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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5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40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My Review MCMXLVIII / 열린책들 16번째 리뷰] 드디어 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가 말이다. 갈랑의 <천일야화>에서는 이 이야기의 원제를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라고 전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수없이 많은 버전의 이야기로 각색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실사 영화(2019)도 같은 제목)으로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천일야화>속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성도 비슷하긴 하지만, 애초에 담고 있는 '주제' 또한 사뭇 달라서 애니메이션을 즐긴 뒤에 원작이야기를 읽으면 살짝 뚱한 표정을 짓는 어린이들도 상당히 많이 보았다. 왜냐면 나와 같이 '원작이야기'를 먼저 읽고서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바로 원작에선 '알라딘의 재치'가 돋보인다면, 애니메이션에선 '램프의 요정 지니'가 거의 다 해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으로 올수록 '알라딘의 재치'보다는 '요정 지니의 익살'이 더 인상 깊기에 그럴 것이다. 자, 원작과 비교를 해보자.
원작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영향을 받는 '중국의 한 왕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굳이 역사적인 고증을 하자면, 중국의 서쪽 변경의 제후국이라고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곳에서 알라딘은 망나니 소년으로 등장한다. 재봉사인 아버지가 죽고나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 바로 알라딘이다. 그런데 이 소년이 아주 철부지다. 일 하기는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방탕하기 그지 없어서 날이면 날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그런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한편, 애니에서는 고아소년으로 등장한다. 직업도 없어서 좀도둑이다. 애초에 둘 다 '빈털털이 가난뱅이'라는 설정은 유사하지만 '어머니의 존재 여부'가 사뭇 다르다. 이렇게 어머니가 살아계신 원작에서는 훗날 알라딘이 왕국의 공주(바드룰부두르)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역할을 하지만,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의 도움을 받아 뚝딱 해치우고 만다. 일륜지대사에 속하는 혼인인데, 원작에서처럼 '격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전통(상견례 포함)'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요즘에는 젊은 두 남녀가 '직접 연애'를 한 뒤에 사랑만으로 뚝딱 결혼을 할지언정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에서는 알라딘과 공주가 혼인과 동시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연을 맺고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애정을 강조한데 반해서, 애니에서는 그런 끈끈한 연보다는 '사랑의 조건'을 따지면서 헤어질 수 있으면 헤어지는 게 '맞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으니 좀 아쉬운 설정이다. 아무리 젊은 감성일지라도 '부부의 연'을 그렇게 쉽게 끊을 수도 있다는 설정은 애초에 '예시'로라도 보여주어선 안 되는 건데 말이다. 부부사이에 '사랑'이 식으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성립한다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장해선 안 된다고 본다. 물론 '폭력이 가득한 부부'까지 붙들어 매어야 옳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아무튼 이런 등장인물의 차이점은 또 있다.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 지니' 뿐만 아니라 '원숭이 아부', '마법양탄자'까지 나와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과 '반지의 정령'이 등장할 뿐, 원숭이나 양탄자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애니에서는 '마법사 자파'가 홀로 악역을 맡지만, 원작에서는 '아프리카 마법사와 그 동생'까지 악역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알라딘과 공주에게 온갖 시련과 위기를 맞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말의 차이점'이다. 애니에서는 쟈스민 공주가 지혜를 발휘해서 마법사 자파를 '새로운 램프의 요정'으로 바꾸어서 스스로 파멸하게 만들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의 도움'을 받은 알라딘이 나쁜 두 마법사를 처리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맡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에서는 알라딘과 쟈스민의 행복한 결혼으로 끝맺지만, 원작에서는 국왕 사망하자 바드룰부두르 공주가 '왕위의 계승'을 받아 왕권을 거머쥐고, 남편인 알라딘과 공동통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는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원작을 살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니만 기억하고, 원작을 잊어버린 평론가들이 실사 영화를 '패미니즘의 구현'이라고 논평한 것이 어색할 지경이다.
이렇게 차이가 많기에 '원작'만의 매력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철없던 소년이 온갖 시련과 행운을 연이어 겪으면서 끝내 한 나라의 통치자까지 되는 행복한 결말 말이다. 이게 원작의 주제다.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교훈'까지 솎아낼 수 있기에 원작이야기를 나는 더 좋아한다. 이런 교훈은 애니와 실사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재미로 시작해서 재미로 끝날 뿐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사랑은 아름답다' 정도일까?
한편, 원작에서는 '소원의 갯수'가 무제한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들은 '주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준다. 물론, 금기되고 터부시 되는 것들이 있긴 하다. 금기 되는 것은 '상위 정령이 해놓은 일'을 '하위 정령'이 어쩔 수는 없다는 것이고, 터부시 되는 것은 '정령의 주인(로크 새)'을 해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아무리 '램프의 주인'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소원은 딱 세 가지뿐'이다. 좀 째째하다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횟수'를 한정해놓으면 더욱 신중한 소원을 빌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원작보다 더 능가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소원의 남발'을 하지 않고 '한정된 느낌'을 주고는 있다. 바로 알라딘이 순박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소원을 남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라딘이 비는 소원이 워낙 '검소(?)한 편'이라서 그러한 방만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딱 '세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고 한정해 놓았기에 알라딘을 비롯한 '램프의 주인들'은 모두 신중하게 소원을 빌게 된다. 하긴 바라는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인생만큼 식상한 인생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무한정 소원을 들어주면 행복할 거라고? 배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배부른 자(부자)의 행복이 배고픈 자(빈자)의 행복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한정 이루어지는 소원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론은 진리다.
암튼, 나는 <천일야화>속 이야기 중에서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는 읽고 또 읽었던 추억이 서려있기도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정이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빌었던 소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그 소원은 점점 구체적이 되었지만 결코 실현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떠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소원'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 진리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