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 문, 파자마 파티를 하다 이사도라 문 시리즈 9
해리엇 먼캐스터 지음, 심연희 옮김 / 을파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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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파자마 파티를 하다>  해리엇 먼캐스터 / 심연희 / 을파소 (2020) [원제 : Isadora Moon Has a Sleepover (2019)]

[My Review MMLXXXII / 을파소 10번째 리뷰] 오랜만에 '이사도라 문 시리즈'를 다시 읽었다. 이 책으로 논술수업을 하던 여자아이가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말이다. 딱히 독서논술 수업을 하기에 좋은 책은 아니었으나, 요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제가 '나다운 것을 감추지 말고 당당히 드러내라!'이기에 퍼뜩 떠오른 어린이책이 바로 '이사도라 문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사도라 문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었다. 바로 '뱀파이어 요정'이라는 사실이다. 아빠가 뱀파이어, 엄마가 요정으로 이사도라 문은 아빠와 엄마의 반반이 섞인 혼혈이다. 그래서 뱀파이어처럼 재빠르고 정확하지도 못하고, 요정처럼 아름답고 우아하지도 못해서,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는 법! 뱀파이어 요정이기 때문에 뱀파이어들과 달리 '마법지팡이'를 쓸 줄 알고, 요정과 달리 '남다른 감각'을 뛰어나게 쓸 줄 안다. 그래서 이쪽 저쪽에서도 반쪽이 취급을 당하던 이사도라 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줄 아는 인간들'이 다니는 학교를 선택해서 쭉 다니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인간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말이다. 왜냐면 평범한 인간들에 비하면 '이사도라 문'은 할 줄 아는 것이 너무 많은 다재다능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능이 많은 이사도라 문은 수많은 시리즈에서 다양한 사고를 터뜨리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번 <이사도라 문, 파자마 파티를 하다>에서는 학교에서 '케이크 만들기 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최고의 '반짝반짝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 힘을 모으게 되는데, 이사도라 문과 함께 케이크를 만들게 된 '조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기 위해서 조이네 집에 초대를 받게 되는데, 조이가 '파자마 파티'도 겸해서 하자고 제안을 하게 된다. 뱀파이어 요정이기에 인간들이 하는 '파자마 파티'를 해본 적이 없는 이사도라는 정말 해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신 나게 파자마 파티를 하면서 조이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반짝반짝 케이크'도 완성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만든 케이크였지만, '최고의 케이크'로 뽑히면 <반짝반짝 케이크> TV쇼 방청권을 부상으로 준다는 이야기에 욕심을 부리게 된다. 인간들에겐 금지된 '마법'을 살짝 부려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이사도라와 조이의 반짝반짝 케이크는 이름 그대로 '반짝반짝' 마법 케이크로 변신하게 된다. 마치 불꽃놀이가 케이크 위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하고, 보고만 있어도 감탄을 하게 되는 케이크였다. 이 케이크를 내놓기만 하면 <반짝반짝 케이크> TV쇼 방청권은 따논당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양심에 찔렸다. 분명 다른 친구들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케이크를 만들어서 가지고 나올텐데, 자신은 '마법'을 부린 케이크로 상을 타는 것은 마치 '가로채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이에게 이 '마법 케이크'말고, 우리끼리 열심히 해서 만든 '평범한 케이크'를 내놓자고 제안을 한다. 그리고 조이도 찬성을 하는데...과연, '반짝반짝 케이크 만들기 대회'에 출품된 케이크 가운데 1등을 차지할 케이크는 어떤 케이크일까?

세상에는 욕심나는 것들이 참 많다.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바람이 너무 커서 '반칙'을 하거나, '편법'을 사용하는 등등 '공정하지 못한 방법'을 써서 1등이 차지해야 할 상을 가로채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게 차지한 '1등'이 과연 영광스러울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또한, 겉으로는 기쁘고 즐겁겠지만 마음속까지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차지한 것이 기쁘고 즐겁고 영광스럽기까지 하다면 '악당'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다른 재능'도 자신의 것인 것은 사실이다. 허나 '공정한 경쟁'을 하기 위해선 '똑같은 기준/잣대'을 들이대고 '동일한 방법'으로 재능 경쟁을 해야만 한다. 이를 테면, 인간은 마법을 쓸 수 없는데, 뱀파이어 요정은 마법을 써서 1등을 차지한다면, 불공정한 경쟁을 한 것이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친구 사이에서는 더욱더 그래선 안 된다. 특별한 재능으로 친구와 불공정한 시합을 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 이사도라와 조이가 만든 '반짝반짝 마법 케이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 <이사도라 문 시리즈>는 상당히 소녀소녀한 동화책이기 때문에 씩씩한 남자아이들이 읽기엔 다소 어색한(?) 책이기도 하다. 책의 표지부터 안쪽 삽화까지 온통 분홍분홍하기 때문이다. 내용도 소녀들이 겪을 법한 사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여자어린이들에게 권하는 바다. 요즘 <케데헌> 같은 경우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큰 인기를 얻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아무래도 소년들은 읽기 힘든 면이 다분하다. 그래도 소녀감성의 견문을 넓히고 싶은 남자아이들이라면 도전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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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는 아이들의 생생 경제 교실 3 세금 내는 아이들의 생생 경제 교실 3
최재훈 지음, 안병현 그림, 옥효진 감수 / 샌드박스스토리 키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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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는 아이들의 생생 경제 교실 3>  최재훈 / 옥효진 / 샌드박스스토리 키즈 (2024)

[My Review MMLXXXI / 샌드박스스토리 키즈 3번째 리뷰] 어린이들에게 '조기 경제교육'을 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긴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경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서 손수 돈을 벌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뭐, 어린이들도 아주 돈을 쓰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자기가 쓰는 용돈 정도는 직접 벌어서 쓰게 하는 것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적정 수준의 돈벌이(장사)'일 것이다. 그런데 '돈벌이'라는 것이 모두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는 한 달에 10만 원 정도를 벌었다면, 어떤 이는 한 달에 20만 원 손실을 볼 수도 있다. 개중에 초대박을 쳐서 한 달에 500만 원 이상의 순수익을 거뒀다면 어쩔 것인가? 또는 쫄딱 망해서 과도한 대출에, 위험천만한 사채에, 피싱 사기까지 당해서 1000만 원 이상의 빚쟁이가 된다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거기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서 누구는 '초기 자본금'이 재벌급인데 반해, 누구는 '맨땅에 헤딩' 수준이어서, 공정한 경쟁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면 애초에 '경제교육'이라는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교육'을 빌미로, '또 다른 완전경쟁시장'을 오픈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애초에 어린이들에게 이런 과도한 경쟁을 주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옥효진 선생님이 펴낸 <세금 내는 아이들>은 정말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미소'라는 학교 교실에서만 쓸 수 있는 가상화폐를 만들고, 아이들이 '직업선택'을 해서 손수 월급도 받고, 받은 월급으로 '합리적인 소비'도 하며, 자신이 가진 '자본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고, 투자도 할 수 있으며, 보험도 가입하고, 기부도 할 수 있는 등등 한 국가 안에서 벌어지는 '실물 경제'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세금 내는 아이들의 생생 경제 교실>은 그 책의 '만화 버전'으로 펴냈지만, 더 자세하고, 더 꼼꼼하게 재연하여 어린이들로 하여금 '경제란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특히, 3권에서는 '부동산 매매', '세금 횡령', '경제 위기 극복 방법' 등 <세금 내는 아이들>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경제 교육도 다루고 있어서 더욱 유익할 것이 틀림없다.

무릇, 경제란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갈 내용들인데,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른들도 해결하기 힘든 '국가 경제 위기'의 내용을 다루며, 아이들이 직접 '국무회의'를 거쳐서 위기극복방안을 내놓길 바라는 내용은 너무 과하다는 지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내놓을 위기극복 방안이라고 해봐야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며, '교과서'에서 이미 배운 내용대로 '모범답안'을 내놓듯 짜여진 각본이 아니겠냐는 타박도 나올 수 있겠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것이 완벽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모티브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을 잘 숙지해서 '모범답안'과 다를 바 없는 정답을 외서 답한다고 타박할 것은 못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공정'한 경향을 보이고, '더 정의'를 중시하며, 어른들보다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어른들이 풀지 못한 숙제를 어린이들에게 슬쩍 물어보고 기대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정말 '우문현답'과 같은 좋은 해답을 내놓는 경우도 꽤 많다. 그런 그런 답을 현실에서 바로 써먹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아직 알지 못하고, '권모술수(속임수)' 따위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천진난만한 해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이 정말이지 부끄러워 숨고만 싶어질 정도다.

그래서 이 책 <세금 내는 아이들의 생생 경제 교실>에서 다루는 경제 교육의 내용은 '교과서'적인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화 버전'이다보니 책을 읽고 떠올리는 '상상력'도 발휘하기 힘들어서, '경제개념'을 그대로 이해하고 달달 외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만의 장점을 꼽으라면, 다른 '어린이경제 교육도서'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 잔뜩 만들지만, 이 책은 그야말로 '어린이경제교육의 정석'을 쉽게 이해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경제개념 교육도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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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3 - 넓은 변방에서 부딪치는 천하의 도리 쾌자풍 3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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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3 : 드넓은 변방에서 부딪히는 천하의 도리>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X / 해냄 5번째 리뷰] 아직 완결되지 못한 소설이 또 하나 있다. <치우천왕기>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출판사'가 바뀌는 헤프닝을 거쳐 결국 '완간'이 되긴 했지만, <파이로 매니악>과 마찬가지로 4권 출간을 앞두고 '함흥차사'가 되고 만 케이스를 만들고 말았다. 일찌기 <퇴마록>이란 '대서사'를 완결시킨 이우혁이기에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꽤나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10년이 넘도록 '완결'도 하지 않고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은 '이우혁답지 않다'고 단언하고 싶다. 어쨌든 '뉴 퇴마록(가제)'으로 <퇴마록>의 뒷이야기를 쓰겠다는 결의(?)를 내비쳤고, '또 하나의 지구(!)'를 만들면서 퇴마사들이 있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퇴마사들이 없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분해서 쓸 수도 있음을 밝혔으니, 살포시 기대할 따름이다.

<쾌자풍>은 별 능력도 없고 덜 떨어진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무림의 절정고수조차 풀지 못하는 난제를 얼렁뚱땅인 방법이지만, 의외로 절묘한 방식으로 찰떡같이 해결해내는 '블랙 코미디'같은 유쾌한 소설을 쓰려던 것 같다. 그런데 애초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사안'이 중대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해나가다보니 그런 능력조차 능력이라면 능력이랄 수 있으니 '초기의 캐릭터 컨셉'에서 실패했거나, 부담을 느끼고 더 이상의 사건 전개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는 <파이로 매니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한'으로 내몰다보니 '풀어낼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지고, 별다른 능력도 없이 '정의감' 하나로만 버티다가 더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용두사미'격으로 어설프게 이야기를 결론 짓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심사숙고를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소설은 <쾌자풍>이라고 한다.

<쾌자풍>은 의외로 '도리'에 대한 물음을 곧잘 던진다. 사마천이 역사서 <사기>를 지어놓고 '천하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지만, 이우혁은 <쾌자풍>을 써놓고서 '천하의 도리'를 논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왕조시절의 '천하의 도'란 왕도정치의 궁극적인 실현이 가능하겠느냔 물음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선한 왕이 선정을 베풀어서 온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천하를 평정해서 외침 걱정없이 누구나 안빈낙도를 실행할 수 있는 시절을 구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디 '임금 하나'만 잘나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천하의 공도'라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입에 올리며 세상이 저들 꼴리는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리'가 어긋났다면서 임금 탓으로 돌리고, 저들의 맘에 흡족하지 않아 수틀리기라도 하면 임금을 갈아엎으면 어긋난 도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곤 하니 문제란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를 공부하고, 경제를 공부하는 것들이 모두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 같다. 그렇다면 명나라 초기에 발생한 '토목의 변', '탈문의 변'이 벌어져서 발생한 억울한 일을 당한 사연을 한 번 생각해보자. 외적(몽골 오이라트)이 쳐들어왔는데 무능한 황제(정통제)가 간신의 언변에 속아 몸소 출정을 했고, 제대로 군사를 다루지 못해 첫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고 황제가 산 채로 포로가 되어 버린 사건이 '토목의 변'이다. 명나라로서는 최고의 위기 상황을 맞이했고, 포로가 된 황제를 앞세워서 북경을 포위 공격한다면 명나라로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황제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성을 지켜냈더라도 볼모 신세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더라면, 나라를 구했더라도 황제를 구하지 못한 죄를 물었을 것이고, 반대로 황제의 목숨은 구했더라도 나라는 망해서 온백성이 외적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신 우겸은 '새 황제(경태제)'를 내세워 국가를 온전히 살리는 수를 마련했고, 이는 외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아주 절묘한 묘수였다. 그렇게 외적을 물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전을 하고 퇴각을 하는 오이라트의 군대는 애써 잡았던 명 황제(정통제)를 살려서 돌려보냈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 나라에 '두 명의 황제'가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겸은 급한대로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아 자금성의 깊은 곳에 유폐시켰고, 경태제로 하여금 국정을 이끌어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일단락이 되어서 정통제가 천수를 누리다 죽고, 경태제의 후손으로 하여금 황실의 명맥을 잇게 하면 순탄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경태제는 건강이 안 좋았고, 재위 8년째 그만 붕어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새로운 황제로 '천순제'가 등극했는데, 이 사람은 과거 '정통제'로 불리던 이였다. 옛 임금이 다시 재위에 오른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우겸의 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말았으니, 이를 '탈문의 변'이라 부른다. 비록 역적으로 내몰며 죽었으나 백성들은 안다. 우겸이 충직한 신하였으며, 큰 위기를 맞아 슬기롭게 처신하여 만 백성을 위한 훌륭한 정책을 주도한 훌륭한 위인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홍치제' 때가 되자 억울하게 역적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한 '우겸'을 충신의 반열에 올렸고, 억울하게 죽은 넋을 기려 '사면복권'하였으며, 살아남은 우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모든 죄를 묻지 않는다고 일단락을 하였다. 비록 황제의 위치에서 '사과'나 '사죄'라는 표현을 쓰지는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한 셈이다.

그런데 당한 처지에서는 어찌 억울한 것이 없겠는가. 특히 우겸의 아들 우담에겐 지울 수 없는 치욕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복수를 다짐해도 이상치 않을 것이다. 이는 제삼자 입장인 백성들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나라를 구한 의인인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목숨을 앗아가고 역적으로 몰아 패가망신을 당하게 하다니, 너무 심한 처사라고 우담을 동정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허나 '왕조시대'에서는 그런 억울함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충신'이란 이름으로 죽어나간 우국지사들이 차고도 넘쳤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황제를 모시는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지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랏일을 하다보면 그런 일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런 각오도 없이 국록을 먹는다면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는 썩은 관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우담은 관리가 아니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충신의 아들이라도 관직이 없으니 백성의 관점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우담은 그런 하소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현 황제 '홍치제를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천하의 공도'를 근거로 내세운다. 역대 왕조를 돌아보면, 나라의 큰 변고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황제'에게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황제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판단되면 '역성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역모가 아니라 '천심(하늘의 뜻)'이었다고 포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담은 과거 '정통제(천순제)'가 저지른 잘못과 이를 비호했던 무능한 간신배들을 처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혁명'을 일으켜서 '천하의 도'가 과연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심판을 받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논리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명나라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가능한 논리다.

그렇다면 명나라 백성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민주사회도 아니었으니 굳이 백성들의 생각 따위는 들으나 마나일테지만, 그래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했으니 백성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에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뭐라 묻는다고 제대로 된 의견을 이야기해줄 턱이 없다. 더구나 백성들은 '힘(권력, 능력)'이 없다. 하다 못해 경제력도 없어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뒷배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나마 백성들 가운데 '무력'을 지니고 강호를 호령하는 '무림 집단'은 나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들 집단 중에는 '학식'을 가진 이들도 있고, '경제력'을 갖춘 부호도 있었고, 이래저래 수틀리면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무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림의 도는 '의리'를 따르는 편이라, 크게는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선이라 여기지만, 때에 따라서는 '의'를 앞세워서 충보다 더 단단한 '의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무림 집단의 생리다. <쾌자풍>에서는 남궁칠협을 우두머리로 삼은 '남궁세가'가 중원의 무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바로 남궁칠협은 우담이 내세우는 논리가 더 경우에 맞다고 여기고 우담의 가담한 역모에 참여도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역모를 막으려 애쓰지도 않겠다며 '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게 우리의 관점과는 사뭇 달라 의아해 보인다. 한국사람들은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평상시에는 '내부갈등'으로 심각하게 다투는 지경이라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면 특유의 단결력을 뿜뿜하며 국난극복을 최고의 과제로 삼고, 이겨내는데 최선을 다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이게 아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든 것은 둘째 문제고, 첫째는 '의리'를 따지는 일이다. 그 의리에 따른 결과가 선하냐? 악하냐? 따지는 것은 둘째 문제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무사도'를 따르는 집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잘 보여주며, 소위 '조폭 집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행태이기도 하다. 평소에 '도리'에 대해 잘 따지며 '도덕'이니, '의리'니, '충성'이니 좋은 말은 다 따지던 놈들이 '다른 집단'에게는 일절의 양심도 없고, 도리도 없는 듯이 사람을 다칠 정도로 때리고, 심지어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냐고 물으면, 자신은 의리와 충성을 다한 일이기 때문에 반성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당당히 죗값을 치르겠다고 언성을 높인다. 물론 '법적 처벌'을 받아 판결을 받을 땐 온갖 비굴한 모습을 다 보이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은 절정의 무술을 보여주는 강호의 고수들도 마찬가지다. 고매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조차 '의리'를 따지면서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작가 이우혁은 이러한 '중원의 의리'와 '천하의 공도'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착안하여, 포졸 지종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의 본모습을 파헤치고, 진정 별 것 아닌 인물이지만 '천하의 공도'를 잘 따르기만 한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주제를 증명할 엉뚱한 캐릭터를 내세웠다. 만약 이우혁이 이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이런 주제도 완성시키고, '천하의 도'는 무력이나 권력, 경제력 따위를 뿜뿜하는 세력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지만 '선한 의지'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따르는 이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완결'로 남는 바람에 모처럼 마련한 '천하의 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히틀러, 윤석열, 그리고 트럼프의 사례를 통해서 '힘 있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만약 그들이 가진 힘만으로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로 가득했을 것이다. 허나 '천하의 도'는 그런 이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잠시 잠깐 '그들의 손아귀'에 놓인 듯 싶어도, 결국엔 그들이 아닌 '선량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들'에게 천하의 도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착함', '도덕' 같은 것에는 절대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력'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정의'라는 것과 함께 힘을 합치게 되면 '착함'과 '도덕' 같은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왜냐면 그것에는 '한 점 부끄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뻔뻔한 파렴치한 이들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이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 '지종희'는 정의로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 다시 말해 '선을 넘지 않는 마음가짐'이 지종희로 하여금 한 점 부끄럼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당함이 꼬이고 꼬인 이들의 못된 심보를 단박에 치유하곤 한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왜 '미완결' 상태로 남겨 두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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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8
소포클레스 지음, 이미경 옮김 / 별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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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08] <오이디푸스 왕 : 오이디푸스 왕 / 안티고네 / 엘렉트라>  소포클레스 / 이미경 / 별글 (2018)

[My Review MMLXXIX / 별글 3번째 리뷰] 이 책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을 읽을 때면 어릴 적에 읽었던 '세계명작 문고판'이 떠오른다. 집에 소장하고 있던 '문고판'은 그야말로 '저가보급형'이라서 종이재질로 허름한 편이었지만, 친구집에서 우연히 보게 된 '세계명작전집'은 비록 문고판 형식이었지만, 낱권마다 '비닐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종이재질도 상당히 좋아서 아주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그 친구네 집에 몇 번 더 방문하며 책을 빌려가려 했지만, 2권 정도 빌려보는 게 전부였더랬다. 그래도 '그 기억'만은 오랫동안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별글클래식'을 읽을 때면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분명 그 때 읽었던 책과는 제목도 내용도 완전 다른 책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호감이 가는 책이라서 다 읽어볼 작정이다. 물론 기약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너무나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으로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한 인간에게 내려진 슬픈 서사가 <오이디푸스 왕>의 핵심 포인트다. 이어지는 <안티고네>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와 법률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엄청난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티고네가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오이디푸스의 딸이기에 슬픔은 더욱 배가 된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그녀의 내연남을 단죄하기 위해서 칼날을 벼르고 또 벼르는 '복수극'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동명의 소설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다른 소설은 대개 '뒤친이(번역가)'만 다른 것에 비해서, <오이디푸스 왕>은 소포클레스의 대표적 비극작 여러 편이 각기 다르게 수록된 경우가 많기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출판사'의 책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이 주로 '그리스 신화 이야기'에서 비극의 모티브를 따왔기에 각각의 비극일지라도 '동일한 주인공'이 펼쳐 보이는 '또 다른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당히 많은 비극 작품들이 서로의 앞뒤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에, '비극 작품들'을 연결해 놓으면 장엄한 그리스 비극의 대서사를 엿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 모든 작품들을 '단 한 권'으로 총망라해 놓은 것은 찾아보기 힘든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많은 작품이라서 '판권'이 별개인 탓에, 출판사마다 주력으로 사들이는 판권에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소포클레스 전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책 저책을 다 뒤적거리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암튼, 별글클래식에서는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그리고 <엘렉트라>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운명을 정한 대상이 무려 '신(아폴로)'인데 어찌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이 정한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 '비극'은 다름 아니라, 어차피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몸부림을 치며 거부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내용으로 전개가 이루어진다. 물론, 결론도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부하지 말고 따르라. 그래야 현명한 인간이다. 그에 반해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온몸으로 저항한다면, 그 끝은 무시무시한 신의 분노를 불러오거나, 아니면 인간으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게 될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몸으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교묘한 꾀를 부렸으나, 결국엔 그 꾀에 자신이 넘어가 애초에 정해진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저지르고 말았으며,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한 형벌로 가장 치욕스런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고, 제 어미의 뱃속에서 낳으면서도, 또한 제 어미에게서 아들과 딸을 낳게 만드는 가장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런데 인간 오이디푸스의 행적을 뒤쫓아가면 어느 한 구석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는 '영웅, 그 자체'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 '오이디푸스'처럼 살라고 한다면 정말 영광스러울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어릴 적 '목동의 아들'인 줄 알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았고, 우연히 코린트의 왕실에 입양되어 왕자로서 살았으나 겸손하게 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대로 그럴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는 양부모의 품을 떠나 양부모께 부끄러운 짓을 할 수 없도록 '원천차단'을 시도한다. 물론 코린트를 떠나서도 자신이 '입양'된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줄도 전혀 몰랐다. 그렇게 발길 닿는데로 떠난 오이디푸스는 사람을 해친다는 '스핑크스 괴물'을 처치하고 일약 '테베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삼거리'에서 만난 오만방자한 늙은이를 죽여버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늙은이가 하필이면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였던 것이다. 이로써 신탁의 하나가 끝내 이루어졌다. 정해진 운명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신탁의 당사자인 오이디푸스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창졸지간에 임금을 잃어버린 '테베의 백성들'을 위해서 새로운 테베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라이오스 왕의 아내였던 이오카스타와 혼인함으로써 '왕실의 혈통'에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남겨진 신탁마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오카스타 왕비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과 두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신탁이 이루어진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백성들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쓴다. 선정을 베푸는 훌륭한 임금 오이디푸스를 맞이한 테베의 백성들도 만족해하고 말이다.

여기까지 보면, 오이디푸스는 영웅적인 면모만 보여줄 뿐, 절대로 '나쁜 인간'일 수가 없다. 딱 한 명을 죽였다. 근데 '삼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던 불한당이었을 뿐이다. 근데, 사실 '친아버지(라이오스 왕)'였던 것이다. 그리고, 딱 한 번 결혼을 했다. 근데 원했다기보다는 백성들의 부추김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떠밀리듯 한 결혼이었는데, 살다보니 너무 금슬이 좋았고, 그래서 네 명의 아들딸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근데, 사실 '친어머니(이오카스타 왕비)'였던 것이다. 그래도 알고서 저지른 잘못도 아니고, 모르고 살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근데 오이디푸스의 신탁 때문에 테베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전염병이 돌면 '신의 분노'에서 원인을 찾았고, 신이 분노한 까닭은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스르려 한 죄인이 테베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임금으로서 '그런 죄인'을 찾아내서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죄인이 다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일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그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가 '대예언자 테이레시아스'다. 그녀는 자신의 점괘로 테베에 역병이 도는 원인을 잘 알고 있다. 허나 그 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그 죄인은 죄인이로되 너무도 훌륭한 임금이자 선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훌륭한 임금이자 멋진 영웅이었고, 인간으로서도 매력이 철철 넘쳤는데, "사실은 말야. 테베에 역병이 도는 천벌을 몰고 온 자가 바로 너야!" 라고 발설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입을 꾹 닫고 있으려 했는데, 애초에 입만 열면 '신뢰'를 얻지 못할 형벌을 받은 테이레시아스는 입만 열면 '대예언'을 하면서도, 그걸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결코 믿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실은 너,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지! 니가 말하는 예언은 다 엉터리지!"라는 소리에 분노해서, 해서는 안 될 '악담' 같은 예언을 마구 쏟아낸다. 그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같은 신탁이 사실은 딱 맞아 떨어졌고, 한 번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고 말았던 셈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영웅이다. 아무리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일지라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울먹이는 비겁한 짓거리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기에 그 죄를 달게 받아들이며 서슴치 않고 자신의 두 눈을 '자신의 손'으로 찔러 멀게 만든다. 그리고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테베'를 떠나 영원한 떠돌이로 살아갈 것을, 다시 말해 '속죄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테베의 백성들은 죄가 없으니 역병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길 당부하며 조용히 사라지듯 테베를 떠난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다보면,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어서 좀 답답한 느낌이 든다. 물론 '비극적 요소'는 차고도 넘치기 때문에 온갖 슬픔과 애통함을 느낄 수 있지만, 오이디푸스처럼 멋지게 살았으면 조금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출구 없는 미로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갇힌 인간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모양새가 너무도 끔찍한 형벌처럼 다가오며, '비극'을 최고조로 솟구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애써 탈출하려 애쓸 필요가 무엇이냔 말이다. 이래도 고통스럽고, 저래도 고통스럽다면, 가장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는 '멈춤 상태'로 영원히 지속하게 될 것이 아니냔 말이다. 어느 멍청이가 고통스러울 것을 뻔히 알면서 고통스러운 일을 반복하겠느냔 말이다. 결국 인간은 '탈출구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에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귀띔'해 준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뀔까?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비극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더욱더 희망이 샘솟는 긍정적인 방향을 엿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을 하나둘 해낼 때마다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전율하지 않았을까? 내가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궁금증이다.

<안티고네>와 <엘렉트라>는 다음 기회를 빌어서 썰을 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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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쾌자풍 2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 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III / 해냄 4번째 리뷰] 2권까지 읽고 나니, 이우혁이 이 책 <쾌자풍>을 통해서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조금쯤 감이 잡힌다. 국어교과서에서도 늘 강조하는 '주제파악'을 잘하는 요령은 비문학 장르에서는 '중심문장'을 찾아내는 것이고, 문학 장르에서는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럼 여러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다 파악해야 하느냐? 그러면 좀더 다각도로 다채로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주동인물'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쾌자풍>에서는 그 주동인물이 바로 '지종희'라는 주인공이 틀림없다.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 무림의 고수를 일거에 제압하고, 여진과 몽골 따위의 시정잡배들까지도 눈빛 한 번으로 통솔하는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이야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기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 너무 당연한 이치인 까닭에 그리 주목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진리에 불과하다. 허나 이것이 한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외국에만 가도 그 '선'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저 먼 서양까지 가버리면 애초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는 철저한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이 우리가 넘지 않는 '선'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네 경우엔 '선'을 넘었을 경우에도 말로 훈계하고, 경고하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쌍욕을 던지고, 심하면 주먹이 오고 가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서양의 경우엔 '선'을 넘으면 일단 '총'부터 꺼내들고 점잖은 사람은 '경고사격'을 허공에 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총을 갈기고 다치거나 죽거나, 그런 문제는 '나중'으로 돌려놓고, 서로에게 유리한 증거를 내세우며 법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차이는 우리는 '선'을 넘어도 사람이 죽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선'을 넘게 되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거나 '둘째 이유'로 밀려나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단 말인가?

<쾌자풍>의 주인공 지종희는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렇다고 문약한 서생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타고난 체력이 뛰어난데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서 조그마한 싸움기술을 가르쳐주면 곧잘 따라하는 '눈썰미'까지 장착(?)한 재주꾼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데 무술이나 무예라는 '싸움기술'까지 가르치면 큰일(!) 치르겠다는 친형 지두희와 그의 스승(공운)이 지종희에게 일체의 싸움기술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에 철저히 훈육하며 가르치려 했던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종종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제 힘만 믿고 함부로 주먹(힘)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들이 동네에서 뛰어놀면서 저지르는 일 가운데 '수틀리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패서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 맘대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에 맛들이게(?) 되면, 그놈은 결국 사람을 해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말종이 되고 만다. 사람 살아가는데 도리와 이치를 따지기에 앞서 '주먹'을 쓰면 쉽게 해결하고, 제 잇속을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쾌락에 쉬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법과 도덕도 '주먹' 앞에서는 당장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고난 싸움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지종희에게 형 지두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해서도 안 되며,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철저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재주가 '엄청난 힘'인데, 그걸 쓰지 못하게 만들면 바보천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은 지두희는 남몰래 동생 지종희에게 '싸움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초를 십수 년간 가르쳐 왔다. 꼭 필요할 때에는 그 타고난 힘을 써서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게 만들려는 목적이었고, 애초에 그런 힘을 타고났다면 '세상의 이치'로 따져서, 세상이 '그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지종희에게 꼭 필요한 경우엔 '그 힘'을 쓸 수 있게 단련시켜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무의식 중에라도 '나쁜 쪽'으로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코자, 지종희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치고, 그 핵심으로 결코 '선을 넘지 말라(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는 등의 도덕개념)'는 가르침을 뼈에 사뭇치도록 톡톡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천하를 들었다놨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지종희에게 먹혀 들어갔다. 아무리 시종잡배들 마냥 쌍욕을 즐겨쓰는 왈패처럼 굴더라도, 결코 지켜야 할 선은 넘는 법이 없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왜냐면 그게 옳다고, 그게 공명정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한국 사람들이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도덕개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목숨'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것 말이다.

사실, 이런 가르침은 우리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이게 잘 통용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강렬하고, 더 받아들이기 쉽기에 그에 따르기 십상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강자의 이익'이 철저히 보장되는 것이 진리라고 이해하고, 때에 따라서 '강자의 요구'가 사람의 목숨인 경우일지라도 서슴 없이 목숨을 해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며, 약자들은 이런 '힘의 논리'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식으로 쭈구리로 살아가곤 한다. 왜냐면 강자에게 반박을 하면 '강자의 힘'에 자신이 피해를 볼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별다른 반박도 하지 않고, 그저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감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저절로 터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악당이 등장하게 되면, 아무리 약자들이라도 감내만 하며 당하지 않는다. 끝끝내 저항하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반발하며, 설령 목숨을 잃거나 큰 손해를 볼지라도 순순히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 목소리를 분명하게 낸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힘의 논리'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상위개념으로 '도덕'을 따지고,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숨값(!)'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당한 일에 맞서다 목숨을 다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 모두는 분연히 일어나서 '함께' 저항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힘의 논리'가 워낙 강하다보니 부당한 일을 강요하는 악당이 등장해도 별다른 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힘에 맞설 '영웅(히어로)'의 등장을 꿈꾼다. 하나 뿐인 목숨을 허투루 날릴 수는 없고, 약자의 목숨쯤이야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으니, 부당한 악당의 불공정한 요구에 묵묵히 참고만 살다가 '영웅'이 등장하는 때에 맞춰서 '악당'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곤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엔 그리 오래 참고만 있지 않는다. 특별한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특별한 힘이 없어도 누구나 특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 도덕적 우월감(?)만 있으면 된다. 그럼 된다. 그게 '한국적 영웅(히어로)'의 특징이다.

이 소설 <쾌자풍>에서 '중원무림'은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묘사된다.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무림인'들이 그들의 싸움기술(무술)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데...뭐, 뻥 같지만, 그럴 법하기 때문에 따지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편하다. 그럼 조선에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느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매한가진데 없을 턱이 있을까. 당연히 그 정도의 싸움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허나 조선에선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왜냐면 조선은 '육체적인 힘(武)'이 아닌 '정신적인 힘(文)'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원에는 육체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무림(武林)'이란 세상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정신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유림(儒林)'이 있었던 셈이다. 뭐, 중원의 무림과 조선의 유림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한국인들이 좀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글공부'를 시키는 경향이 강한 것처럼, 중국인들은 '의협'이 강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그런 경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건덕지가 있다고도 본다.

또한, 지난 1권 리뷰에서도 한국인들은 '충의 논리'에 충실하다면, 중국인들은 '의의 논리'에 맹신(?)을 한다고 얘기했었는데, 그럴 정도로 중국인들은 '의협(義俠)'을 대단하게 쳐준다. 쉽게 말해, 정의를 내세우며 약자를 위해서 기꺼이 도와주는 의로운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쳐준다는 말인데, 여기에 너무 심취하다보니 '의리'를 너무 앞세우고,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목숨마저 대신 갚는 대상으로 삼고, 살인자마저 의롭다고 옹호하는 경향이 '무림'에 대한 환상으로 커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뛰어난 무술, 검술, 심지어 내공(內功)까지 아우른 대단한 사람이 등장해서 세상의 정의를 수호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는데,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허풍에 불가하다고 본다.

이는 조선에서 대유행한 '유림의 폐해'를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글재주를 뽐내는 것에 그쳤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련만, '사림파'를 조직하고서 '훈구파'를 견제하는 것까지는 나름 성과가 있었으나, 훈구파가 사라진 뒤 '사림파의 천하'가 열리자마자 '붕당'을 형성하고 '당파'로 나뉘더니 서로간의 파벌싸움에만 혈안이 되어 '국정 발목잡기'를 기본 셋팅하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물론, 이를 부추긴 것은 '왕권 강화'에 목을 맨 조선왕실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대표적인 임금이 바로 '선조'와 '숙종'이다. 선조는 전운이 감도는 와중에도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신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왕권을 제대로 강화하려면 임금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첫째이거늘, 제 실력을 높일 방도가 여의치 않자 신하들끼리 붕당을 조직한 것을 엿보다가 서로 싸움질만 하다 왕권에게 휘어잡히는 꼴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임진왜란'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이간질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도성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몰려오자 선조는 의주 국경을 넘어 명국으로 넘어가 제 살 궁리만 했더랬다. 그리고서 한조각 양심은 남았는지, 광해군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분조'를 이끌고서 조선을 지키라 명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마저 전쟁이 끝나자마자 광해군의 입지를 흔들며, 뒤늦게 낳은 '영창대군'을 적자로 삼는 등, 엄청난 폐해를 낳았다. 이를 해결코자 붕당을 타파하고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 애를 쓴 인물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유림'에서는 그런 인물이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내세울 수 없었다. 여전히 저들의 파벌이 국가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숙종도 왕권강화를 위해서 '환국'을 일삼아 피비린내 나는 혼돈의 정치를 일삼았다.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으로 갈등이 심화하자, 이를 혁파하기 위해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사사시킨 임금이 바로 숙종이었다. 숙종 나이 14살때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일찍 완수했는데도 '유림의 세상'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환국'만 주도하며 유림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일종의 말 안 들으면 죽는다는 전략이었으나, 그게 어디 조선 군중들에게 먹힐 전략이었던가? 결국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영조', '정조' 또한 유림들에게 한껏 휘둘리다가 정조 이후부터는 '세도가문'을 형성한 외척 유림들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어 나라꼴은 형편없이 망해갔다.

중국의 역대 황실도 마찬가지다. 무림이 적절히 활용되어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국난극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무림 세력'들이 한족의 황실을 완성한 뒤에는 여지없이 토사구팽 당하며 나가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황제 등극으로 그나마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는데, '토목지변'으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지자 명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꼴이 되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쳐하게 되었다. 이때 위기를 극복한 인물은 충신 우겸 덕분이었다. 무림은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오직 관직에 있는 뛰어난 관리의 지혜로 인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었다. 물론, 우겸이 새로운 황제(경태제)를 내세워서 포로가 된 황제(정통제)를 앞세워 항복하라고 할 위기를 극복한 것은 훌륭한 처사였으나, 문제는 포로가 되었던 정통제가 살아서 다시 명국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8년 뒤, 경태제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죽자 상황으로 물러났던 정통제가 다시 황제로 재등극하고 '천순제'가 되자 충신이었던 우겸을 숙청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은 '우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황제(천순제)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앞장 서서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훗날 천순제의 손자뻘인 효종(홍치제) 때에 와서야 죄를 묻지 않고 복권 되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무림의 세계'에서도 우겸의 충성스런 행위를 이야기하기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서 무림인사들 가운데에도 관직을 얻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세력 가운데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저들끼리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남궁칠협이라는 걸세출의 영웅을 내세운다. 당대 무림의 고수인 셈이다. 물론 무술의 달인이라도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죄인을 직접 처단하기는 뭣하다. 왜냐면 죄인의 벌을 행하는 주체는 당연히 '관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국의 사법체계에 속한 '동창'이 이를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여의치가 않다. 우겸의 아들이 상당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동창 관리쪽에서도 '고수'를 내세워야 한다. 헌데, 그런 고수를 내보내는 족족 '함흥차사'마냥 죽어나자빠지니 문제다. 그래서 동창의 우두머리 '유온'은 남궁세가의 힘을 빌리는 꼼수를 부리려 남궁칠협의 단 하나뿐인 손자 '남궁수'를 일계급 특진시키며 비밀 밀사로 사건 수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을 하는 것이 <쾌자풍>의 줄거리다.

뭐, 일일이 줄거리만 다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에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겸의 아들은 '여진족'의 틈바구니에 틀어박혀서 후일을 도모하며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고 있고, 동창 수장 유온은 일찌감치 우겸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사건을 해결하려 요원들을 일일이 보내지만, 모두 실패하자 '무림 전체'를 다 동원해서 범인을 처단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인다. 이 와중에 중원 무림의 최고봉인 남궁세가의 손자인 '남궁수'가 동창 비밀요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 포졸 지종희'와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종희가 중원의 무림 고수들을 '육모 방망이' 한 자루로 일거에 일망타진해 버린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다.

이렇게만 줄거리를 요약하면, 호쾌한 무협 소설처럼 보이지만, 저자인 이우혁은 단연코 '무협 소설'이 아니란다. 오히려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선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이게 또, 그런 식으로 읽으려니 '이야기꺼리'가 한도 끝도 없게 되었다. 다만, <쾌자풍>을 통해서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을 재확인하면서 읽는 재미만큼은 제법 솔솔하였다. 요즘 <케데헌> 보는 재미로 사는데, 전세계에 '한류 문화'는 먹히는데, '중국 문화'는 발톱의 때만큼도 관심있게 쳐다봐주지 않는 현상을 읽는 재미와도 유사한 점이 많아서 새삼 재미나게 읽고 있다. 이래 저래 중국은 한국을 쫓아오기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굳혀가며, '무협의 세계'도 읽어나가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참에 김용과 와룡생도 '다시 읽기'를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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