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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1 - 천하 통일과 고려의 개막 ㅣ 박시백의 고려사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우리가 자랑하는 '반만년의 역사'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많이 하곤 한다. 왜냐면 1차적으로 '사료'가 절대 부족한 탓이다. 고대사를 직접 다룬 사료들이 '고려시대'에 쓰여졌고, 그나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조선부터 통일신라, 그리고 발해까지 '우리 역사'로 대외적인 인정을 받는 까닭은 '대외적인 사료', 다름 아니라 이웃나라들에 '우리 역사에 관한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우리 역사를 고증할 수 있었고, 우리가 '직접' 쓴 것이 아니기에 객관적인 사료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쓴 것이 아닌 까닭에 '역사왜곡'과 '날조' 등등 점차 저희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역사를 제것인 것마냥 치부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역사'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의 역사'도 철저히 분석해야 하며, 더 나아가 '세계사의 범주'에서 우리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역사공부는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그나마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꼼꼼하고 촘촘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지금도 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정도로 방대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실록편찬'이 조선시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려때 시작하여 조선이 이를 본받아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존속되지 못하고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만약 <고려실록>이 지금껏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더욱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사'는 '조선사'보다 더욱 개방적이었고, 스스로 황제국이라 표방할 정도로 자주성을 띠었으며, 수많은 외적의 침략도 막아내고. 지금 우리나라를 일컫는 '코리아'라는 명칭도 바로 '고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려사의 진면목'이 오롯이 담겨 있었을 <고려실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쉽지만, 지금 우리가 '고려사'를 투영해 볼 수 있는 사료는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다. 박시백의 고려사는 바로 이 두 책을 바탕으로 삼아 저자 나름의 생각과 요즘 역사트랜드를 감안하여 시리즈를 펼쳤다. 비록 전편인 <조선왕조실록> 20권보다 현저히 적은 분량일테지만, 교과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고려사'를 당시의 주변국가들의 시대정황과 더불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빗대어 표현한다면, '드라마 몰아보기'로 집중력을 높여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1권에서는 후삼국시대부터 시작해 고려 성종에 이르는 대장정이 펼쳐졌다. 역사적 흐름이 다소 빠른 듯 싶은 것도 '기록'이 현저히 부족한 탓이 매우 컸다. 그나마 사료 분량이 좀 많아지는 2권부터는 좀더 세세히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니, 조금만 기다려보자.
사료가 부족하면 '야사'의 도움을 받곤 한다. <삼국사기>가 놓친 내용을 <삼국유사>가 보충해서 우리 역사가 좀 더 풍요로워진 것처럼 말이다. 후삼국시대의 주요인물도 그렇다.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원래는 '진훤'이라 불려야 옳다고 했으나, 최근엔 '견훤'으로 통일한 듯 싶다), 그리고 고려로 삼국을 통일한 왕건, 이 세 명에 대한 '야사'가 '정사'보다 훨씬 더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토룡)였다는 전설, 그리고 왕건의 조상이 용왕이었다는 내용 따위가 그렇다. 이는 명실공히 '영웅의 탄생'에 걸맞게 그러진 것이니 '정사'에서도 비슷한 뉘앙스가 풍긴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역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이 중요하다. 통일신라가 왜 혼란스러워졌으며, 후삼국으로 어떻게 분열되었다가 고려로 재통일이 되었는가..하는 것들 말이다. 신라사회는 '골품제'로 인해 변화를 꾀하기 힘들어졌고,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넘어가면서 '왕위 정통성'은 점점 낮아졌고,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골간 왕위다툼'은 점점 빈번해졌으며, 중앙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지역부터 스스로 성주나 장군이라 칭하던 '호족세력'들이 점차 세력을 불려나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호족들 가운데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 그리고 궁예의 부하였다가 궁예가 몰락한 뒤에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삼국시대'를 이끌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라면 당연히 세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통일신라는 이미 힘과 정통성 모두 잃어버린지 오래되어 후고구려(고려)와 후백제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스스로를 '신라사람'으로 생각했으니 두 나라 모두 '신라'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이런 신라를 함부로 대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궁예'와 '견훤'이었다. 궁예는 속설에 '신라왕자' 출신이었다고 하니 왕위쟁탈전에 탈락하고 추방(?) 당한 원한으로 신라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고, 견훤은 연이은 승리에 취해 자기 잘난 맛(?)에 서라벌을 점령한 뒤 '신라왕'까지 바꾸고 백성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르며 업신여겼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어차피 망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평소에 신라에 유화적이며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준 왕건에게 나라를 홀랑 바쳐버리고 만다. 이런 왕건의 기세와 백성들의 바람으로 인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만다.
어쩌면 통일을 이루는 비결은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일거에 제압하는 방식보다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인다. 이는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통일의 위업을 보여준 제왕들이 대부분 '무력'을 바탕으로 적들을 제압하여서 패자의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은데 반해, 우리 역사에서는 '첨예한 갈등'을 잠시 내려놓고 '평화'를 사랑하고 '백성'의 안위를 먼저 보여준 인물이 '통일의 위업'을 보여준 예가 더 많아 보인다. 뭐,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위인이 등장하지 못하고 상대를 확실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대권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암튼, 왕건은 우리 민족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만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제 왕건에게 통일보다 더 어려운 숙제가 남았으니, 바로 '호족세력'을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다. 왕건도 호족출신이거니와 나머지 호족세력을 모조리 제압해버리는 힘이 모자란데도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걱정할 만도 하다. 그래서 왕건은 '혼인정책'을 내세웠다. 비등비등한 세력을 갖고 있는 '호족들의 딸'을 한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무려 29명의 부인이다. 자식들이 많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 탓인지 왕건의 자식들은 '근친혼'을 많이 했다. 즉, '엄마'만 다르면 혼인을 장려(?)했던 것이다. 이는 '외척세력'을 두지 않아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조선 태종의 사례만 보아도 '외척'을 견제해야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의 자리는 무척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고려는 성종 때까지 별다른 '외척세력'을 두지 않아 비교적 평온하게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하게 2대 헤종, 3대 정종, 4대 광종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모두 왕건의 아들들이다. 허나 광종대에 이르러서는 계속되는 호족들의 반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왕권강화'를 도모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비롯해서 '과거제'를 시행해 호족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숙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5대 경종, 6대 성종에 이르러서는 포악한 정치(?)는 삼가고 '유교적인 정치'를 구축하고, 전시과를 손보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나라의 기틀을 완성해나갈 즈음에 고려의 북방과 바다 건너 대륙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더니, 급기야 '고려'의 안보에 일대 위기가 몰아치려 한다. 바로 '거란의 침입'이다. 2권을 기대하시라.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지나간 옛일을 공부해서 어따 써먹을 수 있겠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에게 대답해줄 적절한 비유가 있으니,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다. 흔히, 역사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과거라는 '거울'에 빗대어 표현하며, 그 중요성을 설파하곤 한다. 실제로 '과거사실'을 들춰보며 '미래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과거사실'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현재의 권력자'다. 어떤 이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라고 말하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꽤나 설득력이 강한 메시지다.
그렇다면 승자만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거꾸로 말하면, 역사공부에 진지해지면 '승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역사공부에 진지해져야 할 것이다. 역사공부에 진지해지면 '독재자의 횡포'도 막아낼 수 있다. 독재자들은 늘 그렇듯이 아둔한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개를 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이들이 많은 곳에서 공포정치를 펼치곤 한다. 그러다 똑똑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민중들에게 무참히 박살이 나곤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인재가 '역사'에 밝은 명석하고 교양 넘치는 시민들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퉁쳐버리고, 국민들의 이익과 쪽팔림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과거를 망각하게 만들어 현재를 지배하려는 무리'를 솎아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공부를 멈춰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