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5 열린책들 세계문학 140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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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II / 열린책들 16번째 리뷰] 드디어 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가 말이다. 갈랑의 <천일야화>에서는 이 이야기의 원제를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라고 전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수없이 많은 버전의 이야기로 각색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실사 영화(2019)도 같은 제목)으로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천일야화>속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성도 비슷하긴 하지만, 애초에 담고 있는 '주제' 또한 사뭇 달라서 애니메이션을 즐긴 뒤에 원작이야기를 읽으면 살짝 뚱한 표정을 짓는 어린이들도 상당히 많이 보았다. 왜냐면 나와 같이 '원작이야기'를 먼저 읽고서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바로 원작에선 '알라딘의 재치'가 돋보인다면, 애니메이션에선 '램프의 요정 지니'가 거의 다 해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으로 올수록 '알라딘의 재치'보다는 '요정 지니의 익살'이 더 인상 깊기에 그럴 것이다. 자, 원작과 비교를 해보자.

원작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영향을 받는 '중국의 한 왕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굳이 역사적인 고증을 하자면, 중국의 서쪽 변경의 제후국이라고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곳에서 알라딘은 망나니 소년으로 등장한다. 재봉사인 아버지가 죽고나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 바로 알라딘이다. 그런데 이 소년이 아주 철부지다. 일 하기는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방탕하기 그지 없어서 날이면 날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그런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한편, 애니에서는 고아소년으로 등장한다. 직업도 없어서 좀도둑이다. 애초에 둘 다 '빈털털이 가난뱅이'라는 설정은 유사하지만 '어머니의 존재 여부'가 사뭇 다르다. 이렇게 어머니가 살아계신 원작에서는 훗날 알라딘이 왕국의 공주(바드룰부두르)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역할을 하지만,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의 도움을 받아 뚝딱 해치우고 만다. 일륜지대사에 속하는 혼인인데, 원작에서처럼 '격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전통(상견례 포함)'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요즘에는 젊은 두 남녀가 '직접 연애'를 한 뒤에 사랑만으로 뚝딱 결혼을 할지언정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에서는 알라딘과 공주가 혼인과 동시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연을 맺고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애정을 강조한데 반해서, 애니에서는 그런 끈끈한 연보다는 '사랑의 조건'을 따지면서 헤어질 수 있으면 헤어지는 게 '맞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으니 좀 아쉬운 설정이다. 아무리 젊은 감성일지라도 '부부의 연'을 그렇게 쉽게 끊을 수도 있다는 설정은 애초에 '예시'로라도 보여주어선 안 되는 건데 말이다. 부부사이에 '사랑'이 식으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성립한다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장해선 안 된다고 본다. 물론 '폭력이 가득한 부부'까지 붙들어 매어야 옳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아무튼 이런 등장인물의 차이점은 또 있다.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 지니' 뿐만 아니라 '원숭이 아부', '마법양탄자'까지 나와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과 '반지의 정령'이 등장할 뿐, 원숭이나 양탄자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애니에서는 '마법사 자파'가 홀로 악역을 맡지만, 원작에서는 '아프리카 마법사와 그 동생'까지 악역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알라딘과 공주에게 온갖 시련과 위기를 맞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말의 차이점'이다. 애니에서는 쟈스민 공주가 지혜를 발휘해서 마법사 자파를 '새로운 램프의 요정'으로 바꾸어서 스스로 파멸하게 만들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의 도움'을 받은 알라딘이 나쁜 두 마법사를 처리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맡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에서는 알라딘과 쟈스민의 행복한 결혼으로 끝맺지만, 원작에서는 국왕 사망하자 바드룰부두르 공주가 '왕위의 계승'을 받아 왕권을 거머쥐고, 남편인 알라딘과 공동통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는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원작을 살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니만 기억하고, 원작을 잊어버린 평론가들이 실사 영화를 '패미니즘의 구현'이라고 논평한 것이 어색할 지경이다.

이렇게 차이가 많기에 '원작'만의 매력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철없던 소년이 온갖 시련과 행운을 연이어 겪으면서 끝내 한 나라의 통치자까지 되는 행복한 결말 말이다. 이게 원작의 주제다.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교훈'까지 솎아낼 수 있기에 원작이야기를 나는 더 좋아한다. 이런 교훈은 애니와 실사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재미로 시작해서 재미로 끝날 뿐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사랑은 아름답다' 정도일까?

한편, 원작에서는 '소원의 갯수'가 무제한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들은 '주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준다. 물론, 금기되고 터부시 되는 것들이 있긴 하다. 금기 되는 것은 '상위 정령이 해놓은 일'을 '하위 정령'이 어쩔 수는 없다는 것이고, 터부시 되는 것은 '정령의 주인(로크 새)'을 해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아무리 '램프의 주인'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소원은 딱 세 가지뿐'이다. 좀 째째하다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횟수'를 한정해놓으면 더욱 신중한 소원을 빌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원작보다 더 능가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소원의 남발'을 하지 않고 '한정된 느낌'을 주고는 있다. 바로 알라딘이 순박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소원을 남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라딘이 비는 소원이 워낙 '검소(?)한 편'이라서 그러한 방만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딱 '세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고 한정해 놓았기에 알라딘을 비롯한 '램프의 주인들'은 모두 신중하게 소원을 빌게 된다. 하긴 바라는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인생만큼 식상한 인생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무한정 소원을 들어주면 행복할 거라고? 배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배부른 자(부자)의 행복이 배고픈 자(빈자)의 행복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한정 이루어지는 소원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론은 진리다.

암튼, 나는 <천일야화>속 이야기 중에서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는 읽고 또 읽었던 추억이 서려있기도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정이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빌었던 소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그 소원은 점점 구체적이 되었지만 결코 실현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떠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소원'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 진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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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4 열린책들 세계문학 139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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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I / 열린책들 15번째 리뷰] 셰에라자드의 여동생 '디나르자드'의 역할은 감초 역할일까? '약방의 감초'란 말은 여러 한약처방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감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지랖'이란 말뜻과 비슷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 감초 역할이라고 하면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쓰디쓴 한약재를 그나마 마시기 좋게, 마시기 편하게 '해주는 역할'이라는 긍정적인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디나르자드의 역할이 딱 그런 역할 아니겠는가.

언니 셰에라자드의 부탁으로 '왕비의 침실'에 함께 머물게 된 디나르자드는 '아침 해가 뜨기 한 시간 전'에 언니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야만 한다. 어찌 보면 매일밤, 언니가 '페르시아 대제국 술탄의 명령'에 따라서 처형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모면하게 만들어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만약 이렇게 졸라대는 듯한 말투가 '술탄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면, 재미난 이야기고 뭐고 간에 술탄은 셰에라자드를 처형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작두를 탄다'는 느낌으로 간절한 호소를 해야하는 역할인 셈이다. 또다시 만약 '디나르자드'가 없이 셰에라자드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간청을 한다면, 이는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고자 하는 뻔한 수작이라며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니가 처형되고 나면 이렇게나 재밌는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라는 느낌을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않게 딱 적당히 간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나르자드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일밤 '똑같거나 비슷한 멘트'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어서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디나르자드야 하나뿐인 언니를 구명하기 위한 최선일 수 있겠지만, 똑같은 멘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디나르자드의 호소는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딴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앙투안 갈랑이 <천일야화>를 출간하면서 독자들의 불만을 적극 수용한 결과 (이 책 기준으로) 4권부터는 '며칠째 밤'이라는 구분도 삭제하고, '디나르자드의 등장'도 최소한으로 축약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전체 6권 분량 가운데 딱 절반부터는 '그런 구분'이 사라지고, 독자들은 훨씬 더 편하게 <천일야화> 이야기에 심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긴 했는데, 나는 '읽는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셰에라자드와 샤리아 사이에 디나르자드까지 함께 어우려져서 '셋이서' 쑥떡대는 무언가, 그것만의 '매력'이 있었는데, 그게 실종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나는 '매일밤'마다 구분하며 들려주는 토막이야기를 통해서 '낮동안에 일어난 샤리아 술탄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디나르자드의 감초 역할을 쏙 빼버리고나니 '두 배로 즐기던 재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온통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만 읽어나가야 했다. 이래선 '보통의 소설(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게 된 셈이다. 아직 '버튼의 <천일야화>'도 이런 식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예전에 10권 분량의 '버튼 <천일야화>'를 읽을 때에는 초반만 읽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확인을 해봐야겠다.

더구나 '디나르자드'의 분량을 빼버리니 '샤리아'의 분량마저 함께 토막나고 말았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판소리'에 비유하자면, 소리꾼에 비유할 수 있겠고, 디나르자드는 '고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소리꾼이 아무리 명창이라도 고수의 '추임새'가 없으면 고무줄 없는 팬티 신세가 아닐까 싶다. 아무런 '약효'를 갖지 못한 감초일지라도 한약재에서 감초를 덜어내면 너무 써서 좋은 약도 먹지 못해 효과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감초 역할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귀찮아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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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3 열린책들 세계문학 138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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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 / 열린책들 14번째 리뷰] <천일야화>의 중요 화자는 셰에라자드다. 그녀는 샤리아 왕이 왕비를 간택하고 '첫날밤'이 지나면 처형을 하는 국법을 알고도 샤리아 왕의 아내가 되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무려 천하룻밤 동안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바로 매일밤 동트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 동생인 '디나르자드'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셰에라자드가 여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지만 '같은 침실'에 머물고 있었기에 샤리아 왕도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해가 뜨면 '국왕의 명령'대로 처형을 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샤리아 왕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해서 처형을 미루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니 어느덧 백여날 밤이 지났다. 샤리아 왕은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자신의 명령'대로 셰에라자드를 처형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은 것 같을 정도다.

하지만 샤리아 왕이 단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서 세에라자드의 처형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만큼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은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어디 '이야기'만 그럴까. 이야기의 서사를 갖고 있는 모든 매체가 '동일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단 1편의 웹툰'만 무료인 이유가 그렇다. 1편만 '눈도장'을 받으면 그 다음 연재부터는 '유료'여도 보게 된다. 만화책도, 드라마도, 모두 그런 힘이 발휘되면 초대박을 터뜨리기 마련이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천일야화>도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샤리아 왕도 셰에라자드가 무심코 던진 '이야기 1화'가 지닌 매력이자 덫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라 봐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한 나라의 임금 '역할'을 맡은 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평범해서야 말이 될까? 더구나 실제 존재했던 왕이 아니더라도 설정상 '중동지역과 인도까지' 광대한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왕인데 말이다. 무슬림들의 말로 술탄이자 '정통 칼리프'에 버금가는 대제국의 으뜸인데, 고작 여인네의 이야기 보따리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못난 역할을 맡은 것이 전부일까? 하지만 알 수 없다. <천일야화>에서는 오직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간'을 읽듯 <천일야화>가 이야기하지 못한 '빈틈', 또는 '여백'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안목을 발휘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밤의 화자는 '셰에라자드'지만, 낮의 화자는 '샤리아 왕'일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를 끝맺는 시간은 늘 '동트기 직전'이다. 무슬림들의 하루는 '아침기도'로 시작한다. 이는 국왕일지라도 어길 수 없는 '의무'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국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밤새 쌓인 '국정'을 처리해야 한단 말이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국정'을 본 샤리아 왕은 늦은 밤에 침실로 돌아와 '왕비의 의무'를 받아들이고 취침에 들 것이다. 그리고나서 다시 '동 틀 녘'에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일과'를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바쁜 임금의 일상을 앞두고 그저 '재미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기에 천하룻날이나 '자신의 명령'을 미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재미와 흥미, 그 이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실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다른 나라의 임금'이 등장하기도 하고, '왕비'가 등장하기도 하며, 그밖에 귀족이나 재상, 그리고 부자와 빈자, 도둑이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신'이라 불리는 정령이나 악마 같은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사건사고 들이 하나같이 '교훈'을 담고 있다. 샤리아 왕은 매일 아침 '교훈'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셈이다. 뛰어나고 현명한 국왕이 그 정도 주제파악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테니, 낮에 일을 보면서 그렇게 '득템한 지혜'를 써먹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남자는 '성취욕'이 대단히 강한 존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해내려는 욕구가 매우 높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들이 '성과'를 빠르게 올리고 '승진'이 빠른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샤리아 왕이 '지엄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셰에라자드의 처형을 미루게 된 까닭도 이런 욕구와 성향이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샤리아 왕이 '낮동안'에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어디에도 묘사되거나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작은 가능할 것이다. 바로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물론, 셰에라자드가 종종 빼먹지 않은 이야기는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악독한 아내를 만나 폐가망신한 남편도 등장하지만, 지혜로운 아내(몸종출신도 있다)가 헌신을 다해 남편을 섬긴 덕분에 남편이 복을 받게 되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이는 셰에라자드,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밖에도 '재상이야기'가 참 많이 등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셰에라자드가 '정치참여'를 하고 있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직업이 재상이었기에 '잘 아는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신분제도가 뚜렷한 전제왕권시절에 '여성의 정치참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재상'인데, 아버지의 '업무상 특성'을 너무도 잘 아는 척을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재상이 '비밀유지'도 하지 못하고 딸에게 '나랏일'을 떠벌리고 다녔다고 의심하기 딱 좋지 않느냔 말이다. 셰에라자드도 멍청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에서 '재상이야기'를 했을까?

그건 낮동안 샤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사건사고에 대한 귀띔을 셰에라자드가 듣고서 '영감'을 얻어서 아침마다 샤리아 왕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래를 펼치면 <천일야화>는 단숨에 '두 배나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방대한 천하룻밤 동안의 이야기에 '천하룻날의 낮이야기'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당신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시도해봄직할 것이다. 이름하야 <천일주(晝)화>가 펼쳐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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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2 열린책들 세계문학 137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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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 / 열린책들 13번째 리뷰]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는 원래의 '아랍어로 적힌 원작'의 내용의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앙투안 갈랑이 살던 18세기에도 '원작 <천일야화>'가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한 원작'에서 너무 야하고 비상식적인 내용은 도려내듯 걸러낸 뒤에 '남은 것'만을 옮겨 적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천일야화>는 이토록 방대하다. 또 하나의 <천일야화>인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의 책에는 갈랑의 책을 참고했다고도 전해지지만 '분량'면에서는 훨씬 더 많다. 애초에 '야한 내용'을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작'이 불완전하기에 버튼의 <천일야화>도 완전한 책은 아니다. 게다가 살짝 MSG도 첨가한 듯 싶다. 그렇기에 두 가지 <천일야화>는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는 갈랑의 <천일야화>로 출간하였고, '동서문화사'에서는 버튼의 <아라비안 나이트>로 출간했기 때문에 앞으론 둘을 이렇게 구분하고자 한다.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을 소개하는 까닭은 두 작품의 '목차'부터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분량도 차이가 나지만 수록된 이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은 무슨 까닭 때문인 건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은 '단행본'과 '어린이책'에서도 마찬가지다. 1권 짜리 '단행본'이야 애초에 주요 이야기만 추려서 냈을 것이고, '어린이책'이야 어린이가 읽어도 될 정도로 각색까지 했을테니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건전한 내용으로 펴낸 '갈랑의 <천일야화>' 스타일을 본땄을 텐데도, 이야기가 실려 있는 순서가 사뭇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걸까? 셰에라자드(이름도 천차만별인데, '세헤라자드'가 가장 보편적이지만, 이 책에서는 셰에라자드로 표기했으니 따르려 한다)가 매일 아침 동트기 전까지 샤리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순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만일 '샤리아 왕'이 실존 인물이었다면 이런 차이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샤리아(Shariah)'는 이슬람세계의 '율법'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로 <천일야화>를 이해하면 매일밤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이슬람율법'을 앞에 두고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할 수 있다. 마치 최종판결을 앞둔 피고인이 '최후변론'을 하는 느낌으로 읽힐 수도 있는 대목이다. 허나 이슬람사회에서 '샤리아'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가타부타 따지며 '해석'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최후변론'을 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셰에라자드는 결국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다. 율법 앞에서 '관대함'을 요청할지언정 '율법,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최후변론을 무려 '천하룻밤'동안 한 셈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절대불변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융통성'이라는 빈틈을 파고들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샤리아 왕과 셰에라자드 왕비는 매일밤 동침을 하는 부부사이다. 물론 율법은 '부부사이'도 갈라놓을만큼 엄정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천일야화>의 이야기 순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싶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하든, 저 이야기를 먼저 하든 샤리아 왕의 부당한 법집행 아래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서 매일밤마다 '생명연장', '집행연기'를 위해서 네버엔딩 스토리, 다시 말해, '끝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몇 번째 날 밤'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어차피 진술한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일야화>에 담긴 이야기가 지닌 속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건 다음 리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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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36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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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IV / 열린책들 12번째 리뷰] 우리에게는 '아라비안 나이트'로 익숙하지만 원제는 '천하룻밤 이야기'라는 뜻으로 <천일야화>로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에 논란거리가 하나 있다. '천일'이 千一(1001)을 가리키는 것인지, 千日(1000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어깃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왜냐면 당시 '아랍세계'에서 1000이라는 숫자나 1001이라는 숫자는 그저 '많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수많은 날동안 들려준 이야기'라는 뜻으로 이해하지, 꼭 정확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천일야화> 속에는 말그대로 엄청난 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단 한 사람의 '서술자(세헤라자드)'에 의해서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전하는 이야기에는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단 한 명의 서술자'에 의해 전해졌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데' 모은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샤리아 왕의 엽기적인 행각을 멈추게 하려는 세헤라자드 왕비의 지혜가 <천일야화>의 핵심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 책은 18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다. 이외에도 19세기 영국 작가인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이 쓴 <천일야화>도 있다. 이 두 버전은 각각 다른 소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색다르다 하겠다. 분명 '아랍어로 쓰인 원작'이 존재할테지만, 이를 각각 '프랑스어'와 '영어'로 뒤쳐서 소개할 때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갈랑의 <천일야화>'는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야한 이야기는 걸러내고 교훈적이며 이국적인 정취를 최대한 살려서 썼다면, '버튼의 <천일야화>'는 그야말로 도색(桃色)적인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아서 그야말로 야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천일야화>를 기본적으로 두 가지 버전으로 즐길 수 있지만, 어느 것이 더 원작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나는 '앙투안 갈랑의 책'으로 꼽고 싶다.

애초에 '야한 이야기'는 원작에 담긴 핵심요소다. 왜냐면 샤리아 왕이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난잡한 불륜 때문에 분노했고, 그 때문에 온 왕국의 처녀를 왕비로 삼은 '첫날밤'을 치르고 나서 처형을 해버리는 일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왕의 아내가 정절을 지키지 않은 죄를 애꿎은 왕국의 처녀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는 분명 '샤리아 왕의 명백한 잘못'이다. 이에 세헤라자드 왕비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왕국의 처녀들을 처형하는 '왕의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세헤라자드 왕비가 이야기를 들려준 것만으로 샤리아 왕이 처형을 미룬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이야기'가 재밌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깨닫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의 정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부덕한 짓'을 저지른 것이 핵심이고, '남녀의 성행위, 그 자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자 행복이고,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랍어로 적혀 있는 '원작'에서는 가감없는 성묘사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 작가인 버튼은 <천일야화>에 담겨 있는 본질적인 '교훈'은 쏙 빼놓고 원색적이고 말초적인 '야한 이야기'만 골라서 노골적으로 추려놓았다. 이런 식이면 애초에 샤리아 왕이 세헤라자드 왕비를 살려줄 이유가 사라져버린다. 아내의 불륜으로 분노한 왕을 달래기 위해서 '야한 이야기'를, 그것도 '천하룻밤'동안 주절댄다고? 네 년의 더러운 생각보따리를 다시는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도록 단칼에 목을 자르리라고 말할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이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행위 묘사'를 노골적으로 강조하여 '영어'로 뒤쳐낸 오류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 작가인 갈랑은 <천일야화>에 담긴 핵심요소인 '잘못의 깨달음'에 주목해서 매일밤마다 세헤라자드 왕비가 샤리아 왕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를 전하려는 끝없는 노력이 아주 잘 담겨 있다. 그렇기에 점잖은 문화(?)를 가진 프랑스 국민들에게 노골적인 성묘사는 과감히 삭제하고, 내용을 축약하여 '건전한(?) 내용'만을 골라서 전달하려 했다. 이런 갈랑의 노력을 후대 작가인 버튼도 간파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원색적인 성묘사만 골라담아 추려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허나 버튼의 '야한 버전'도 읽는 맛이 있기는 하다. 건전한 성생활을 즐기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해..쿨럭

각설하고, 갈랑의 <천일야화>는 모두 여섯 권으로 되었으며, 그 첫 번째 책에는 <상인과 정령>, <어부 이야기>, 그리고 <세 탁발승과 다섯 아가씨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각각의 이야기는 모두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야기속의 이야기, 다시 말해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단 하나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이는 세헤라자드 왕비가 매일밤 '동트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를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세헤라자드 왕비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끊어서 한 까닭은 그렇지 않으면 '날이 밝는대로' 샤리아 왕의 아내는 처형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샤리아 왕의 분노로 인한 '법령'이며, 그 집행 또한 샤리아 왕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왕의 분노와 의지를 꺾게 만든 것이 바로 '호기심'이었다. 바로 이 호기심이 '이야기에 담긴 힘'이라는 걸 세헤라자드 왕비는 간파하고 있었고, 이 힘을 통해서 잘못된 법령을 바로 잡고, 다시금 현명하고 사려 깊은 국왕으로 되돌리기 위한 '여인의 지혜'가 발휘된 셈이다.

이처럼 '남녀의 구분'이 명확했고, '왕의 군림'이 강력했던 시절에도 단 하나뿐인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지혜'뿐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교훈은 전세계 '옛이야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지혜는 인류의 유산'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글을 통해 배움을 익히고 연구하는 방법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전승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혜와 교훈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속에 녹여내어 스스로 깨우치도록 만들기 때문에 더욱 유익할 수밖에 없다. <천일야화>속에도 명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샤리아 왕은 하루 업무를 진행하기에 앞서 세헤라자드 왕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얻은 '지혜'로 왕국을 현명하게 통치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처음엔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단순한 호기심'에 처형을 하루하루 미루지만,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그 처형은 한달두달 자꾸 미뤄지게 된다.

자, 그럼 계속되는 <천일야화>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다음 리뷰에서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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