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박사와 하이드 마카롱 에디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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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만에 다시 손에 잡은 문학책이 또 <지킬 박사와 하이드>였다. 명작을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고민거리가 많아진 요즘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슴 콩닥거리는 도전보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더 그리워진 탓이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는다면서 '공포소설'을 손에 쥔 것이 웃기기도 하지만, 19세기말의 공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고, 도리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탓에 다시금 푹 빠져들 수 있었다.

 

  한편, 이처럼 고전소설을 즐겨 읽는 까닭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깊어지고 연륜이 묻어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원작'이 가진 깊이와 심오함이 없었다면 느낌이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거듭 리뷰를 쓰면서도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것일테다. 물론, 다양한 출판사의 '같은책'을 접하면서 조금씩 다른 뒤침(번역)과, 그로 인해 달라진 '뉘앙스'를 찾아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이기도 하다. 이번 책은 [펭귄클래식코리아]의 지킬 박사였는데, 저렴한 문고판 판본이라 '책의 내구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이외에는 '가격 대 성능비'가 꽤 좋은 책이었다.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가운데 책 값도 점점 비싸지는 와중에 '문학책'만큼은 저렴한 값(?)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거기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외에도 '세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알찬 책이다. 더구나 수록된 단편이 은연중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집필과정에 영향을 끼쳤고, 쓰여질 당시 대유행을 했던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도 밀접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라하니 '전작주의자'들에겐 필수템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각설하고, 다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집중하련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이 책은 '공포소설'로 분류된다. 스토커의 <드라큘라>,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책들이지만, 그건 '외형적인 요소', 다시 말해 '시각적 공포'로 다가오지 않기에 그럴 뿐이지, 소설을 직접 읽으며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공포의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적 감각의 공포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상상력'을 발휘해보길 바란다. 자, 이제부터 공포가 시작된다.

 

  이 책을 설익게 읽은 독자들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고 흔한 착각에 빠진다. 선한 지킬 박사와 악한 하이드 사이에서 고뇌에 빠진 주인공이 끝내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선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그러니 선과 악이 모두 '지킬 박사'의 내면에 공존하고 있었고, 두 가지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갈등을 벌이다 끝내 비극을 맞이했다고 이해를 해야 비로소 공포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곤 한다. 또한 맹목적으로 이기적인 것은 악으로, 이타적인 것은 선으로 선을 긋기도 하는데, 이게 과연 딱 맞는 '구분법'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이타적이기만 하고 이기적은 모습은 없었더냔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현대인은 결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모성애'를 들먹이며 '이타심의 전형'으로 내세우곤 하는데,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자신의 아기를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생명조차 내놓을 각오(?)로 사랑해야 한다는 '강요'는 아닌가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성애로 인해 엄마는 무조건적으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가 불러오는 공포감이 조금은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공포의 정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암암리에 강요하고 있는 도덕과 윤리 따위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때로는 그런 희생이 하나 뿐인 목숨마저 내놓으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나면, '지킬 박사'가 명예나 체면 따위를 내려놓고 마음껏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도 절로 이해가 될 것이다. 뮤지컬을 볼 때, '지금 이순간~'이라는 배우의 열창이 더욱 그런 욕구를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묶고 있던 사슬을 벗어던지는 '마법의 약'을 과학적인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복용할 때, 그 얼마나 신나고 짜릿하고 통쾌한 느낌일지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게 되면서 불현듯 '공포감'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바로 '공포감의 시작'이다. 내 안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또 다른 자아'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니며 '나 자신'이 힘겹게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공포감'이 극대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운전중에 '나의 왼손'이 내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운전대를 옆으로 돌려 중앙선을 침범하고 마주오는 차량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게 만든다면 어떨 것 같은가.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죽을 것 같은 '기시감'이 온몸에 퍼지며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그런 짓을 하면서도 짜릿한 스릴을 맛보는 것을 즐기며 더욱더 '자주' 그러한 짓을 서슴지 않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주 잠깐만 그런 스릴을 즐긴다고 해도 '죽을맛'일텐데, 하루 24시간 중에 23시간 50분을 '그놈'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10분만 남게 된다면 어쩔 것 같으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마지막 10분에 지킬은 '하이드의 악행'을 멈출 수 있었다. 개인에겐 비극적 결말이었겠으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것이 분명한 '또 다른 자아'를 멈출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분명 공포소설이다. 자, 이제 한 개인의 비극을 '확대'시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로 인식을 확장시켜보자. 그러면 이 책이 주는 공포감이 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악한 본성'은 지극히 이기적인 기준으로 자신만의 기쁨을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자아'가 자아내는 공포감을 맛본 이가 '사회지도층'이라면 어찌 될까? 심지어 국민이 허락한 '권력자'라면 어찌 될까? 더 나아가 초강대국으로 세계 패권을 다투는 국가지도자가 '또 다른 자아'를 만나 저만의 즐거움을 위해 독단적인 결심을 서슴지 않게 된다면 말이다. 통제가 안 되는 '나의 왼손'이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모자라 마주오는 상대 차량의 무고한 희생을 일삼고 만다면 말이다. 마주오는 차량이 기름을 한가득 싣고 오는 트럭이라면, 단 한모금이라도 숨을 들이키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유독가스를 싣고 있다면,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가공할 핵무기를 싣고 있다면, 아니, 전세계 주요 도시를 향해 핵무기를 발사시킬 수 있는 '버튼'을 아무 거리낌없이 눌러재끼는 '또 다른 자아'라면 어쩔 것이냔 말이다.

 

  상상이 너무 과했다면 사과부터 드린다. 그저 소설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인류멸망 시나리오를 풀가동시키는 것이 너무 과한 '설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런 공포를 인식하고 고뇌하는 '자아'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다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안전핀'을 장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안전핀'마저 상실한 국가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우리는 갖추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큘라>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해치려는 악마를 물리침으로써 공포를 씻어낸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미지의 생명을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창조하려는 욕구가 자아내는 공포를 인간보다 선량한 생명체의 등장으로 안식시켰다. 하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의 공포는 좀처럼 씻어낼 수가 없었다. 내 안에 악함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우리 사회의 '누군가의 악함'을 통제할 마땅한 장치가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우리 사회에 '선량한 시민'이 더 많이 있을 거라는 기대만을 품을 따름이다. 우리가 '선량한 시민'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나아가는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라 마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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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8권의 리뷰를 썼다.

지난 19년 이래로 '매달 두 자리수 리뷰'를 빼먹지 않고 썼었는데 말이다.

그러나저러나 좀처럼 리뷰가 써지지 않는다.

책은 날마다 읽고 있는데도

리뷰는 차일피일 미루다 '몰아서' 쓰기 일쑤다.

뭔가 '원동력'을 잃어버린 듯 싶다.


확실히 내게 책을 지원해주는 출판사가 줄어든 탓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책이 없는 것도 아닌데

좀처럼 써지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

뭐, 책 읽는 속도도 현저히 떨어진 탓도 있으니

단순히 컨디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듯 싶다.

무엇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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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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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장르를 무어라 정하면 좋을까? 우선, '로맨스장르'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남녀 주인공이 도드라지게 등장하고, 스토리라인이 온통 둘 사이를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는 듯이 이어지니 마땅하다 할 것이다. 또한, '추리소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명탐정이 등장해서 사건에 감춰낸 내막을 들춰내고 범죄사실을 낱낱이 밝혀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로맨스추리장르>라니 시뻘건 살해현장에서 콩닥콩닥 러브스토리가 진행된다는 것이 사뭇 낯설기 그지 없다.

 

  아닌게 아니라, 첫 시작부터 요상한 '장르의 혼종'이 펼쳐지며 독자로 하여금 낯선 흥미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어디론가 급히 달아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첫 씬부터 이미 '살해사건의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치 않은 혼인을 앞둔 처녀가 파혼을 하지 못하자 일가족 모두를 독극물로 살해하고 도망을 하였단다. 그토록 혼인을 하기 싫었던 것일까? 아님 몰래 숨겨둔 정혼자가 따로 있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킬 정도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살해를 저질렀다는 소녀가 어려운 사건도 척척 해결할 정도로 천재적인 사건해결능력을 갖춘 명탐정으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게 도망을 치던 그녀가 도망을 치다 '그'를 만났다.

 

  로맨스 장르라면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인 '남자주인공의 등장'인 셈이다. 보통 <로맨스소설>에서 남주는 능력이 뛰어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선 아예 '왕자'로 등장한다. 시대배경이 중국 당제국 의종 때이니 '황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잘 생긴 것은 기본이고, 부유함은 말할 것도 없는데,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천부적 기억의 소유자로 인간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듯한 남주로 등장한다. 역시나 '로맨스의 정석'을 잘 따랐다. 물론 거기에 '차갑다 못해 냉혈한 싸가지'까지 소유하였으니 시크한 남주의 등장으로 로맨스소설의 기대치를 확 끌어올리는데 아주 성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나 완벽한 남녀 주인공의 인상적인 등장에도 불구하고, 내심 스토리 전개가 껄쩍스런 점이 없지 않아 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로맨스장르'가 '추리장르'로 갑자기 유턴을 하기 때문이다. 첫 등장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너무나도 뻔한 로맨스의 정석을 밟은 탓일까? 너무나도 갑작스레 스토리라인이 '추리장르'로 급선회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제 3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시체 검안과 심지어 해부까지 좋아라하는 '검시관'이라는 로맨스장르에 걸맞지 않은 요상한 직업이 등장하고 만다.

 

  이렇게 이 소설 <잠중록>은 로맨스를 위한 예쁘고 멋진 남녀주인공의 썸타는 이야기를 곁가지로 두고, 살인사건의 단서수집 및 추리를 위해 '시체검시관'을 등장시켜 '본격추리'를 주된 이야기로 이끌어가는 한편, '시대극'이라는 형식을 따와 '대하장편소설'의 형식을 가미시키니, 이름하야 <대하장편추리로맨스>라는 묘한 소설이 등장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이 책을 처음 접할 적에는 심각한 '장르혼종'으로 인해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감의 리뷰를 썼을 정도였다. 허나 시간이 지나니 좋고 싫고의 문제를 떠나 '이야기' 본연에 빠져들어 감상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금 리뷰를 써내려가게 된 것이다.

 

  허나, 이 책이 보여주는 '추리기법'은 독자들에게 '추리'를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훌륭한 점수를 줄 수 없겠다. 스토리 상에서 '주어진 단서'로는 절대 범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리의 범주를 넘어선 방대한 시간흐름과 난삽한 전개로 인해, 설령 '단서'가 명백히 주어졌다하더라도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배경지식'이 없는 한 추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은 '황궁배치도'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하는데, 이런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왕비가 될 여인이 밀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을 어찌 '해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새장속의 새를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기법을 이야기 앞쪽에 잔뜩 '암시'로 깔아두고선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을 바꿔치기'한 방법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저 사건의 진실규명과 진상이 밝히는 '명탐정의 나래이션'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관계로, 이 책의 '추리장르'는 그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읽어가면, 그뿐이다. 절대 추리에 참여할 생각은 잠시 내려두길 바란다.

 

  이 책을 즐기기 위해선 '로맨스'에 집중을 해야 한다. 추리가 면면히 이어지는 와중에 두 남녀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징후에 예의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단 말이다. 다시 말해, 명탐정 황재하(환관 양숭고)와 기왕 이서백(황자) 사이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애정행각과 썸을 타는 손발놀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것이 500여 쪽에 육박하는 '대하사극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방대한 스케일이 '중국로맨스'의 특징인 것일까? 앞서 읽었던 <보보경심>도 꽤나 긴 스토리였는데...암튼, 아직 '중국의 것'은 많이 접해보지 않은 탓에 뭐라 단정지을 순 없겠다. 단지 <영웅문>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김용의 소설들'을 참고한다면,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녹정기> 등등 대체로 '대하장편소설'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중국로맨스'로 그와 비슷한 분량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물론, '무협지'와 '로맨스'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잠중록>만의 매력은 심심할 틈이 없게 만드는 '흡인력'이라 할 수 있다. 도도하게 이어지는 추리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시대적인 비극이 만들어낸 인물들 간의 갈등이 쫀쫀하게 연결되어 있음에 감복하게 되고, 어지럽게 흩어진 단서들을 하나하나 모을 땐 '줌인'을 시켜 사건의 심각성을 한껏 부각시켜놓은 다음에 다 모은 단서들을 '줌아웃'시키며 전체적인 조망을 할 적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들어맞는 완벽함에 감탄하게 만든다. 이런 감복과 감탄 사이에 황재하, 이서백, 그리고 주자진이라는 세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감춰진 비밀'을 파헤치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가 선명해지게 되고, 비밀을 품고 있었던 '최강의 빌런(악당)'이 누구인지 밝혀지면서 '대하드라마의 여운'이 찐~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이런 것'까진 느낄 여력이 없었는데, <청춘월담>이라는 드라마를 접하게 되면서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 전개방식'을 서로 비교분석하는 재미를 느껴 다시금 읽게 되었다. 그 시간의 간극에 <외전>까지 출간되었으니 할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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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5 : 존 롤스 정의론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5
김면수 지음, 남기영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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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열광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이다. 그렇다고 '부자'를 존경하는 것도 아니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곤 한다. 그래서 엄청난 액수를 자랑하는 로또에 매주 빠져들고, 코인이 떡상하길 마냥 바란다. 물론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부동산과 주식에도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따 쓰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몰려드는 모습에 안 쓰럽기까지하다.

 

  이토록 일확천금에 눈이 돌아가버릴 정도로 천한 민낯을 드러내긴 하지만 한국인의 가슴속엔 '공정'과 '평등'에 대한 열망도 함께 품고 있다.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며, 그런 부정한 이들이 '사회지도층'을 장악하고 쥐고 흔드는 사회시스템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빈부의 차이'를 부정하거나 '재능과 실력의 차이'로 인한 부의 분배가 불균형을 이루는 것, 자체를 부정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정과 평등의 가치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꿈꾸는 한국인들이 '정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어쩜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르겠다.

 

  10여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용두사미처럼 흐지부지 끝맺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에 부족한 점이 없을 것이다. 물론, 흐지부지 끝낼 수밖에 없었던 원인도 밝혀내고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샌델 교수가 말한 '정의'는 공리주의에 입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첨가하여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끝맺음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개론으로 시작한 학구적인 분석에 깊은 관심을 끌어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샌델이 말한 '정의'가 곧바로 '부가 가져다주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면나자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깔끔하게 손절하고 말아버린 헤프닝이었다는 얘기다. 정리하면, '정의=부의 공평'이라는 공식과 거리감을 느끼자 공정과 평등을 갈망하던 우리 세대가 <정의론>조차 외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히나, '부유함'이 곧 '행복'이라는 공식조차 성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서, 소위 '부자'라는 것들이 저지르는 불공정과 불평등, 더 나아가 굴욕과 굴종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며 대한민국의 시곗바늘을 되돌리려하는 만행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왜 다시금 '정의'에 대해 신랄하고 뼈저린 반성과 지대한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먹고 살 걱정'을 내려놓고 소소한 여유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전부였는데, 애써 뽑아놓은 정부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작태를 보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더욱 뻔뻔한 것은 '저들'이 저지른 짓이 '무슨 잘못'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며, '저들만의 천국'을 만들고서 또다시 국민 대다수의 '행복'을 담보로 삼아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롤스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두 사람이 떡을 공평하게 나눠먹기 위해선 한 사람에겐 '칼'을 쥐어주고, 다른 한 사람에겐 '선택권'을 우선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을 든 사람은 어느 쪽이든 '먼저' 선택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되도록 '똑같이' 나누려 노력할 것이다. 왜냐면 '선택권'이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에 제 욕심을 부려 크기가 '다르게' 잘라버리면, 우선권을 가진 상대가 큰 것을 날름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찬가지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도 베일속에 가려진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법을 제정할 때, 어느 한 쪽이 유불리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공평한 법'을 제정해야 자신에게 손해가 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의 베일'이 작용하면 우리 사회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공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롤스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선한 존재'라는 가정 아래 <정의론>을 집필하였다. 왜냐면 몇몇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대다수의 선한 마음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꽤나 낙관적인 결론이긴 하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현실성'이 좀 떨어질 뿐이다. 이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실제로 작동되고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윤리적 가치'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에서는 잘 통용되지도 않고 '구속력'조차 없는 윤리도덕을 앞세워 <정의론>을 펼쳐냈으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법도 하다.

 

  허나,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또한, '윤리도덕'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안전한 치안을 자랑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근간에는 '경제적 성장'도 한몫 했지만, 누가 뭐라해도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윤리도덕'을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할 줄 알며, 스스로 뉘우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의'를 말할 때 바로 이러한 '윤리도덕'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감히 '정의'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 설령 다른 이를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긴, '염치'를 옆동네를 지나가던 똥강아지로 알고 허투루 여기는 못난놈들도 많긴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못난놈들도 '정의'를 운운하고 있지만, 진정한 정의로움을 위해서 반드시 솎아내야할 종자들이다.

 

  진정한 정의로움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힘'을 갖는 것이다. 스스로 윤리도덕을 통달해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저들밖에 모르는 '악당'들에게 밀리지 말아야 한다. 법 없이도 살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법'을 만들 힘과 집행할 힘, 그리고 제대로 운영되는지 감시할 수 있는 힘까지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착한이들이 부유해져야 한다. '돈의 속성'이 점점 악해지고 있는 까닭도 악당같은 놈들이 돈의 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부유해져야 한다. 그리고 선한 힘을 발휘해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비현실적일 것이다. 이미 '부의 독점'이 명백해진 시점에 부가 가져다준 '모든 혜택'을 골고루 나눠갖는 '선한 영향력'이 순순히 실행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떡줄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그렇다면 존 롤스의 <정의론>은 한낱 '그림속의 떡'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롤스의 '방법론'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없어보일지라도 '정의, 그 잡채'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말하지 않으면 권력을 가질 수도 없고, 부를 이룰 수도 없다. 정치인, 경제인,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정의'를 참마음이 아닐지언정 입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한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당장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고 실행하라"고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우리는 <정의론>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악당과 못난놈들이 실행하는 정의일지라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선한 마음'을 그들 스스로 일구어나아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어의심치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난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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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사용법
캐럴 해이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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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남성이고,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이 말하길, 여성이 아닌 '남성'은 결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남성으로서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러나 듣기 안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해서 빈정 상하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번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면 여전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저항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권리인데도 그런 권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상처 입은 여성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남성'인 나는 듣기에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회분위기여야만 한다고 인정한다.

 

  인류의 역사는 '여성'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여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눅 들도록 '강요' 당했고, 최근까지도 여성이기 때문에 '희생'은 당연시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의 당찬 활동으로 '여성인권'이 성장한 것은 환영할 만 하지만, 아직도 '농담'이안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수치심을 일으키는 혐오스런 범죄(!)가 아직까지도 만연하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끔찍할 지경이다.

 

  우리는 여성 상위적이고, 여성만을 위한 '강도 높은' 페미니즘을 마주할 때 당혹스러워한다. 남성들은 이를 두고 '역차별'이라 반발하고, '양성평등'에 위배된다면서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지만 그간 당하기만 했던 '여성의 관점'에서 봤을 땐, '새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의 과격함일 뿐이다. 한편으론 '같은 여성'인데도 페미니스트들에 반감을 나타내고, 페미니즘을 '못생긴 여자들의 히스테리'로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의 주장은 '예쁜 여자'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남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예쁜 여자'를 멍청이 취급하는 것이라며 페미니즘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는 서로를 잘못 이해한 탓에 벌어진 헤프닝에 불과하다. 서로의 진심을 이해한다면 페미니즘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어떤 형태를 띠고, 어떤 활동과 주장을 하든 원칙적으로 '휴머니즘'을 표방한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길 바라고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가 완전히 사라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완벽한 세상이 되는 순간 '페미니즘'은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남녀차별에 반대로 시작한 여성들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애초의 원인이었던 '차별'이 사라지면 운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이 찾아오기는 하는 걸까? 회의심이 들 정도로 '차별'은 심각하고, 차별로 인한 '문제'는 끝없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전세계 어디선가 '원치 않은' 강간, '원치 않은' 결혼,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강요에 의한' 육아와 가사로부터 해방되길 간절히 바라는 여성들이 울부짖고 있다. 거기에 사회적 활동의 제약은 더욱 끔찍하다. 비교적 사회활동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고위직'은 온통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고, 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공정한 선발기준에 의해 '합격통보'를 받았음에도 2차, 3차 선발 등으로 교묘히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만드는 음모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을 하는 여성은 직장에서도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이고, 여성을 '죄인 취급'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같은 이유로 남자는 직장에서 더욱 열심히 일할 '찬스'로 작용하고, 승진 기회로 작동하는 것을 보면 '차별'은 좀더 분명해진다. 상황이 이럴 진데, 페미니즘을 욕할 수 있겠는가? 이젠 인류를 위해서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딴에는 페미니즘 대신 '휴머니즘'이나 '여성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운동의 진정성을 위하고 남성의 참여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아닌 게 아니라 나역시 '여성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했다.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페미니스트를 만나는 일보다 고역스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남성을 예비성범죄자로 간주하고, 남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표방하기' 일쑤다. 누군가 그들에게 진정하라고 얘기하면, 자신들이 '정상'이고 당신들이 '비정상'이니 진정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강요를 요구하면서, 그런 것이 '여성스럽다'거나 '여성이 지녀야 할 올바른 몸가짐', 심지어 그 부당한 것을 '여성이 지닌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가스라이팅' 해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당신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자매, 딸에게 희생과 강요를 '아름다워지는 비결'이라며 권할 것이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부당함을 당연한 듯이 요구하는 '사회' 속에 당신의 딸과 자매, 아내와 어머니, 할머니를 욱여넣고 안심할 수 있겠냔 말이다.

 

  이제 '여성혐오'를 멈추어야 할 때다. 여성이기에 '차별'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오직 '인간'이기에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에만 주목해야 한다. '양성평등'한 세상이 펼쳐지는 그날까지 페미니스트들을 응원해야 마땅하다. 그들 중 일부가 '남성혐오'를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너무 비약적이라고 여긴다면, 인류 역사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때를 집중적으로 파헤쳐보길 바란다. 불만은 '힘 없는 자들'의 무기였고, 그 불만이 일시에 터져나왔을 때 세상은 늘 바뀌었다. 그리고 '혁명은 피를 부른다'고 말하곤 하는데, 여성들은 원래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또 다른 피'를 부르게 된다면, 그 피는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 혁명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도 당연한 '양성평등'을 바랄 뿐이다.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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