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찰 30년 -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18가지 이유
염종순 지음 / 토네이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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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일본전문가'라는 분들은 두 가지 부류다. 첫째는 '어쨌든 일본이 한국보다 앞선 나라니 배울 건 배워야 한다'는 부류고, 둘째는 '이제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선진국이다. 그러니 더는 일본에 쫄지 말고, 아니 일본을 사뿐히 즈려 밟고 멋진 대한민국이 되자'라는 부류다. 이렇듯 일본에 대해서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흡사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에 서인과 동인이 '풍신수길'을 두고 내린 평가와 매우 닮은 평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상반된 관점을 가진 두 부류 모두 공통된 의견이 하나 있다. 바로 '한일 양국의 상호교린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어찌 되었든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이니 서로 으르렁거리기보다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양국이 이득을 가져올 거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양국은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마냥 사이좋게 지내기는 매우 힘들다는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 가운데 하나다. 이 책도 그런 내용으로 마무리 한 책이기도 하다.

 

  과연 어느 전문가(?)의 말이 사실일까? 한국과 일본은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윈윈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두 가지 상반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선진국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꼼꼼이 따져보면 분명 배울 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는 더 정확하다고 할 정도로 둘 사이는 틀어질대로 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과거사 청산 문제'만 보아도 한국은 겉으로는 사과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론 인정하지 않고 망언을 일삼고 있다고 분개하는데 반해서, 일본은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하는 거냐? 이미 지난 일을 들춰내며 양국의 미래를 운운하는 한국은 진정성이 없고 신뢰할 수 없 나라라면서 매도하기 일쑤다. 타협점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대립적 형국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 일본은 '회생불가능'할 정도로 망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로 일찌감치 '디지털화'에 성공하고 전세계 'IT업체'를 선도하고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는데도, 일본은 여전히 관공서에서 서류를 한 장 떼려 해도 '직접 방문'을 해야 하고, '전자결제'는커녕 사인도 인정하지 않아 도장을 호호 불며 찍는 '아날로그'적인 나라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를 애써 '전통문화'를 지키는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고서도 아름다운 전통문화 운운하는 것은 '무능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잃어버린 30년'이라며 90년대 이후 일본경제는 내리막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언제 바닥을 찍고 반등할지 아직도 불투명할 지경이라고 한다. 오랜 관행처럼 정경유착은 끊이지 않고 '정치인의 비리'가 터지고 있고, 일본기업들은 혁신을 하지 못해 '기득권의 이득'만 챙기기 급급하며, 언론은 총리의 눈치만 살피며 '정권의 나팔수 역할'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사법부마저 일본정부의 입맛에 알맞는 판결을 내리는 현실이고, 총리의 한 마디면 유죄도 무죄로 바꿀 수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이미 망가진 복사기'를 새로 구입하는 것보다 고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본인의 습성으로 잘 표현하는 것 같다. 바쁜 업무 처리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새 복사기'를 구입하는 것이 효율적일텐데도 일본인은 '책임소재'를 따지며 누가 망가뜨렸는지 따지고, '구입비용'과 '수리비용'을 꼼꼼이 따지며, 이를 따지기 위해서 매일매일 '마라톤 회의'를 여는 일본의 일상은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답답함, 그 자체일 뿐이다. 한마디로 한국인에게 일본은 '이상한 나라'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더는 일본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을 즈려 밟고 당당히 '선도국가'가 될 대한민국을 그리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조차 없다. '일본보다 앞서자'라는 마음가짐 자체가 후진국 일본을 신경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도국가 대한민국 앞에 '일본은 없다'고 보고 세계로, 우주로 나아가면 될 뿐이다. 그래도 일본에게 배울 점이 아직 남았다면 가뿐하게 배우고 넘어가면 된다. 이 책에서는 '장애인 천국'을 예로 들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장애인'이 살기에 편의제공도 미흡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기에도 불편한 나라지만, 일본은 '장애인 등록'만 하면 '평생 연금'과 더불어 나이에 맞는 '공짜 휠체어 제공', '간병인과 치료사 등 사회복지사 지원' 등등 사회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없을 뿐더러 재활과 치료에 대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진정한 선진국이라면서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이런 점'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글쓴이의 표현처럼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지만 너무 다른 나라'라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은 혁신은커녕 '변화'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나라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불과 100년 만에 변화를 넘어 혁신에 성공한 나라가 되어 전세계에 '한류열풍'과 'K-컬쳐붐'을 일으켰지만, 일본은 그 100년간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도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낡은 인식이 통용되고 있고, 국외출장도 아닌 지방출장이 잦다는 이유로 대기업 입사를 거부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일본은 망해야 정신 차리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똥볼을 차고 있는 일본인데도 그동안 뿌려놓은 '국외자산'과 '내수경제'로 근근히 버티며 또 버티고 있다. 위축된 경제는 '엔화발행'으로 부흥시키고 국가부채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도 '냄비 속의 개구리'마냥 서서히 죽어가는 일본을 보면서 우리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초고령화 국가인 대한민국은 '초초고령화 국가'인 일본과 매우 흡사하다면서 말이다.

 

  그동안 여러 일본관련서적을 읽으면서 갖가지 진단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어떤 진단이든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배울 점이 있든 없든 '일본'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배우고 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으며,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는 일본에게 대화와 설득은 그닥 중요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일본인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지만 '일본인들의 논리'로만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면서 '혐오스런 한국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구조를 단박에 깨지 않고서는 한일양국의 우호는 요원할 뿐이다.

 

  그리고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한민국이 월등히 앞선 나라가 되어 철저히 짓밟아줘서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는 방법'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본의 황당한 논리구조를 풀 수 있는 마법이 없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다행히 일본은 서서히 망해가는 나라를 면치 못하고 있다. 철저히 망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혁신은 물건너 갔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향해 '거짓말'을 일삼는 일본정부를 두둔하는 '일본언론'과, 그런 언론을 철떡같이 믿고 옹호하는 '일본국민'이 있는 한은 말이다. 이웃나라가 망해서 우리가 볼 피해가 무지 걱정은 되지만, 일본은 정말이지 철저히 망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망해가는 일본 때문에 우리가 볼 피해를 현명하게 줄이는 방도를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한 현안이 되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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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돈 - 결국 용기 있는 기회주의자가 부를 얻는다
황현희.제갈현열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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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 속성은 무엇일까? 길바닥에 100만 원짜리 수표가 놓여있다고 하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주우면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망설일 까닭이 있을까? 당연히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먼돈'이 있다면 먼저 차지한 사람이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말이다.

 

  그런데 가정을 해보자. 그 돈이 더러운 쓰레기통에 있었더래도 당연히 주울까? 뭐, 이 정도는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취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빠졌거나 누군가가 똥을 싸질러 놓고 그 돈으로 뒤를 닦았는데도 당연히 주울까? 조금 망설여질 것이다. 그렇다면 금액을 올려보자. 1억 원짜리다. 당연히 주울 것이다. 더러워도 참고 말이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음, 이를 테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그 대가'로 받는 돈이라도 당연히 하고 당연히 챙길 수 있는가? 이건 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무리 돈이 좋더라도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돈을 챙긴다면 구리다 못해 캥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기를 치거나, 살인을 저지르거나,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해서 돈을 챙기는 부류를 굉장히 싫어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돈에도 나름의 '선'이 있는 셈이다.

 

  <비겁한 돈>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고 '정당한 투자'만으로도 누구나 부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불법을 저지르지도 않고 투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으로도 누구나 넉넉한 부를 누릴 수 있다면 망설일 까닭이 전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가 투자로 번 돈=누군가가 잘못된 투자로 잃은 돈]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투자는 제로섬게임'이기 때문이다. 분명 불법은 아니다. 돈을 번 사람도 잃은 사람도 모두 투자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사행성 도박이라는 느낌이 잠깐 들지만 엄연히 투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법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수많은 투자전문가들은 '비겁한 돈'의 실체를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건전한 투자방법을 설명하며, 초기에 서툰 투자로 종자돈을 잃거나 쌈지돈을 잃어버려도 열심히 투자를 배우다보면 자연스레 올바른 투자방법을 배워 '부의 성공'을 쌓을 수 있다고 조언할 뿐이다. 어찌보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초기 투자자의 호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리는 뉘앙스는 애써 감추면서 "당신의 잘못된 투자가 고스란히 내 수익이 된다는 사실만 모르면 돼"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딴에는 <비겁한 돈>의 저자가 공익제보를 하며 '부의 성공'에 감춰진 비밀을 속시원하게 까발려준 것도 같다.

 

  허나 이 책의 저자도 어쩔 수 없이 '투자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 투자를 시작한 사람은 '어제' 투자한 사람의 빈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말이다. 결국, '오늘' 투자한 사람은 '내일' 투자를 시작한 사람의 이익을 챙겨갈 것이다. 물론, 투자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열심히 투자한다고 고스란히 수익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투자를 전혀 모르는 침팬지가 투자전문가보다 더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기도 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투자다.

 

  그러나 아무리 '투자의 속성'이 불확실하다해도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시작기-상승기-정체기-쇠락기] 말이다. <비겁한 돈>에 따르면 누구나 확실히 수익을 낸 시점인 '정체기'에는 절대 투자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마치 '소문난 잔치'에 뒤늦게 참석한 손님처럼 변변한 음식대접도 받지 못하고 엄청난 '참가비'만 낼 뿐이라면서 말이다. 그럴 땐 투자를 멈추고 '쉼'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체기'가 지나면 하락장을 면치 못하고 투자금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손실을 보기 때문이란다. 이럴 땐 '관망'하며 숨을 죽이는 것도 포인트란다.

 

  '비겁한 포인트'도 바로 여기다. 당신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 투자센스만 가지고 있다면 어중간한 투자센스만으로도 충분히 '투자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투자금'을 몽땅 빼놓고 객관적인 자세로 '관망'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조언한다. 하락세에 투자를 한 상태로 관망을 하면 객관적인 자세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투자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조차 없다고 한다. 쉴 때는 확실하게 쉬는 것이 '비겁한 돈'의 핵심이다. 그러다 '시작기'에 들어선 투자물에 조심스럽게 투자를 하다 '상승기'에 과감히 투자를 하고 '정체기'에 확실히 빠지는 센스만 기르면 웬만한 투자전문가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용기 있는 기회주의자가 부를 얻는 방법'이란다.

 

  물론, 책의 내용은 더 자세하고 풍부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비겁한 돈'일지언정 불법을 저지르는 방법이 절대 아니므로 '돈의 가치'를 따질 게재도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난 이 지점에서 살짝 머뭇거려진다. 저자는 일단 풍요로운 부의 지위에 올라서고 난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면서, 부동산 급등, 비트코인 광풍 따위의 '상승세'에 과감한 투자만 했더라면 '당신의 고민'은 그닥 큰 고민이 아니었다는 것도 실감하게 될 거라고도 말한다. 분명 솔깃한 제안이다.

 

  허나, 이는 '결과론적인 해피엔딩'일 뿐이다. 다시 말해, 부의 성공을 이룬 몇몇 만이 고개를 주억거릴 행복한 이야기라는 얘기다. 부의 속성은 누구나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순간 행복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 없다면, 애당초 '투자'는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투자로 얻는 행복은 결국 누군가가 열심히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투자가 없다면 밥상 차릴 '재료'조차 준비할 수 없으니 올바른 투자까지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비겁한 돈>은 올바른 투자자가 얹어놓은 숟가락 옆에 '확실한 숟가락'을 함께 얹어서 수익을 내라고 한다. 올바른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느낌엔 그렇다.

 

  암튼, 부자가 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육체적인 노동'으로 더는 돈을 벌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40대 후반에 접어드니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부의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투자'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비록 <비겁한 돈>과 같이 '확실한 투자법'이 있다면 해보고도 싶다. 불법적인 방법도 아니라니 더욱 구미가 당긴다. 그런데도 뒷맛이 찝찝한게 깔끔하지가 않다. 더러운 쓰레기통속에서라도 기꺼이 주울 수 있는 용기가 샘 솟는 돈일 뿐인데, 왠지 나 자신이 뻔뻔해지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부의 성공을 이루고 나면 절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거면서도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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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십이야 셰익스피어 희극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재남 옮김 / 해누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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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야>는 무슨 뜻일까? 로맨스 희극이니 남녀 주인공이 벌이는 알콩달콩한 '열두 밤' 이야기일 것 같지만, 그리스도교의 대축일이 가운데 하나인 '주현절(1월 6일): 주님이 모습을 드러낸 날'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성탄일(12월25일)로부터 12일 뒤가 바로 주현절(1월6일)인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작품의 제목으로 '십이야'를 선택한 유래는 1601년 1월 6일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탈리아 오시노 공작을 환영하는 만찬을 겸해서 궁정 초연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십이야>의 주된 줄거리도 이탈리아의 설화에서 착안했고, 등장인물 가운데 '오시노 공작'이 등장하는 것 등 여러 모로 보아 '헌정 희극'으로 볼 수 있다. 암튼 제목의 유래와 희곡의 내용은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만 알았으면 그뿐이다. 굳이 유추하자면, "공작님이 왕림하신 날이 마침 성스러운 날이니 당신을 주님을 보듯 환영합니다. 더불어 재미난 연극을 상연해보이겠나이다. 보는 내내 즐거우시길 바랍니다"로 해석해도 될 듯 싶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꼽으라면 단연 <십이야>를 꼽겠다. 세 남녀의 물고 물리는 심리묘사로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남장여인'이 알고 보니 미녀였고, 놀랍도록 닮은 '쌍둥이'가 등장해서 벌이는 헤프닝은 요즘 <로맨스 소설>에서도 곧잘 써먹는 단골소재로 꼽힐 정도로 달콤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셰익스피어만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는 독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아버리는 매력이 넘친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대표작은 <베니스의 상인>을 꼽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십이야>가 더 희극스럽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악당 샤일록이 등장해 갈등을 유발하지만, <십이야>에서는 그런 악당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에 진지한 남녀주인공들을 돋보이기 위해 조연들이 벌이는 유쾌한 코미디가 내내 이어지기 때문에 작품 전체가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낭만이 흐르고 유쾌한 코미디가 펼쳐지기로는 <한여름밤의 꿈>도 만만치 않지만 '사랑의 묘약'보다는 '남장여자'와 '쌍둥이'가 개인적으로는 취향저격이라고나 할까? 어디까지나 개취다.

 

  줄거리는 여행 도중 배가 난파한 뒤 생이별을 하게 된 세바스티앙과 비올라 두 남매는 서로 죽은 줄로만 알게 된다. 그렇게 따로 떨어져 생존한 두 남매 가운데 여동생은 '여자'임을 숨기고 오시노 공작을 찾아가 시종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물론 옷차림은 남자로 꾸몄고, 이름도 비올라에서 세자리오로 바꾸고 말이다. 한편 오시노 공작은 백작 가문의 딸인 올리비아에게 한창 구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구혼을 애써 거절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시노 공작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마침 새로운 시종 세자리오를 구혼사절로 보내며 이 혼인을 꼭 성사시키길 명령(!)했다.

 

  그런데 사실은 비올라는 오시노 공작을 사모하고 있었다. 오빠와도 헤어지고 홀로 지내고, 몸을 의탁하고 있는 처지인데다 '남장'까지 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도와주고 잘생기기까지 한 공작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신분을 감추고 '남장'을 하고 있기에, 감히 '사랑고백'을 하지는 못하고 오시노 공작의 명령을 받아 올리비아에게 찾아가 공작을 대신해서 사랑고백을 하는 처지가 된다.

 

  근데 올리비아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남자다운 오시노 공작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매력을 품어내는 시종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단박에 그 '남자'에게 빠져들었고, 오시노와 올리비아, 그리고 세자리오(사실은 비올라) 세 남녀는 서로 얽히고 얽힌 사랑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사랑의 작대기'로 정리하면, 오시노는 올리비아에게, 올리비아는 세자리오에게, 비올라는 오시노에게 작대기를 가리키고서는 요지부동인 상황에 빠져버린 셈이다. 이는 다시, 미남은 미녀에게, 미녀는 '남장여자'에게, '남장여자'는 미남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되니, 극중 당사자들은 안타까움을, 무대관객과 독자들에게는 사랑의 알콩달콩함을 선사한 셈이다.

 

  여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빠 '세바스티앙'이 등장하게 된다. 비올라와 세바스티앙은 남내지간인데도 놀랍도록 외모가 닮았다는 설정이 또한 흥미를 유발한다. 또한, 셰익스피어도 이런 설정을 아주 '극적인 상황'으로 연출해서 관객과 독자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말이다. 물론, 어설픈 장치도 눈에 띈다. 오시노 공작과 세바스티앙은 전쟁터에서 대적했던 사이였으며, 세바스티앙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시노 공작에게 큰 손해를 끼쳤다는 설정으로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 놓았는데,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해소시켜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피엔딩'이 완벽하면 덜 감동적이긴 하다. 두루뭉술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 더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이야>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두 남녀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춰서 읽으면 진정한 '희극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조연들의 향연이 <십이야>의 백미이기 때문이다. 토비와 앤드류의 술주정 뿐만 아니라 말볼리오와 마리아, 페이비언, 그리고 페스테라는 광대가 펼치는 대소동은 대폭소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이야기로 달콤해진 관객과 독자들에게 짓궂은 장난으로 무대 전체를 웃음바다로 풍덩 빠뜨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셰익스피어 특유의 '말장난' 같은 대사가 분위기를 한창 업그레이드 시켜버리기 때문에 정말 흥미진진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십이야>는 희곡대본으로 만나는 것보다 연극무대에서 '직관'하는 것이 한층 더 신명나게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톡톡 튀는 대사들이 배우들의 무르익은 연기력에 더해져서 뿜어져 나올 때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책으로만 만날 수 있다면 '상상력'을 발휘하시길 바란다. 무대 위에서 한바탕 펼치는 대환장 폭소와 가슴 저미는 애뜻한 사랑이야기에 푹 빠지면서 말이다. 물론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슴은 따뜻해질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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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읽어드립니다 읽어드립니다 시리즈
김경일.사피엔스 스튜디오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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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데믹 시대를 보내며 많은 분들이 심리적 불안을 호소하고 있단다. 불안, 짜증, 화남, 우울...2년째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오면서 많은 분들이 느꼈을 감정들이다. 비단 우리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상황이며 전세계인이 비슷한 불안증세를 겪으며 지내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심리적 불안'과 함께 하며 살아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하기 때문에 좀처럼 불안심리는 가실 줄 모르고 있다.

 

  이렇게 '심리적 불안'이 장기화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저 참고 견디기만 해야 할까? 아니면 쌓이고 쌓인 감정의 분출구를 찾아나서야 할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심리'를 제대로 읽어보면 어떨까?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바로 당신이 겪고 있는 심리적 불안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해결하기 위해서 펴낸 책이다. 왜냐면 '심리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아직도 '심리학'을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때려맞추는 독심술이나, 쪽집게 점쟁이처럼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알아맞추는 학문으로 여기기 일쑤다. 하지만 심리학자는 여러분의 생각을 알아맞추거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는 없다. 대신에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 생각과 마음을 분석하거나, 심리적 불안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검증하여 불안을 해소하는 학문을 연구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이다. 따라서 심리학자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판데믹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불안증세들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럼 판데믹 시대에 자주 호소하는 대표적인 '불안심리의 원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활동범위의 제한으로 인한 불만들일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임도 취소하고 집으로 가고, 학교나 직장도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해결하고, 모처럼 주말인데도 여행이나 취미 따위도 즐기지 못하고 집콕하는 일상이 계속 이어지면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이런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착각이 어른은 비교적 잘 견디지만 아이는 못 버틸 것이라는 편견이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경우가 다반사다. 어른들이 못 견디고 아이들은 비교적 잘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스크 착용도 어른들이 허술하게 지키는데 반해 아이들은 마스크를 잘 쓰며 오히려 어른들이 마스크를 벗고 있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기 일쑤기 때문이다.

 

  허나 애나 어른이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에너지 발산'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은 집에만 있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다고 호소한다. 이런 점에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힘들어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에너지는 어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클 뿐만 아니라 재충전도 엄청 빠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너지가 넘칠 때 적절하게 소모시켜줘야 하는데, '집콕생활'이 오래도록 이어지면서 힘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가족끼리' 불편해졌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아침저녁에 잠깐 얼굴을 볼까말까 하던 가족끼리 하루종일 붙어있으니 없던 스트레스도 도질 판인게 사실이다. 거기다 가족끼리 허물없이 지내다보니 서로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경우도 많아졌기 때문에 더 많이 상처받고 소원해졌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심리학자들은 가족끼리니까 더욱 '거리'를 두고, '격식'을 차리고, '선'을 지키라고 권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권한다면 '감정표현'을 솔직하고 더 자주하는 방법이 가족끼리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왜냐면 가족끼리 싸우는 가장 흔한 경우가 바로 너무 '친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니까 이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 믿었는데, 몰라도 너무 몰라준다며 서운해하고, 그런 서운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한 순간'에 폭발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한 가족일수록 한 발짝 물러서서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가족끼리 서로 '배려'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맙다'는 표현이 가장 중요하단다. 남들에게는 사소한 친절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남발하면서 가족끼리는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그건 쑥쓰럽기 때문이란다. 가족끼리 '당연한 일'인데 뭘 사소한 것까지 고맙다고 표현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다 싸운다. 고맙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애써 배려한 마음이 전달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서운함이 들고, 그렇게 서운함이 쌓이면 끝내 사소한 일에 발끈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판데믹 시대에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럴 땐 '불안하다'는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단다. 불안한데도 애써 참고 견디기만 하면 결국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은 바로 바로 해소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참고 견디고, 또 그걸 강요하다보면 끝내 폭발하여 더 큰 피해를 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화가 나면 화난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가 풀릴 때까지 누구든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렇게 '내가 화난 까닭'을 주절주절 이야기하다보면 화가 난 원인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원인에 대해서 공감 받거나, 위로 받거나, 또는 신속하게 해결책을 제시해준다면 화라는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도 이런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내담자(마음이 아파서 심리학자에게 찾아와 속깊은 이야기를 하는 환자)'에게 무엇이라도 이야기를 꺼내도록 심리학자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환자의 마음상태를 살펴 적절한 대화요법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이 책도 그런 내담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마음치유를 위해서 들려주는 처방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데도 원인을 몰라 헤매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적극 권한다. 또는 판데믹 상황에 마음 한구석이 아플 것만 같아서 '예방적 차원'에서 심리치유가 필요한 독자들에게도 심하게 권한다. 또한,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이 궁금해서 <심리학>을 접근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적극 권한다. 심리학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읽어내는지, 그 '과학적 접근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튼, 대단히 유익한 심리학책이니 누구나 읽고 유용하게 써먹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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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8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정우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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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은 첫 번째 리뷰에 써놓았으니 각설하고, <돈 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의 생애부터 논해본다. 지난 번에 '효용론적 관점(독자관점)'에서 <돈 키호테>를 분석했으니, 이번엔 '표현론적 관점(작가관점)'에 대해서 논해보겠단 말이다. 간간히 '반영론적 관점(시대관점)'도 포함해서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할 지경이었단다. 오늘날이야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이었지만, 16세기만 해도 '외과의사=이발사'로 통용될 만큼 천한 직업이었으며, 치료를 해주고도 치료비를 제대로 받지 않는 등 인심 좋은 가장이었던 탓에 자식들은 배를 곯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귀족의 시종 노릇을 하며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뒤 군인이 되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에는 여행을 공짜로 하기 위해서 군대에 입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학자 데카르트도 그중 하나였는데, 암튼 세르반테스도 좋은 경험(?)을 많이 하기 위해서, 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군인의 길을 갔던 것 같다.

 

  하지만 해전에서 왼팔에 총상을 입고 평생 불구가 된 세르반테스는 5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해적에게 붙잡혀 또다시 5년간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어찌어찌 고국인 에스파냐로 되돌아간 세르반테스는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투잡, 쓰리잡까지 했지만 곤궁한 삶을 벗어나진 못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왕성한 집필 활동까지 했고, <돈 키호테>를 비롯한 여러 대본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등 대히트를 쳤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1616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숨을 거두었다. 각각 영국과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대문호가 한날에 생을 마감한 것이 참으로 묘하다.

 

  셰익스피어는 그렇다치고 세르반테스도 대문호인 것이 타당할까? 그렇다. <돈 키호테>가 그 증거다. 다름 아니라 <돈 키호테>가 '현대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럴까? <돈 키호테>를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할 따름인데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줄거리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탄하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모험을 짜깁기한 것마냥 어수선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작가의 넉두리'로 보이는 잡담까지 고스란히 담아 놓았는데, 주인공인 돈 키호테는 미치광이 짓을 거듭할 뿐이다. 이렇게나 난삽한 내용이 무려 300쪽~700쪽에 달하기 때문에 웬만한 독자들은 읽다가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현대소설의 효시'로 삼는 까닭은 '르네상스 이전의 소설'들이 어땠는지 살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고전소설들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전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켰던 것에 비춰볼 때 '돈 키호테'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착한지, 나쁜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짓을 일삼는다. 그당시 독자들이 느꼈을 충격을 상상해보면 <돈 키호테>의 인기가 왜 높을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돈 키호테>는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히곤 했다. 17세기 근대가 시작하던 때에는 마냥 재밌는 책이었겠지만, 18세기 합리주의가 대륙의 사상을 지배할 때는 '이성상실'한 미치광이로 보았다. 그러다 19세기 낭만주의가 들어서자 돈 키호테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해석되어 불의와 맞서는 고귀한 이상주의자가 되었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해서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뻥쟁이이고, 마르크스주의로 보면 몰락한 봉건적 가치에 집착하는 귀족집단을 대표하며, 실존주의로 투영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초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만나면서 '돈 키호테'는 물을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을 말한다. 한마디로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사조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래서 돈 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주막을 성으로, 이웃집 못난이 처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둘시네아 공주로 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독자들도 <돈 키호테>를 읽으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 일쑤다. 평가도 다양하다. 좋았다는 독자들도 있는 반면, 형편없다고 혹평을 내놓는 독자도 부지기수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읽히면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받는 작품이 또 있을까? 그래서 <돈 키호테>가 오늘날까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영혼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한편, 메타버스가 가능해지는 미래에는 어떨까? 현실과는 다른 '가상세계'에 또 다른 나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지면 돈 키호테 같은 인물은 더는 미치광이가 아니게 된다. 왜냐면 풍차를 거인으로도 보고 뛰어들면 '진짜 거인'이 풍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는 '게임속의 캐릭터'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아낌없이 투자하여 키우고, 꾸미고, 능력치를 성장시켜서 수많은 유저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현실속의 자신'도 덩달아 대리만족을 느끼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단언컨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구현된다는 2040년을 기점으로 <돈 키호테>는 다시금 주목받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인공지능의 몫이 되고, 인간은 '돈 키호테의 사고방식'을 추구하며 살아야 인간다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하면 '인공지능'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은 남다르고 색다른 창의적인 생각을 샘물처럼 쏟아내야만 할 것이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미치광이가 주목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다음 <돈 키호테> 책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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