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뭔가 뜻대로 이루기가 힘든가 보다.

이번 달에도 '아버지 치매 판정' 등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목표한 만큼 책읽고 리뷰쓰기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의 태양은 뜨듯이

읽어야 할 책은 읽고 써야 할 리뷰는 쓸 것이다.

세상사 세옹지마요, 고진감래라 했으니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뒤따르고

고된 날이 지나면 좋은 날이 찾아올 거라 믿는다.


나이가 드니 그런 경험도 해본 듯 해서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10월에 못 읽은 책은 11월에 다시 도전한다.

꾸준히 읽을 책 '한빛비즈'와 '인간사랑' 책이고,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와 박시백의 <고려사>

그리고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60선>을 차례대로 섭렵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관심도서'도 틈틈이 읽고,

'세계명작소설'도 새롭게 정리하면서 '문학적 안목'을 키워나갈 것이다.


남은 두 달..150권을 찍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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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미래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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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적에 읽었어야 마땅할 책인데 반백살이 되어가는 지금에야 뒤늦게 '문학책 읽기'에 빠져서 허겁지겁 닥치는대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도 그렇게 책꽂이 속에 푹 파묻혀 있다가 뒤늦게 내 손에 집힌 책인데 무려 20년이나 지난 책이다. 하긴 소설이 200여년 전에 쓰였는데, 고작 20년 지난 책을 읽는 것이 무슨 대수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긴 하다. 세월의 변화를 단박에 알아챌 수는 없지만, '뒤침(번역)'에도 유행이랄지 트랜드랄지..뭐,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인지 책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뒤친이(번역가)'의 역량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도 유행에 민감할진데 뒤칠 당시에 알게 모르게 유행하던 말투가 고스란히 담긴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말이다.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아이들과 함께 '문학책'으로 논술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차이가 부쩍 눈에 띄곤 한다. 그래서 왜 그런 차이가 나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애들 책(새책)'과 '샘 책(낡은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뒤친 책의 '원본'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영국소설인 이 책의 원본이 '원작자'인 메리 셀리가 직접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책인 탓에 '미국말로 뒤쳐진 책'을 원본으로 삼아 다시 '우리말'로 뒤쳐진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더욱 복잡한 경우는 '어린이를 위한 축약된 책'인 경우인데, 이 경우엔 뒤침이에 의해 '각색'까지 더해져서 원작의 내용과 사뭇 다른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여러 버전의 뒤침책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지 않았다면 그런 차이를 모르고 지났을 것인데, 뒤늦게 이런 경험을 하다보니 왜 그토록  '같은 원작의 소설'이 다양한 출판사와 여러 뒤침이에 의해 출간되고 뒤쳐지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암튼, 책마다 '맛'이 색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으니, '깜냥'이 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맛'을 최대한 살려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맛이 다르면 '느낌'도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공포'라는 느낌은 그닥 들지 않곤 한다. 왜냐면 익히 알고 있는 '괴물'의 등장이 상당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즘 트랜드에는 초반부에 등장해도 시원찮은 공포감이 들기 때문에 '시작'과 동시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괴물이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꽉 채우곤 하기 때문에 소설의 중반부를 훌쩍 넘어갔는데도 사람만 죽고 정작 '원흉'인 괴물이 등장하질 않으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난 이것을 두고 아이들에게 '고전명작의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이들은 '찐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고 밋밋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괴물 주인공'이 등장했는데도 공포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외모가 흉칙하기 이를데 없다는 '묘사'가 나오긴 하지만 동영상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인데다 어렵사리 등장한 괴물이 너무나도 '감상적인 복수'를 하고 '논리정연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공포감'은 싹 사라져버리기 일쑤란 얘기다. 이런데도 이 책을 '공포소설'이라고 소개해도 좋은 걸까?

 

  맞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 분명하다. 하지만 외면의 공포가 아닌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공포가 불현듯 꺼내어졌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소설'이 된 것이라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이 창조해낸 '생명체'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버린다는 '내면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제대로 된 찐 공포가 전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도 다름 아니라 인간의 '편리와 이기'를 위해서 발달해온 '과학'이 만들어낸 공포이기 때문에 정말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공포감'이 들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이 행한 모든 행동과 활동이 '도리어' 인간을 비롯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심지어 지구마저도 파괴해버리는 공포를 말이다.

 

  '과학의 발달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만들어서 '유익'하게 써오다가, 어느날 갑자기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들이 한둘이 아닐 게다. '가습기살균제'는 어떤가? 갓 태어난 아기와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서 아빠는 '가습기'에 낀 곰팡이를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퇴근길에 '가습기살균제'를 사왔다. 그리고 아내가 맛있게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 '가습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물때를 제거한 뒤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청결'하게 하기 위해 소중히 사가지고 온 '가습기살균제'를 넣고 가습기를 켠다.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상황인가. 그런 아빠의 애정을 듬뿍 받은 아기와 육아휴직으로 집에 머물고 있는 아내가 '가습기살균제'의 직격탄을 맞고 '중증호흡기장애'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사망을 하게 되었다. 이제 좀 공포감이 드는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화학을 연구했다. 얼마나 심취했는지 오랜 옛날의 과학자인 '연금술사의 비법'까지 손을 대면서 열중을 했더랬다. 비록 대학교수는 '하릴없는 옛 지식'까지 들춰 대는 프랑켄슈타인을 비아냥거리며 '시간낭비'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학문에 빠져들면서 놀라운 성과를 냈다. 바로 '죽은 시체'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비법을 알아낸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인간'보다 더 크고 힘도 쎈 것을 만들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연구에 성공하고보니 자신이 만든 '새 생명체'가 보기만해도 역겹고 혐오감이 들 정도로 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서 꿈틀대기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혐오감이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인데도 너무도 혐오스럽고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며 갓 태어난 '생명체'를 그대로 방치한 채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빨리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까지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기만 하고 사태를 수습하는데에는 소홀했던 점이 크나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괴물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말이다. 그렇게 괴물은 복수심에 차서 살인을 저질렀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마주하면서 더욱 심한 공포감에 젖어들게 된다. 바로 이 '공포'가 <프랑켄슈타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도 범죄를 막을 수도 없고, 범죄를 밝힐 수도 없는 '주인공'이 겪는 공포 말이다.

 

  하지만 괴물이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성선설'을 증명하기라도 할 것인냥 갓 태어난(?) 괴물은 착한 본성을 지녔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과 달리 너무나도 혐오스런 외모를 가진 탓에 '선한' 인간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을 나중에 새삼 깨닫게 되면서 '증오'를 배우게 되었고, 믿었던 사람에게마저 '배신'을 당하면서 그 무엇보다 처절한 '복수의 화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괴물의 탓'일까? 분명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애초에 사랑을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지 않을까 싶어서, 괴물에게 '동정심'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끝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복수'와 '살인'을 멈추고 싶다면서 '제안'을 내놓는다. 자신과 똑같은 '여자'를 만들어주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떠나 '남미'에 정착하겠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남미'에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데 뭔소린고 싶지만, 19세기 제국주의시절의 감성이 충만한 '막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대영제국'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괴물'이 살아갈 장소로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튼, 비판적인 읽기를 해야 할 부분이지만, 잠시 고정을 하고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그럴듯한 제안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믿고 '여자 괴물'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오면서 막바지에 들어간 작업(?)을 멈추고 애써 만든 '여자 괴물'을 망가뜨려버린다. 왜냐면 괴물 종족이 번식(!)을 해서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전자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의 죽은 시체에서 얻은 조각을 이어붙여서 '부활'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여자 괴물'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여자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될 것이라 '프랑켄슈타인의 고민'은 쓸데없는...이치에도 맞지 않는 고민이었으나, 19세기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의 소설인 것을 감안하면서 읽어보면, 제법 고민해볼 만한 '공포감'이었을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켄슈타인은 또 다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게 되고 만다. 이로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사이의 쫓고 쫓기는(?) 대단원의 막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권리'로써 괴물을 죽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괴물은 '할 수 있으면 해봐라'면서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소설의 줄거리와는 별개로,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수많은 고찰을 하곤 한다.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읽기도 하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과학자의 윤리의식'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연구를 끝까지 하거나, 지적 호기심만 충족하고서 책임은 지지 않는 비양심적인 행태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이기는 대단한 업적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로 인한 폐해에도 무한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인류는 '엄청난 파괴력'에만 주의를 기울였을 뿐, '방사능'이라는 위험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써'보고 나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이런 어리석음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도 왜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항생제의 남용'도 마찬가지다. 수퍼박테리아가 등장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 예상은 둘째치고, 기존의 항생제가 소용 없어지면 '더 강한 항생제'를 개발하려들고, 그도 소용없어지면 '더 쎈 항생제'를 만들 궁리부터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무기로도 엄청난 살상력을 갖추고 있건만 '기어코' 더 쎈 무기를 만들어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 괘씸하단 말이다.

 

  이런 비판을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과학'이라는 마법사의 돌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끝내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흉칙한 괴물을 만들고야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공할만 한 물건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의 대명사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또 만들고 있다. 처음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조금 뒤엔 '인간만을 위한 편리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끝에는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때문일까? 여기까지 '죽음을 부르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괴물의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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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3 : 인간의 감정은 롤러코스터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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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감정'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분석을 할 수 있을까? 감정의 반대적 개념은 '이성'이라서 감정적인 표현은 이성적인 표현보다 낮은 수준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 까닭은 '감정'은 생각과 판단이라는 과정을 건너뛰고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본능'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뜨거운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행동하는 것을 더 바람직한 행동이라도 여기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인간의 감정은 정말 불필요할 정도로 뜬금없는 일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일을 해결하기보다 침착하게 '이성적 판단'을 먼저 하라는 격언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앞서 '욱하는 감정'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결코 인간답지 못하다 할 것이다. 태초의 인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원만하게 무리생할을 할 수 있었고, 만약 '감정'이 없고 '이성'만 있었다면 불가능에 도전을 하는 무모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테니 거대한 문명사회를 건설하기는커녕 그저 '생존'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감정'을 통해서 서로를 돕고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두는 놀라운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류는 '질투'를 통해서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했고, '즐거움'이란 마약(?)에 취해서 고된 반복노동도 힘든 줄 모르고 거뜬히 해냈으며, '슬픔'을 통해서 '감정의 쓰레기'를 토해내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는 새 힘을 얻어내기도 했다. 하긴 '하릴없는 걱정'만하면서 없던 걱정까지 싹싹 긁어모아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걱정을 통해서도 얻는 긍정적인 것이 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미리' 대비하고 준비해서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덜하게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나누면서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지향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때,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볼작시면, '너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별개인 것이기에 함께 기뻐해야 할 아무런 이유나 근거가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은 비록 남일지라도 '함께' 기뻐해주면서 기쁨을 만끽하는 경험을 하면서 '감정의 긍정적인 면'을 터득하곤 했다. 이처럼 지구인은 '감정의 폭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의 유익함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감정'을 적극 표현하고, 때론 '감정'을 절제하면서 위기의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이런 인간의 감정은 뇌에서 어떻게 조절하는 것일까? 뇌 속의 뇌하수체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데, 우리몸의 곳곳에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보통 호르몬은 혈액과 림프절을 통해서 먼 곳까지 화학신호를 전달하는데 멀리 이동하기 때문에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지만 오래 지속되고, 신경전달물질은 뉴런과 뉴런 사이에 전달되는 화학신호 매개체로 이동거리가 비교적 짧아서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이 생겼을 땐 '세로토닌'과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 행복한 감정이 빠르게 우리몸을 감싸고, 무서운 상황에 놓였을 땐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과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즉각적이고 오랫동안 감정을 안정시키며 위험상황에 대비하도록 한다. 또한, 화가 났을 땐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자 신경전달물질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고, 더욱 화가 나면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심박수와 혈압을 높여 긴장감과 집중력을 높여준다. 하지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다른 감정에 무뎌지게 만들기 때문에 화가 난 상태에서는 물불이나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게 만들곤 한다. 때론, 매우 신나는 상황에서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 활력과 집중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적당하게 분비되는 것에 실패하게 되면 감정이 폭주하게 되고, 심리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하며 '정신과치료'를 받으며 '약물치료'를 받기도 하는데, 이 약물의 주성분도 바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신날 땐 '도파민' 쭉쭉, 짜증날 땐, '코르티솔' 솔솔 나와서 더욱 신나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며, 슬플 땐 '세로토닌'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충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폭주'와 '심리불안'이 생겼을 때 적절한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도움이 된다. 물론, 너무 약물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뇌하수체를 '직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감정조절'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에 영향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결국은 뇌에서 분비되는 '물질'에 의해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며 영향을 받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뭐든 지나치거나 모자르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감정을 너무 절제하려고 들지도 말고, 감정에 지나치게 휘둘리지도 말도록 적절히 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약물의 도움'도 받고 말이다. 우리는 '정신과 치료'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이성적 판단'의 도입이 시급한 편인 것을 긍정적으로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편, 책속의 줄거리를 살짝 들여다보면, 지구를 탐사하는 '아우린 외계인들'의 비밀이 속속 밝혀지는데, 그 비밀임무가 바로 '지구정복'이었던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래서 아우린 행성인들이 지구에서 정착하기 적당하다는 것이 판명된 지금 '지구인 절멸'을 결정했는데, 그 이유가 지구인들은 명확한 이성이 아닌 '불확실한 감정'에 휘둘려 살아가는 예측불가능한 존재인만큼 '아우린 행성인들의 이주'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란다. 다행히 좀더 신중히 결정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탐사대'의 지구인 관찰은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지만...과연, 지구인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다음 편은 지구인의 '사춘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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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미선 옮김, 빅토르 위고 원작, Crystal S. Chan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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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빛비즈의 <문학툰> 네 번째 책은 너무나도 감동스런 <레 미제라블>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이 책을 '한 권의 만화책'에 다 담는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에는 다 담겨 있다. 비록 그 감동까지 다 담을 순 없을지라도 마지막 장을 넘길 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4주간 아이들과 함께 한 논술 수업의 <문학툰> 마지막 책으로 이 책을 골랐으며 '대작'을 축약해 어린이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 가운데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감동 포인트도 함께 수업해보았다.

 

  아시다시피,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또는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도 있다. 시대배경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의 혼란을 겪으며 '공포정치' 시절을 지나 '제정'이 들어섰다가, 다시 '왕정복고'가 들어섰다가 또다시 '7월혁명'이 일어날 즈음의 1820년대를 관통하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았다. 시민들은 성직자와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을 더는 참지 못하고 '제3신분(부르주아)'를 주축으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것으로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루이16세'를 단두대에 올려 시민들이 직접 왕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주축이 사라진 프랑스는 '내부 혼란'과 '외부 공격'이라는 두 가지 위기를 한꺼번에 맞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침략을 '결속'으로 극복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수호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구체제의 모순(앙시앵 레짐)'을 다시 재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몰락'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노동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빵 한 조각'을 사기 힘들 지경에 놓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던 것이다. 이런 경제적 불안은 사회불만을 키웠고 조금이라도 힘이 약한 사람은 자기 것을 빼앗기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불안이 이어지자 프랑스 정부는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법과 질서를 앞세우지만 당장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민들은 법과 질서보다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을 목놓아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한 형벌'과 '무시무시한 채찍질'이었다. 이렇게 프랑스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비참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것은 그렇게 불쌍한 처지로 내몰린 사람들끼리도 서로 돕기는커녕 '범죄자'로 낙인 찍힌 이들을 차별하며 나락으로 내몰 정도로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이다. 누구라도 아무런 죄 없이 '범죄자'로 전락하는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범죄자'로 낙인 찍히면 두 번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없도록 내몰았던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다 못해 '비열한 사회'가 되어 버린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였고,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불쌍한 두 사람 '팡틴'과 '장 발장'이 서로 만난다.

 

  팡틴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여쁜 10대 소녀였던 팡틴은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멋진 남자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멋진 남자는 팡틴은 '하룻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헌신짝처럼 버렸고, 팡틴은 그만 버림 받았다. 비단 팡틴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원작'을 보면 팡틴을 비롯한 다른 소녀들도 똑같이 사내들의 무정함에 버림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달랐다. 이미 그 남자의 아이를 뱃속에 가졌기 때문이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팡틴은 어린 코제트를 데리고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가려 했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질 않았다. 결국, 팡틴은 테나르디에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소중한 딸을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한편, 장 발장은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 달아났다가 도둑으로 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형량이 5년이었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5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판결'이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벌인 것도 아니고 어린 조카들이 굶어죽을 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죄값이었다. 그래서 장 발장은 탈옥을 결심한다. 허나 탈옥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붙잡히길 반복하니 결국 19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그렇게 '가석방'을 받아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범죄자의 신분으로는 일자리는 고사하고, 먹을 것도, 지친 몸을 잠시 뉘일 곳도 얻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기 일쑤였다.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으니 지나가던 아이들도 돌을 던져대는 신세가 되자 장 발장은 어느새 분노와 복수라는 마음만 가슴 가득히 품게 되었다.

 

  그러다 겨우 눈을 부친 곳이 성당 문앞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미리엘 주교'가 선뜻 맛있는 빵과 따뜻한 잠자리를 권해주어 실로 오랜만에 장 발장은 '안식'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미 가슴 가득히 분노와 복수 등 나쁜 마음을 품은 장 발장은 주교의 호의를 '도둑질'로 갚게 된다. 성당에가 가장 값비싼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 발장은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헌병에게 붙들려 성당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또다시 '죄인' 신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장 발장은 범죄자가 아니라며 두둔했고, 남아 있는 '은촛대'마저 챙겨가라며 손수 가방에 넣어준다. 그리고 "잊지 마시오.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은식기를 쓰겠다고 약속한 것을"라고 말을 건낸다. 장 발장은 한 적이 없는 약속이라 얼떨떨했지만, 주교는 은은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제 장 발장은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장 발장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이 정말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미 절망을 맛본 상태에서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비정한 사회를 향해서 다시 착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고뇌의 찬 와중에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동전을 본능적(!)으로 감추고 동전을 잃어버린 소년을 향해 꺼지라고 윽박을 지르고 만다. 장 발장은 다시는 나쁜 짓을 짓지 않겠다는 맹세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감옥에 갈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억울하게 살았다 생각하면서 '동전 한 닢'을 훔치는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추해졌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장 발장은 자신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뒤늦게 소년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다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 발장은 두 번 다시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한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장 발장은 '새로운 기술(구슬제조법)'로 제법 돈을 모았고 공장을 열어 수많은 직공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마들렌 시장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팡틴은 마들렌의 공장에 취직해 알뜰히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좀처럼 돈을 모을 수 없었다. 하루 빨리 돈을 모아 자신의 딸 코제트를 찾으로 가야 하건만, 여인숙의 주인은 '사기꾼'에 '도둑놈'이었기 때문에 팡틴에게서 돈을 뜯어내 제 몫으로 취하고 코제트는 하녀 취급을 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팡틴은 테나르디에 내외가 달라는 돈을 넙죽넙죽 갖다바치기 바빴고, 액수는 점점 부풀려져서 끝내 감당하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곱상한 팡틴을 두고 질투심에 불타던 동료직원들이 '팡틴의 비밀'을 공개하면서 결국 일자리도 잃게 되었고, 그 뒤로 팡틴은 여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을 참고 견디며 코제트에게 필요하다는 돈을 송금하며 서서히 병들어 갔다.

 

  뒤늦게서야 마들렌(장 발장)은 이 사실을 알고 팡틴을 도우려 했지만, 이미 병든 팡틴의 목숨을 살릴 수는 없었고, 죽어가는 여자의 마지막 부탁인 '코제트'를 구하기 위해 떠나려 하지만 '자베르 경감'에게 정체가 들통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미뤄지게 되었다. 자신을 대신에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당당히 밝히고 감옥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암튼, 위기에 빠진 선원을 구하고 탈옥 아닌 탈옥을 한 장 발장은 '시장 시절'에 모아둔 돈을 챙겨 코제트를 구하려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코제트를 구한 장 발장은 '코제트의 아빠'가 되어 세상의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지만,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포슐르방의 도움으로 수녀원에 숨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마리우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마리우스 퐁메르시는 부유한 외할아버지의 귀여운 손자였지만 '왕당파'인 외할아버지와 '공화파'인 아버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난하게 사는 청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포기하면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하게 살 수 있다며 말했지만, 마리우스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의 핏줄임을 자긍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받지 않을지언정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는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마리우스였기에 자연스레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고,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의 모임에 들락거리거렸지만, 한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기도 했다. 그 소녀의 이름이 바로 '코제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곧 시작될 것이고, '코제트와의 사랑'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왜냐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마리우스'와 '장 발장'에게 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경찰 가운데 자베르도 있었던 것이다. 경찰들은 시위대에 잠임해서 정보를 캐내는 한편, 자베르는 장 발장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 발장이 자베르의 추격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에포닌은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며 사랑의 달콤함 대신 쓰디쓴 고통을 느끼게 된다. 테나르디에의 큰 딸이었던 에포닌은 자신의 아빠가 '코제트의 아빠'의 재산도 노리고 '마리우스의 주머니'도 모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 둘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뿐 아니라 끝내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마리우스를 구해내고 대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제트와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마리우스는 에포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닥 슬퍼하지 않는다. 아니 슬프고 고맙긴 했지만, 코제트와 헤어질 아픔 때문에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절망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끝내, 마리우스는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상처를 입고 쓰려져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장 발장이 때마침 구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장 발장은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연히 떠났다. 뒤늦게서야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마리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의인이 바로 장 발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범죄자 취급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용서를 구하지만 이미 장 발장의 목숨은 꺼져가는 촛불과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어린 독자를 위한 '축약본'이 이미 많이 출간된 상태라서 대강의 줄거리는 이미 잘 알려진 상태다. 여기에 '만화형식'의 한계까지 더하게 되니 줄거리는 더욱 간결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만의 장점을 꼽자면, '시대배경'을 (그림으로 직접 보면서)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읽을 수 있기에 어린 독자들의 이해가 더욱 편리했다는 점이다. 또한 등장인물의 '표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대화'를 읽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원작의 감동'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원작이 주는 감동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허나 이는 '장편소설'이 주는 위용과 거대한 물줄기를 타는 듯한 큰 감동과 여운에서 비롯된 것일테니, 만화에서 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꼬투리를 붙잡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문학툰>이 주는 감동은 또 새롭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새로운 이야기'로 펼쳐져 현대적인 느낌으로 되살리는 촉매가 될 것이고 말이다.

 

  실제로 아이들과 논술수업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과 '6월 항쟁'을 비교하면서 읽어 나갔다. 프랑스 시민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과 대한민국 시민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면서 말이다. 시대적 아픔이 시민들의 의식을 성장시키기 마련이다. 비록 혁명은 피를 부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룬 다음에야 얻어지는 새 세상이지만, 이미 불쌍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그 순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희망과 목숨을 맞바꾸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은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기 위함이니 <동물농장> 속의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감시하고 정책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교양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선거가 끝난 뒤에 넋놓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던진 '소중한 표'에 무한한 책임을 질 때 바로 설 수 있다고도 했다. 또한 정치인은 100% 사기꾼이고 예비 독재자이니 뽑고 난 뒤에 잘 관리하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바로 잡힐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레 미제라블'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결코 '그들만의 천국'을 좌시해선 안 된다고 또다시 강조하면서 말이다.

 

  끝으로 <문학툰>을 감상한 뒤에 '원작'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문학툰>으로 '원작의 맛'을 보았고, '대작의 감동'을 느낄 준비를 마쳤으니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 책 <문학툰> 시리즈가 굉장히 훌륭한 점은 뛰어난 '각색'으로 원작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수의 '축약본'이 각색을 하고 줄거리를 압축하면서 '원작'과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데, 이번 <문학툰>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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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쁜 뉴스의 나라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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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고 싶다. 아직도 우리 나라에 참언론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말이다. 주요 신문들은 '보수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지 오래고, 지상파 뉴스는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느라 나쁜놈을 나쁘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종편 뉴스는 태생부터 '한쪽 편'만을 들며 '뉴스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교양있는 시민들은 '종이신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지상파 뉴스'도, '종편 뉴스'도 점점 보지 않고 있고, 그나마 읽고 보더라도 '믿지 않은' 지 오래 되고 말았다.

 

  대신 '인터넷(포털) 신문'이나 '너튜브 동영상' 따위를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은 '언론'이 아닌데도 '언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마저도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낚기 위해 쓴 '허섭스레기' 같은 기사들이 점령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고 대충대충 읽고 보면서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만 훑어본 뒤, 평가를 내리곤 한다. 왜냐면 애초에 '뉴스의 가치'가 없는 선정적인 사진이 걸린 짤방(짤림방지)용이거나 기사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낚시성 제목'으로 클릭수만 늘리려는 기사들이 '메인'에 올라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속보'랍시고 올라온 기사들도 정치인 누구누구의 말(인용문)을 그대로 옮긴 '따옴표 기사'가 대부분이라 기자의 주장이나 의견 따위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전혀 없어져 버린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기자들의 고충도 이해할 점이 없지 않다.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발로 뛰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쓴 기사가 '무가치한 낚시글'에 밀려 메인에 오르지도 못하거나, 소신껏 기자의 양심을 걸고 쓴 기사가 '데스크(언론사 국장급 이상)'의 검열(?)에 걸려 기사의 원본이 수정되거나 애초에 올려지지도 않는 등의 억압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을 뚫고 무사히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한 꼭지를 차지한다고 해도 '시민들의 무관심'이 이런 가치 있는 기사들을 무덤으로 보내고 마는 우리 현실이 더 안타깝기 그지 없다.

 

  어찌보면 총체적 난국이다. 기자는 '기레기'라 욕먹고, 독자들은 '교양없다'며 깎아내리며, 그렇게 우리 언론은 '언론다운 언론'이 되지 못하는 비극이 악순환처럼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어려움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딱 하나 있다. 그 방법은 '진실'이 승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기 마련이기에 반드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건 바로, '교양 시민이 되는 길'이다.

 

  아직도 '가짜뉴스'와 '편향적 뉴스'를 보면서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약간의 상식만 있어도 '가짜'임을 알 수 있고, '한쪽으로 치우친' 불공정한 뉴스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도 홀라당 속아넘어가는 까닭은 바로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가치'를 배우길 멈추지 않아야 하는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도 이해가 부족한 이들이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여야로 갈려 '정책적 대립'을 벌이고,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고, 언론은 '정쟁'이란 표현을 곧잘 쓴다. 그리고 이런 뉴스를 접한 이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 놓았더니 하는 일이라고는 싸움질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회(입법기관)는 정부(행정기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니 국회의원이 대통령의 권한과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국회의원들끼리도 '여야로 갈려 어떤 법을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냐'면서 정책토론을 벌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국민은 '그걸'하라고 뽑아놓은 의원들이다. 그런데도 이를 싸잡아서 '싸움질'이라고만 판단해버리는 국민들은 '교양'이 없는 셈이고,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비두는 '언론'은 쓰레기인 셈이다.

 

  교양 있는 시민이라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회의원의 싸움질(?)을 지켜보면서 '이 정책에 관해선' 누가 더 잘했는지 근거를 내세워 목소리를 내고, 참언론이 되려면 '국회에서 벌어지는 정쟁'에 대해서 교양시민들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해 '제대로 된 여론'을 보도하면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잡아나가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라면 '언론'이 보도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테고 말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나쁜 뉴스', '가치 없는 뉴스'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참언론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제왕적인 권력과 거대 언론에 주눅이 들어 있기에 바꾸기 힘든 현실만 탓하고 있다. 그래 가지고 무슨 개혁을 하고, 혁명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느냔 말이다. 통탄할 일이다. 그러면서 '나쁜 뉴스'를 가려낼 스킬(?)만 화려하게 나열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무릇 '내공'이 받쳐주질 않으면 화려한 스킬은 그저 '관상용(눈요기)'일 뿐이다.

 

  지금 우리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킬'이 아니라 '내공'이란 말이다. 내공을 기르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공부(교양)'를 해야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인성', '도덕', '책임'과 같은 '선한 윤리의식'이 앞서야 한다. 내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배려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에서 살아야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너나할 것 없이 '부'를 쌓고, '권력'에 다가가기만 하면 '인두껍'을 쓴 악귀처럼 갑질을 부리고, 국민을 개돼지로 만들어버리는 거지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으냔 말이다.

 

  가지나부랭이들이 '쓰레기'같은 기사를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돈벌이를 위해 '광고성 기사'를 퍼나르는 양심없는 짓거리를 일삼는 것도 '인성'이 내팽겨쳤기 때문이다. 그 따위 인성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성'이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을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 '뉴스'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바르게' 살기를 바라냔 말이다. 권력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 부패한 권력이나 부정한 세력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지 못하게 막을 유일한 방법도 '바른 언론'밖에 없다. 그런 바른 언론을 만들고자 '교양 시민'도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정리하면, 바른 언론도 교양 시민도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없는 법이다.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야 한다. 한 사람이 바른 말을 하면 두 사람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만 만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바른 말'을 가려낼 수 있는 '교양쌓기'가 필요하단 말이다. 이 책에서 '나쁜 뉴스'를 가려내는 스킬을 나열한 것과 마찬가지다. 숲을 제대로 보려면 '전체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안목도 중요하고, '나무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력도 중요하다. 언론을 제대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뉴스의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교양시민의 안목'과 뉴스를 세세히 분석할 수 있는 '실력있는 언론인'이 함께 해야 한다.

 

  이 책이 쓰여진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슬픈 현실은 변함이 없다. 아니 언론은 그 역할을 더더욱 못하고 있다. '뉴스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수록 기뻐하는 세력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말이다. 이제 '언론'이 제스스로 바로 서기에는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젠 '독자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당장의 내 이익만 챙기며 살다보면 '더러워진 세상' 때문에 더욱 살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내 주위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보기 위해 작은 걸음을 모아야 할 때다. 그 작은 걸음이 모이고 모여서 '큰 걸음'이 되는 세상을 꿈 꿔야 비로소 세상은 바뀌게 된다. '착한 뉴스의 나라'가 되길 바라 본다. 더 나아가 '희망찬 뉴스의 나라'가 되어 전세계가 함께 힘찬 발걸음을 옮겨보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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