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 입문자를 위한 철학
김현강 지음, 안스가 로렌츠 그림, 김현강.신성엽 옮김 / 인간사랑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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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의 책은 두 번째다. 그리고 참 만족스럽다. 난 '몸소 실천하는 철학자'를 좋아한다. 생각만으로 그쳐 '세상 바꾸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철학자는 그저 '말 많은 수다쟁이'라는 느낌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마르크스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현실에 투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바꾸기를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노답'으로 귀결이 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끝없이 변주되면서 '자본주의'를 바로 잡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한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여기 '슬라보예 지젝'도 마르크스 못지 않은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슬라보예는 1949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며 라캉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그저 그런 학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계'에 입문하여 대통령체제에 도전하는 등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 접목시키려 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영향을 진하게 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철학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슬라보예는 '농담'을 즐겨 한다. 물론, 그의 농담에는 뼈도 있고, 가시도 있다. 그가 농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동구권 출신'이며, '사회주의 정치 색채'가 물씬나는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즐기는 농담이 목숨을 걸고 내뱉을 정도로 나치나 공산당의 감시와 같은 것들이 팽배한 '독재정권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는데도,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용기에 박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의 저적들은 한결같이 유머러스함이 빠지지 않아 철학적인 내용인데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그득하다.

 

  그 가운데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친절한(?) 책이다. 마치 그의 '연대기'를 연상케하는 내용을 뼈대로 삼아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늘어놓으며 설명해주고 있어 '슬라보예, 그는 누구인가'라는 부제가 어울릴 지경이다. 이와 함께 '근현대 철학사상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슬라보예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정립하게 되었는지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철학은 역시 철학이다. 잘 정리된 듯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옮기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을 멀리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철학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한 '헤겔의 변증법'으로 철학을 간략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철학'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맺기 마련이다. 이를 헤겔은 '테제-안티테제-진테제'라는 '정-반-합'으로 요약했다. 다시 말해, '기존 철학사상'을 '비판'하는 철학사상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철학사상'이 나온다. 이렇게 새로운 철학사상은 다시 '기존 철학'이 되어 '또 다른 비판'을 받고 '새로운 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의 거듭된 비판의 내용들'을 정리하다보면 자연스레 '철학사상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그 심오하고 복잡하며 방대한 내용을 간략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슬라보예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라캉)'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의 핵심은 '윤리적이면서 폭력적'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윤리'는 도덕적인 선함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에 윤리적인 탓이다. 오히려 욕망에 거스르려할 때 상황이 악화되기 십상이니, 욕망에 충실하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허나 욕망이 '성적쾌락'과 같은 수준이하의 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한다. 그는 '성차별'이 아닌 '성차이'를 뚜렷히 밝히며 여성을 비하하는 부류들에게 통쾌한 어퍼컷을 날리길 아끼지 않는다. 한편, 슬라보예는 '폭력'을 지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지만, 그에게 '폭력'이란 '혁명'에 가깝다. 다시 말해, 엿 같은 세상을 시원하게 바꿔버리기 위해서는 '폭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슬라보예는 자타공인 '마르크스주의자'인 셈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오늘날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공산당'은 히틀러의 나치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대명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입에 올릴 것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반대 개념인 '자본주의' 역시 노답인 상황에 처하자 세계의 석학들은 다시금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사상가들은 "2008년 이후, 자본주의는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대표적인 자본주의 폐해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방법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다.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우리 사회도 '수저 계급론'을 펴며, 금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입에 무는 것이지 흙수저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감히 들어볼 수조차 없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소득의 재분배'의 한 형태인 '기본소득제도'인데,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빨갱이' 운운하며 극렬하게 반대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능력'대로 먹고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든다고 맹신하고 있기에, '기회의 평등'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면서 오로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위한 규제철폐를 목놓아 외치고 있다. 대한민국의 상위 1%에 해당하는 금수저들의 외침이라면 이해하고도 남을 현상이지만, 웃기게도 99%에 해당하는 '흙수저'들이 '자유시장경제'를 훼손하고,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소득의 재분배'를 하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일에 열심이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지만,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접목시켜 수많은 '복지정책'을 펼침으로써 겨우 유지되고 있는 형국이다. 쉽게 말해, 상위 0.1%가 하위 99.9%의 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형평에 맞게 '복지정책'을 강화하며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빈곤층'이 더 많아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가난은 게을러서 생기는 질병'쯤으로 여기고서 늘어나는 빈곤층을 그대로 방치하여 소멸시켜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빈곤층은 게을러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아도 '내집(아파트) 마련'에 실패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과연 대한민국 국민들 태반이 게으름이라는 질병에 걸렸단 말인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착취'로 말미암아 '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실현시키려 노력했다. 나의 노동이 '내 조국'을 건실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며, '내 가정'을 먹여 살리기에 모자람이 없다면 힘든 줄 모르고 즐거이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조국', '우리 사회'를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소수 재벌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서 수탈 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아가 정부가 재벌들을 비호하고 노동착취를 보장하며 '내 가정'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굶주려 모아둔 목돈을 날름했다면, 이를 그저 '방관'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 목소리로 외친다.

 

  과거에는 이를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외쳤겠지만, 이제 우리의 혁명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한 목소리로 외치면 '혁명'이 완수되는 놀라운 경험을 우리는 해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전세계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가장 '혁명(폭력)적인 방법'이면서도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인 '촛불의 위력'을 전세계에 선보였다. 이는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이룩한 위대함이다. 이런 위대함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고 이어지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촛불을 들 시간이 오는 듯 하다. 또 한 번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비겁한 무리배들은 요란스럽게 목청을 높이고 난리법석을 떠들겠지만 말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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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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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시절에 난 '추리소설'에 푹 빠졌더랬다. 어릴 적부터 기괴하고 신비스런 '오컬트 문화'에 심취해 있던 참에 '살인사건'을 추리해나가는 명탐정들의 활약에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그 덕분에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 그리고 모리스 르 블랑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었던 추억이 있다. 물론 그밖의 여러 탐정소설도 읽긴 읽었지만, 줄곧 위 세 사람의 작품만 줄기차게 읽었더랬다. 아무래도 나의 취향이었나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코난 도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셜록 홈즈'가 등장해서 좋았고, 모리스 르 블랑은 <813의 비밀>, <기암성>에서 '이지톨'이라는 소년탐정이 등장해서 정말 좋아했지만, 유독 애거사 크리스티의 책에서는 '탐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에르퀼 푸아로'라는 명탐정을 인식하고 있지만, 어릴 적에는 유독 애거사의 탐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살인사건, 그 잡채'에 신선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하긴, 르 블랑의 '뤼팽 시리즈'에서도 난 뤼팽보다 소년탐정 이지톨이 더 좋았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유독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하긴 '미스 마플'도 잘 기억나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저 '사건, 그 잡채'만이 선명할 뿐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사건이 진행된다는 신선한 충격에 좀처럼 헤어나질 못하고, 사건이 미궁에 빠져 '끝까지(Z까지)' 이어지길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릴 적의 나는 '나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려버린 푸아로에 대해서 '반감'마저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남들과는 다른 '기발한 착상'을 했었다는 소박하나마 뿌듯함으로 풀이해보고자 한다.

 

  암튼, 책의 줄거리는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탐정인 '푸아로'와 동료인 '헤이스팅스'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것은 살인사건의 대한 '포석'이자,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홈즈와 왓슨'의 대화로 시작하는 코난 도일과의 유사성이 엿보인다. 하긴 두 작가 모두 '영국작가'이니 그런 듯도 싶지만,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이런 전통(?)을 따르곤 한다. 왜냐하면 이런 스타일로 소설의 시작을 장식하면 뒤이어 벌어질 '사건개요'를 잘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탐정'이라는 점을 새삼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명탐정'에게 동료나 조수가 항상 같이 붙어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자화자찬'보다는 '곁에서 띄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객관적인 신빙성이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울러, 명탐정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는 또 있다. 그것은 '추리소설'속의 경찰이 언제나 '무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사'나 '증거수집', 그리고 '범인검거' 등 공권력의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으면서도 언제나 '명탐정과 동료'보다 뒤쳐지거나, 엉뚱한 수사나 범인을 잡아들이고, 뻔히 보이는 단서조차 허술하게 놓쳐버리고서 모든 공을 '명탐정'이 차지하는 수법을 곧잘 쓰곤 한다. 정말 뻔한 수법이지만, 추리소설을 읽는 맛, 또한 이것 뿐일 것이다. 안 그런가?

 

  그럼 <ABC 살인사건>의 매력을 진단해보자. 으레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범인찾기'에 푹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로 사소한 단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유심히 '관찰'하며 탐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재빠르게 '단정'짓곤 한다. "범인은 바로 너야!"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소설속 명탐정처럼 조목조목 근거를 대지는 못하고 대개 '찍는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제대로 맛보려면 섣불리 찍지 말고, 범인일 수밖에 없는 근거(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범인찾기'에 꼭 필요한 단서가 차근차근 들어난다는 점이다. 애초에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푸아로는 범인이 누구인지, 왜 범행을 일으키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명색이 '명탐정'이라면서도 날카로운 예지력으로 '살인사건'을 막지도 못하면서 그저 '범인이 직접 보내는 편지'만을 기다리며 계속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을 그저 방조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바로 '단서'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초에 '모든 단서'를 주어지고 난 뒤에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단서'를 하나씩 모아 완성하듯 찔끔 질끔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명탐정으로 소문난 푸아로조차 사건해결은커녕 '범인'이 누군지도 지목하지 못하고, '살인사건'을 막지도 못한다. 조금씩 드러나는 단서가 '살인사건,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렇게 살인사건은 A로 시작해서, B를 지나, C도 지나, D까지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C까지 이어져오던 범인의 '완벽한 살인사건'이 D에 이르러서는 왠지 모르게 어설프고, 성급하기도 했으며, '결정적 실수'를 하고 만다. 추리소설 마니아쯤 되면 바로 이 '결정적 실수' 때문에 범인이 누군지 확신하게 되고 명탐정보다 더 빨리 '범인검거'를 위한 증거수집을 끝마쳤을 것이다. 왜냐면 '범죄를 저지르는 까닭'이 몇 가지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원한이나 복수 때문이고, 둘째는 사랑과 질투, 배신 같은 감정 때문이며, 셋째는 금전적 이득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누가 누구에게 원한을 품었거나, 누가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범죄가 일어난 뒤에 누가 '이득'을 챙겼는지 꼼꼼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당신도 명탐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범인이 밝혀지고 나면, 왜 범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또는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뒷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토리를 즐기면 된다. 그리고 이 스토리가 감동적이거나,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짜릿하거나, 뒷통수를 후려맞은 것처럼 반전이 드러나면 '명작추리소설'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크리스티의 작품은 대개 '반전'을 주는 쪽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범인이었거나, 기발한 범행수법, 그리고 기막한 반전 따위가 '추리소설의 매력'인데, <ABC 살인사건>은 이 세 가지 매력조건이 적절히 믹싱되어 '감칠맛'이 최고인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1920년부터 70년까지 활발히 작품을 써왔으니 '100주년 기념'을 맞아 다시금 조명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올해 <나일강의 죽음>이 영화화되었으니 벌써 기념은 시작된 셈이다. 나도 새삼스레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리뷰를 새로 써볼까 한다. 나도 3~40년 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게 되는 셈이다. 옛 추억에 풍덩하고 빠져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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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엄마와 물건 - 물건들 사이로 엄마와 떠난 시간 여행
심혜진 지음, 이입분 구술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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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거창한 것만 떠올리기 일쑤다. 교과서에서조차 '임금의 업적'만 나열을 하고 '위인들의 생애'만 다루며, 인류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굵직한 사건' 들을 예로 들면서 스케일을 한껏 키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로 오면서 역사의 범위는 점점 복잡해지고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으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위대하고 유구한 역사의 흐름만을 따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늘 거창해야만 하는 걸까?

 

  한편, 임금이나 위인이나 모두 같은 사람인데, '그들'만 역사의 주인공이 되란 법이 있느냔 말이다. 더구나 무릇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다고 친다면 '개인의 취향'이 얼마든지 반영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역사책'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든지 위인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를 테면, '엄마' 같은 위인 말이다.

 

  엄마가 왜 위인이냐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당신은 엄마를 존경하지도 않으신답니까? 세상에는 인류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위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신 엄마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의 모든 것'을 역사책으로 쓸 수도 있다. 특히, 엄마 때부터 '즐겨 쓰던 물건에 담긴 현대사의 질곡'을 주제로 삼아 역사책을 쓴다면, 바로 이 책일 것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역사책>은 아닐지라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떠올리신 분들이 꽤나 많을 게다. 왜냐면 대한민국만큼 '빠르게' 변천한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발만 보아도 그렇다. 지금 100세를 살고 계신 분이 살아계신다면 그분은 어릴 적에는 '짚신'을 신으셨을 것이고, 비가 오는 날이면 '나막신'도 신어보셨을 것이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고무신'도 신어보셨을 것이고, '가죽신'을 신고 폼을 내기도 해보셨을 것이다. 젊어서 직장에 다닐 때에는 '구두'를 신고 다녔을 것이고, 평상시에는 '운동화'를 신고, 근래에 들어서는 '기능성 신발'을 신으며 발건강에 신경 쓰면서, 요즘처럼 부쩍 추워진 날씨에는 발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털신'을 신으며 평생 자신이 신어본 '신발의 변천사'를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게다. 이렇듯 '신발' 하나에도 동서양을 아우르고 전통과 현대, 그리고 시대별 유행까지 모두 담겨 있고, 시대마다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까지 수용하였으니,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사소한 물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발달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글쓴이와 글쓴이의 엄마가 나눈 '대화'가 주를 이룬다. 지금 현재의 '나'는 이런 물건을 쓰는데, 과거의 엄마, 또는 엄마의 엄마는 어떤 물건을 써왔었는가하고 말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읽다보니, '나 어릴 적의 추억'이 떠올라 색다른 감상에 빠지기 일쑤이기도 했다. 이런 점이 책의 첫 번째 매력이었다. 또 다른 매력은 글쓴이가 '여성'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남자'들은 늘 쓰던 물건에 그닥 애착을 갖지 않는 편이다. 그저 손에 익숙하고 편하면 그뿐, 그 이상도 없고, 쓰다가 없어도 그만이기에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거나 '까라면 까..'라는 묘한 신조(?)가 남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까닭에 망치가 있으면, 못을 박는데 쓰다가도, 밤송이를 깔 때도 쓰고, 땅을 팔 때도 쓰고, 심지어 밥 먹다가 이를 쑤실 때도 쓰는..무던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무래도 '군대식 문화'라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런 점이 없지 않나 싶지만, 확실히 '여성'들의 관점에서 물건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집안 살림을 하다보면 세탁기, 청소기, 밥솥, 김치냉장고 등과 같은 '전자제품'에 대한 위대함을 저절로 깨닫곤 한다. 나 어릴 적에는 부뚜막에서 아궁이에 불을 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스레인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풍로', 또는 '곤로'라고 불리는 기구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음식을 조리하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리면 '즉석밥'이 뚝딱 만들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어릴 적에 밥 타는 냄새에 눈을 뜨고, '삼층 떡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도시락도 싸지 못해 점심시간에 물배를 채우고 1시간 남짓 출렁출렁거리는 뱃속 장단을 치던 것이 '컵라면'의 등장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게 되는 추억을 갖고 있는지라, 집안에 '전자제품'이 하나둘 들어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실제로 세탁기가 없을 적에 울 엄마는 화장실에서 빨래판에 빨래비누를 듬뿍 묻혀서 비비고 또 비비곤 하셨다. 좀 두꺼운 빨랫감에는 빨랫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 세탁기가 들어오자 '세상 참 편해졌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늘 처음에만 그러셨다. 세탁기가 들어와도 '빨랫감'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기에 빨래를 널고 걷고 개고, 다시 꺼내 입히는 수고는 똑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베란다에 널어서 빨래가 마르지 않으니 '연립주택' 앞마당에 집집마다 '빨간 빨랫줄'을 걸고서 널어놓기 일쑤였다. 빨래는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날에 잘 말랐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는 뽀송뽀송 잘 마르던 빨래가 한겨울이면 고드름을 주렁주렁 달려 있기 일쑤였다. 초창기 세탁기에는 '탈수기능'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그 고드름을 참 잘도 따먹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제성분'이 제대로 분해되지 않아 '화학물질 덩어리'였다는 생각에 먹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엔 뭐든 참 잘 먹었다.

 

  암튼, 전자제품이 쏙쏙 들어와서 '엄마의 수고'가 덜어진 듯 싶었지만, 집안살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남정네'들은 전자제품이 '여성을 게으르게 만든다'라고 단단히 오해했지만, 정작 '전자제품'이 집안살림을 대신한다고 '집안일, 그 자체'가 사라진 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젖은 손이 애처로워 '고무장갑'을 사주며 생색을 내도 '고무장갑'이 엄마 손을 보호해줄 수는 있어도 '설겆이, 그 잡채'를 대신 해주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훨씬 더 과학이 발전한 미래에도 똑같을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 집안일 로봇'이 등장한들, '집안일, 그 잡채'는 여전할 것이다. '로봇청소기'가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얘가 아니라 '물걸레 기능'까지 탑재되었다고 해도, 꼼꼼한 사람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훨씬, 훨씬 더 나중에는 '꼼꼼한 사람손길'이 탑재된 전자제품이 등장한다고해도 그닥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새삼 옛일을 떠올려 아스라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고, 대한민국의 급속한 변천사를 들여다보는 역사기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암튼 참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누군가 쓰다 버린 '파란 비닐우산'이었고, 비가 오면 학교앞으로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오신 엄마가 있나 없나 살펴보던 추억이었다. 대개는 바빠서 학교앞에 오시지 못했지만, 간혹 오시는 날에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했다. 울엄마가 너무 예뻐서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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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기후 위기 와이즈만 미래과학 12
김성화.권수진 지음, 허지영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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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하며 지금껏 생존해왔다. 날짐승처럼 날개도 없고 들짐슴처럼 이빨과 발톱도 없어서 '약한 존재'로 살아왔지만, '불의 발견' 이후에는 문명을 건설하며 '최상위포식자의 위치'에 군림하듯 두려운 것 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허나 인류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문명을 건설한 뒤에는 자연이 주는 재앙이 두려워졌다. 가뭄과 홍수, 화산과 지진, 그리고 온갖 것을 다 날려버릴 듯 몰아치는 태풍의 위력 앞에 인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해도 자연이 가져온 재앙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이 몰고오는 재앙을 극복하는 기적을 일으키곤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던 것일까? 인류는 과학의 힘을 길러 자연을 정복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뿜어내기에 이르렀다. 신의 영역이라 여겼던 것을 하나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인류는 '창조의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오만까지 갖게 되면서 자신감은 어느새 자만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극복이라 믿었던 '과학의 힘'은 더 큰 재앙을 불어오고 말았다. 과학의 발전하면 할수록 위기는 더욱 크게 찾아왔고, 더욱 발전된 과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지속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끝내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기후위기'가 그것이다.

 

  사실, 기후위기는 지구적인 사이클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신생대 이후 지구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왔고, 그때마다 지구는 얼었다 녹았다는 반복해왔다. 다시 말해, 지구가 추웠다 더웠다 하는 '기후 변화'는 늘 있었던 현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인류의 등장 이후에 지구의 자연스런 변화에 '다른점'이 발견되었다. 늘 있었던 '기후 변화'가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100만 년~ 1억 년을 주기로 일어났던 '기후 변화'가 1만 년전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인 변화를 보이더니 근래에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기온 상승'을 기록하더라는 것이다. 불과 100년도 안 된 사이에 평균 기온 1도라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엄청나게 소비하면서 지구 나이 46억년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온실가스'를 공기중으로 뿜어냈다. 그 결과, 바다의 온도가 100년 사이에 1도가 상승하고 말았다.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에 바다의 온도가 1도만 더 오르게 된다면 인류를 비롯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고작 1도 오를 뿐인데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되묻는다면, 곰곰이 상상해보길 바란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 물을 담고 팔팔 끓게 만드는 장면을 말이다. 무척 간단해 보일 것이다. 이제 그 냄비속에 '지구의 바닷물'을 몽땅 담고 끓여 보길 바란다. 1도 올리는 일이 쉬워 보일까? 아마도 쉽게 상상이 가질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구의 바닷물'을 끓일 정도로 큰 가스레인지도 없다. 오직 '온실가스'로만 바닷물을 데웠는데 무려 1도나 올라가버린 것이다. 인류가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온실가스'를 뿜어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해냈다. 70억 인구가 뿜어내는 '온실가스'의 양이 어마무시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아무런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앞으로 10년 뒤, 아니 20년 뒤에 인류가 숨을 쉬지도 못할 정도로 '기온'이 상승하고, 해수면은 상승해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조차 남지 않고, 뜨거워진 바닷물로 인해 태풍은 더욱 강력하고 더 자주 불어닥칠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를 먹여 살릴 '경작지'는 찾기조차 힘들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될 판인데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치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말이다.

 

  뭐, 아직도 '기후 변화'는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떠벌리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대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쏟아져도 전지구적으로 볼 때 '균형'을 맞출 것이기 때문에 살짝 이사를 가면 더욱 살기 좋고 풍요로운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학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맞다하더라도 '대한민국 서울'을 사알짝 어디로 이사시킬 셈인가? 결국 정든 땅을 떠나 황량한 땅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정녕 쉬운 일인가? 현재 남태평양의 섬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포기선언'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뉴스에서는 지구 어디선가 가뭄이 들어 굶주리고 대홍수로 물난리가 났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화산폭발과 대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정녕 '기후위기'가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인가.

 

  화석연료 사용은 반드시 줄어야 한다. 지금 곧 맞이할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없을 지라도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체에너지'를 빠르게 확보해야 한다. 온실가스로 일어난 끔찍한 비극인데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생명을 연명할 수는 없지 않느냔 말이다. 천만다행으로 '지구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청정연료'를 사용하면 우리가 사는 환경이 보다 깨끗해지기 마련이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살았던 추억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우리의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할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아니겠냔 말이다.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면 '기후 위기' 따위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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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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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널리즘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대중에게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저널리스트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그럼 요즘처럼 신문이나 잡지를 도통 읽지 않는 시대에는 누가 저널리스트라 할 수 있을까? 대중에게 시사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더 저널리스트'가 있기는 한 걸까? 순방길에 오른 현 대통령 전용기의 추락을 기원하는 사제일까? 그 사제들이 신부직위에서 해제되고 종교계에서 파문을 당한 것을 보도한 기자일까? 아니다. 뭔가 부족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시사 내용'을 전달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단박에 알아챌 정도로 명쾌한 '기사'가 아니고서는 감히 '저널리스트'라고 입에 오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는 '더 저널리스트'가 없다.

 

  헤밍웨이는 작가로 유명해지기 전에 '기자'로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든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현장감'이 뛰어난 기사를 쏟아낸 '저널리스트'라고도 전한다. 그가 '더 저널리스트'가 된 까닭도 바로 그 '현장감' 때문이다. 비겁한 기자들은 종종 자신이 직접 취재하지도 않고 증거를 찾기 위해 발로 뛰지도 않고 '누구인지 밝힐 수 없는' 정보원의 말만 믿고 섣불리 기사를 쏟아내기도 한단다. 기자들이 양심도 없이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까닭은 '속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보다 더 빠르게 기사를 쏟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그런다고도 하고, '대서특필'로 남기 위해 누구와의 정보공유도 없고, 사실검증(팩트체크)도 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찍어내듯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낸 뒤에 나몰라라 하는 얌체라서 그런다고도 한다. 암튼 이유를 불문하고 이렇게 비겁한 기사를 써놓고서 뻔뻔스레 '유명세'를 거머쥐는 이들이 종종 발생하기에 너나할 것 없이 '거짓기사 경쟁(?)'에 뛰어든다고 한단다.

 

  이미저도 오늘날엔 '유사언론(너튜브, 포털사이트 등)'이 인터넷기사를 도배하다시피하는 까닭에 전통적인 신문이나 잡지는 아무도 보지 않고, 팔리지도 않는 처지에 내몰리면서 '무한경쟁'에 돌입한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무책임한 저질기사'가 온통 도배를 한 지 오래되고 말았다. 그래서 '저널'다운 저널을 좀처럼 찾아보기도 힘들고, 간혹 이슈가 된다 싶은 기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검증'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추측성 소설'에 불과하다고 판명이 나는 등.. 정말이지 '정통 저널리즘'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그렇다면 이 책, <더 저널리스트>에 나오는 헤밍웨이의 기사는 눈여겨 볼 만한 저널리즘 기사들이었나? 무려 100여 년전의 기사들이다보니 '기사'가 갖고 있는 시사가 적절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를 테면, 1910년대 미국 어느 도시의 정치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어서 주목된다는 기사를 남겼다할지라도 '기사의 배경'이 됨직한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내용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그 기사'가 적절한 시사성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하기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헤밍웨이'가 꽤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기사를 작성하면서 '권력가'와 '유명인' 들을 까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또한, 헤밍웨이가 직접 본 현장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와 '스페인 내전 속 마드리드' 따위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있으므로 '간접적'이나마 헤밍웨이가 던지는 '시사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곳에서 직접 겪고 본 것을 사실 그대로 '기사'에 담으려는 진실된 마음이 절절하게 전달되는 느낌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스트'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은 '현장(르포)을 직접 탐방하고 사실검증을 마친 뒤'에 전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이 벌어진 마드리드 한복판에 뛰어들어 취재를 하면서 '거짓기사'를 작성해서 대박을 터트릴 욕심에 동료기사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덜떨어진 기자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내전의 한복판인 마드리드였지만 '전쟁의 위협'은 잦아들고 모처럼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마드리드였는데, 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하루만에, 그것도 호텔방 한 구석에서 상상으로 써낸 '무시무시한 전쟁속에서 공포에 떠는 마드리드 시민들'이란 기사를 제 손도 아닌 동료 여기자의 손에 들려서 스페인 밖으로 송출하려 한 몹쓸 기자였다. 만약, 스페인군의 검열에 그런 내용의 기사가 들통이 났더라면 '그 기사'를 국외로 빼돌리려던 여기자는 그 자리에서 검거되어 총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무사히 국외로 빼돌려 미국시민들에게 '그 공포감'을 전달했더라면 모처럼 평온을 맞이한 마드리드는 '외부에서 찾아든 오해'로 인해 다시금 피비린내나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스페인'에 남겨진 현장취재 기자들의 생명도 위험해졌을 것이고 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린다는 속담은 이럴 때 딱 어울릴 것이다.

 

  그뿐 아니라 헤밍웨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우두머리인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돌려까며 이탈리아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밝혀냈고, 독재자를 비호하는 여타의 강대국들의 검은 속내를 까발리며 '공산주의(볼셰비즘)'를 막기 위해 '파시즘(무솔리니, 히틀러)'을 감싸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위정자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에티오피아 전선에 파병된 이탈리아 병사의 주검을 선명한 사진으로 보여주며 하나하나 주석을 달기도 했다. 강대국(?) 이탈리아의 병사들이 전쟁터에 보내진 뒤에 벌어지는 사실들이라면서 이들은 분명 조국의 환호를 받으며 이곳으로 보내졌을 텐데, 환대를 받기는커녕 차가운 시신으로 눕는 것으로도 모자라 날짐승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손과 발, 심지어 얼굴의 일부까지 총탄과 포탄에 찢겨져서 날아가버린 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면서 전쟁은 애국하는 병사들의 주검조차 수습하지 않는 비정한 것인데도 '전쟁'에 환장한 이들은 전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날것, 그대로' 기사에 담아냈다.

 

  저널리즘이란 그렇다. '날것,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기자는 이런 생생한 정보를 모든 이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물론 '생생한 정보'에는 기자의 '가치판단'으로 걸러낸 정수가 담겨야만 한다. 아무리 '날것'이라 해도 그냥 '전달'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생한 정보에 기자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 기사로 뽑아내야만 한다. 그 기사가 대박을 칠지 어떨지는 운에 달리긴 했다. 그럼에도 '날것, 그대로'의 기사에 독자들은 반드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저널리즘'이다. 물론 '저널리스트'도 중요하지만, 사람보다 먼저 양성해야 할 것은 '저널리즘'에 목마른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저널리즘'을 소비하기 위해선 교양을 쌓아야 한다. 시쳇말로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비로소 '저널리즘'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널리즘'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져야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들이 활동할 터전이 마련된다. 그 반대라면 저널리스트들이 아무리 입 바른 소리를 높이고 날카로운 기사를 쏟아낸 들 맥이 빠져서 금세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용감하고 굳센 저널리스트라 하더라도 그들도 사람인지라 '먹고 사는 문제'가 결부되면 저널리즘을 쏟아내고 싶어도 못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기껏 용기를 내어 '밥줄 끊어질 각오'를 하고 저널리즘을 썼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그 저널리스트는 끝내 굶어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널리즘에 목마른 교양있는 독자들이 먼저 양성되어야 한다. 그런 뒤에 '더 저널리스트'가 없는 현실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성명을 내면...어디선가 스물스물 저널리스트들이 싹을 튀울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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