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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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신이 안배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직 신앙심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원동력'은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이는 부를 쫓을 것이고, 다른이는 권세를 누리길 바랄 것이며, 대개는 행복한 삶을 꿈꾸며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 여자의 사랑만을 바라며 모든 것을 바친 순정남'이 있다. 바로 개츠비다. 이제부터 그가 왜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는지 말하려 한다.

 

  때는 1920년대 미국 뉴욕발 대공황 직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세계, 특히 유럽이 심각한 물자난을 겪고 있었기에 미국은 이에 발맞춰 '세계의 공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만든 물건은 전세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그렇게 판 물건값으로 또다시 공장을 만들어 물건을 만들었는데도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 경기는 '대호황'이었다. 그렇게 일자리는 넘쳐났고 미국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그렇게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사람들은 돈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돈을 쓸 곳을 찾아 흥청망청 쓰고자 했다.

 

  하지만 집집마다 물건은 넘쳐났기 때문에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으로는 주머니를 탕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또 대박이었다. 건드리는 사업마다 '대호황'을 누린 미국의 주가는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올랐기에 어제 산 100달러짜리 주식이 아침에는 10000달러로 치솟아 여기저기 '백만장자'가 속출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벼락부자들이 늘어나니 사람들은 날마다 파티가 열린 곳을 찾아다니며 흥청망청 탕진잼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도 주머니가 빵빵해지는 '경제호황기'를 맞았으니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부자들은 연일 파티를 주최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많은 파티들 중에서도 최고가 있었으니 바로 '개츠비'가 연 파티였다. 이 파티에는 늘 춤과 음악이 흐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술이 강처럼 흘러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모두들 미친듯한 광란의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 파티의 주인공 개츠비는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느라 바쁠 정도로 매일매일 엄청 화려한 파티가 열리곤 했다. 바로 그때 개츠비의 옆집으로 이사온 사람이 있었으니, 닉이다.

 

  닉은 증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부자들과도 친분이 많았다. 하긴 졸부들이 많던 시절이라 그닥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진짜 명문가 출신의 부유한 사람들과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닉은 부자집 친구였던 톰과 그의 아내인 데이지의 초대를 받아 친구집에 방문하였다. 하지만 닉은 부자집인데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 톰과 데이지의 사이가 서먹서먹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아니나 다를까 톰은 직장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데이지는 그런 톰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온 도시가 흥청망청 탕진잼의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데 모자랄 것 없이 다 가진 이들이 찾는 것은 '일탈'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술에 쩌들어서 남녀가 엉겨붙으니 불륜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톰은 닉과 함께 놀러간 자리에서조차 대놓고 '몰래 숨겨둔 정부'와 불륜을 즐겼고, 닉도 분위기에 휩쓸려 거나하게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락의 재미'를 느끼며 황홀한 나락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개츠비의 초대장'이 도착한다. 매일밤 파티를 열면서도 그 파티에 정식으로 초대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티 손님들도 그저 무작정 늘 열리는 파티에 그냥 참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닉은 '정식 초대장'을 받았다. 뭐, 이것도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환상의 파티를 두 눈으로 확인했고, 바로 그곳에서 '개츠비'를 처음 만났다. 모두가 술에 취해 광란과 관능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홀로 '깨어있는 듯'해 보이는 말쑥한 차림에 고귀한 혈통을 지닌 듯한 묘한 매력을 뿜어내는 개츠비와의 첫 만남은 닉에게 강렬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친구가 한 눈에 닉을 알아보더니 곧바로 '친한 척' 다가와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그리고 둘은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친해졌으며 부자들만 드나드는 '비밀클럽'에도 같이 출입하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개츠비는 닉을 '대단한 친구'라면서 도시의 거물들에게 직접 소개해주곤 했다. 그렇게 닉도 덩달아 '상류사회'에 프리패스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 즈음 개츠비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닉에게 부탁을 한다. 바로 닉의 친구인 '데이지'와 우연을 가장한 자연스런 만남을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순간 닉은 의심한다. 개츠비라는 고귀한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그렇고 그런 '불륜'을 저지르는 저질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개츠비는 이미 데이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고, 심지어 첫사랑이었다고 고백까지 한 것이다. 닉은 생각했다. 또 다른 친구인 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차피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나쁜 친구'였기에 '진짜(?) 친구'인 개츠비를 위해 데이지와 만날 수 있게 주선한 것이었다.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데이지를 위해서(?)도 개츠비와 만날 수 있게 햊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던 것이다. 정말 예쁘고 착한 데이지에게 딱 어울리는 남자는 '한 여자밖에 모르는 순정남'이었지, '예쁜 아내를 두고서도 바람을 피우는 불륜남'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오랜만에 만난 개츠비와 데이지는 못다 이룬 사랑을 다시 이룰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물론 정황상 두 사람도 '불륜'이 맞지만, 너무나도 로맨틱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인정했을 것이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이다.

 

  사실, 개츠비에겐 남모를 비밀이 있었다. 지금은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쌓았고, 전쟁에도 참전했던 군인으로 명예로웠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명문가 자제(?) 같은 품위를 보여주었기에 정말 반듯했지만, 데이지와 첫 만남을 가졌던 때에는 '데이지' 곁에 있을 수 없는 절박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가난뱅이'였던 점이다. 하지만 둘의 첫 만남은 아름다웠고, 둘은 서로 첫 눈에 반해 사랑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집 딸이었던 데이지의 부모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처지였기에 데이지에게 편지 하나 달랑 남겨놓고 전장터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후 소식도 끊긴 채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데이지는 부모님에 의해 돈 많은 톰과 덜컥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 사이에 개츠비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나타날 수 있었지만, 데이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개츠비는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아버릴 각오로 부를 쌓았지만, 결국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개츠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데이지도 자신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라 믿었으며, 개츠비 자신은 절대로 '변치 않는 사랑'이었기에 당당했다. 그래서 데이지가 사는 저택의 '맞은 편'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날마다 환한 불빛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며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우연일지라도 데이지가 바라볼 것을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언제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만큼 환한 빛을 뿜어내며 파티를 열었다. 마치 '등대'를 밝혀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어버린 배가 안심하고 찾아올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맞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남편인 톰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둘이 서로 어긋나서 이혼이라도 하길 바랐던 것이다. 개츠비는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지가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자신'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연을 가장해서 '톰의 불륜현장'에 개츠비는 데이지와 함께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개츠비는 데이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며, 톰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고백을 하길 꾸몄다. 개츠비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누가 보더라도 바람 핀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할 아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배신감에 슬픔과 눈물을 쏟아낼 데이지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만반의 준비를 마친 개츠비는 속된 말로 안달이 났다. 그리고 데이지의 한 마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초조한 시간이 지나는데도 데이지는 톰에게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바로, 이 대목이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다. 이른바 '데이지의 선택'인데, 여자들은 '이해'하고, 남자들은 '분노'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그래도 이혼까지는 아니지'라며 공감을 표하지만, 남자들은 '이건 아니잖아'라며 분노를 참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고지순한 순정남'을 버리고 '불륜 피우는 바람둥이'를 선택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지를 어리석다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데이지는 개츠비도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풀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이 든 여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부모님의 강요에 못이여 '부자집 톰'과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식을 치르려 했다.하지만, 결혼식날 찾아온 '개츠비의 편지(5년만 기다려줘, 내 사랑)'를 받고 식장을 박차고 나가려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톰과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부모님의 강요가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한 톰과도 그닥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신혼생활은 꽤 달콤했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개츠비로 인해 '불 같았던 청춘의 추억'을 되살리며 권태로운 결혼생활에 새로운 활력이 되긴 했지만,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파탄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데이지는 '사랑'이 고팠던 것이고, 톰이 불륜을 멈추고 되돌아 와주기만 한다면 부유한 생활을 여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기에 '개츠비'라는 위험스런 모험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런 '데이지의 선택'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법적 효력이 살아있는 부부사이인데 말이다. 자고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데이지의 선택'에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지고야 만다. 바로 '톰과의 사랑'을 끝낼 수 없는 데이지의 마음을 돌리려 '드라이브'를 떠났고, 자동차가 과속으로 질주를 하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한 여자'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바로 '톰의 정부'였던 것이다. 한낮에는 분명 톰이 타고 나갔던 차였는데, 사실 '그 차'는 개츠비의 차였던 것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톰 사장의 부하직원'이었는데, 자기 아내가 불륜을 피우는 것을 알고 추궁하던 중, 폭력을 휘둘렀고 매맞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마침맞게 '톰이 타고나간 차'가 지나가자 톰이 운전하는줄 알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는 과속을 하고 있었고 미처 세우지 못한 사이에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여자는 즉사했던 것이다. 목격자도 수없이 많았지만 '개츠비의 차'는 그대로 뺑소니를 치고 말았다. 그렇게 교통사고의 범인은 '개츠비'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사고의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치는 '비열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은 달랐다. 그때 차를 몰고 내달렸던 사람은 개츠비가 아니라 '데이지'였다. 사랑했던 남자와는 헤어져야만 했고, 남편은 불륜을 피운 것이 확실했고, 그런데도 자신은 '순정남'이 아니라 '불륜남'을 선택했으니 오죽 착찹했을까. 더구나 지금 데이지 옆에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뿜어내는 '잘 생긴 직진남'이다. 이런 남자를 내치고 '바람 피운 남편'을 선택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수록 자동차의 엑셀을 밟아댔고, 결국 '교통사고'를 낸 살인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실조차 밝힐 용기가 없는 데이지는 끝내 '개츠비'로부터 멀리 도망가버리고 만다.

 

  개츠비는 그 와중에도 '데이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란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더구나 '데이지'가 저지른 살인죄까지 자신이 감수하지 않았느냐면서 '반드시' 돌아올거란 확신에 차서 데이지의 연락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완벽하게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선택할 리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연락을 기다리는 순간에 톰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데이지를 데리고 떠나버린다. 데이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개츠비를 버리고 톰을 따라가버린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던 개츠비는 '누군가'의 총에 맞고 죽고 만다. 그 '누군가'는 바로..누굴까? 스포, 다 해놓고 꼴랑 요거 하나 남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마지막 즐거움(?)까지 차마 빼앗을 수 없기에 남겨둔다.

 

  암튼, 개츠비는 죽었다. 하지만 초라한 죽음이었다. 살아서는 모든 이의 숭배를 한 몸에 받던 개츠비였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죄까지 뒤집어 쓰고나자 사람들은 빠르게 '손절'해버리고 만 것이다. 더구나 개츠비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비밀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밀주사업을 하던 갱단'과 비밀거래를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경기호황은 '주식'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진짜 알짜배기 부를 쌓은 사람은 '금주법'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밀주사업'을 벌인 갱단(마피아)이었다. 알 카포네는 그 당시 갱단을 이끌던 대명사다. 바로 개츠비가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비법이 바로 이런 '불법'을 이용한 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개츠비'를 비난할 수 없다. 사랑을 향해 직진밖에 모르는 남자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모든 죄를 사하여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술'을 판 것이 전부다. 오늘날에도 '금주법'은 시대적 착오인 악법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오히려 그 법으로 인해 '범죄집단'만 돈을 버는 엉망진창인 법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불법적인 방법일지라도 '순정남'에게 이익이 돌아가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썼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마냥 탓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데이지'다. 사실 데이지도 '희생자'일 수 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순정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도망가고 말았으니 스스로 속물임을 증명하고 만 셈이다. 이런 여자를 위해서 사랑밖에 모르던 남자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죽고 말았고 말이다.

 

  이런 개츠비를 '위대하다' 하지 않는다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오직 사랑만을 위해서 살다 간 개츠비를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자인데, 데이지를 '대신'할만 한 여자를 찾지 못하고 매달리는 순진함 탓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종교인'에게 세상에 믿을 게 없어서 신을 믿어요? 라고 말하거나, '소방관'에게 불속이 얼마나 뜨거운데 거길 뛰어들어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조국을 사랑해서 목숨 받쳐 외적을 무찌르는 용감한 군인을 보고도 어리석다고 탓할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위대하다'고 말하면서. 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직진하는 남자를 위대하다고 말하지 못한단 말인가?

 

  물론, 결과적으로 불륜인 셈이고, 법적으로 보호받는 '남의 부인'에게 직진하는 점은 비판해 마땅하다. 하지만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첫 사랑'이었고, 원래 자신과 결혼해야 할 '아내'였으며, 평생을 함께 할 '운명적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안타깝게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분명히 개츠비 자신은 '자격'이 충분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데이지'는 자신과 행복하게 살아갈 운명이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개츠비는 사랑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에 '타이밍'은 매우 중요한 선제 조건이다. 한 번 지나간 버스는 탈 수 없는 법이다. 기다리면 '다음 버스'가 오긴 하겠지만, 그 버스는 '다른 버스'일 뿐이다. 하지만 개츠비는 '놓친 버스'를 타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심지어 지나간 지 5년도 넘었는데 말이다. 5분도 아니고 말이다.

 

  우리는 사랑에 '직진'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개츠비를 향해 씁쓸한 박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찐 사랑'에 진한 낭만을 느끼고 열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기에 한 번,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설렘에 또 한 번 말이다. 나도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사랑에 직진하고 싶다. 내 사랑이 개츠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른 것이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말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내 사랑도 개츠비 못지 않았다고...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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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한겨레 옛이야기 22
신동흔 지음, 노을진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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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판소리 여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춘향가'를 이야기로 묶어낸 '판소리계 소설'이 <춘향전>이다. 원래는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전해지는데, 대부분 유실되었고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 여섯마당이 전해지고 있다. 여섯마당에는 '춘향가'를 비롯해서 '흥부가(박타령)',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이 정리되었다. 이 가운데 '가루지기타령'은 너무 야한 내용을 담고 있어 점잖은 소리꾼들은 잘하지 않아 요즘에는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정리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전해지는 <춘향전>은 판소리계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있다. 특히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시작되는 '사랑가'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곡이며, 완창을 하려면 총 7~8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마저도 간략히 추려서 핵심적인 내용만 부를 때 걸리는 시간이며, 완벽한 완창을 한다면 12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는 '판소리 유럽투어'를 떠났을 때, 이탈리아 극장에서 '춘향가 완창'을 요구했다가 된통 혼났다고 전해진다. 사연인 즉슨, 관객들의 매너가 좋기로 자부심이 강한 이탈리아 극장측에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완창'을 해달라고 요구했고, 12시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하는 바람에 결국 완창을 시작했고, 한 번 시작한 이상 무대를 끝까지 듣고야마는 이탈리아 관중매너 때문에 12시간 동안 관객들이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고문(?)을 받은 끝에 감동의 피날레로 기립박수를 1시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믿지 못할 후문이 들리기도 했다.

 

  그때 '춘향가'의 가슴 절절한 소리꾼의 '소리조'와 '아니리' 사이의 오묘한 앙상블과 소리꾼의 적절한 '발림'으로 완벽히 알아듣지는 못할지언정 이야기의 맥락과 흐름을 가슴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극찬을 했고, 12시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소리꾼'과 '고수' 단 2명이서 완창을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자국의 오페라 명가수들도 해내지 못하는 무대매너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3~4시간짜리 오페라 가수들도 길어야 2~3일간 무대에 오를 뿐이며, '같은 배역'을 2~3명 이상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무대에 오르기 마련인데, 12시간이 넘는 완창을 단 한 명의 소리꾼이 일주일을 공연하는 것을 보며 '신의 경지'에 올랐다면서 놀랍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호평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춘향전>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판소리를 소설로 옮겼기에 그 매력은 '소리'가 전해주는 매력과는 사뭇 다른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팔 청춘 꽃다운 나이의 선남선녀가 아우러낸 사랑이야기라는 것이 첫 번째 까닭일 것이고, 두 번째는 기승전결이 딱 들어맞는 흥미진진한 이이갸구성일 것이며, 세 번째는 온갖 인물들이 벌이는 갈등과 억압적인 사회적 모순이 엮어낸 모진 고난을 이겨낸 두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는 것으로 해소해버리는 통쾌한 결말을 맺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이야기가 '극적인 성공'을 얻어내기 위해선 주인공이 잘 생기고 아름다워야 한다. 더구나 꽃다운 나이 '열여섯'의 두 선남선녀가 맞났으니 혈기왕성한 두 사람이 벌일 일이야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배경'을 깔아놓았으니 이미 반 이상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구성이 두 남녀를 소개하기도 바쁘게 첫 만남부터 첫 사랑을 나누며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더니 '혼인약조'까지 나눌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그런데 덜컥 제동이 걸린다. 몽룡이 '과거급제'를 위해 서울로 떠나야만 한단다. 남자의 출세길을 막지 않으려면 춘향은 몽룡을 따라가지 않고 남아 몽룡을 기다려야만 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별의 눈물바다를 만들어놓고서 더욱 눈물을 쏙 뺄 일이 남았다. 춘향이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새로 부임한 사또의 수청을 들어야 한단다. 하지만 춘향은 일부종사, 이군불사, 삼종지법을 내세우며 이미 낭군이 있는 몸이니 정절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변사또는 천한 기생 주제에 정절 운운하다니 꽤씸하다며 온갖 매질을 다하고 옥에 가두고 만다. 그렇게 춘향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죽을 위기에서 구하고 변사또를 벌하며 온갖 수탈로 억압받던 백성들의 설움을 해소하니 '최고의 절정'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해피엔딩 중에 해피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남선녀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장면과 자신의 목숨을 구한 어사가 실은 그토록 그리던 낭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은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을 절절 끓게 만들다가 한 순간에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명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거지꼴을 하고 변사또의 생인잔치에 사또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밝히는 '칠언율시' 끝에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는 장면은 죽을 위기에 놓인 춘향의 목숨이 다시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탐관오리들에게 온갖 수탈을 당하며 곤궁함을 면치 못한 백성들의 설움이 일순간에 풀림과 동시에, 억울한 사연을 아무리 외쳐도 들을 척도 하지 않던 아전들이 제대로 된통을 맞게 되는 통쾌함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화룡점정의 순간'일 것이다.

 

  이처럼 <춘향전>은 단순한 사랑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울불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그렇기에 <춘향전>은 곱씹어가며 읽어야 할 고전이다. 더구나 천한 기생이 양반들이나 지키던 '정조'를 다하겠다는 서민들의 의식고양은 눈여겨 볼 일이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일반 평민들도 웬만한 부를 이루며 살 수 있던 시대였다. 그로 인해 '평민들의 삶'은 차츰차츰 수준이 높아지고 있었고, 일부 평민들은 '양반' 못지 않은 의식주를 갖추게 되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그렇게 부유한 평민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평민들은 '양반'들보다 더 양반 같은 행세를 했으며, 심지어 양반이 양반 같지 않다며 '비꼼'의 대상으로 만들어 풍자와 해학이라는 새로운 '서민문화'를 만들어냈으니 춘향이 양반흉내를 내고 있다한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춘향과 몽룡은 '자유연애'를 시도하였다. 양반가의 아들과 천한 기생의 딸이 '혼인약조'를 한다는 것조차 놀라울 판에 부모가 점지해주는 짝이 아닌 자기 자신들 '스스로'가 정한 혼인약조 맺고 정절과 수절을 지키려 애쓰는데 아무도 놀라지 않고 있다. 마치 '그런 것'이 당연한 일인냥 말이다. <춘향전>은 시대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면모를 갖췄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네 고전소설 속에서 으레 찾던 '시대적 한계'를 찾는 것보다 이런 선구적인 면모를 찾아내는 것이 더 의미 있다 할 것이다. '남자의 발목을 잡는 여인'이라느니 '여성의 해방이 아닌 한 남자의 아내로 만족한다'느니 하릴없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깎아내리는데 급급한 평론 따위는 개나 줘버렸으면 좋겠다. 비단 <춘향전>뿐이 아니다. 교과서에 실린 '우리 고전'은 죄다 '시대적 한계점'을 시험에 출제하며 달달 외우게 만든다. 외국소설을 보면서 '단점'을 꼽아보라고 시험문제를 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앞선 서양문물에 비해 뒤처진 우리네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을 직시하라던 '식민사관'과 다를 바가 없다. 하긴 해방 이후에도 교육계에도 상당기간 '친일적폐'들이 윗자리를 선점하였더랬으니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암튼, 이제라도 '전근대적인 낡은 비판'은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 고전'은 다시금 조명해야만 한다. <춘향전>은 종종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교되곤 하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두 가문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젊은 두 남녀 이야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춘향전>에서는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을 가로 막는 것이 '사회적인 병폐 현상'이었고, 두 남녀가 끝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면서 '사회적 문제'도 아울러 해결해버리는 뜻깊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방끈 긴 평론가들은 '희극(해피엔딩)'보다 '비극(새드엔딩)'이 카타르시스를 더 진하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값어치가 높다고들 하지만, 난 달리 생각한다. 이 세상에 '해피엔딩'보다 값어치 높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죽느냐 사느냐 고것이 문제로다'라면서 고뇌에 쩌들기보다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십년 묵은 체증이 쭉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이 더 짜릿하지 않느냔 말이다. 우리네 고전이 더 맛깔 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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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2 : 인간의 기억력은 형편없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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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자꾸 잊어버리고, 심지어 조작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뇌는 방법을 써왔다. 잊을만 하면 다시 기억하고, 잊을마안 하면 또다시 기억을 되살리고, 잊어버릴만 하면 기억을 꺼내 절대 까먹지 않도록 외우고 또 외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겨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필요할 때 꺼내보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를 위해서 '문자'를 만드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고 말이다. 오늘날에는 '기록장치'를 만들어서 음성이나 영상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기억'을 꺼낼 수 있게 되어 기억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일을 줄이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 한 번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분 좋고 즐거운 기억이라면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을 것이다. 이때에는 '망각'이 귀찮고 불편할 테지만, 슬프고 괴로운 기억을 망각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끔찍한 기억이 자꾸자꾸 되살아난다면 어떨 것 같은가. 때로는 잊어버리고 잊혀지는 것이 더 나은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억을 지우곤 한다. 때때로 나쁜 기억을 '조작'해서 좋은 기억으로 바꾸는 것도 슬픔에서 벗어나고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기억법'이다. 어차피 잊어비리지 못하는 기억이라면 '좋은 쪽'으로 편집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기억'을 불신하게 되었다. 기억이 주관적인 편집이 될 우려도 있기에 '기록'이라고 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하지만 유달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등장하곤 한다. 이들은 무작위로 놓여진 '트럼프 카드'를 뒤집으며 맞추는 게임에서 500개가 넘는 카드는 단 한 번만 보고서 맞춰 '가장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 사람의 놀라운 기억법은 카드의 순서에 맞게 '이야기'를 지어내 카드의 순서를 틀림없이 맞출 수 있다고 밝혔다.

 

  인간의 기억은 놀랍게도 '짧은 정보'를 외우는 것보다 '긴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이 발달했다. 물론, 긴 정보는 '앞뒤의 맥락'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단편적인 '영어단어'보다 길고 긴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하는 것이다. 200쪽이 넘는 이야기책의 줄거리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물론,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살을 더 붙이기도 하고, 군더더기를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맛깔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렇게 해서 기억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또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의 뇌'가 엄청난 정보량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용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양은 '우주'를 통째로 담을 수도 있을 정도로 무한하다. 또한, 실제로 우주여행은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뇌 처리속도는 광활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우주공간'을 순식간에 왔다갔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이 때문에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종종 '컴퓨터'에 빗대며 '슈퍼컴퓨터'에 인간의 뇌를 대신 심을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구현해냈고, 2040년이 되면 '인간의 뇌'를 대신할 '인공지능'이 완성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유용한 일일까? 인간의 뇌를 대신할 '인공지능의 탄생'이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 아직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칫 인간이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인간의 뇌는 '기억'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왔다. 과거에 경험하고 배운 것을 뇌에 '저장'한 뒤에 필요할 때마다 기억을 꺼내 생각하고 생각해서 인류에게 유용한 것을 발달시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뇌'를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된다면 인간은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될지로 모른다. 지금도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치매'라느니, '결정장애'라느니 다양한 폐해가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인간답게 살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대신에 '인공지능'을 인간이 망각하기 쉬운 기억을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좋을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생각을 하기 위한 '도구'로 쓴다면 인간의 능력을 더욱 뛰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뇌과학이 제시하는 미래의 모습도 바로 이런 긍정적인 결과이다. 우리가 뇌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한낱 '기계'에 불과한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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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유전자 - 협력과 배신, 그리고 진화에 관한 모든 이야기
니컬라 라이하니 지음, 김정아 옮김, 장이권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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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 사는 참다랑어는 희귀한 생선이다. 마구잡이 어획으로 개체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족자원' 보호 차원에서 참다랑어를 낚는 것을 금지하며 맛있는 참다랑어가 다시 많아지길 기원하고 있다. 하지만 도쿄 어시장에서 270킬로그램짜리 대형 참다랑어가 경매가 31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단다. 한 마리만 낚아도 대박인 셈이다. 지금 참다랑어 어획량은 늘었을까? 줄었을까?

 

  이를 경제학 용어에서는 '공유지의 비극'이라 부른다. 한정된 자원임을 뻔히 알면서도 주인 없는 공유지에서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이 앞서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마구 잡이로 경쟁에 뛰어드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분명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익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할 것을 걱정하며 '한정된 자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긁어모아 끝내 사달을 내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협력'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당당히 현존하는 '최강의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초기 인류는 '포식자'는커녕 더 강한 포식자들의 먹잇감에 불과했는데도 뛰어난 지능으로 정보의 축척을 가능하게 했고, 본능적으로 삶을 영위하기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더 나은 삶'을 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끝에 지금의 자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생 인류'는 과연 어떤 유전자를 가졌기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일까? 리차드 도킨스의 지적처럼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니콜라 라이허니의 주장처럼 <협력의 유전자>를 가졌기에 가능했을까?

 

  놀랍게도 거의 모든 생물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종을 번식시키고 개체수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글쓴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예를 들고 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 인간도 마찬가지란다. 서로 '협력'하며 살아간 종만이 번성할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앞서도 예를 들었던 것처럼 '협력'보다는 '배신'을 때리는 것이 더 큰 이득을 불어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란다. 그런데도 글쓴이는 '협력'만이 유일하게 종을 번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더 큰 이득은 저 멀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팬데믹'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대처방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초기에 수많은 나라들이 두루말이 화장지와 신선식품을 사재기하며 대혼란을 겪었던 것과 병상확보를 하지 못해 수많은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자국의 백신'을 먼저 챙기면서 상대적으로 보건의료에 취약한 나라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물론 초창기의 혼란을 겪으며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지만, 사스나 메르스에 비해 '치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차츰 '자국 이기주의'를 내려놓고 인도적 차원에서 저개발국가들에게 백신을 나눠주며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나열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협력의 유전자'가 결국 승리했다면서 말이다.

 

  확실히 인간은 비겁하다 못해 비열할 정도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위기의 상황속에서 '나'를 더 먼저 챙기고, '가족'과 '친구'를 그 다음으로 챙기며, '아는 이웃'을 챙긴 다음에야 더 많은 사람들을 챙기는 양상을 보여주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팬데믹의 초기 때부터 자기보다 남을 더 걱정하고 챙기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보인 사람들이 더 많았고, 비록 자기가 감염되었다하더라도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가격리'를 실천하며 감염의 확산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고, 재감염을 막기 위해 손씻기와 마스크를 몸소 실천하며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배려하는 '자기 희생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여타의 생물에게서도 발견되는 모습이다. 남미에 서식하는 개미 가운데 하나는 해가 떨어지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므로 자신들의 둥지로 서둘러 되돌아오곤 하는데, 이때 먹이활동을 벌이다 미처 복귀하지 못한 개미들은 '다른 포식자'들이 자기네 보금자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밖에서 입구를 막고 난 다음에 춥고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로 행진을 벌인 뒤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동료들을 생존확률을 높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협력의 유전자'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협력'하는 것이 더 이득이란 말인가? 앞서 보았듯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면 홀로 로또 맞은 것처럼 대박을 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글쓴이는 '정규 상선의 선장과 선원'과 '해적선의 선장과 선원'의 생존률을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머나먼 항해를 떠나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 대가로 얻는 뱃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단다. 물론, 상선이나 해적선 모두 '무역'과 '약탈'의 대가로 얻는 이득은 로또 만큼이나 막대하기에 위험천만한 항해를 끝마치고 난 뒤의 엄청난 보수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 힘겨운 항해를 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기약없는 이득을 기다리기보다 '생존(안전)'을 택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단다. 바로 '선상반란'인데, 선장을 죽이고 배를 빼앗는 일이 '정규 상선'과 '해적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았을까? 결과는 놀랍게도 '정규 상선'에서 더 많이 더 끔찍한 선상반란이 일어나곤 했단다. 글쓴이는 그 까닭으로 고립된 선상 위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이 어느 쪽이냐를 주목했고, 놀랍게도 무역을 하는 '정규 상선'에서 선장의 독재와 독단적 폭력이 문제가 된 적이 더 많았으며, '해적선'에서는 배 안의 모두가 평등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기에 선상반란 같은 일은 덜 일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배신'을 때리는 쪽은 덜 협력적인 방식으로 항해를 했던 '정규 상선'이었다는 말이다. 반면에 '해적선'은 모두가 협력을 잘 했기에 갈등이 더 적었고, 규율이 더 잘 지켜졌으며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해(?)를 했다는 것이다.

 

  비록 고립된 선상에서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도 우주에서 고립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같은 태양계 안에서도 인간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행성은 없다. 이렇게 고립된 지구에서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더 많은 인간들은 '협력의 유전자'를 발휘해서 더 잘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

 

  참,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전자에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언급했지만, 유전자는 어떤 방향성조차 없다. 다시 말해, 유전자에는 목적도, 욕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전자가 '이기적'인 것을 아는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잘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협력의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유전자가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릴리 없다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협력'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단다. 이는 '배신'하는 종은 도태되고, '협력'하는 종이 생존하기에 그리 보일 뿐, 자연선택에서 '방향성'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물론, '목적성'은 더더군다가 없다. 단지, 인간은 '이성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유리한 선택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종은 '협력'을 통해 더욱 번성했다. 우리 인간도 이런 생물들의 번성을 살펴보면서 '배신'이냐, '협력'이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의 유전자는 뭐라 말하던가? 아무 소리도 못 듣는 게 '정상'이다. 자연선택은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는다. 단지, 선택의 결과만을 냉혹하게 보여줄 뿐이다. 짧은 순간의 이득을 위해 '배신의 길'을 걷는 인간들이 더 많아진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물론, 강요는 아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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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 : 인간은 외모에 집착한다 (5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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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다소 철학적인 질문이지만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때다. 철학에서는 이를 '실존의 문제'로 다루며 인간의 가치에 대한 고찰을 하지만, 최근에는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심리부터 전부 '과학적인 접근'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도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란 말이다.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면 기쁘고 설레게 되지만, 세로토닌이 부족해지면 불행하다고 느끼며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뇌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거의 모든 학문의 원천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봐도 절대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뇌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 교육에서는 '뇌과학' 분야에 대해서 학창시절에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단다. 단순히 '신경전달물질'과 신경세포인 '뉴런'에 대해 잠깐 배울 뿐, 뇌과학에 관한 기초교육조차 없이 넘어가버리고 만단다. 이런 상황이면 우리 나라의 인재들은 '뇌과학'이라는 분야가 있는줄로 모른체 대학에 가서야 겨우 그런 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뒤늦게 쫓아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미래과학의 핵심인 '뇌과학'을 이런 식으로 홀대하다간 '과학대국'으로 성장하기란 영영 꿈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나라 '뇌공학자'의 1인자인 정재승 교수가 야심차게 기획한 이 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재미나게 읽고 배울 수 있는 '뇌과학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책이 널리 읽히길 바랄 뿐이다.

 

  먼저, 1권에서는 뇌의 인지능력 가운데 하나인 '시각'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기관은 모두 다섯 가지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시각인데, 다른 감각에 비해 유달리 뛰어난 감각이며, 매우 예민한 감각기관이기도 하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인간은 '시각' 능력으로 모든 사물을 평가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란 얘기다. 사회적 문제 가운데 '외모지상주의'가 있는데, 괜히 문제가 된 것이 아니란 것도 바로 인간의 '시각 중심적인 감각능력'에서 비롯되었기에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시각에 의존할까? 인간의 뇌가 가장 강렬히 반응하는 것 중에 하나다 바로 '첫인상'이다. 그것도 처음 만난 지 0.1초만에 모든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잘생김'에 대해서는 더욱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인간의 눈, 코, 입, 그리고 귀가 모여 있는 '얼굴'이 특히 중요한데, 단 1초 사이에 얼굴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지은 뒤, 평생을 간다는 말이다. 이런 단순한 평가로 인간의 모든 것을 평가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얼굴평가'를 시도한다. 눈, 코, 입이 괜히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것이 아니란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얼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아니면 못생긴 사람들의 대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로 승부(?)를 내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옷차림'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유행'에 민감하게 따지며, 이제는 '몸매'까지 신경을 쓰면서 죽을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이어트에 매달리곤 한다. 인간에게 시각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시각은 '틀린 그림 찾기'의 선수다. 눈가의 주름이나 얼굴에 찍힌 희미한 점까지 구별해낼 정도로 예리하다 못해 예민한 시각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은 누구나 '2개의 눈', '1개의 코', '1개의 입', '2개의 귀'를 똑같이 갖고 있는데도, 70억의 인구를 다 다르게 구분할 수 있다. 개와 초코칩 쿠키를 구분 못하는 '인공지능'과는 너무나도 극명한 실력 차이다. 더구나 갓 태어난 아이조차 '예쁜 사람'과 '안 예쁜 사람'을 구별할 줄 알 정도로 인간의 시각능력은 뛰어나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민감한 시각능력을 갖게 되었나? 아마도 초기의 인류가 '포식자'로부터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멀리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람 가운데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하려는 사람의 감정표현을 민감하게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시각능력이 뛰어난 경우에 살아남기(적자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갖게 되었고, 그런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시각능력이 뛰어나게 되었을 것(자연선택)이란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높을 것이다.

 

  인간의 뇌가 할 수 있는 능력은 엄청나게 많다. 1권에서 다룬 '시각능력'만 따져보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뇌가 가진 비밀을 하나씩 캐내다보면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의 비밀'도 더 많이 알아내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시리즈가 주목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밝혀나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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