'을 쓸 수가 없었다. 왜냐면 책속의 내용은 다 기억이 나고 줄거리도 줄줄 읊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데, 뭘 더 '생각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펀지, 그 자체'였다. 줄줄 외우고 따라하는 것들은 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을 표현하라는 것에는 늘 빵점이었다. 이를 테면, '이것'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물음에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그런 나를 다그치면 난 늘 '이것'에 대한 '사실적인 답변(정보)'만 줄줄 말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런 거' 말고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다! 라고 다그쳤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이란 걸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각'만 나에게 강요할 뿐, '내 생각'을 말하면 버릇 없다, 발칙하다, 그런 걸 도대체 누구에게 배웠느냐 면서 늘 혼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눅이 든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길 꺼렸었다. 아니, '내 생각' 따위를 표현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자기방어'를 먼저 배운 나는 그저 '어른들의 생각'을 외워서 얘기할 뿐이었다. 그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책속의 내용을 달달 외워서 글로 옮겨 적을 뿐, 내 생각을 담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던 나는 학창시절 내내 고통스런 작문시간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도 나는 '학력고사 세대'였다. 그래서 달달 외운 것만으로도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저마다 다른 것에 대해 나는 깜짝 놀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들을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이 나에겐 너무도 낯설었다. 도대체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마다 생각을 줄줄 읊어대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꽤나 흥분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나는 말 한마디 뻥긋할 수 없었다.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여서 나는 그 후로도 10여 년간 '표현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으며, 아기가 '첫 단어'를 내뱉는 것과 같은 긴 기다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 즈음이 되어 만난 쥐스킨트의 <향수>를 리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그 책을 소개했다. '그루누이는 사람들의 정과 사랑에 굶주린 절대고독에 빠진 존재이다'라고 말이다. 그루누이는 살인자다. 최고의 향수를 제작하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만을 골라 '그녀들의 채취'만을 뽑아내 절대적인 매혹의 향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맡으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을 못차리고 오직 '본능적인 인간, 그 자체'가 되게 만드는..그야말로 '냄새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매우 흡족해하며 '냄새'로 온갖 것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는 권능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 그루누이는 공포심에 깃들게 된다. 온갖 냄새를 구분하고 심지어 부릴 줄(?)도 알게 된 자신에게서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루누이는 채취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루누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어깨라도 부딪히면 부딪힌 상대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분명히 '느끼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딪혔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래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마저 제조해버린다. 달리 '냄새의 신'인가. 그루누이는 땀냄새를 비롯해서 구취, 암내, 발꼬랑내까지 손수 만들어서 알맞은 부위에 적절하게 뿌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루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냄새를 풍기는 그루누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루누이는 그 평온한 일상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자신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찰나에 그루누이는 자신이 벌인 '엽기적인 살해 행각'이 발각되고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그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결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 슬퍼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향수병을 열고 향수를 뿌린다. 자신이 제조한 최고의 향수를 말이다.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제정신을 못차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행복감에 충만한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루누이는 또다시 '군중속의 고독'을 절감하게 된다. 자신은 또다시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다. 제정신을 차린 군중을 자신을 죽이려 들테고, 제정신 못차린 군중은 자신을 추앙할테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은 설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느라 광란에 빠진 광장을 벗어난 그루누이는 한때거리의 사람들을 만나자 자신의 온몸에 '그 향수'를 뿌리고 만다. 향기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고 향기에 취해 그루누이를 탐하고 그자리에서 그루누이를 먹어버리고 만다. 그루누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평생을 외롭고 쓸쓸한 절대고독자로 살아온 그루누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뱃속에서나마 존재감을 드러냈다. '포만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내용으로 <향수>를 리뷰하게 되면서 나는 '나만의 표현법'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리뷰를 했지만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은 분명히 '이때'부터였다.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나만의 글'을 쓰는 첫발을 내민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리뷰어가 되었다. 돈벌이가 되지 않아 '본업'이 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내 목표가 있다면 내가 쓴 글로 엮은 책을 내는 것이다. 아직 그럴 정도로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으며 실력은 더욱 형편이 없지만 말이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을 읽으며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글쓴이 김미옥의 글을 읽으며 한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도 했더랬다. 글쓴이와는 달리 나에겐 책을 읽고 '책이야기'를 나눌 지인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책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가족 가운데 책을 읽는 이가 아무도 없고, 절친이라고 할만한 친구들도 '책이야기'라면 쥐똥만큼도 듣지를 않으며, 책모임 같은 곳을 찾아다닌 적도 있지만, 책은 핑계일 뿐 뒷풀이로 즐기는 술을 마실 생각뿐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나도 글쓴이만큼 '활자중독자'로 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변엔 '나의 생각'을 공감해줄 사람이 거의 없다. 딴에는 내가 <향수>에 흠뻑 빠진 것도 이런 환경탓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루누이처럼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은..아직 '냄새의 신'에 버금가는 '리뷰의 신'이 되지 못한 형편없는 내 글빨 덕일지도...

  서론은 이쯤하고,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쉽게 말해 '독후감 모음집'이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에세이 형식'으로 옮겨 적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난 수필보다 '독후감'이란 표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김미옥 글쓴이가 쓴 글은 분명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글'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뭉뚱그려 '신변잡기적인 글모음'이라는 수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독후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글쓴이가 이 책에서 밝힌 '책목록'과 '내가 여태껏 읽은 책목록'이 사뭇 달라 '독후감'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글쓴이가 읽은 책의 '주제'는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이 언급하는 내용과 '상통'하는 주제들이 많았기에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독후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사실 '독후감'과 비슷한 용어로 '서평'이나 '리뷰'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솔직히 '서평, 리뷰'따위는 '독후감'에 비하면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전자는 '홍보, 광고효과'를 노리고 마켓팅의 일환으로 쓰여지는 일이 빈번하지만, 후자인 '독후감'은 직접 책을 사서 읽고 느낀점을 썼다는 느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표현'에 연연하지 않고 쓰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분류법'으로 나누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리뷰'가 더 정진을 해야만 '나의 독후감'으로 승격될 것이라고 본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암튼, 글쓴이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책을 읽되 책의 내용을 '옮겨' 적는 수준을 넘어 '나만의 느낌이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써야 제대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갈고 닦아나가면 '내 글(독후감)'을 읽는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것을 글쓴이의 표현에 빗대자면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것일테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김미옥 글쓴이는 수많은 팬들에게 "어떻게 하면 글쓴이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어요?"라는 질문도 상당히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이는 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물음에 답을 알고 있다. "읽지만 말고 쓰세요." 글쓴이도 똑같은 답변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읽으면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멤돌게 하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 생각을 말과 글로 비로소 '표현'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서로의 생각을 비교분석하면서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책속의 명문장을 '베껴 적는 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법적으로 '표절'이며,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굶어죽는 현실에서 '남의 글을 베껴서 옮기는 일'만큼은 좀 자제했으면 싶다. 물론 널리 알리고픈 순수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굶어죽는 비극은 여전하다. 그러니 감동스런 책을 읽었다면 '그 감동'을 자신만의 느낌을 살려 표현해서 '그 책'을 직접 사서 읽게 해주면 비극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모르겠다. 쨌든, 그렇게 글을 차곡차곡 써나가다보면 어느새 '김미옥' 글쓴이처럼 독후감을 써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글쓴이도 답을 달았을 것이다. 왜? 내가 바로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정말 글을 못쓰는 잼병이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을 소개하는 한 문장을 남기고 글을 마치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한데, [읽거나 죽거나(Read or Die)]다. 수많은 활자중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독서가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읽는 것'은 행복이다. 그 행복에 충분히 젖어야 비로소 글도 써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 된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바로 그 '또 다른 행복'을 전해주는 책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다.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지만 오직 '읽힌 책'만이 행복을 전할 수 있고, 그 행복을 만끽한 독자만이 '또 다른 행복'을 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찐한 행복을 담은 독후감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이 된다. 앞으로 '활자중독자'가 아닌 '예술가 김미옥'을 만나고 싶다.

파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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