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듄 그래픽노블 1 듄 그래픽노블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라울 앨런 외 그림, 진서희 옮김, 브라이언 허버트 외 각색 / 황금가지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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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스. '듄'이라고도 불리는 모래행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새주인이 찾아온다. 공작가문인 '아트레이데스'가 남작가문인 '하코넨'의 뒤를 이어 아라키스를 영지로 삼게 되었다. 물론 '사담 4세'라 불리는 황제의 재가를 받아서 아트레이데스의 레토 공작이 정식임명되긴 했지만, 공작으로서는 황제조차 믿을 수 없는 처지이다. 왜냐면 아라키스에서 생산되는 '스파이스'가 엄청난 이윤이 남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하코넨을 이용해서 아트레이데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선심을 쓰듯 아라키스, 즉 '듄'을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욕심이 난다면 황제가 자신의 권력과 권위로 '듄'을 독차지하면 될 것을 왜 복잡하게 '줬다가 빼았느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최고권력자가 혼자서 독식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면 괜한 '반발심'만 키우기 때문에 하사하는 척하면서 온갖 이권은 황제가 차지하고, '황제의 몫'까지 챙기느라 영주였던 '하코넨'은 듄의 사람들을 혹사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착착 착취를 해오던 것까지도 눈치를 보게 될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국 안에서 평판이 좋은 편인 '아트레이데스'에게 듄을 새로 하사하고서 '하코넨'과 짜고서 공작을 암살해버리면, 다시 황제에게 엄청난 이득을 챙겨줄 '하코넨'이 다시 듄을 재점령하는 방식을 취하려는 '감춰진 뒷배경'을 이해하면 <듄>의 줄거리가 술술 읽히게 될 것이다.


  암튼, <듄>의 첫 장면은 물이 풍부한 '칼라단 행성'에서 모래투성이인 '듄 행성'으로 이주하는 아트레이데스의 분주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초심자(입문자)'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듄>의 매력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를 관람한 분들이라면 더욱더 생생할 것이지만, 앞서 설명한 뒷배경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과거의 독자들처럼 '읽고 또 읽고'서야 겨우 머릿속에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그려낼 수 있는 노고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면에 이번 '그래픽노블'은 그런 불편함을 싹 해소하는 면에서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의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는 영화에서 감상하시고, 폴 아트레이데스에 집중해보자. 훗날 '퀴사츠 헤더락'이라 불리며 모래행성의 주민 '프레멘'을 이끌고 황제와 대결해서 승리를 거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운명인 아이다. 전형적인 영웅 등장의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태생부터 영웅이 될 자질을 타고났으며, 그렇기에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고, 적절한 때가 되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며, 그 위기 속에서도 기적과 같이 살아남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고, 숙명적인 적들을 처지하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꿈꾸던 미래를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어찌보면 이런 '영웅의 탄생'이 전체 1부의 내용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듄 그래픽노블 1권>에서는 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 순간까지 보여준다.


  한편, <듄>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설'과 달리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공부에 해당하는 '용어해설'이 빠져 있다. 그래서 '그래픽노블'만 읽은 초심자라면 뒷배경의 전반적인 이해가 힘들 수도 있다. 이는 '영화'만 관람한 관객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소설'은 필독이다. 그밖에도 부수적으로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트레이데스 VS 하코넨'의 갈등양상일 것이다. 왜 이 두 가문은 숙명적으로 싸우기만 하는가 말이다.


  사실, 두 가문은 '베네 게세리트'라는 종교집단에 의해 '하나의 가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미 섞여있는 상태다. 왜냐면 두 가문의 남자들이 대부분 '베네 게세리트 교단' 출신의 여자들과 혼인을 한 상태이고, 이들이 낳은 딸은 어김없이 두 가문의 남자와 혼인을 하니, 두 가문을 따로 구분할 유전적 개별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쓰일 당시에는 '유전학'이 그닥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대가문의 혈통'은 오직 남자쪽으로만 이어져내려 온 탓에 '하코넨'과 '아트레이데스', 그 밖의 대가문들로 구분할 뿐이다. 따라서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넨'이 대립하는 까닭은 '두 가문의 뿌리깊은 성정'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하코넨'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족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품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자신들의 명예가 신하와 부하들의 안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서, 꽤나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문의 일원들을 관대하게 통치하는 품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듄' 행성을 통치하는 방식도 차별적인 것이다. 하코넨은 듄의 주민들인 '프레멘'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쓰레기를 보듯 하찮게 푸대접을 한 반면에 아트레이데스는 '프레멘'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들을 지배하기보다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대우해주는 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프레멘은 레토 공작의 아들인 '폴 아트레이데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이며, '공통의 적'인 하코넨과 황제를 향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해 물리치게 된다.


  1권에서는 이쯤하고 2권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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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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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세이아>는 <일리아드>와 쌍을 이룬다. 같은 '호메로스'가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둘은 굉장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서사를 이야기했다면, <오디세이아>는 온갖 고난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귀환서사'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같은 영웅은 결코 아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길 고대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다시 말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본능(생의 의지)'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일리아드>보다는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더 친밀감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영웅적인 모습에는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는 법이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뇌와 고난을 겪는 모습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법이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꾀가 많은 영리한 사람인데도 그토록 모진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살펴보자.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측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오디세우스'의 공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가 트로이측을 속이고 패배한 척 '목마' 하나만 덜렁 남겨놓고 후퇴한 '기만술'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을 잃은 그리스 연합측이 승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트로이를 응원했던 '신들의 분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0년 만에 승리를 거둔 그리스 연합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귀환을 서둘렀는데, 오디세우스도 귀환길에 올랐다가 그만 '포세이돈의 아들'을 해코지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포세이돈은 분노를 참지 않았고, 오디세우스를 바다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고향땅 이타카를 밟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고난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에겐 제우스가 '고향땅으로 귀환할 운명'을 점지해준 까닭에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아예 죽일 수는 없었지만. 죽음보다 못한 고난을 겪게 하며 무려 10년 동안이나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전쟁 10년, 고난 10년, 무려 20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형벌을 겪게 된다. 20살의 건장한 청년이 40살의 장년으로 만들 기나긴 세월이다.

 

  한편, 고향땅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남편이 없는 설움, 아버지가 없는 설움을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10년 넘게 공석이 된 자리(?)를 탐내는 변방의 귀족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스릴 주인이 없는 왕국을 탐냈고, 지켜줄 남편이 없는 여인을 탐냈다. 그래서 이 두 자리를 단번에 차지할 수 있는 '결혼'을 청하러 매일낮밤을 페넬로페를 희롱하고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는데 열심이었던 것이다. 왕국과 어머니를 지켜야 할 아버지의 빈자리는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가 지키려 했으나 아직 십대에 불과했던 텔레마코스는 자신의 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 확인하고서 발만 동동거리는 형편이었다. 이에 페넬로페는 아들의 귀환만 기다리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수의를 만든다는 핑계를 대고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고만 있었다. 낮에는 열심히 수의를 짰다가 밤이면 낮에 짰던 수의를 도로 풀어내면서 말이다. 과연 꾀보 오디세우스의 아내답다 하겠다.

 

  허나 그런 기지만으로 버티는 것도 10년이 지나니 별소용이 없었다. 왕국내에서도 오디세우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핑계삼아 망나니 같은 귀족들의 편을 들어 '왕국의 비밀'이 하나둘 세어나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배신자가 생긴 것이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죽었다는 사실만 확인이 되면 페넬로페는 저들 귀족 가운데 한 명과 '강제결혼'을 치뤄야 할 것이고, 텔레마코스는 왕국에서 쫓겨나 방랑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일궈낸 터전이 송두리채 다 빼앗길 판이 된 셈이다. 이에 텔레마코스는 이타카를 몰래 빠져나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신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고 곧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확신도 받아오게 된다. 그런데도 20년 간 빈자리였던 것을 오디세우스가 되돌아온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땅 이타카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부터 '권선징악'이 실현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동서고금의 정의론'이 실현되고, 오랫동안 갈고 또 갈았던 '복수의 칼날'이 여기저기 번쩍거릴 때마다 독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인간적인' <오디세우스>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니면서 고생을 했다지만, 페넬로페도 그에 못지 않게 고생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분노의 창칼로 '정의의 심판'을 내릴 때, 페넬로페도 '심판자'가 되었어야만 했다. 적어도 악한 짓을 저지른 '시녀(여자)들'만이라도 페넬로페가 처벌하는 '당사자'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복수는 오직 오디세우스의 몫이었고, 페넬로페마저도 '심판의 대상'이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20년동안 '정숙한 아내'로 남아있었는지 검증받아야 했단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20년 동안 '전리품'으로 여인을 탐했고, '미녀들의 유혹'에 넙죽 홀려서 황홀한 나날들을 몇 년간이나 보냈으면서, 페넬로페는 '시월드'에서 없는 남편을 대신해 시중을 들어야 했고,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으며, 그럼에도 욕정에 빠지지 않는 '정숙한 아내'로 남았어야만 했다. 그 모진 시련을 다 이겨내고도 '심판의 날'까지도 오디세우스에게 정숙함을 검증받고 '통과'해야만 했다. 꽤나 부당한 처사라고 보여지지 않는가 말이다. 정말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수천 년전의 '성평등 의식'이 오늘날과 같을 수는 없을 테지만, 우리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오디세우스>를 읽어야 할 필독서로 삼고 있는데, '여성독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대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하겠기에 그런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아>를 여성독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어야 바람직할 것인가? 현대판 <오디세이아>는 분명 온갖 불륜과 바람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남편'이 정숙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귀환(?)'한다는 내용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 과연 20년 동안이나 '여성편력'으로 화려한 대장정을 치루고 돌아온 남편(혹은 애인)을 제정신으로 맞이할 '정숙한 아내'가 현대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식의 질문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던지는 질문일 뿐이다. 과연 바람둥이 남자를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하며 정숙한 여자'가 있다면 존경받는 위인으로 삼을 만할 것인가? 아니면 역발상으로 20여 년간 '남성편력'으로 장식하며 수많은 수펄들을 끌어안았고 현재도 끌어안고 있는 매혹적인 여왕벌(?)만을 기다리는 '순정남'을 위인으로 삼을만 하냔 말이다.

 

  이따위 '순정남'이 있을지라도 어떤 남자도 '위인'으로 존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정숙한 남편'을 정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정숙한 아내'는 정상(?)으로 볼 수 있느냔 말이다. 왜 여자에게만 이따위 '굴레'를 짊어지게 하고 남자들만의 '환상속의 아내상'으로 삼고서 여성들에게 강요하느냔 말이다. 오히려 여성독자들에게 '페넬로페'가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직접 '오디세우스'가 되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를 읽었다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험'과 '여행'을 떠나서 견문을 넓히고 인생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라고 권유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떠난 여정이 '고행길'일지언정 그것이 '인생'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침실 따위가 아닌 진정한 여행가들이 언제든 돌아가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귀띔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비로소 <오디세우스>를 바람직하게 읽었다 할 것이다.

 

  우리는 곧잘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맹점에 빠지곤 한다. 책에 적혀 있으니 '진실'이고, '사실'만 담겨 있을 거라고 말이다. 더구나 '고전'처럼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권위'에 짓눌려서 '잘못된 개념'을 곧이곧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고작 몇 살만 차이가 나도 '세대차이' 운운 하면서 어찌 수십, 수백, 수천년 전의 책을 곧이 곧대로 믿는단 말인가? <경전>일지라도 시대에 맞은 올바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책에 나와 있는 문구를 밑줄까지 쳐가며 달달 외우는 것은 하릴없는 짓이다. 차라리 외우지 말고 '소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내것'으로 만든 다음 '표현'을 해야 바람직하다. 그리고 내것으로 만든 표현을 주고 받으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면, '내것'이 올바른지 그른지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내것'을 많이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책들, 즉 <고전>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동시대 뿐만 아니라 수세대에 걸쳐 오랫동안 '검증'해온 책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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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 고양이 시리즈
나이스 캥 그림, 김희진 옮김, 베르나르 베르베르 원작, 포그 각색 / 미메시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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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고양이>에 이어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의 모험이 펼쳐지는 <문명>이다. 아직 베르나르의 원작을 '읽기전'인 까닭에 두 작품이 얼마나 싱크로율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 '차이점'은 곧 읽게 될 원작을 완독하는 순간 밝혀질 것이고, 내가 관심 높게 살펴본 것은 '스토리 진행'이었다.

 

  전작 <고양이>에서는 서로 다른 종족간의 '소통'을 꿈꾸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인간이 쌓은 지식을 고스란히 '수용'한 샴고양이 피타고라스가 파멸로 종지부를 찍은 인간의 문명을 '재건'하는데 성공하며 마무리 지었다. 한낱 동물에 불과한 고양이가 인간 스스로 파멸시켜버린 '문명'을 되살린다는 전개가 황당하긴 했지만, 나름 인상 깊기도 했다. 원래 '자기 머리'를 스스로 깎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 문명도 '인간이 아닌 존재'에 의해서 다시 스타일을 되찾을 수도 있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문명>에서는 과연 그 문명이 '어떤' 스타일로 쌓여질지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문명'이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동물실험에 참여했던 동물은 샴고양이 '피타고라스'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실험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이 또 있었단 말이다. 바로 '알비노 생쥐'인 티무르였다. 오~티무르라니 <고양이>에서도 쥐떼를 이끌던 우두머리가 '캄비세스'였다. 그런데 그 캄비세스를 단박에 제거하고 새롭게 쥐떼를 이끌게 된 우두머리가 바로 '티무르'였던 것이다. 인간 '티무르'는 살아생전에 인간을 학살하는 즐거움(?)으로 살았다고 할 정도로 살육을 즐겼던 제왕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학살자'의 이름을 딴 생쥐가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인류 문명으로 쌓은 지식'을 갖추었다니 위험수위가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생쥐 티무르는 '실험체'로써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며,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 뒤에 인간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갈고 닦을 것이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티무르는 캄비세스와 마찬가지로 바스테트와 인간들이 머무르고 있는 섬을 '포위'하며 점점 보여오고 있었다. 티무르는 꽤나 지능적이란 증거다.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고 말이다.

 

  이에 바스테트는 자신의 집사 나탈리와 피타고라스와 함께 '열기구'를 만들어 자신들을 도와줄 '응원군'을 청하려 탐색에 나간다. 분명 저 바깥 어딘가에 쥐떼의 공격을 아직 받지 않은 '공동체'가 분명히 존재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곧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 공동체가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긴 했지만, 순순히 손을 잡고 함께 '티무르'와 대항하는 공동작전에 나서게 될까? 설령 손을 잡았다고 해도 서로 다른 '종족간의 소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리고 인간들의 문명은 정녕 이렇게 멸망을 고하고 말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암코양이가 펼치는 대활약이 점점 흥미로워진다.

 

  그런데 이쯤해서 '인류의 문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문제를 맞딱뜨리게 되었다. 바로 '대멸종'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지구온난화니, 기후변화니, 핵전쟁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유를 밝히지 않은 '내전'과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문명이 금세 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건 바로 인간들이 파괴한 도시를 점령한 '쥐떼의 공격'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시를 점령한 쥐들은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페스트'를 퍼뜨렸고 말이다. 중세 유럽인구 3/4을 절멸시켜 '봉건사회의 기틀'을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로 혁신할 수 있게 된 분수령이었던 바로 그 '페스트'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2019년을 기점으로 '팬데믹 선언'을 하게 만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는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인류의 문명을 삽시간에 절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류를 절멸시킬 시나리오는 여섯번째 대멸종이나 제3차 세계대전 같은 것보다는 '감염병'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제때에 '치료약'과 '백신'을 만들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시나리오인 셈이다.

 

  결국, 베르나르의 상상력은 '인류의 절멸'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인류의 문명'이 인간의 대멸종 이후에도 존속할 것이라고 전망한 점이다. 바로 'USB를 꽂은 고양이'를 통해서 말이다. 고대부터 인간과 친숙하면서도 인류를 '집사'로 삼을 정도로 고귀하고 도도한 생명체인 '고양이'가 인류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종족으로 선택한 셈이다. 실현가능성은 둘째치고 베르나르의 상상력 만큼은 정말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비록 내게 '고양이'는 딱맞는 취향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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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원작, 포그 각색, 나이스 캥 그림, 김희진 옮김 / 미메시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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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고양이 집사'란 이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주인'인 인간을 동등한 친구사이도 아닌 '자신의 종'으로 격하시켜버리는 동물을 집에서 기르는 것이 '내 기준'에서는 절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양이를 집에서 기르는 것이 아닌 고양이를 '기꺼이' 섬기며 살아가며 기쁨과 행복을 논하는 '별종(스스로를 '고양이 집사'라 일컫는 사람)'들과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난 베르나르의 <고양이>도 별로였더랬다. 그래서 1권을 읽고 나서 2권을 마저 읽지도 않았더랬는데, '그래픽노블'로 다시 나왔다길래 꺼내 들어봤다. 웹툰은 읽는데도 별로 시간을 빼앗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웬걸 읽자마자 느낌이 확 달랐다. 소설책으로 처음 접했을 때에는 별난 고양이가 등장해서 저 잘난 맛에 사는 재수탱이(?)의 독백 나레이션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웹툰으로 읽으니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었다. 먼저 프랑스 빠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내전상황'이 눈에 들어왔고, 그로 인해 인간세상은 피폐해졌으며, 그렇게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엔 쥐떼들이 점령하면서 전염병인 '페스트'가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페스트...유럽의 인구 절반을 죽음으로 몰고간 지독한 질병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주인공이 '고양이'였다. 쥐떼를 내몰고 페스트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영웅 아니냔 말이다. 내가 놓친 것은 2권부터 펼쳐질 '쥐와 고양이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고양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었다면, <고양이>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힘, 지식, 그리고 소통'에 있다. 프랑스혁명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앙시앵 레짐(혁명전 구체제)'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실현시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이제 <고양이>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인간들의 세상은 끝없는 내전으로 스스로 타락하고 끝내 몰락하고 만다. 그렇게 인간들의 삶은 피페해지고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돌아 절멸의 위기까지 치닫게 된 셈이다. 이렇게 인간이 무력해진 도시를 점령한 것은 다름 아닌 '쥐떼들'이었다. 하지만 쥐떼들은 인간들이 애써 만든 '문명'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저 파괴를 일삼는 '야만'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인간들이 남긴 '문명'을 이어받은 것이 피타고라스라는 '똑똑한 고양이'였다.

 

  고양이 피타고라스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온갖 스트레스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았기에 이마 한복판에 '제3의눈'이라는 USB 장치를 달고서 인간들이 일구어낸 문명(컴퓨터 인터넷망)과 접속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내전이 한창일 때 피타고라스는 차곡차곡 지식을 담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뇌를 '저장장치' 삼아서 말이다. 비록 고양이라서 '인간의 언어'는 구사하지 못하지만, '바스테트'라는 엉뚱한 고양이를 만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바스테트가 엉뚱한 고양이인 까닭은 그녀가 '종간소통'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종끼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고양이였단 말이다. 그래서 끝없이 바스테트는 생쥐와도, 금붕어와도, 그리고 인간과도 갸르릉거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서로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끝없이 시도를 한다. 결국 그 '종간소통'이 성공을 이루고, 고양이는 인간과 사자와 힘을 합해서 야만스런 쥐떼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시금 문명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로 자리 잡는다는 내용이 이 소설의 줄거리였다. 즉, 사자의 힘, 피타고라스의 지식, 그리고 바스테트의 소통으로 야만을 몰아내고 문명을 새롭게 일구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물론, 사자의 힘은 '인간들이 다루는 무기의 힘'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암튼, 이 웹툰으로 인해서 소설 <고양이>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고양이>에 이어, <문명>과 <행성>이라는 '고양이 시리즈'를 펴냈다고 하는데, 모두 읽어보려 한다. 물론 '내 기준'에서 고양이는 완전히 흡족할 수만은 없겠지만, 이 책으로 인해 '나의 지적호기심'을 자극받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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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의 천일야화 6 - 알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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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대단원이다. 방대한 <천일야화>를 단 6권으로 끝마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이 책은 원작을 고스란히 옮긴 책이 아니라 또 다른 '순수창작'이기에 6권으로 충분할 것이다. 허나 양영순이 담은 감동만큼은 6권으로 부족할 것이 틀림없다. 웹툰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그 두배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대서사일테니 말이다. 20여 년 전만해도 일본만화의 홍수속에서 우리 국산만화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처지였다. '명함을 내놓는다'는 표현조차 일본식 표현이니 할말조차 없었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K-웹툰'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 만화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마저 '한국 웹툰'은 대세를 거머쥐고 있으니 말이다. 마블 영화 <어벤져스>에서 아이어맨이 로키에게 말한 대사가 있다. "우리에겐 헐크가 있다"고 말이다. 그 말마따나 "우리에겐 양영순이 있다"로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천일야화>는 대작이었다. 근데...안타깝게도 양영순은 '다작'을 하지 않았다.

 

  물론, '다작'이 대문호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닐 것이다. 일본 <파이브스타 스토리>를 봐도 그렇다. 아직도 '완결'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1년에 한 편은커녕 10년에 1~2권을 쓸까 말까다. 중요한 것은 '완성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좋은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보다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하고 또 기대할 뿐이다. 더구나 <천일야화>가 꼴랑 6권으로 종결을 한 뒤에 허탈감은 더했을 것이다. 충분히 더 우려먹을 수도 있었을 것을 하고 말이다. 그 때문인지 양영순의 <덴마>는 가히 '스페이스 오디세이'라고 불릴만큼 긴 이야기를 담았다. <천일야화>도 그처럼 길게 연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암튼, 대단원의 도입부는 전편에 이어 '한 가지에서 꽃이 피면 다른 가지에서는 꽃이 지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번 리뷰에선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그동안 스포 다 해놓고 뭔짓이냐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도 '판매중'인 이 만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마지막 이야기가 궁금해 미치겠다면 직접 읽어보시는 것도 최상의 선택일 것이다.

 

  양영순의 작화기법은 '가질 수 없기에 더 가지고 싶다'는 모순적인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는 것 같다. <천일야화> 1권부터 쭉 살펴보면, 이야기들이 모두 '극적인 감동'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어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아주 사소하더라도 '욕구'를 내비치는 순간 영원하고 완벽할 것만 같았던 것들이 허무러지고 사라져버리는 '허무감'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생명, 당장 죽음을 마주했을 때에는 '살아남기만' 하면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해도 행복할 것이라 여겼건만, 막상 살고나면 빼앗기도 싶지 않고 싶은 법이다. 사랑은 어떤가?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것이라 여기지만 내 사랑이 아니면 다른 이의 사랑은 그저 '입담화'에 오르내릴 천박한 추문에 불과하다. 희생은 고귀한 것이라 여기면서도 자기 자신은 절대 희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권력 또한 누리면 누릴수록 애초의 투명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 것인지 오래되면 될수록 감추고 또 감추어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장소'에서 이루어지며, 나중에 밝혀질 때는 죄다 추악한 흉물에, 코를 쥐어잡는 악취가 진동할 뿐이다. 그런데도 양영순과 만나면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감동 스토리'로 변모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진실과 마주할 때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서 수긍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감동적인 스토리도 자꾸 반복되다보면 식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너무나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이 팍 오기 때문이다. 마지막 6권의 이야기도 그렇다. 쌍둥이 중 한 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 쪽이 날마다 '생명의 주문'을 외워줘야만 한다. 하지만 애초에는 그럴 일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쌍둥이는 태어날 때부터 선별되어 '서로의 존재'를 모르도록 키워졌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한 쌍둥이가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서 그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비밀을 알아낸 쌍둥이를 죽여버린다. 그럼 남은 쌍둥이도 저절로 죽게 될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잔혹한 이야기로 진행되면 그저 끔찍한 이야기에 불과할테니 한가닥 살 수 있는 희망을 심어놓았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외워야 할 방대한 주문을 하루종일 '읽는 것'이 일상이었던 한쪽의 눈을 멀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이 먼 쌍둥이 형제는 이 사실을 모르는 남은 형제를 살리기 위해 그 긴 주문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리고 장님이 되어 시장 한구석에서 구걸을 하면서도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며 살아간다. 원래는 자신이 살고 다른 형제가 죽을 운명이었음이 너무도 미안해서 말이다. 그렇게 뻔뻔한 삶을 살아갈 운명이 너무도 죄스러웠기에 말이다. 그리고 두 형제가 나중에 마주치게 된다. 서로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

 

  한편, 조카와 숙부 사이의 칼부림도 '외세의 침략'이라는 대위기 속에서 일단락이 되고 만다. 아무리 원수같은 사이라하더라도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우면 힘을 합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나 내전이 길었던 탓에 외세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할 수는 없었다. 마치 어부지리처럼 막강한 군사력 앞에 허물어지고 만 셈이다. 허나 샤리아르의 왕비가 아니었던 세라자드는 살아남았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은 전쟁통 속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스포는 안 한다고 했지만, 궁금하게는 만들어야겠기에 짤막하게나마 적어 보았다.

 

  <천일야화>는 그저 그런 야한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미녀가 등장하고 강력한 마신이 등장하는 후끈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는 하지만 결코 야릇한 이야기만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교훈적인 이야기'만도 아니다. 잘못된 선입견에 빠져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는 임금이 등장하긴 하지만, 임금의 무능을 탓하지 않고 누구라도 한 번 들으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치고 올바르고 현명한 군주로 되돌아오시라고 매일밤 드리는 기도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문'은 무려 1001일만에 성취가 되었다 무려 삼 년만에 말이다. 이 정도라면 간신히 '서당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이 '서당개'에 비유될 수 있겠느냐고 코웃음을 치곤 했었는데, 지금은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서당개보다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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