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네이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
베르길리우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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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네이스>의 줄거리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뒤를 이어 트로이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3부작'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리스인인 호메로스에 의해 기원전 8세기에 쓰인 작품이며, <아이네이스>는 로마인인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기원전 1세기에 쓰인 작품으로 엄연히 말하면 전혀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도 세 작품은 교묘하게 줄거리가 이어진다. 그 까닭은 바로 <아이네이스>를 쓴 목적이 '로마의 건국 이야기'에 신묘한 힘을 덧붙이기 위한 '밑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베르길리우스에게 '건국신화'를 한 편 쓰라고 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이를 위해 마지막 필력을 다하다 병에 걸려 '미완성'인채로 전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직전에 '미완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불에 태우지 말고 발표하라 명령을 내린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 12권' 모두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베르길리우스는 평생 호메로스를 흠모했기에 그의 작품을 본따서 <아이네이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이 <아이네이스>가 로마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그때까지도 덜 알려졌던 '호메로스'도 덩달아서 널리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베르길리우스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던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에서 서술자 단테를 지옥으로 데리고 안내를 맡은 이가 베르길리우스였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단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거의 모든 영웅들이 죽어가는 전투에서 가족과 함께 떠나라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충고를 받고 온가족과 그를 따르는 '트로이인 생존자들'과 함께 정처없는 항해를 떠난다. 이렇게 아이네이아스가 떠나는 긴 항해는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올랐던 이야기 <오디세이아>와 정말 많이 닮았고, 아이네이아스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라틴인들의 땅(이탈리아)'에 도착하고부터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일리아스>와 꼭 닮았다. 하지만 완전 판박이로 베낀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면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분노와 복수'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의 주제는 '로마 건국'이다.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생존과 귀향'이다. 물론 <아이네이스>의 주제도 '생존'이긴 하지만, 그 생존 목적이 바로 '로마 건국'에 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애초에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아이네이스>를 썼기 때문에 '로마 건국'을 주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초의 황제가 등장할 자신의 조국이 고작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들'에서 유래되었다는 볼품 없는 건국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그보다 훨씬 더 신비하고, 신묘한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아들'이 로마 건국의 시조라는 썰을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로마명 '베누스')'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우라노스의 '거시기'가 아닌 '제우스의 딸'로 못을 박았다. 이로 인해 로마 건국의 시조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이지만, 그 로물루스의 조상이 트로이인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이며, 아이네이아스의 엄마는 여신 '아프로디테'이고, 그 여신의 아버지가 바로 '제우스'라는 점을 밝힌 셈이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은 '제우스의 후손'이 건국을 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아이네이스>의 골자 되겠다. 어쩌면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현지 답사까지 하면서 '제우스의 후손'인 점을 더 명확하게 꾸미려 했으나, 여행중에 걸린 병이 악화되는 바람이 그 뜻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그렇게 '미완'으로 남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완의 유작으로도 로마제국이 여신 아프로디테의 후예가 세웠다는 정설(?)을 만들어냈으니 그 목적은 '완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아이네이스>는 '여신들의 전쟁'이라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온갖 모험과 전쟁은 '인간의 몫'이었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목숨을 잃은 것은 바로 '여신들의 끝없는 다툼'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신이 바로 '헤라'와 '아프로디테'였다. 그리고 두 여신이 다투게 된 까닭은 바로 '파리스의 심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말이다. 불화의 여신이 결혼식장에 던져두고 간 '황금사과'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 명의 여신 앞에서 누구에게 황금사과를 줄 것인지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를 뽑으면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아테나를 뽑으면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었으며, 아프로디테를 뽑으면 '최고의 미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스는 '최고의 미녀'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헤라와 아테나는 아프로디테와 '미모대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아프로디테'가 하는 일마다 딴죽을 걸기 일쑤였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전쟁의 패배로 '트로이'는 멸망하게 되었고, 그후 '트로이인들'은 거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트로이인에 대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그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는 <일리아스>의 격렬한 전투속에서도 여신의 도움으로 번번히 살아남게 되었고, '트로이 목마'로 인해 끝내 멸망에 이른 트로이 성에서도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로마건국'이라는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갖은 모험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허나 아이네이아스의 고난은 곧 '여신들의 전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헤라는 아이네이아스를 죽이고 싶었고, 죽이지 못한다면 생고생을 시켜야 속이 풀렸으며, 위기나 고난에서 벗어나는 꼴을 보기만해도 화가 치밀어서 '또 다른 저주'를 퍼부으며 아이네이아스와 그 일행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맞보게 한다. 허나 그럴 때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심지어 제우스에게도 찾아가서 자기 아들 살려달라고 확답을 받아냈고,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를 찾아가 최강의 무구를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포세이돈과 하데스에게까지 달려가 '아들의 안위'를 봐달라고 통사정을 할 정도였다. 어렵사리 이탈리아에 도착하고서 주변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질 때에도 어김없이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안배하며 '로마건국'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쉼없는 사랑을 퍼부어 준다. 물론, 전쟁의 막바지에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모든 신들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오직 아이네이아스만의 힘으로 적들을 제거하고 '건국'을 완성하지만, 그 전에 이미 '아프로디테'가 거의 모든 것을 다 안배한 뒤에 벌어진 일이었을 뿐일 정도였다. 그만큼 여신들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신들의 전쟁'을 슬며시 벗겨내고 읽으면 '한 편의 역사서'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과정이 세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네이스>는 당시 로마인들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신들에 의해 운명적으로 '건국'될 수밖에 없었던 조국 로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아이네이스>를 로마 건국의 '당위성'이란 주제로 읽어야만 하는가? 독자는 나는 '로마인'도 아닌데 말이다. 더구나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뻔히 아는 정황에서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읽어야만 할까?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 책 <아이네이스>를 오늘날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애초에 '이야기'는 만들어질 뿐이다. 바로 '목적'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순수'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의 시조를 '트로이'에서 찾았다. 로마는 '신화'조차 그리스에서 빌려왔다. 그러니 '시조'를 빌려오는 것도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들이 사랑했던 '그리스'와 '트로이'에서 각각 '신화'와 '신조'를 빌려와서 '균형(?)'을 맞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들의 조상을 '트로이'에서 왔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트로이인'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그것이 '로마인'이 갖춘 포용력(?), 관대함(?)의 표상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장점을 부각하지 않고, 배울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는 관대함으로 일관하였더랬다. 그리고 그런 장점을 '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나타냈다. 그렇게 로마인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배타성'을 배제하고 배울 것을 확실히 배우며,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미덕'을 갖춰나갔다. 그런 로마인들의 장점이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를 잘 알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책을 널리 반포하라 명령했던 것이고 말이다. 물론, 로마는 '황제정'으로 바뀐 뒤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알았던 '순수함'을 잃고, 스스로 최고라는 생각에 너무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들더니 끝내 '배타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타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이다. 그렇게 로마는 <아이네이스>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망해갔다. 그 정점을 이룬 '책'을 읽으며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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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듄 그래픽노블 2 - 무앗딥 Muad’Dib 듄 그래픽노블 2
프랭크 허버트 지음, 라울 앨런 외 그림, 진서희 옮김, 브라이언 허버트 외 각색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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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리뷰에 이어 <듄 그래픽노블 2>의 줄거리는 레토 공작 사후에 하코넨 병사로 가장한 '사다우카(황제의 군대)'의 공격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폴 아트레이데스와 레이디 제시카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폴이 프레멘 전사와 결투를 벌여서 승리를 거두고 '무앗딥('사막쥐'라는 뜻을 지녔지만, 프레멘들의 전설속 구원자의 이름이기도 함)'으로 거듭나고, 제시카는 프레멘 종족의 '대모'에 의해 시험을 받지만 극복해내고 프레멘들의 새로운 대모가 되어 두 사람 모두 프레멘 무리에 합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아직 3권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24년에 '출간예정'이라고 하니, 영화 <듄2>가 개봉하는 시기에 맞춰서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듄>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한 법이다. 이번엔 '프레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프레멘은 모래로 이루어진 행성 '아라키스'에 적응해서 살아남은 종족이다. 비록 '스파이스'로 가득하여서 엄청나게 값비싼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생명의 원천인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라서 낮과 밤의 일교차를 이용해서 얻는 '이슬'을 한두 방울 모아서 하루를 연명하는 매우 척박한 곳이다. 그래서 프레멘에게 '사막복'은 절대적이다. 프레멘이 만든 사막복을 입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증발하는 수분을 '집수기'에 모아서 다시 수분보충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막복을 제대로 입고 있다면 하룻동안 소비하는 물의 양은 '땀 한두 방울' 정도일 정도다. 그래서 프레멘은 자신들이 손수 만든 사막복을 입고서 '사막횡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듄'의 모래사막에는 '모래벌레'가 산다. 이 모래벌레가 어떻게 생겨나고 살아가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허나 거대한 모래벌레는 사람이 만든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하다. 그리고 모래벌레는 사막을 '이동'하는 인위적인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개걸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덩치가 웬만큼 커지면 그 어떤 무기로도 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모래벌레를 '프레멘'은 적절히 이용하며 심지어 '탈것'으로 쓰기도 한다. 이렇게 모래벌레를 프레멘 전사들이 '탈것'으로 이용하는 장면은 3권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무앗딥이 프레멘 전사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코넨과 사다우카와 대결하는 장면은 압권일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이렇게나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이니 '프레멘'은 자연스럽게 물을 소중히 여기고 다룬다. 그래서 가장 존경한다는 뜻으로 상대에게 '침'을 뱉거나, '눈물'을 흘리면, '나의 물'을 아낌없이 '나눠준다'는 의미로 쓰여서 성스러운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허나 이렇게 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마냥 좋은 모습으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프레멘 전사들은 '죽은 사람'에게서 물을 모조리 채취하고 남은 빈 껍때기만으로 장례를 치룬다. 허나 그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물을 낭비하는 행위'에 속하므로 그냥 내버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람의 몸에 70%가 수분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물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주검까지 매장이나 애도를 하지 않고서 '수분 채취'만하고서 나머지는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미개하고 야만스런 풍습이 아닐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혐오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프레멘들은 '물의 맹약'이 무엇보다 우선일 수밖에 없다. 물이 흐르는 곳이 하나도 없는 '듄'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한 방울의 물'이라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레멘들이 이토록 물을 아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프레멘들이 그간 모은 물은 상당한 양이다. 바위틈 깊은 곳에 호수처럼 깊게 물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많은 물을 모았지만 프레멘들은 결코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왜냐면 먼 미래에는 이렇게 모은 물로 사막 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을 길러내서 풍요로운 대지를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프레멘들은 '그날'이 오길 고대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렇게나 물이 절대부족한 행성을 그려낸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물이 풍부한 환경'에 젖어서 '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인류에게 뼈저린 각성을 일깨워주고, 그 소중함을 애써 모른 체하며 '생명의 원천'을 오염시켜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싶다. 이제 지구도 머지 않아 '아라키스'와 닮은 꼴로 바뀌고 말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사막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으며,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가 '생명의 원천'으로 쓰고 있는 '담수의 양'은 고갈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하수는 펑펑 써서 곳곳에서 '싱크홀'이 생겨나고 있으며, 극심한 기후변화로 인해 홍수와 가뭄이 무작위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극지방의 빙하는 거의 다 녹아서 '맨땅'이 드러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빙하가 있던 자리에 식물이 자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엄청 따뜻해졌다는 증거란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담수)이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다. 물론, 바닷물을 '담수화 장치'를 거쳐서 깨끗한 물로 바꾸어 마시기도 하고 농업용수로 쓰기도 하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을 오염시키면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경각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큰일이다.

  암튼, 프레멘들을 보고 있으면 '지구의 미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황제를 비롯한 대가문들은 수많은 영지를 통해서 얻은 수익으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데 반해, 이들의 지배를 받는 프레멘들은 대가문들의 시중이나 들면서 그들이 '버린 물'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바닥에 엎드려 마른 걸레로 물기를 훔쳐내며 감격할 뿐이다. 이런 모욕적인 처사는 그마저 '황공'할 따름이다. 황제와 하코넨들이 프레멘들의 것을 약탈하고, 프레멘의 노동을 약탈하며, 프레멘의 목숨마저 '하찮게' 여기며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구인들의 먼 미래도 '프레멘'과 다를 것이 없겠다 싶다. 몇몇 소수만이 '모두'를 지배하는 세상이 판을 치는 먼 미래의 지구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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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듄 그래픽노블 1 듄 그래픽노블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라울 앨런 외 그림, 진서희 옮김, 브라이언 허버트 외 각색 / 황금가지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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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스. '듄'이라고도 불리는 모래행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새주인이 찾아온다. 공작가문인 '아트레이데스'가 남작가문인 '하코넨'의 뒤를 이어 아라키스를 영지로 삼게 되었다. 물론 '사담 4세'라 불리는 황제의 재가를 받아서 아트레이데스의 레토 공작이 정식임명되긴 했지만, 공작으로서는 황제조차 믿을 수 없는 처지이다. 왜냐면 아라키스에서 생산되는 '스파이스'가 엄청난 이윤이 남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하코넨을 이용해서 아트레이데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선심을 쓰듯 아라키스, 즉 '듄'을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욕심이 난다면 황제가 자신의 권력과 권위로 '듄'을 독차지하면 될 것을 왜 복잡하게 '줬다가 빼았느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최고권력자가 혼자서 독식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면 괜한 '반발심'만 키우기 때문에 하사하는 척하면서 온갖 이권은 황제가 차지하고, '황제의 몫'까지 챙기느라 영주였던 '하코넨'은 듄의 사람들을 혹사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착착 착취를 해오던 것까지도 눈치를 보게 될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국 안에서 평판이 좋은 편인 '아트레이데스'에게 듄을 새로 하사하고서 '하코넨'과 짜고서 공작을 암살해버리면, 다시 황제에게 엄청난 이득을 챙겨줄 '하코넨'이 다시 듄을 재점령하는 방식을 취하려는 '감춰진 뒷배경'을 이해하면 <듄>의 줄거리가 술술 읽히게 될 것이다.


  암튼, <듄>의 첫 장면은 물이 풍부한 '칼라단 행성'에서 모래투성이인 '듄 행성'으로 이주하는 아트레이데스의 분주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초심자(입문자)'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듄>의 매력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를 관람한 분들이라면 더욱더 생생할 것이지만, 앞서 설명한 뒷배경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과거의 독자들처럼 '읽고 또 읽고'서야 겨우 머릿속에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그려낼 수 있는 노고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면에 이번 '그래픽노블'은 그런 불편함을 싹 해소하는 면에서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의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는 영화에서 감상하시고, 폴 아트레이데스에 집중해보자. 훗날 '퀴사츠 헤더락'이라 불리며 모래행성의 주민 '프레멘'을 이끌고 황제와 대결해서 승리를 거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운명인 아이다. 전형적인 영웅 등장의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태생부터 영웅이 될 자질을 타고났으며, 그렇기에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고, 적절한 때가 되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며, 그 위기 속에서도 기적과 같이 살아남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고, 숙명적인 적들을 처지하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꿈꾸던 미래를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어찌보면 이런 '영웅의 탄생'이 전체 1부의 내용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듄 그래픽노블 1권>에서는 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 순간까지 보여준다.


  한편, <듄>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설'과 달리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공부에 해당하는 '용어해설'이 빠져 있다. 그래서 '그래픽노블'만 읽은 초심자라면 뒷배경의 전반적인 이해가 힘들 수도 있다. 이는 '영화'만 관람한 관객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소설'은 필독이다. 그밖에도 부수적으로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트레이데스 VS 하코넨'의 갈등양상일 것이다. 왜 이 두 가문은 숙명적으로 싸우기만 하는가 말이다.


  사실, 두 가문은 '베네 게세리트'라는 종교집단에 의해 '하나의 가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미 섞여있는 상태다. 왜냐면 두 가문의 남자들이 대부분 '베네 게세리트 교단' 출신의 여자들과 혼인을 한 상태이고, 이들이 낳은 딸은 어김없이 두 가문의 남자와 혼인을 하니, 두 가문을 따로 구분할 유전적 개별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쓰일 당시에는 '유전학'이 그닥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대가문의 혈통'은 오직 남자쪽으로만 이어져내려 온 탓에 '하코넨'과 '아트레이데스', 그 밖의 대가문들로 구분할 뿐이다. 따라서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넨'이 대립하는 까닭은 '두 가문의 뿌리깊은 성정'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하코넨'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족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품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자신들의 명예가 신하와 부하들의 안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서, 꽤나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문의 일원들을 관대하게 통치하는 품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듄' 행성을 통치하는 방식도 차별적인 것이다. 하코넨은 듄의 주민들인 '프레멘'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쓰레기를 보듯 하찮게 푸대접을 한 반면에 아트레이데스는 '프레멘'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들을 지배하기보다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대우해주는 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프레멘은 레토 공작의 아들인 '폴 아트레이데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이며, '공통의 적'인 하코넨과 황제를 향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해 물리치게 된다.


  1권에서는 이쯤하고 2권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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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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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세이아>는 <일리아드>와 쌍을 이룬다. 같은 '호메로스'가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둘은 굉장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서사를 이야기했다면, <오디세이아>는 온갖 고난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귀환서사'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같은 영웅은 결코 아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길 고대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다시 말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본능(생의 의지)'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일리아드>보다는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더 친밀감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영웅적인 모습에는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는 법이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뇌와 고난을 겪는 모습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법이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꾀가 많은 영리한 사람인데도 그토록 모진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살펴보자.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측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오디세우스'의 공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가 트로이측을 속이고 패배한 척 '목마' 하나만 덜렁 남겨놓고 후퇴한 '기만술'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을 잃은 그리스 연합측이 승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트로이를 응원했던 '신들의 분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0년 만에 승리를 거둔 그리스 연합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귀환을 서둘렀는데, 오디세우스도 귀환길에 올랐다가 그만 '포세이돈의 아들'을 해코지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포세이돈은 분노를 참지 않았고, 오디세우스를 바다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고향땅 이타카를 밟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고난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에겐 제우스가 '고향땅으로 귀환할 운명'을 점지해준 까닭에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아예 죽일 수는 없었지만. 죽음보다 못한 고난을 겪게 하며 무려 10년 동안이나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전쟁 10년, 고난 10년, 무려 20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형벌을 겪게 된다. 20살의 건장한 청년이 40살의 장년으로 만들 기나긴 세월이다.

 

  한편, 고향땅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남편이 없는 설움, 아버지가 없는 설움을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10년 넘게 공석이 된 자리(?)를 탐내는 변방의 귀족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스릴 주인이 없는 왕국을 탐냈고, 지켜줄 남편이 없는 여인을 탐냈다. 그래서 이 두 자리를 단번에 차지할 수 있는 '결혼'을 청하러 매일낮밤을 페넬로페를 희롱하고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는데 열심이었던 것이다. 왕국과 어머니를 지켜야 할 아버지의 빈자리는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가 지키려 했으나 아직 십대에 불과했던 텔레마코스는 자신의 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 확인하고서 발만 동동거리는 형편이었다. 이에 페넬로페는 아들의 귀환만 기다리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수의를 만든다는 핑계를 대고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고만 있었다. 낮에는 열심히 수의를 짰다가 밤이면 낮에 짰던 수의를 도로 풀어내면서 말이다. 과연 꾀보 오디세우스의 아내답다 하겠다.

 

  허나 그런 기지만으로 버티는 것도 10년이 지나니 별소용이 없었다. 왕국내에서도 오디세우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핑계삼아 망나니 같은 귀족들의 편을 들어 '왕국의 비밀'이 하나둘 세어나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배신자가 생긴 것이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죽었다는 사실만 확인이 되면 페넬로페는 저들 귀족 가운데 한 명과 '강제결혼'을 치뤄야 할 것이고, 텔레마코스는 왕국에서 쫓겨나 방랑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일궈낸 터전이 송두리채 다 빼앗길 판이 된 셈이다. 이에 텔레마코스는 이타카를 몰래 빠져나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신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고 곧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확신도 받아오게 된다. 그런데도 20년 간 빈자리였던 것을 오디세우스가 되돌아온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땅 이타카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부터 '권선징악'이 실현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동서고금의 정의론'이 실현되고, 오랫동안 갈고 또 갈았던 '복수의 칼날'이 여기저기 번쩍거릴 때마다 독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인간적인' <오디세우스>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니면서 고생을 했다지만, 페넬로페도 그에 못지 않게 고생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분노의 창칼로 '정의의 심판'을 내릴 때, 페넬로페도 '심판자'가 되었어야만 했다. 적어도 악한 짓을 저지른 '시녀(여자)들'만이라도 페넬로페가 처벌하는 '당사자'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복수는 오직 오디세우스의 몫이었고, 페넬로페마저도 '심판의 대상'이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20년동안 '정숙한 아내'로 남아있었는지 검증받아야 했단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20년 동안 '전리품'으로 여인을 탐했고, '미녀들의 유혹'에 넙죽 홀려서 황홀한 나날들을 몇 년간이나 보냈으면서, 페넬로페는 '시월드'에서 없는 남편을 대신해 시중을 들어야 했고,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으며, 그럼에도 욕정에 빠지지 않는 '정숙한 아내'로 남았어야만 했다. 그 모진 시련을 다 이겨내고도 '심판의 날'까지도 오디세우스에게 정숙함을 검증받고 '통과'해야만 했다. 꽤나 부당한 처사라고 보여지지 않는가 말이다. 정말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수천 년전의 '성평등 의식'이 오늘날과 같을 수는 없을 테지만, 우리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오디세우스>를 읽어야 할 필독서로 삼고 있는데, '여성독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대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하겠기에 그런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아>를 여성독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어야 바람직할 것인가? 현대판 <오디세이아>는 분명 온갖 불륜과 바람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남편'이 정숙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귀환(?)'한다는 내용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 과연 20년 동안이나 '여성편력'으로 화려한 대장정을 치루고 돌아온 남편(혹은 애인)을 제정신으로 맞이할 '정숙한 아내'가 현대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식의 질문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던지는 질문일 뿐이다. 과연 바람둥이 남자를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하며 정숙한 여자'가 있다면 존경받는 위인으로 삼을 만할 것인가? 아니면 역발상으로 20여 년간 '남성편력'으로 장식하며 수많은 수펄들을 끌어안았고 현재도 끌어안고 있는 매혹적인 여왕벌(?)만을 기다리는 '순정남'을 위인으로 삼을만 하냔 말이다.

 

  이따위 '순정남'이 있을지라도 어떤 남자도 '위인'으로 존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정숙한 남편'을 정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정숙한 아내'는 정상(?)으로 볼 수 있느냔 말이다. 왜 여자에게만 이따위 '굴레'를 짊어지게 하고 남자들만의 '환상속의 아내상'으로 삼고서 여성들에게 강요하느냔 말이다. 오히려 여성독자들에게 '페넬로페'가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직접 '오디세우스'가 되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를 읽었다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험'과 '여행'을 떠나서 견문을 넓히고 인생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라고 권유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떠난 여정이 '고행길'일지언정 그것이 '인생'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침실 따위가 아닌 진정한 여행가들이 언제든 돌아가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귀띔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비로소 <오디세우스>를 바람직하게 읽었다 할 것이다.

 

  우리는 곧잘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맹점에 빠지곤 한다. 책에 적혀 있으니 '진실'이고, '사실'만 담겨 있을 거라고 말이다. 더구나 '고전'처럼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권위'에 짓눌려서 '잘못된 개념'을 곧이곧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고작 몇 살만 차이가 나도 '세대차이' 운운 하면서 어찌 수십, 수백, 수천년 전의 책을 곧이 곧대로 믿는단 말인가? <경전>일지라도 시대에 맞은 올바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책에 나와 있는 문구를 밑줄까지 쳐가며 달달 외우는 것은 하릴없는 짓이다. 차라리 외우지 말고 '소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내것'으로 만든 다음 '표현'을 해야 바람직하다. 그리고 내것으로 만든 표현을 주고 받으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면, '내것'이 올바른지 그른지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내것'을 많이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책들, 즉 <고전>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동시대 뿐만 아니라 수세대에 걸쳐 오랫동안 '검증'해온 책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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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 고양이 시리즈
나이스 캥 그림, 김희진 옮김, 베르나르 베르베르 원작, 포그 각색 / 미메시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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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고양이>에 이어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의 모험이 펼쳐지는 <문명>이다. 아직 베르나르의 원작을 '읽기전'인 까닭에 두 작품이 얼마나 싱크로율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 '차이점'은 곧 읽게 될 원작을 완독하는 순간 밝혀질 것이고, 내가 관심 높게 살펴본 것은 '스토리 진행'이었다.

 

  전작 <고양이>에서는 서로 다른 종족간의 '소통'을 꿈꾸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인간이 쌓은 지식을 고스란히 '수용'한 샴고양이 피타고라스가 파멸로 종지부를 찍은 인간의 문명을 '재건'하는데 성공하며 마무리 지었다. 한낱 동물에 불과한 고양이가 인간 스스로 파멸시켜버린 '문명'을 되살린다는 전개가 황당하긴 했지만, 나름 인상 깊기도 했다. 원래 '자기 머리'를 스스로 깎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 문명도 '인간이 아닌 존재'에 의해서 다시 스타일을 되찾을 수도 있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문명>에서는 과연 그 문명이 '어떤' 스타일로 쌓여질지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문명'이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동물실험에 참여했던 동물은 샴고양이 '피타고라스'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실험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이 또 있었단 말이다. 바로 '알비노 생쥐'인 티무르였다. 오~티무르라니 <고양이>에서도 쥐떼를 이끌던 우두머리가 '캄비세스'였다. 그런데 그 캄비세스를 단박에 제거하고 새롭게 쥐떼를 이끌게 된 우두머리가 바로 '티무르'였던 것이다. 인간 '티무르'는 살아생전에 인간을 학살하는 즐거움(?)으로 살았다고 할 정도로 살육을 즐겼던 제왕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학살자'의 이름을 딴 생쥐가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인류 문명으로 쌓은 지식'을 갖추었다니 위험수위가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생쥐 티무르는 '실험체'로써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며,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 뒤에 인간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갈고 닦을 것이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티무르는 캄비세스와 마찬가지로 바스테트와 인간들이 머무르고 있는 섬을 '포위'하며 점점 보여오고 있었다. 티무르는 꽤나 지능적이란 증거다.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고 말이다.

 

  이에 바스테트는 자신의 집사 나탈리와 피타고라스와 함께 '열기구'를 만들어 자신들을 도와줄 '응원군'을 청하려 탐색에 나간다. 분명 저 바깥 어딘가에 쥐떼의 공격을 아직 받지 않은 '공동체'가 분명히 존재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곧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 공동체가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긴 했지만, 순순히 손을 잡고 함께 '티무르'와 대항하는 공동작전에 나서게 될까? 설령 손을 잡았다고 해도 서로 다른 '종족간의 소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리고 인간들의 문명은 정녕 이렇게 멸망을 고하고 말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암코양이가 펼치는 대활약이 점점 흥미로워진다.

 

  그런데 이쯤해서 '인류의 문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문제를 맞딱뜨리게 되었다. 바로 '대멸종'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지구온난화니, 기후변화니, 핵전쟁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유를 밝히지 않은 '내전'과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문명이 금세 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건 바로 인간들이 파괴한 도시를 점령한 '쥐떼의 공격'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시를 점령한 쥐들은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페스트'를 퍼뜨렸고 말이다. 중세 유럽인구 3/4을 절멸시켜 '봉건사회의 기틀'을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로 혁신할 수 있게 된 분수령이었던 바로 그 '페스트'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2019년을 기점으로 '팬데믹 선언'을 하게 만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는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인류의 문명을 삽시간에 절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류를 절멸시킬 시나리오는 여섯번째 대멸종이나 제3차 세계대전 같은 것보다는 '감염병'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제때에 '치료약'과 '백신'을 만들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시나리오인 셈이다.

 

  결국, 베르나르의 상상력은 '인류의 절멸'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인류의 문명'이 인간의 대멸종 이후에도 존속할 것이라고 전망한 점이다. 바로 'USB를 꽂은 고양이'를 통해서 말이다. 고대부터 인간과 친숙하면서도 인류를 '집사'로 삼을 정도로 고귀하고 도도한 생명체인 '고양이'가 인류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종족으로 선택한 셈이다. 실현가능성은 둘째치고 베르나르의 상상력 만큼은 정말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비록 내게 '고양이'는 딱맞는 취향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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