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쾌자풍 2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 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III / 해냄 4번째 리뷰] 2권까지 읽고 나니, 이우혁이 이 책 <쾌자풍>을 통해서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조금쯤 감이 잡힌다. 국어교과서에서도 늘 강조하는 '주제파악'을 잘하는 요령은 비문학 장르에서는 '중심문장'을 찾아내는 것이고, 문학 장르에서는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럼 여러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다 파악해야 하느냐? 그러면 좀더 다각도로 다채로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주동인물'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쾌자풍>에서는 그 주동인물이 바로 '지종희'라는 주인공이 틀림없다.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 무림의 고수를 일거에 제압하고, 여진과 몽골 따위의 시정잡배들까지도 눈빛 한 번으로 통솔하는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이야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기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 너무 당연한 이치인 까닭에 그리 주목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진리에 불과하다. 허나 이것이 한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외국에만 가도 그 '선'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저 먼 서양까지 가버리면 애초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는 철저한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이 우리가 넘지 않는 '선'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네 경우엔 '선'을 넘었을 경우에도 말로 훈계하고, 경고하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쌍욕을 던지고, 심하면 주먹이 오고 가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서양의 경우엔 '선'을 넘으면 일단 '총'부터 꺼내들고 점잖은 사람은 '경고사격'을 허공에 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총을 갈기고 다치거나 죽거나, 그런 문제는 '나중'으로 돌려놓고, 서로에게 유리한 증거를 내세우며 법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차이는 우리는 '선'을 넘어도 사람이 죽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선'을 넘게 되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거나 '둘째 이유'로 밀려나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단 말인가?

<쾌자풍>의 주인공 지종희는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렇다고 문약한 서생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타고난 체력이 뛰어난데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서 조그마한 싸움기술을 가르쳐주면 곧잘 따라하는 '눈썰미'까지 장착(?)한 재주꾼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데 무술이나 무예라는 '싸움기술'까지 가르치면 큰일(!) 치르겠다는 친형 지두희와 그의 스승(공운)이 지종희에게 일체의 싸움기술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에 철저히 훈육하며 가르치려 했던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종종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제 힘만 믿고 함부로 주먹(힘)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들이 동네에서 뛰어놀면서 저지르는 일 가운데 '수틀리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패서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 맘대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에 맛들이게(?) 되면, 그놈은 결국 사람을 해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말종이 되고 만다. 사람 살아가는데 도리와 이치를 따지기에 앞서 '주먹'을 쓰면 쉽게 해결하고, 제 잇속을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쾌락에 쉬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법과 도덕도 '주먹' 앞에서는 당장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고난 싸움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지종희에게 형 지두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해서도 안 되며,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철저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재주가 '엄청난 힘'인데, 그걸 쓰지 못하게 만들면 바보천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은 지두희는 남몰래 동생 지종희에게 '싸움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초를 십수 년간 가르쳐 왔다. 꼭 필요할 때에는 그 타고난 힘을 써서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게 만들려는 목적이었고, 애초에 그런 힘을 타고났다면 '세상의 이치'로 따져서, 세상이 '그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지종희에게 꼭 필요한 경우엔 '그 힘'을 쓸 수 있게 단련시켜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무의식 중에라도 '나쁜 쪽'으로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코자, 지종희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치고, 그 핵심으로 결코 '선을 넘지 말라(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는 등의 도덕개념)'는 가르침을 뼈에 사뭇치도록 톡톡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천하를 들었다놨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지종희에게 먹혀 들어갔다. 아무리 시종잡배들 마냥 쌍욕을 즐겨쓰는 왈패처럼 굴더라도, 결코 지켜야 할 선은 넘는 법이 없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왜냐면 그게 옳다고, 그게 공명정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한국 사람들이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도덕개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목숨'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것 말이다.

사실, 이런 가르침은 우리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이게 잘 통용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강렬하고, 더 받아들이기 쉽기에 그에 따르기 십상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강자의 이익'이 철저히 보장되는 것이 진리라고 이해하고, 때에 따라서 '강자의 요구'가 사람의 목숨인 경우일지라도 서슴 없이 목숨을 해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며, 약자들은 이런 '힘의 논리'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식으로 쭈구리로 살아가곤 한다. 왜냐면 강자에게 반박을 하면 '강자의 힘'에 자신이 피해를 볼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별다른 반박도 하지 않고, 그저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감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저절로 터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악당이 등장하게 되면, 아무리 약자들이라도 감내만 하며 당하지 않는다. 끝끝내 저항하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반발하며, 설령 목숨을 잃거나 큰 손해를 볼지라도 순순히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 목소리를 분명하게 낸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힘의 논리'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상위개념으로 '도덕'을 따지고,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숨값(!)'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당한 일에 맞서다 목숨을 다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 모두는 분연히 일어나서 '함께' 저항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힘의 논리'가 워낙 강하다보니 부당한 일을 강요하는 악당이 등장해도 별다른 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힘에 맞설 '영웅(히어로)'의 등장을 꿈꾼다. 하나 뿐인 목숨을 허투루 날릴 수는 없고, 약자의 목숨쯤이야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으니, 부당한 악당의 불공정한 요구에 묵묵히 참고만 살다가 '영웅'이 등장하는 때에 맞춰서 '악당'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곤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엔 그리 오래 참고만 있지 않는다. 특별한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특별한 힘이 없어도 누구나 특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 도덕적 우월감(?)만 있으면 된다. 그럼 된다. 그게 '한국적 영웅(히어로)'의 특징이다.

이 소설 <쾌자풍>에서 '중원무림'은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묘사된다.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무림인'들이 그들의 싸움기술(무술)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데...뭐, 뻥 같지만, 그럴 법하기 때문에 따지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편하다. 그럼 조선에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느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매한가진데 없을 턱이 있을까. 당연히 그 정도의 싸움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허나 조선에선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왜냐면 조선은 '육체적인 힘(武)'이 아닌 '정신적인 힘(文)'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원에는 육체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무림(武林)'이란 세상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정신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유림(儒林)'이 있었던 셈이다. 뭐, 중원의 무림과 조선의 유림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한국인들이 좀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글공부'를 시키는 경향이 강한 것처럼, 중국인들은 '의협'이 강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그런 경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건덕지가 있다고도 본다.

또한, 지난 1권 리뷰에서도 한국인들은 '충의 논리'에 충실하다면, 중국인들은 '의의 논리'에 맹신(?)을 한다고 얘기했었는데, 그럴 정도로 중국인들은 '의협(義俠)'을 대단하게 쳐준다. 쉽게 말해, 정의를 내세우며 약자를 위해서 기꺼이 도와주는 의로운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쳐준다는 말인데, 여기에 너무 심취하다보니 '의리'를 너무 앞세우고,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목숨마저 대신 갚는 대상으로 삼고, 살인자마저 의롭다고 옹호하는 경향이 '무림'에 대한 환상으로 커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뛰어난 무술, 검술, 심지어 내공(內功)까지 아우른 대단한 사람이 등장해서 세상의 정의를 수호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는데,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허풍에 불가하다고 본다.

이는 조선에서 대유행한 '유림의 폐해'를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글재주를 뽐내는 것에 그쳤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련만, '사림파'를 조직하고서 '훈구파'를 견제하는 것까지는 나름 성과가 있었으나, 훈구파가 사라진 뒤 '사림파의 천하'가 열리자마자 '붕당'을 형성하고 '당파'로 나뉘더니 서로간의 파벌싸움에만 혈안이 되어 '국정 발목잡기'를 기본 셋팅하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물론, 이를 부추긴 것은 '왕권 강화'에 목을 맨 조선왕실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대표적인 임금이 바로 '선조'와 '숙종'이다. 선조는 전운이 감도는 와중에도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신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왕권을 제대로 강화하려면 임금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첫째이거늘, 제 실력을 높일 방도가 여의치 않자 신하들끼리 붕당을 조직한 것을 엿보다가 서로 싸움질만 하다 왕권에게 휘어잡히는 꼴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임진왜란'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이간질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도성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몰려오자 선조는 의주 국경을 넘어 명국으로 넘어가 제 살 궁리만 했더랬다. 그리고서 한조각 양심은 남았는지, 광해군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분조'를 이끌고서 조선을 지키라 명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마저 전쟁이 끝나자마자 광해군의 입지를 흔들며, 뒤늦게 낳은 '영창대군'을 적자로 삼는 등, 엄청난 폐해를 낳았다. 이를 해결코자 붕당을 타파하고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 애를 쓴 인물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유림'에서는 그런 인물이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내세울 수 없었다. 여전히 저들의 파벌이 국가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숙종도 왕권강화를 위해서 '환국'을 일삼아 피비린내 나는 혼돈의 정치를 일삼았다.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으로 갈등이 심화하자, 이를 혁파하기 위해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사사시킨 임금이 바로 숙종이었다. 숙종 나이 14살때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일찍 완수했는데도 '유림의 세상'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환국'만 주도하며 유림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일종의 말 안 들으면 죽는다는 전략이었으나, 그게 어디 조선 군중들에게 먹힐 전략이었던가? 결국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영조', '정조' 또한 유림들에게 한껏 휘둘리다가 정조 이후부터는 '세도가문'을 형성한 외척 유림들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어 나라꼴은 형편없이 망해갔다.

중국의 역대 황실도 마찬가지다. 무림이 적절히 활용되어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국난극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무림 세력'들이 한족의 황실을 완성한 뒤에는 여지없이 토사구팽 당하며 나가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황제 등극으로 그나마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는데, '토목지변'으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지자 명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꼴이 되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쳐하게 되었다. 이때 위기를 극복한 인물은 충신 우겸 덕분이었다. 무림은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오직 관직에 있는 뛰어난 관리의 지혜로 인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었다. 물론, 우겸이 새로운 황제(경태제)를 내세워서 포로가 된 황제(정통제)를 앞세워 항복하라고 할 위기를 극복한 것은 훌륭한 처사였으나, 문제는 포로가 되었던 정통제가 살아서 다시 명국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8년 뒤, 경태제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죽자 상황으로 물러났던 정통제가 다시 황제로 재등극하고 '천순제'가 되자 충신이었던 우겸을 숙청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은 '우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황제(천순제)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앞장 서서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훗날 천순제의 손자뻘인 효종(홍치제) 때에 와서야 죄를 묻지 않고 복권 되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무림의 세계'에서도 우겸의 충성스런 행위를 이야기하기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서 무림인사들 가운데에도 관직을 얻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세력 가운데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저들끼리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남궁칠협이라는 걸세출의 영웅을 내세운다. 당대 무림의 고수인 셈이다. 물론 무술의 달인이라도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죄인을 직접 처단하기는 뭣하다. 왜냐면 죄인의 벌을 행하는 주체는 당연히 '관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국의 사법체계에 속한 '동창'이 이를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여의치가 않다. 우겸의 아들이 상당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동창 관리쪽에서도 '고수'를 내세워야 한다. 헌데, 그런 고수를 내보내는 족족 '함흥차사'마냥 죽어나자빠지니 문제다. 그래서 동창의 우두머리 '유온'은 남궁세가의 힘을 빌리는 꼼수를 부리려 남궁칠협의 단 하나뿐인 손자 '남궁수'를 일계급 특진시키며 비밀 밀사로 사건 수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을 하는 것이 <쾌자풍>의 줄거리다.

뭐, 일일이 줄거리만 다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에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겸의 아들은 '여진족'의 틈바구니에 틀어박혀서 후일을 도모하며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고 있고, 동창 수장 유온은 일찌감치 우겸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사건을 해결하려 요원들을 일일이 보내지만, 모두 실패하자 '무림 전체'를 다 동원해서 범인을 처단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인다. 이 와중에 중원 무림의 최고봉인 남궁세가의 손자인 '남궁수'가 동창 비밀요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 포졸 지종희'와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종희가 중원의 무림 고수들을 '육모 방망이' 한 자루로 일거에 일망타진해 버린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다.

이렇게만 줄거리를 요약하면, 호쾌한 무협 소설처럼 보이지만, 저자인 이우혁은 단연코 '무협 소설'이 아니란다. 오히려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선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이게 또, 그런 식으로 읽으려니 '이야기꺼리'가 한도 끝도 없게 되었다. 다만, <쾌자풍>을 통해서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을 재확인하면서 읽는 재미만큼은 제법 솔솔하였다. 요즘 <케데헌> 보는 재미로 사는데, 전세계에 '한류 문화'는 먹히는데, '중국 문화'는 발톱의 때만큼도 관심있게 쳐다봐주지 않는 현상을 읽는 재미와도 유사한 점이 많아서 새삼 재미나게 읽고 있다. 이래 저래 중국은 한국을 쫓아오기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굳혀가며, '무협의 세계'도 읽어나가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참에 김용과 와룡생도 '다시 읽기'를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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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서가명강 시리즈 2
홍성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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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2] <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홍성욱 / 21세기북스 (2019)

[My Review MMLXXVII / 21세기북스 41번째 리뷰] 책 제목만 보고서 짐작하기로는 '이과'의 과학과 '문과'의 인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교과적 지식'을 다루는 과학이야기인줄 알았다. 나 어릴 적만 해도 '문과'는 사탐을, '이과'는 과탐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수능세대'가 아니라 '학력고사세대'인 탓에 사탐/과탐으로 불리는 '영역별' 분류가 아니라, '사회/과학' 등등의 '과목별' 분류로 대입시험을 치뤘던 탓에, 학과적인 분류는 더욱 그 '경계'가 뚜렷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라는 학문이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회가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반대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단다.

이렇게 생소해 하는 나에게 '융합'이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많이 보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분야만 전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다른 하나'를 접목시키거나, 또는 '여럿의 서로 다른 분야'를 접목시켜서 우리에게 당면한 중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과학'과 '인문', '예술'을 융합시켜서 우리가 직면한 복합적인 '사회적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거기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어렵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보자. 일찍이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유전자(DNA)의 구조'가 판명되었고, 그 유전자에서 원하는 부분을 잘라내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를 '유전자 가위'라고 하는데, 근래에는 '유전자 가위'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잘라낸 유전자를 다른 생물의 유전자에 붙이는 기술도 '유전학'에서 연구중에 있긴 하지만, 유전자 가위만으로도 충분히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잘라서 제거함으로써 치료가 힘든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난치병'과 '불치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이 상당히 줄어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장밋빛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과학기술학'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과연 이 '유전자 가위'라는 기술을 광범위하게 쓰게 될 경우에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고민과 비판이 시작되고, 문제가 예측되는 순간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 가위'라는 것이 자연상태에서는 극히 희박하게 발생(돌연변이)되는데 반해서, 인간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유전자 가위'로 특정 유전자를 잘라냈을 경우에, 그 이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혹여 되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촉진시켜 '또 다른 인류'가 발생하는 일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도덕적 비난'으로 시작하여 '종교적인 차원'의 목소리까지 쏟아져 나와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과학기술학'인 셈이다.

한때 우리는 '과학만능주의'라 하여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근대 이후, 인류는 '신 중심 사상'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이성'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정작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신의 형상'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는 오만이 가득했기에 그랬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만능주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도 무색할 정도로 겸손(?)을 떨고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능력이 초라할 뿐이라는 사실도 더욱더 명백해졌으니까 말이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 사실이다. 아주 작은 '바이러스'조차 어쩌지 못하고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현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아주 강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백신'을 조속히 만들고 대량공급체계를 갖추면서 '엔데믹'을 맞이하긴 했지만, 또 어떤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박멸해서 '엔데믹'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면역체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일이 지나자 겨우 안심할 정도의 수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환자가 나오고 있으며, 해마다 '백신'을 준비해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접종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 '유행'을 완화시키며 통제할 수 있는 정도로 심각성을 낮춘 것일 뿐이다.

특히나, 자연재해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다. 물론 아무리 큰 재앙이 닥쳤고, 큰 피해를 입었더라도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고 '피해복구'에 뛰어들어서 빠르게 원상회복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자연재해가 재앙을 불러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크로스 사이언스> 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최신 정보를 접하고 완벽히 이해한 뒤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는 없다. 과학이 결코 쉬운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학기술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접했다 하더라도, 그 정보의 '사실과 가치'를 빠삭하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도 절대로 많지 않다. 왜냐면 과학기술이 상당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큰 어려움은 새로 나온 '과학기술'을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 학문의 수준을 높였다하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되버리기 일쑤다. 그러니 언제 공부해서 얼마나 도움을 얻을 수 있겠냔 말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전문가'의 범주로 한정되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그 전문가가 쉽게 풀어서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이 전하는 사회문제 해법에 대한 '사실과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바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크로스 사이언스'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은 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찬반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으며 참여하기도 했다. 바로 '과학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이를 테면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영화속에서도 관심과 참여를 할 수 있었다. <가타카>, <로보캅>, <메트릭스>, <옥자>, <AI> 등등 이 책에 거론한 소설과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전부 다는 아니어도 한두 작품은 이미 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어떤 내용이었고, 어느 점이 문제였으며,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로 인해서 생긴 문제점은 무엇이었고, 그 문제점을 해결했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 우리 인류가 당면한 미래는 '유토피아'였는지, '디스토피아'였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 정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크로스 사이언스'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어떤 '사실'에, 어떤 '가치'를 교차시키는 일은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이라고 저자인 홍성욱 교수는 지적한다. 우리가 이해한 '과학적 사실'에, 우리가 생각하여 내린 '인문학적 가치'를 접목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뭐,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 문제도 없이 살기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싹다 바뀐 세상에서 '도태'되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참여조차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삶'을 연명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햄버거 하나 '주문'하고 싶을 뿐인데, 매장 내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키오스크'만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공간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같이 말이다. 세상은 참으로 빠르게 변해간다. AI가 가져올 변화는 더욱 극심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학기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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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레저위츠 지음, 김선희 옮김 / 다른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레저위츠 / 김선희 / 다른 (2015) [원제 : Excellent Sheep (2014)]

[My Review MMLXXVI / 다른 2번째 리뷰] 어쩌다보니 근래에 쓰는 리뷰들이 죄다 '절판'인 책이다. 애초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뭐 그렇다고 '최신판'의 책을 리뷰한다고 주목 받을 일도 없을 테니,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좋은책'은 언제고 다시 꺼내 읽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 책 <공부의 배신>은 부제가 더 인상적이다. 최고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하버드생'을 바보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은 '교육'에 대한 비평이 담겼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만큼 이 책에 주목해야 할 의무도 있다는 의미다.

이미 2002년에 출간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다치바나 다카시, 청어람미디어)에도 비슷한 제목이 적혀 있어서 내용도 비슷할 것 같았지만, 크게 달랐다. 다카시는 일본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는 동경대생이 '현대교양'의 태부족으로 인해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상식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헛똑똑이가 된 현실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는 뛰어난 인재이지만, 실상은 '시험문제 잘 푸는 기계'에 불과하고, 기본적인 상식 수준에서는 초등학생보다 못한 비인간적(?)인 실태를 고발한 책이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당시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서 공부하던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교양의 차원'에서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통섭적인 교양을 쌓아나가는 것을 당부했다.

이에 반해 <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는 '명문대'를 졸업해서 '엘리트 집단'에 소속되어 '사회 권력층(기득권층)'을 형성해서 자기들 '소속 집단'의 무한 이기주의를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실태를 고발하면서, 오늘날 미국사회가 민주사회에서 퇴보하고 되려 '귀족사회(?)'로 회기하려는 사회분위기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잘난 사람이 저들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명문대'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한 것에 대해서 비난할 것은 없다. '경쟁 사회'에서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경쟁 사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쟁에 패배한 약자'들의 하소연(?)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도 상당 부분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니 경쟁에서 패배하고 징징거리는 찌질이가 되지 말고, 실력을 발휘해서 '승자'가 되어 당당히 '승자의 권리'를 누리며 살 생각을 하라는 이야기가 더 솔깃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애초에 그 '경쟁'이라는 것이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떨까? 소위 '명문대 교육'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중추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계급적 사회'를 지향하고, '계급 사회'를 고착화 시키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면, 과연 '공정한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명문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그 치열한 경쟁 시스템을 이겨내고 사회 지도층에서 활약을 하면서 '학창 시절'에 배웠던 내용이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끼고, 실상 '명문대 교육'이라는 것이 너무도 공허한데, 학생 때에는 왜 그토록 죽어라 공부를 강요(?) 받았는지 알 수 없다고 소감을 쏟아내고 있다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대'를 졸업하고 난 뒤에야, 그 '과도한 경쟁'과 '치열한 교육'을 강요받은 사실이 '특권의식'을 갖게 만들고, 그 '특권을 세습하려는 엘리트 집단의 무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우리 교육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마저 들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는 '똑똑한 양(Excellent Sheep)'이다. 무려 '하버드'를 졸업한 출중한 인재들을 순종적인(?) 양떼에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명문대'에서 뭘 배웠기에 그들은 불의에 저항하길 포기한 '순종적인 양'이 되고 만 것일까? 사실 엘리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다. 똑똑해서 능력이 출중한 것 같은데 '사회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저들만의 특권을 지키는데에만 그 똑똑함을 허비하는 멍청이(!)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비단 이런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만 드러나는 현상도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 일컫는 나라의 상류계층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비리(!)였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선진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후진국'에서는 더 심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똑똑한 양'이 되어 할 줄 아는 일이 '특권계층'끼리 교잡을 통해서 자신들의 자식들도 '명문대'에 입학해서 똑똑하지만 순종적인 양이 되길 기꺼워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쌓은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문대'에서 특별한 것을 배울 필요도 없고, 가르칠 이유는 더더군다나 없게 되었다. 저들이 원하는 바는 '아무나' 입학할 수 없는 '명문대'를 유지해서, 그곳을 졸업한 것만으로도 부와 명예를 손쉽게(?) 거머쥘 수 있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문대'를 졸업한 똘똘이(!)들 치고 제대로 된 인재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런 '저항정신'으로 가득 찬 학생을 졸업 시킬 의도조차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교육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셈이다.

이런 '명문대'가 천지빼깔이라는게 이 책이 강조하는 바다. 이런 실상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학생들이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고강도의 학업'을 수행하고서 얻는 것이 고작해야 공허감과 허무함이라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도대체 졸업한 뒤에 써먹지도 못할 지식을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 넣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하는가? 왜 학교는 학생들에게 '순한 양'이 되길 원하고, '과도한 장애물'을 설치해서 딴 생각(!)조차 할 여유를 주지 않는가 말이다. 마치 '1등급 목장'처럼 순종적인 양떼를 대량생산해내기 위해서 대학 당국은 최선을 다하고 있고, 학생들은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와 성적에만 내몰려 씨름하게 만들 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 길들여진 '순한 양'을 우수한 졸업생으로 명문대생을 배출해낸 뒤에 '엘리트 집단'에 소속된 일원으로 잘 적응하게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일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나라의 '엘리트'라고 불리는 집단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보란 말이다.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비상계엄'조차 함부로 선포하고, 그런 무도한 비리를 덮기 위해서 모든 '국가 시스템'을 총동원해서 비리를 감추려 한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국가와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저들만의 세상'을 만들려 했고, 국가가 파탄이 나서 전쟁이 벌어지고 온 국민들의 안정적인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어 버려도, 저들 집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들만 살 궁리'를 하고 있었지 않느냔 말이다. 지금의 미국사회도, 일본사회도 마찬가지다. 아니, 전세계가 이런 '헛똑똑이'들을 엘리트라고 철떡 같이 믿고 있고, 그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비인간적인 행태를 일삼는 '엘리트 집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 정상화'를 어떻게 해야 이런 비인간적인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일수록 '엘리트 집단'에 의지하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도덕적 해이'에 빠져들지 않고, '몰상식한 짓'을 부끄럽다고 여기게 만드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테지만, 과연 그런 교육을 어떻게 시킬 수 있단 말인가? 부와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그들인데 말이다. 그저 그들의 양심에만 맡기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적어도 '민주사회'의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다면 결코 그런 지식인들을 방치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리더 교육'이 아닌 '시민 교육'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시민 교육'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학벌 사회'가 심화되면서 이런 '시민 교육'은 퇴색하고, 저들만의 세상을 구축할 수 있는 '리더 교육'에 매진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특권의식을 교묘하게 심어주기까지 한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확실한 경험이 바로 '명문대' 입학과 졸업이다. 대학에 서열을 매기고, 그 서열 순위에서 가장 높은 '탑클래스'에 올라서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환상(?)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자행하는 꼴이다. 이것부터 타파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경쟁'을 혁파의 대상으로 삼고, '평준화' 시키는 것으로는 발전은 고사하고 퇴행하게 만들 뿐이다. 경쟁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경쟁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모든 것을 누릴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시민 교육'이다. 아무리 잘났어도 '시민이 누리는 권리'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얻은 성과도 인정하고 맘껏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혜택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결격사유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일체의 것을 허락치 않고, 만약 부도덕적인 것을 특권처럼 누리려 한다면 뭇매를 달게 맞아야 함을 각인시켜주는 '도덕 교육'을 더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선진국들이 동양사상 가운데 '유교'에 관심을 두는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유교사상에서 저들이 겪고 있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는 셈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언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엘리트주의'가 몰고 오는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럴해저드'를 혁파할 수 있는 사상적 대안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데에는 공감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의 교육 문제에 깊이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훌륭한 교수와 현명한 학생들이 아직 많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힘들게 한 '양심고백'이 헛되지 않았다는 응원이라도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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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쾌자풍 1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 / 해냄 3번째 리뷰] 리뷰가 많이 늦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근래에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더위'를 먹은 탓인지 좀처럼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읽는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기도 했고, 암튼 그랬다. 덕분에 한 일주일 가량 'K-POP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만 줄기차게 보고 또 보았다. 헌트릭스의 '골든'과 '테이크 다운', 사자보이즈의 '소다팝'과 '유어아이돌'만 온종일 흥얼거리며 멍 때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벌써 한 달 내내 그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이우혁의 역사소설(?) <쾌자풍>이다.

뭐, 이우혁 소설을 리뷰하면서 <넷플릭스>에서 대박을 터뜨린 '케데헌'을 이야기하는가 싶지만, 묘하게 '연관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직접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한국인과 중국인의 '정서(?)'가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구분되는 무엇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충(忠)'과 '의(義)'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뭔가 감이 오시는 분들이라면, 국가 차원의 문제가 발생하고 '국가 위기'에 당면했을 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충'을 앞세워서 개인적인 희생이 따르더라도 일단 '국가의 위기', 달리 말해 '모두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일치단결 하는데 반해서, 중국인들은 국가적인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개인적인 의리'와 연관이 없으면 일단 '나몰라'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면하고 난 뒤에야, 홀연히 등장한 '영웅(?)'이 있어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맞서 싸우는 희생적인 모습을 재확인(!)하고 나면, 그때서야 '의리'를 내세우며 단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미묘한 차이가 '제삼자(특히,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인'과 '중국인'은 명백하게 그 차이점을 알아채고, 서로를 구분할 수 있고, 그 미묘한 차이점 때문에 한국인과 중국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도대체 '충성'과 '의리'의 차이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충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변치 않고', '흔들림 없는' 꼿꼿한 성정을 떠올린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잘 보여주듯 죽으면 죽었지 '불충'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한다. 허나 중국인들은 왕조가 짧고 자주 바뀌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처럼 꼿꼿한 성정의 충신 이미지를 찾기가 힘들다. 그보다는 '실리'를 따지고 '개인적인 의리'를 따지면서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른 말(?)'을 내세우는 등, 우리가 보기에는 충신치고는 변덕이 죽 끓듯 하다 싶은 사람조차 '충신'이라고 하는 등 쫌 그렇다. 대신에 '의리'를 앞세우다보니 누군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펴며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런 의리(?) 지켜야 중국인답다는 것인지 모를 엉뚱한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 뭐, 극단적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만물중국기원설' 같은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막무가내 식의 '억지주장'을 곧이 믿을 사람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중국인이 그게 맞다!'고 억지주장을 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맞다!'고 동조하는 것이 최고(?)의 '의리'라고 여겨서 13억 중국인이 한 목소리도 '헛소리'를 주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걸 보는 중국인들은 대다수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을 하면 '틀린 주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일단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중에 '수정'을 하든, '사과'를 하든, 그건 나중일이고, 일단은 중국인끼리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틀린 것을 알면서도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싶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팩트폭격'을 날리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틀린 건 틀린 거고, 맞는 건 맞다고 '옳은 소리'를 곧잘 한다. 그리고 이런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충성'에 충실한 모양새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절대 '충성'을 다하고,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정이야말로 '한국인답다'고 할 수 있다.

암튼, 요즘 '케데헌'이 인기몰이를 하며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무슨 일에서건 '충성'을 다하는 한국인의 문화가 전세계인들의 눈에 보이게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에 반해서 '의리'에 따르며 경우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런(?) 중국인의 문화에는 공감하기 힘들어하고, 더 나아가 '억지주장'을 하면서까지 한국문화를 깎아내리려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한국문화'가 원래는 '중국의 것'이었다면서 은근슬쩍 숟가락 얹으려는 속셈을 뻔히 드러내고, 심지어 '중국의 것'을 빼앗아(?) 갔으면서도 중국에 고마워하지도 않는 '한국사람들'이 너무 뻔뻔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고 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도 당한 서양인들조차 중국인들의 뻔뻔스러움과 억지주장에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만 모양이다.

자, 그럼 이제 이 소설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소설은 '무협소설'이 아니라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사실(팩트)에 허구적인 '픽션'을 가미한 '팩션 소설'이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대배경'은 15세기 명나라에서 벌어진 '탈문의 변'을 주요 사건으로 삼았다. '탈문지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벌어진 '토목의 변'을 알아야 할 것이다. 1449년 명과 몽골(오이라트)이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명 황제였던 '정통제'가 간신 왕진의 말에 속아 전투에 참전했다가 50만 대군이 몰살을 당하고 황제인 '정통제'마저 포로로 잡혀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일을 '토목보'에서 벌어진 사건이라하여 '토목보의 변', 줄여서 '토목의 변'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황제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명나라는 몽골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정통제를 앞세우고 몽골군대가 북경으로 밀고 온다면 명나라 군대가 아무리 많더라도 '황제의 목숨'을 두고 어찌 반격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명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그런데 이때 충신이 등장해서 사태를 수습했으니, 다름 아니라 '새 황제'를 내세워서 포로로 잡힌 정통제를 대신하게 한 뒤에,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새 황제가 바로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경태제'다. 몽골군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굳건히 북경을 수비하는 명나라 군대에 막혀서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자, 쓸모가 없어진 '정통제'를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명나라로 되돌려 보낸 뒤 철군하고 만다. 그래서 명나라는 졸지에 '황제'가 두 명이 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경태제를 옹립한 충신은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고 폐궁시켜 버리지만, 병약했던 경태제가 제위 8년만에 큰 병에 걸리자, 이를 기회로 삼은 정통제가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제에 자리에 등극해버리고 만다. 이때가 1457년이었고,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 새로 연호를 '천순'으로 내거니, 그가 바로 '천순제'다. 한 명의 황제가 '정통제'와 '천순제' 두 차례나 황제의 자리를 앉게 된 셈이다. 이런 사태를 맞아서 명나라의 조정에는 어떤 파문이 일었겠는가?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모'를 한 것인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변하는 일대 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암튼, 이때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신이 바로 '우겸'이란 인물이다. 허나 천순제는 '우겸의 공'을 높이 사기에 앞서서 자신에게 '의리'를 져버렸다고 하여 황제에 재등극하고 난 뒤에 바로 처형시켜 버린다. 만약 천순제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우겸을 높이 평가하고, 청렴결백하고 사심 없었던 신하의 충심을 높이 평가하기만 했더라도 명나라는 큰 혼란을 겪었음에도 큰 어려움 없이 기강을 바로 잡아 태평성대를 누릴 수도 있었겠지만, 간신에게 놀아나던(?) 똑똑치 못한 임금이었던 '정통제'였기에, '천순제'도 변변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왕조시대에 '두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것을 곱게(?) 봐줄 수는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요는 이런 역사적 관점을 두고도 한국인과 중국인의 '인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통제와 경태제라는 '두 명의 임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명'이라는 나라가 맞이한 어려움을 해결한 것에 초점을 맞춰서 '국난극복'의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를 불충이라 여겨서 우겸을 충신 중의 충신으로 평가하겠지만, 중국에서는 아무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불충'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의리'적인 관점에서도 정통제를 버리고, 경태제를 내세운 행위의 부당함을 내세워 처형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정난과 반정의 역사'를 봤을 때, 두 임금을 섬긴 이를 '충신'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허나 계유정난의 공신들이나 인조반정의 공신들 가운데 '국가에 끼친 손익 평가'를 거쳐서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 있어서 '개인적인 의리'를 당연히 고려사항이 아니다. 오직 '국가를 위한 우국충정'만을 평가의 잣대로 삼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에는 이게 좀 애매한 예가 많은 모양이다. 뭐, 중국에서는 그런 '잣대(기준)'가 일반적일 수는 있겠지만, 한국인의 기본 잣대로 보면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고평가되고나, 정반대로 저평가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저자 이우혁은 이를 <쾌자풍>의 소재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포졸 복장인 '쾌자'를 입고서 대륙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다. 뭐, 1권의 내용에서는 아직 '대륙'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상황이고 '변죽'만 잔뜩 늘어놓은 지루한(?) 장황설로만 가득했다. 특히 조선 평안도 위화 고을의 포졸 '지종희'의 성격 묘사가 이야기의 2/3를 차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지는 않지만 중국의 무술 고수를 단 한 번의 몽둥이질로 제압해버리는 실력(?)을 선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자도 익히지 못하고 <소학>을 겨우 땐 까막눈(?)이지만 모국어인 조선말을 비롯해서 '북경어', '여진말', '몽골말' 등등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천재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이렇게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지 포졸'이 벌이는 일대 사건들마다 일사천리로 풀어내는 '해결사'의 면모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종 잡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착한 성정을 지닌 캐릭터다. 그렇다고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냐 싶으면, 하는 말마다 '쌍욕'을 달고 살고, '품행' 또한 날건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말'보다 '주먹'이 먼저인 대책 없는 왈패 기질을 타고 났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망나니 같은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지만, 절대로 '국익'을 해치는 범죄나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는 짓을 저지르는 일은 극도로 조심하고 다닌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선'을 넘지 않는 아슬아슬한 맛이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아니라 '그 이하'의 행동을 일삼는 천덕꾸러기라고 보면 딱 좋을 인물이다. 암튼, 그가 벌인 말썽 때문에 '지 포졸'은 조선을 떠나 중국 명나라에서 막중한 임무를 띠고 활약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권에서부터 본격적인 '대륙적 활약'을 선보여줄텐데, 크게 기대는 안 하련다. 하는 짓거리가 대략 난감할 것이 뻔해서 말이다. 그래도 결코 부끄러운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선'을 분명히 지키면서도 '묘수와 꼼수'를 오가며 대대적인 활약을 펼쳐보일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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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역사이야기 - 선생님이 쓴 누구나 쉽게 배우는 우리 역사와 문화
권혁운 지음 / 가온누리(도서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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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우리 역사이야기 : 선생님이 쓴 누구나 쉽게 배우는 우리 역사와 문화>  권혁운 / 가온누리 (2024)

[My Review MMLXXIV / 가온누리 1번째 리뷰] 이 책의 글쓴이는 '지적장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이른바 특수학교에서 장애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셈인데, 일반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학습이 느리고 힘겨워 하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나도 논술수업을 진행하면서 종종 '역사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역사의 개념은커녕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시켜주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역사수업'은 그저 외우기만 잘 하면 되는 '암기과목'이라고 여기기 십상이라,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단순 암기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게 되면,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전통을 어찌 다 외울 수 있겠냐고 반문도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하고 거듭 존경스러워 할 따름이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의 역사는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고대 4대문명이라고 일컫는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고작 4000년 전에 불과하고, 이집트 문명은 3500년 전, 인더스와 황허 문명은 고작해야 2500년 전 문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도 역사 시대별 구분은 고작해야 7개 밖에 되지 않는다. 고조선으로 시작하여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은 섬나라여서 특수한 경우라고 치고, 가까운 중국조차 왕조국가만 27개인데 말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역사의 자긍심'을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서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수난의 역사'만을 강조하곤 한다. 외부의 침략도 많았지만, 내부의 혼란도 참으로 많아서 백성들이 참 살기 힘들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 '천년 왕국'으로 널리 알려진 통일신라만 해도 '나당전쟁(670~676)' 이후 후삼국으로 갈라지기 전(9세기 말)까지 200년 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별다른 외세의 침략이 없었고,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며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런 혼란은 세계 어느 왕조시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수난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이런 시기를 '평화롭다'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략(11세기)과 몽골의 침략(13세기) 사이 200여 년간의 평화가 있었고, 조선이 건국(1392년)된 뒤부터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기까지도 역시 200년 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또한 '병자호란(1637년)' 이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도 200여 년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한 번 왕조가 들어서면 기본적으로 5~600년 정도는 유지한 것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가까운 중국만 해도 2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망해버린 왕조가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그러니 '한국의 역사'를 마냥 '수난의 역사'라고만 퉁치고 넘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 평화로운 기간 동안에 이룬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도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은 'K-컬처(한류열풍)'로 전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음식이나 상품,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앞에 'K-'만 붙이면 아주 좋은 것으로 인식될 정도를 넘어서 '고급'이라는 인상마저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좋았던 것을 우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얼떨떨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면 '과거'에도 분명 그런 '멋진 역사'를 가졌던 때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옛날 '왜나라'는 백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제의 모든 것을 숭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왜로 넘어간 사람들을 '도래인'이라 부르며 환대를 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더구나 통일신라의 '울산항'에는 아라비아(인도 등지) 상인이 직접 찾아와서 무역을 하러 왔고, 실크로드의 '종착지'는 황금의 나라 신라였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려의 제일 무역항 '벽란도'는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져서 '코리아'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었냐 말이다. 이쯤 되면 우리 역사에서도 자랑할 것 투성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인은 '위기'에 강하다는 사실도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민족'은 똘똘 뭉쳐서 어려움을 이겨냈으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되살려서, 결코 다른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해내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전세계 어디에도 이토록 오랫동안 '고유한 문화'를 지켜내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널리 알려진 역사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서양의 그리스로마 문화, 동양의 중국 문화를 빼고는 '한국의 문화'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일본처럼 '섬나라'가 아니라 '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지도 않았고, 정말 많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침략도 당하고, 교류도 정말 빈번했는데도, '한국의 문화'는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도리어 외국인조차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인'이 되길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이다. 오늘날의 'K-컬쳐'가 괜히 붐을 일으킬 정도의 매력을 뿜뿜하고 있는 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낭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수난의 역사'라고 자조적인 자세를 취했던 까닭은 지난 100여 년간 참으로 끔찍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경제위기 등등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그걸 다 이겨내고 오늘날의 영광을 맞이했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왜냐면 '한국의 역사'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숱한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똘똘 뭉쳤고, 결국엔 극복을 해낸 뒤에 전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하고 강력한 '문화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 서론이 길었다. 이 책 <한 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역사이야기>는 이런 '문화의 힘'을 지니고 있는 우리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역사책이다. 지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집필한 역사책이기에 어렵지 않게 핵심만 쏙쏙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물론 초등학생들이 '처음으로 읽는 역사책'으로 삼기에도 딱 좋다. 자녀에게 '한국사'를 직접 가르치고 싶은 학부모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각 챕터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생생한 역사체험'을 경험시켜주고 싶다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역사를 '암기'하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랑스럽고 위대한 우리 역사를 가르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가르치길 바란다. 한국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런 역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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