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협려 1 - 활사인묘
김용 지음, 이덕옥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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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 / 김영사 31번째 리뷰] 이 책 <신조협려>는 김용이 쓴 '영웅전 3부작'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부에 해당하는 <사조영웅전>의 주제가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면, <신조협려>는 '정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정(情)을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신조협려>의 무협영웅들은 하나 같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애정에 집착하고 목숨까지 걸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신조협려>의 주제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 도입부는 너무도 유명해서 '홍콩영화'를 즐겨본 이들이라면 한 번만 들어도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원래는 금나라 시인 원호문의 '안구사'의 한 대목인데, 김용은 이 시를 통해서 <신조협려>를 통으로 써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조협려>의 등장인물들은, 특히 젊은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조협려>의 시대배경은 금나라와 몽골이 한창 싸우던 '남송시대'지만, 칭기스칸이 죽은 뒤에 몽골이 금을 멸한 뒤에 남송까지 차지하려 야욕을 드러는 때다. 이에 한족(남송인)들은 몽골의 군대에 맞서 결사항전을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몽골이 중원을 차지한 뒤 '원나라'를 세우기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소설속에서는 곽정과 황용이 한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끝까지 항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곽정과 황용이 승승장구하는 반면에 전세는 기울어 남송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고 만다. 이런 시기인데도 젊은 남녀들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려 싸우기보다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살짝 의아스럽기까지 하지만, 피비린내나는 전장터에서도 사랑은 꽃을 피우기 마련(?)이라는 것인지 김용은 과연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과 사를 같이하느냐?'고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신조협려>의 주인공은 단연 '양과와 소용녀'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양과는 <사조영웅전>에서 곽정과 의형제를 맺었던 '양강의 아들'이다. 양강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를 아버지로 섬기는 패륜을 일삼다 비명횡사한 탓에 양강의 아내였던 목염자는 아비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를 낳고 외롭게 살아간다. 이를 딱히 여긴 곽정과 황용이 목염자를 돌봐주려 하지만 거절하고 만다. 하지만 의형제 사이였던 곽정의 호의마저 거절할 순 없었기에 양강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되는데, 이름은 '과', 자는 '개지'로 한다. 아비의 과오를 잊지 말고 잘못을 고치라는 뜻을 담았다. 우리식으로 이름을 지으면 '양잘못', '뉘우침' 정도가 될텐데, 외국의 이름은 이렇게나 '직설적'이라서 황당한 경우가 많다. 아무리 아비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이름을 '부정적'으로 짓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굳이 우리식으로 이름을 말하자면, '양바름'이른 뜻을 담아 '양정(楊正)'이라고 지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소용녀는 양과보다 두 살 많은 설정이지만, 어릴 적부터 무덤속에서 살아온 터라 피부가 새하얗고 청순가련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20대가 넘어서도 소녀 같은 미모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허나 무덤에서 적막하게 살았고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는 탓에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성미라서 아이돌급의 미소녀인데도 냉랭하기 그지없..좋게 말해 차분한 미녀다.

  결국,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소용녀가 젊은 나이에 죽기 때문인데, 양과는 팔 한 쪽을 잃고 외팔이가 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키고 싶었던 첫사랑의 여인이 죽자 평생을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잘생김'은 떨쳐내지 못한 탓에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고 마는데, 그 가운데 곽정의 둘째딸인 '곽양'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용녀를 잃고 아파하는 양과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양과 때문에 곽양도 평생을 홀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홀로 무예를 닦아 '아미파'를 창시하게 되니, 훗날 3부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아미파의 여검사 주지약의 오랜 선배가 된다. 이렇듯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야기'가 <신조협려>의 이야기는 수많은 '무협지'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만들게 된 '암연소혼장'이란 무술에서 따온 고한우의 <암연>이라는 노래는 그 쓸쓸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하겠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늘만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와
   마주댄 그대 볼에 눈물이 느껴질 때는 나도 참지 못하고 울어 버렸어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은 이렇듯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런 둘의 사랑을 멀찍이 바라보던 '곽양'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픔에 빠져버렸고 말이다. 어쩌면 <신조협려>에서 사랑에 성공한 이들은 '찐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닌 것처럼 가슴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협려> 1권에서 이야기의 서문을 여는 것도 바로 사랑이다. 적련선자 이막수와 육전원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외모를 지닌 청춘남녀였는데, 둘은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냐면 육전원의 앞에 '하원군'이라는 절세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육전원과 하원군은 서로 첫 눈에 사랑에 빠져서 만나자마자 혼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막수는 육전원과 썸만 타다가 '사랑고백'을 하기도 전에 사랑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렇게 첫사랑에 실패한 이막수는 '악독한 미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살생을 저지르는 악행을 일삼는데, 그 첫 번째 행패가 바로 육전원과 하원군의 혼례식이었다. 그때 대리국 천룡사의 고승에게 제압 당한 이막수는 앞으로 10년간 이 부부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났는데, 시간을 훌쩍 지나 바로 10년 째 되는 그날에 이막수가 찾아와 육전원 부부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진즉에 틀어져 육전원과 하원군은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일찍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런데도 이막수는 육전원의 동생 내외를 비롯해서 그 집의 식솔들을 전부 살육하겠다고 쳐들어오니, 과연 사랑에 눈 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서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도 있고, 사랑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미워하고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마저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분노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음..여자 손목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총각은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다(--)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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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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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 / 파람북 1번째 리뷰] 나는 학창시절에 '작문시간'이 가장 싫었다. 책읽기를 딱히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읽으라고 나를 내모는 것이 너무 싫어 책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참 싫어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쓴 글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늘 낮은 평가만 받고 질책만 받으니 쓰기 싫었던 거다. 내가 쓴 글이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합당'했다. 지금의 나라도 어린 내가 쓴 글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내가 쓴 글에 '내 생각'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 글에 낮은 점수를 주면서 '느낀점(생각)'을 함께 쓰라고 한결같이 지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좀처럼 '느낀점'을 쓸 수가 없었다. 왜냐면 책속의 내용은 다 기억이 나고 줄거리도 줄줄 읊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데, 뭘 더 '생각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펀지, 그 자체'였다. 줄줄 외우고 따라하는 것들은 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을 표현하라는 것에는 늘 빵점이었다. 이를 테면, '이것'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물음에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그런 나를 다그치면 난 늘 '이것'에 대한 '사실적인 답변(정보)'만 줄줄 말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런 거' 말고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다! 라고 다그쳤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이란 걸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각'만 나에게 강요할 뿐, '내 생각'을 말하면 버릇 없다, 발칙하다, 그런 걸 도대체 누구에게 배웠느냐 면서 늘 혼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눅이 든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길 꺼렸었다. 아니, '내 생각' 따위를 표현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자기방어'를 먼저 배운 나는 그저 '어른들의 생각'을 외워서 얘기할 뿐이었다. 그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책속의 내용을 달달 외워서 글로 옮겨 적을 뿐, 내 생각을 담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던 나는 학창시절 내내 고통스런 작문시간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도 나는 '학력고사 세대'였다. 그래서 달달 외운 것만으로도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저마다 다른 것에 대해 나는 깜짝 놀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들을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이 나에겐 너무도 낯설었다. 도대체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마다 생각을 줄줄 읊어대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꽤나 흥분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나는 말 한마디 뻥긋할 수 없었다.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여서 나는 그 후로도 10여 년간 '표현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으며, 아기가 '첫 단어'를 내뱉는 것과 같은 긴 기다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 즈음이 되어 만난 쥐스킨트의 <향수>를 리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그 책을 소개했다. '그루누이는 사람들의 정과 사랑에 굶주린 절대고독에 빠진 존재이다'라고 말이다. 그루누이는 살인자다. 최고의 향수를 제작하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만을 골라 '그녀들의 채취'만을 뽑아내 절대적인 매혹의 향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맡으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을 못차리고 오직 '본능적인 인간, 그 자체'가 되게 만드는..그야말로 '냄새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매우 흡족해하며 '냄새'로 온갖 것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는 권능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 그루누이는 공포심에 깃들게 된다. 온갖 냄새를 구분하고 심지어 부릴 줄(?)도 알게 된 자신에게서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루누이는 채취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루누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어깨라도 부딪히면 부딪힌 상대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분명히 '느끼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딪혔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래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마저 제조해버린다. 달리 '냄새의 신'인가. 그루누이는 땀냄새를 비롯해서 구취, 암내, 발꼬랑내까지 손수 만들어서 알맞은 부위에 적절하게 뿌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루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냄새를 풍기는 그루누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루누이는 그 평온한 일상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자신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찰나에 그루누이는 자신이 벌인 '엽기적인 살해 행각'이 발각되고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그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결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 슬퍼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향수병을 열고 향수를 뿌린다. 자신이 제조한 최고의 향수를 말이다.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제정신을 못차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행복감에 충만한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루누이는 또다시 '군중속의 고독'을 절감하게 된다. 자신은 또다시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다. 제정신을 차린 군중을 자신을 죽이려 들테고, 제정신 못차린 군중은 자신을 추앙할테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은 설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느라 광란에 빠진 광장을 벗어난 그루누이는 한때거리의 사람들을 만나자 자신의 온몸에 '그 향수'를 뿌리고 만다. 향기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고 향기에 취해 그루누이를 탐하고 그자리에서 그루누이를 먹어버리고 만다. 그루누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평생을 외롭고 쓸쓸한 절대고독자로 살아온 그루누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뱃속에서나마 존재감을 드러냈다. '포만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내용으로 <향수>를 리뷰하게 되면서 나는 '나만의 표현법'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리뷰를 했지만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은 분명히 '이때'부터였다.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나만의 글'을 쓰는 첫발을 내민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리뷰어가 되었다. 돈벌이가 되지 않아 '본업'이 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내 목표가 있다면 내가 쓴 글로 엮은 책을 내는 것이다. 아직 그럴 정도로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으며 실력은 더욱 형편이 없지만 말이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을 읽으며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글쓴이 김미옥의 글을 읽으며 한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도 했더랬다. 글쓴이와는 달리 나에겐 책을 읽고 '책이야기'를 나눌 지인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책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가족 가운데 책을 읽는 이가 아무도 없고, 절친이라고 할만한 친구들도 '책이야기'라면 쥐똥만큼도 듣지를 않으며, 책모임 같은 곳을 찾아다닌 적도 있지만, 책은 핑계일 뿐 뒷풀이로 즐기는 술을 마실 생각뿐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나도 글쓴이만큼 '활자중독자'로 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변엔 '나의 생각'을 공감해줄 사람이 거의 없다. 딴에는 내가 <향수>에 흠뻑 빠진 것도 이런 환경탓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루누이처럼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은..아직 '냄새의 신'에 버금가는 '리뷰의 신'이 되지 못한 형편없는 내 글빨 덕일지도...

  서론은 이쯤하고,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쉽게 말해 '독후감 모음집'이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에세이 형식'으로 옮겨 적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난 수필보다 '독후감'이란 표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김미옥 글쓴이가 쓴 글은 분명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글'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뭉뚱그려 '신변잡기적인 글모음'이라는 수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독후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글쓴이가 이 책에서 밝힌 '책목록'과 '내가 여태껏 읽은 책목록'이 사뭇 달라 '독후감'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글쓴이가 읽은 책의 '주제'는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이 언급하는 내용과 '상통'하는 주제들이 많았기에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독후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사실 '독후감'과 비슷한 용어로 '서평'이나 '리뷰'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솔직히 '서평, 리뷰'따위는 '독후감'에 비하면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전자는 '홍보, 광고효과'를 노리고 마켓팅의 일환으로 쓰여지는 일이 빈번하지만, 후자인 '독후감'은 직접 책을 사서 읽고 느낀점을 썼다는 느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표현'에 연연하지 않고 쓰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분류법'으로 나누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리뷰'가 더 정진을 해야만 '나의 독후감'으로 승격될 것이라고 본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암튼, 글쓴이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책을 읽되 책의 내용을 '옮겨' 적는 수준을 넘어 '나만의 느낌이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써야 제대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갈고 닦아나가면 '내 글(독후감)'을 읽는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것을 글쓴이의 표현에 빗대자면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것일테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김미옥 글쓴이는 수많은 팬들에게 "어떻게 하면 글쓴이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어요?"라는 질문도 상당히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이는 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물음에 답을 알고 있다. "읽지만 말고 쓰세요." 글쓴이도 똑같은 답변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읽으면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멤돌게 하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 생각을 말과 글로 비로소 '표현'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서로의 생각을 비교분석하면서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책속의 명문장을 '베껴 적는 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법적으로 '표절'이며,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굶어죽는 현실에서 '남의 글을 베껴서 옮기는 일'만큼은 좀 자제했으면 싶다. 물론 널리 알리고픈 순수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굶어죽는 비극은 여전하다. 그러니 감동스런 책을 읽었다면 '그 감동'을 자신만의 느낌을 살려 표현해서 '그 책'을 직접 사서 읽게 해주면 비극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모르겠다. 쨌든, 그렇게 글을 차곡차곡 써나가다보면 어느새 '김미옥' 글쓴이처럼 독후감을 써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글쓴이도 답을 달았을 것이다. 왜? 내가 바로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정말 글을 못쓰는 잼병이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을 소개하는 한 문장을 남기고 글을 마치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한데, [읽거나 죽거나(Read or Die)]다. 수많은 활자중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독서가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읽는 것'은 행복이다. 그 행복에 충분히 젖어야 비로소 글도 써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 된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바로 그 '또 다른 행복'을 전해주는 책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다.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지만 오직 '읽힌 책'만이 행복을 전할 수 있고, 그 행복을 만끽한 독자만이 '또 다른 행복'을 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찐한 행복을 담은 독후감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이 된다. 앞으로 '활자중독자'가 아닌 '예술가 김미옥'을 만나고 싶다.

파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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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3 : 세계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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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V / 엘릭시르 7번째 리뷰] 세계편의 결말이 드러났다. 퇴마사들은 지옥을 다스리는 '아스타로트의 재림'을 완성하고 온세상을 파멸로 이끌려는 블랙서클의 마스터와 최후의 결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최후의 결투를 하기까지 '3명의 승정'과 대결을 해야만 한다. 각각 '증오', '공포', '고통'의 주술을 이용해 퇴마사들과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살짝 아쉬운 점은 저자 이우혁이 '세계편의 말미'를 써나갈 당시에 대단히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상황이었는지, '3대 승정과 마스터'와 싸우는 이 장면을 대단히 휘뚜루마뚜루 써내려간 흔적을 지우지 못한 것이다. 물론 '국내편'에 비해 세계관이 엄청나게 확장되어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탓도 있겠지만, '세계편'을 읽을 때마다 드는 느낌은 '용두사미'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으로 스토리를 정리하면서 약간이나마 깔끔하게 이야기가 정리된 듯 싶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계편'의 엔딩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첫번째 까닭은 '3대 승정을 다룬 분량의 차이'가 극명하다는 점이다. 원래 '단계'가 거듭 될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이 당연한데, '증오의 승정, 코제트'를 물리치고서 만난 '공포의 승정, 젠킨스'는 허나 허탈할 정도로 쉽게 클리어하고, 그 분량 또한 너무 짧다. 그 뒤를 장식한 '고통의 승정, 히루바바'는 대단히 강력한 힘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를 제압하기 위해서 '현암, 홀로' 대적하고는 대결이 마무리 되는 전개방식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대결을 치루고서 마주한 '마스터와의 대결'은 더욱더 장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또한 분량이 너무 짧다. 그런 뒤에 등장하는 '악마, 아스타로트의 등장'은 기대한 것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전 '국내편'에서 보여준 '사악한 뱀, 브리트라의 등장'보다 초라했다고나 할까? 암튼 '세계편'은 <퇴마록>의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와 함께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리즈다.

  그럼에도 퇴마사들은 '세계편'을 마주하며 그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으니 나름 흡족한 부분이다. 박신부의 기도력은 '베케트의 십자가'를 얻게 되어 아우라를 막으로 펼치는 것 뿐만 아니라 '공모양'으로 발사하는 등 공격력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현암의 기공력은 '승희의 도움'을 받아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탄'자 계열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되어서 더욱 강력한 공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장준후의 주술력은 애초부터 '완성형 신동'이었으나 아직 어린 나이라서 발휘할 수 없던 힘이 '성장기'를 거치며 자연스레 봉인해제가 되는 느낌으로 점점 거센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승희는 '애염명왕'을 몸속에 깃들고 있기에 '신, 그 자체의 힘'을 발휘해야 마땅하지만, 그 힘이 철저히 봉인된 상태라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의외로 꾸준히 성장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의 생각을 읽는 '투시력'은 점점 컨트롤이 정확해졌으며, 퇴마사들에게 전해주는 힘을 '역이용'해서 상대를 폭주하게 만드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힘'을 주체할 만한 정신력이 따라주지 않아 퇴마사들 가운데 가장 약한 캐릭터로 보이고 있는 점이 살짝 아쉽다. 그밖에도 여러 '서브 캐릭터들'의 능력도 향상이 되면서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를 테면, '윌리엄스 신부의 이블 파워', '서연희의 심연의 눈' 등으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으로 '세계관'을 확장시키지 않았고, 독자들의 막연한 기대감만 부풀린 셈이었다.

  <퇴마록>의 주된 주제는 '악령을 물리쳐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세계편'에서 강력한 악의 무리는 '블랙서클'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지옥문을 열어 '악마, 아스타로트'를 이 세상에 재림케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블랙서클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모두를 미워하라"는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 제각각의 재주를 발휘해 온 세상을 향해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의 행적은 각국의 고위급 인사를 '좀비'로 만들어 저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대한민국에 이집트의 망령인 '세크메트'를 부활시켜 전쟁위기를 고조시켰고, 영국에서는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을 불러내어 캘트족의 영광을 위한다며 온세상에 저주를 퍼부으려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네트워크 저주를, 독일에서는 늑대인간의 출몰을 부추겨 대혼란을 불러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서 마주한 '3대 승정' 코제트, 젠킨스, 히루바바를 차례로 격파한 퇴마사들은 블랙서클의 마스터와 최종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지옥문'은 이미 열려 있는 상태였고, 그 지옥문을 통해서 '악마, 아스타로트'가 재림하게 된다.

  아스타로트는 루시퍼, 벨제부브와 지옥을 다스리는 '3대 악마'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악행을 활발하게 저지르는 루시퍼와 벨제부브와는 다르게 아스타로트는 '참모 역할'로 주로 하며 본격적인 활동(?)은 자제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스타로트의 원'과 같은 저주의 흑마술 주문에는 자주 거론되지만, 직접 등장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악명 높은 악마는 아닌 셈이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스터에 의해 '재림'한 아스타로트는 별다른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서 순순히 지옥문을 닫고 물러나는 모양새를 보인다. 물론 악마가 선행을 베푼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아스타로트가 원하던 것은 따로 있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퇴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고통'이었다.

  아스타로트가 말한 '영원한 고통'은 무엇일까? 그건 인간들끼리 싸우면서 생기는 '부산물'이었다.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피를 흘리고, 끝없이 죽고 죽이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인간 스스로 파멸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로 인해 인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한없이 기쁘게 즐기는 악마가 바로 '아스타로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공급해주는 퇴마사들의 활동이 아스타로트는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면서 말이다. 이게 과연 무슨 말일까? 왜 악마가 퇴마사들의 활동을 환영하냔 말이다. 그건 '악의 힘'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따르고 마는 나약한 인간들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울부짓는 인간들의 외침만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고통의 쾌락'을 퇴마사들이 악령과 맞서 싸우면서 '악마의 진정한 힘'을 깨우쳐 나가는 퇴마사들 덕분에 '고통의 강도'는 더욱더 강력해지고 순수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모르고 저지르는 악행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악행 때문에 '죄책감'에 휩싸여 더욱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퇴마사들은 악령들을 물리치고 '순수한 영혼'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악령'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악령은 그때문에 더욱 인간에게 달라붙길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악령은 악행을 저지르는 일보다 '인간이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에 더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스스로 반성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악마는 즐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악의 힘'에 빠져서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마 같은 인간'은 어찌해야 할까? 그들도 '인간'이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기에는 '악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선의 힘'이 너무 초라해보여 답답해지게 된다. 그렇기에 퇴마사들의 고민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한 셈이다. 퇴마사들이 왜 좀비나 흡혈귀에게 물어 뜯길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좀비와 흡혈귀를 파괴하지 않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망설이는 것인지, 답답해 미칠지경에 이를 지라도 우리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못말리는 악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처형'을 하면 속시원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악당 하나를 처단하는 것으로 '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또 다른 악당'이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당이 등장할 때마다 처단하는 방법으론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악당'이 만들어지는 원인을 찾아 발본색원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악당들의 변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변명은 듣되, 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아야 한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악당에게 일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높은 도덕성을 갖춘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닌 '죄 많은 사람'이 따끔한 일침을 놓아봐야 악당의 조롱거리만 늘어날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퇴마사'를 등장시켰다. 악령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말이다. 이들의 행보는 '혼세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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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 - 집중력과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두뇌 정비 프로젝트
피터 홀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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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II / 한빛비즈 146번째 리뷰]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젊었을 때는 단연코 '돈'이 최고였다. 물론 '명예'도 있으면 좋고 말이다. 그래서 죽어라 공부했고, 돈 되는 일이라면 날밤을 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가 '지천명'에 이르고 보니,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건강'에 비해서 말이다. 돈도 건강해야 쓸 수 있는 것이고, 명예도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야 품위 있게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수천억 자산가일지라도 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면 '수천억'을 쏟아부어서라도 건강해지고 싶어진다. 만인지상의 '일인자'가 되는 명예를 얻은들, '건강'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 명예를 탐하는 무리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게 뻔하고, 건강을 다 잃은 '일인자'는 품위조차 지키지 못해 망신살만 뻗치고 말 뿐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바로 '건강'이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돈'도 얼마든지 벌 수 있고, '명예'도 언제든 되찾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몸'과 '정신' 가운데 어떤 건강을 더 챙겨야 할까? 이 또한 젊은 시절에는 '육체적인 몸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정신줄 놓치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아버님이 '치매'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신 모습을 보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정하시고 명석하시던 분이 '기억'을 점점 잃어버리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저 '과거의 기억'만 잃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판단력'까지 떨어지니 점점 '아기'처럼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면 혼자만 아픈 것이 아니라 주위 가족 모두가 아플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정신 건강'은 꼭 챙겨야 한다. 설령 '몸 건강'을 잃는다해도 '정신'만 말짱하다면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 <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은 정신줄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일상생활속 소중한 습관을 마련해주는 '두뇌개발서'다.

  그렇다고 해서 최신 '뇌과학'을 다룬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읽다보면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내용'이라 반갑기 그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뇌건강을 지키기 위한 실천 하나 '땀을 흘릴 정도로 운동을 즐겨라', 둘 '뇌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엔돌핀을 뿜뿜하라', 셋 '뇌를 다시 일깨우는 글림프 시스템을 활성화시켜라', 넷 '뇌건강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지킬 수 있으니, 인지적 상호작용을 일상화하라', 다섯 '뇌건강을 위한 특별한 것은 필요없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주의사항은 '과유불급'이다'. 이렇게 다섯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뇌세포'만 따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적절한 신체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란다. 이를 테면,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뇌세포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물론 더 간단한 운동으로도 얼마든지 뇌건강을 지킬 수 있지만 '춤'을 추면 자연스럽게 온몸을 움직일 수 있고, 다음 동작을 기억함과 동시에 눈은 상대방과 교감하고, 입은 기쁨으로 한껏 치켜올라가며, 호흡은 거칠어지며, 심장은 미친듯이 펌프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손과 허리 등으로 '스킨십'을 하며 온몸의 신경세포를 한껏 긴장시켜 '뇌신경전달물질'인 DOSE, 다시 말해, 즐거움의 호르몬인 '도파민',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 자신감 호르몬 '세로토닌', 그리고 천연 진통제이자 면역 호르몬인 '엔돌핀'을 폭포수처럼 쏟아내 뇌를 비롯해서 온몸을 적시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듯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만으로도 충분하단다. 하릴없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억지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쓸 필요도 없단 말이다.

  여기에 '글림프 시스템'을 챙겨주면 금상첨화가 된다. '글림프 시스템'이란 뇌의 대사 폐기물과 함께 뇌척수액을 빼내는 혈관 네트워크를 일컫는데, 쉽게 말해, 적절한 수면을 취하란 말이다. 다시 말해, 잠을 자면 뇌를 청소할 시간을 주는 셈이란 말이다. 얼마의 시간을 잠을 자야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생체리듬'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평균 8시간의 수면시간을 권장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낮잠의 효능'이다. 밤에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 별도의 '낮잠'을 자는 것이 뇌건강에 아주 이롭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성과에서도 이를 확연하게 증명할 수 있었단다. 그렇다고 낮잠을 오래 자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된단다. 특히 3시간 이상의 낮잠은 본격적인 수면시간인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주원인인 까닭에 30분~1시간 정도의 낮잠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낮잠'을 자려고 하지 말고, 그저 '평온한 휴식의 개념'으로 눈만 붙이고 잡생각을 하지 않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단다. 낮잠 이외에도 효과적인 것은 '초록식물'을 가깝게 두고 자주 바라보기, 두들링이라고 하는 공책에 끄적이며 낙서하기, 껌 씹기 등도 뇌에 불필요하게 쌓여 있는 해로운 물질을 걸러주는 효과를 내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킨십'이 최고다. 사랑하는 이와 애무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굳이 그렇게 '격렬한 스킨십'이 아니어도 좋단다. 쓰담쓰담만으로도 충분히 설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통(대화)'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일만으로도 뇌건강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요가의 호흡법' 따위로 명상을 하면 더 효율이 좋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요가가 아니어도 '비디오게임'을 통해서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겠다. 한마디로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 '비싼 강좌'를 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뇌건강을 지킬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화'를 만들어서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으로 뇌건강을 지키려다 도리어 '스트레스(또는 강박증) 폭발'로 인해 뇌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단다. 일상 습관을 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격렬한 운동과 너무 짜릿한 승부욕을 추구하다 도리어 '뇌건강'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적절함'으로 적당히 뇌건강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할 것이냔 말이다. 이를 테면 적절한 비디오게임이 뇌건강에 유익하다면서 '일상생활 습관'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치자, 그런데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의 비디오게임을 즐기다보면 도리어 뇌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게임의 속성상 '밋밋하면' 금새 질리기 마련이다. 기껏 '뇌건강'을 지키고자 만든 습관인데 매일매일 '심플'하고 '덜 자극'적인 게임만 하다보면 식상해서 금새 지루해져서 안 하게 될 거란 말이다. 비단 게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춤도 밋밋하고, 섹스도 '했던 것'만 계속 반복해서 하고 '시간'과 '코스(?)'를 정해서 의무적으로 하고 끝내면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건강을 위해서 일상생활속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음'을 알고, 꾸준히 뇌운동을 하되,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밋밋하지 않게 적절히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굳이 일상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단짠단짠'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다시 말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뇌건강'이 최고다. 뇌건강을 위해 돈도 적절하게 벌고, 명예도 주눅들지 않을 정도로 챙겨라. 그래야 '뇌건강'을 지켰을 때 아름다운 인생을 누릴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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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6 - 대공황과 뉴딜혁명 미국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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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I / 인물과사상사 13번째 리뷰] 1930년 미국을 관통한 사건은 무엇일까? 흔히 알고 있기로 '대공황'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기억되는 주식 대폭락은 수많은 미국 도시인들을 실업자로 내몰았고, 금융계는 부도와 파산으로 쑥대밭이 되었었다. 그렇게 미국 경제는 10여년 간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지 못했고, 미국이 헤롱거리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즘'이 창궐했으며, 소련은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공산주의'가 약진을 하고 있었다. 이는 대공황을 맞이한 자본주의가 맥을 못추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공산주의가 대공황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었던 탓이다. 흔히 말하는 '뉴딜 정책'은 대공황에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경기부양을 위해 자본을 쏟아붓긴 했지만 그것이 '실업자 구제'로 이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산주의'체제에서는 실업자가 훨씬 적었다. 그렇기에 대공황과 같은 시기에 '똑같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맥을 추지 못한 반면에 공산주의는 궁여지책이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 있던 유럽은 어땠을까? 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겨우 '자력경제'로 회생할 즈음에 대공황을 맞이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말도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파시즘'이 득세하면서 '경제회복'을 맞이한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와 '독일'이었다. '검은 셔츠단'의 무솔리니는 혼란한 정국을 '로마진군'이라는 강행수로 돌파하며 단박에 '두체(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한편 '나치'의 히틀러는 쿠테타를 시도했다 실패한 뒤에 '평화적인 방법(?)'인 선거를 통해 정치계로 화려하게 복귀하고서 경제난으로 허덕이는 독일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총통'의 자리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력으로 공포를 심어주고 총칼로 압제를 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경제난 해소'를 해내고 '국가적 자긍심'을 심어주며,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심어준 덕분이다. 대공황으로 전세계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어떻게 경제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일치단결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침략전쟁'이었다. 아니,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이니 소규모 침략(?)이긴 했지만, 전쟁을 치룰 수도 있다는 분위기만 띄워도 '군수산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가 되살아나는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파시즘의 독재자'들이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의 파시즘'이 한 몫 단단히 했다는 이야기가 솔솔했다.

  아닌 게 아니라, 1930년대 미국의 후버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은 각각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파시즘'을 이상적인 통치수단이라며 대단히 호평을 했더란다. 당시 미국은 '경제대공황의 수렁'에 점점 빠져들며 위기에 봉착했었는데, 경기부양을 위해 실업자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복지정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왜냐면 자본주의국가에서 '공산주의정책'을 시행할 수는 없다는 반대이유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은 공산주의(막시즘)를 악마에 비유할 정도로 맹렬하게 비난한 탓에, 미국에서도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내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한다. 물론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파시즘)은 공동체를 우선으로 삼고 있으니 엇비슷한 체제인 듯 싶은데도, 히틀러의 사회주의(나치즘)는 공산주의와 판이하게 다르다며 마르크스를 맹비난 했더란다. 훗날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독소 불가침선언'을 무력화하며 소련침공을 했으니 정말 미워하긴 했던 모양이다. 당시 스탈린은 그 선언만 믿고 '독일 침공'을 전혀 대비하지 않은 채 '군부 숙청'을 단행해버렸고, 때마침 침공을 한 독일군대에 모스크바가 포위되고, 스탈린그라드를 빼앗겼으니, 스탈린이 히틀러를 직접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만도 했다. 암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꽤나 다른 듯 싶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자본주의의 폐해가 정점에 다다르면 '사회주의'로 전환하게 되고, '사회주의'가 무르익게 되면 '공산주의'로 귀결된다는 사회진화적인 관점이 있는 것을 보면, '사회주의'는 완벽한 공산주의로 귀결되기 이전의 불완전(?)한 단계로 단순무식하게 볼 수도 있겠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말이다.

  암튼, 미국은 경제대공황을 맞아 '파시즘'적인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러나 '파시즘'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미국은 자연스레 새로운 차별 방법을 터득하게 되니 바로 '우생학'이었다. 프랜시스 골턴이 창시한 우생학은 어처구니 없게도 유럽보다 먼저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그것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생학'은 미국인의 인식 저변에 파고들어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그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끔찍했다. 소위 '유전학적 질병'의 소지하였다고 판단되며 '불임수술'은 물론이거니와 '안락사'까지 시켰으며, 사사로운 폭력을 저질러도 '무죄판결'을 받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단다. 더 나아가 '골상학'이란 사이비과학에 이르게 되면 '범죄형'으로 생겼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자비한 일을 시행할 지경이었단다.

  미국이 '파시즘'으로 물들어 있던 시절도 있었다니, 솔직히 잘 몰랐었다. 그리고 미국에 '우생학' 같은 사이비과학이 대유행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심각성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으로 저지르는 폭력의 위험성은 오늘날 우리가 '파시즘'을 경계하는 이유이지만, '파시즘'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 이를 테면 '경제위기극복' 같은 것 말이다. 그 효과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굶주림이 일상이던 시절에 배고픔을 해결해준 이에 대한 고마움이 '맹신'과 '숭배'로 이어지는 현상을 우리도 겪어봤으니 이해하는데 어렵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개발독재'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으로 박정희의 과오가 묻혀지고, 심지어 그의 딸까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해주는 일에 아무런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 두 나라의 국민들이 겪었던 어려움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파시즘 독재자'를 만드는 과정이 당연한 귀결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미국조차 '대공황'이라는 위기 앞에서 '파시즘'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더냔 말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도 한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면 '이성'을 잃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영혼까지 내던져버리는 '비이성적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성의 밝은 빛을 잃어버리면, 끝내 '전쟁'이라는 파멸을 불러오게 되고,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금 '이성'을 되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이미 겪었다. 그 아픔과 고난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철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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