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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4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9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My Review MCMXLVII / 열린책들 15번째 리뷰] 셰에라자드의 여동생 '디나르자드'의 역할은 감초 역할일까? '약방의 감초'란 말은 여러 한약처방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감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지랖'이란 말뜻과 비슷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 감초 역할이라고 하면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쓰디쓴 한약재를 그나마 마시기 좋게, 마시기 편하게 '해주는 역할'이라는 긍정적인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디나르자드의 역할이 딱 그런 역할 아니겠는가.
언니 셰에라자드의 부탁으로 '왕비의 침실'에 함께 머물게 된 디나르자드는 '아침 해가 뜨기 한 시간 전'에 언니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야만 한다. 어찌 보면 매일밤, 언니가 '페르시아 대제국 술탄의 명령'에 따라서 처형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모면하게 만들어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만약 이렇게 졸라대는 듯한 말투가 '술탄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면, 재미난 이야기고 뭐고 간에 술탄은 셰에라자드를 처형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작두를 탄다'는 느낌으로 간절한 호소를 해야하는 역할인 셈이다. 또다시 만약 '디나르자드'가 없이 셰에라자드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간청을 한다면, 이는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고자 하는 뻔한 수작이라며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니가 처형되고 나면 이렇게나 재밌는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라는 느낌을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않게 딱 적당히 간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나르자드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일밤 '똑같거나 비슷한 멘트'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어서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디나르자드야 하나뿐인 언니를 구명하기 위한 최선일 수 있겠지만, 똑같은 멘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디나르자드의 호소는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딴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앙투안 갈랑이 <천일야화>를 출간하면서 독자들의 불만을 적극 수용한 결과 (이 책 기준으로) 4권부터는 '며칠째 밤'이라는 구분도 삭제하고, '디나르자드의 등장'도 최소한으로 축약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전체 6권 분량 가운데 딱 절반부터는 '그런 구분'이 사라지고, 독자들은 훨씬 더 편하게 <천일야화> 이야기에 심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긴 했는데, 나는 '읽는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셰에라자드와 샤리아 사이에 디나르자드까지 함께 어우려져서 '셋이서' 쑥떡대는 무언가, 그것만의 '매력'이 있었는데, 그게 실종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나는 '매일밤'마다 구분하며 들려주는 토막이야기를 통해서 '낮동안에 일어난 샤리아 술탄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디나르자드의 감초 역할을 쏙 빼버리고나니 '두 배로 즐기던 재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온통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만 읽어나가야 했다. 이래선 '보통의 소설(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게 된 셈이다. 아직 '버튼의 <천일야화>'도 이런 식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예전에 10권 분량의 '버튼 <천일야화>'를 읽을 때에는 초반만 읽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확인을 해봐야겠다.
더구나 '디나르자드'의 분량을 빼버리니 '샤리아'의 분량마저 함께 토막나고 말았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판소리'에 비유하자면, 소리꾼에 비유할 수 있겠고, 디나르자드는 '고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소리꾼이 아무리 명창이라도 고수의 '추임새'가 없으면 고무줄 없는 팬티 신세가 아닐까 싶다. 아무런 '약효'를 갖지 못한 감초일지라도 한약재에서 감초를 덜어내면 너무 써서 좋은 약도 먹지 못해 효과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감초 역할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귀찮아해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