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10 : 거인의 어깨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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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0 : 거인의 어깨>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4)

[My Review MMLXV / 돌핀북 10번째 리뷰] 인간은 미약한 존재다. 광활한 우주 속에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우리 은하'의 날개 한 쪽 끄트머리에 있는 그리 밝지 않는 주황색 별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 살고 있는 그리 강하지 않은 생명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딴에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지능을 뽐내며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기도 했었지만, '아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진 오늘날에는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한껏 겸손을 떨고 있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풍이나 홍수, 화산과 지진, 그리고 가뭄과 기근, 하다 못해 병충해와 바이러스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인간은 허약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미약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순간에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며 '두 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지능을 발달시켰고, 그렇게 발달된 지능으로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그렇게 하나둘 쌓은 '지식'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물론 하릴없이 쓸모 없는 지식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들도 상당했다. 하지만 인간은 옥석을 가려가며 끝없이 지식을 축적해나갔고, 그렇게 쌓인 지식은 어느새 '거인'이라 부를 만큼 거대해지게 되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쌓아올렸다고 생각한 지식도 원래부터 있던 지식에 불과하다. 인간은 오랜 세월동안 그 지식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뿐이고 '과학적인 관찰(경험론)'과 '논리적 유추(합리론)'를 거듭하면서 그 '거인(지식)의 존재' 알아챈 것이다. 천재 과학자 뉴턴은 말했다. 자신이 이룬 과학적 업적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덕분이라고 말이다. 뭐, 뉴턴의 경우에는 겸손한 척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런 '거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것은 '나나 되니까 가능했던 거야'라는 뜻으로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인간은 '거인 버프'를 받고 난 다음의 위상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곤 한다. 그런 버프를 맘껏 누린 '과학적 인물들'을 만나 보자.

첫 번째 인물은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다. 천동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고, 지구 주위를 '다른 천체'들이 완벽한 원 운동으로 돌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천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주장 되었던 학설이었다. 그걸 프톨레마이오스가 체계적으로 정립을 하였고, 제대로 된 관측 시설도 없었던 시절에 '천체의 움직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천동설'은 오늘날에도 들으면 믿을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다. 맨눈으로 관측한 결과만으로는 '천동설'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시절에는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천동설이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천동설' 자체만 놓고 본다면 과학계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고, 2세기 때의 천문학 지식을 모아서 <알마게스트>라는 책을 써낸 것은 정말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나 할까? 천동설은 당시의 '종교의 가르침'에 너무 잘 맞아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종교관과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붙박이로 고정해 놓은 '천동설'은 너무 찰떡 같이 들어맞았기에 무려 1400년 간이나 유럽인들에게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두 번째 인물은 '지동설'의 근간을 마련한 코페르니쿠스다. 그는 신학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자신이 '직접 관찰한 천체의 움직임'과 <천동설>의 내용이 너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심하게 된다. 신앙심이 투철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신 중심의 세계관(중세시대)'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는데,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은 그 세계관과 너무 달라서 고심에 빠진 것이다. 여기서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오컴'이 말한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해볼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이란 '단순한 것이 진리에 가깝다'이라는 뜻으로 '객관적인 이론'을 탐구하는 방법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기에 자주 거론되곤 한다. 이를 테면,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태양을 중심에 놓으면 나머지 천체의 움직임이 간결하게 설명되는데 반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처럼 지구를 중심에 놓고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면 더 많은 부연설명을 해야 겨우 맞아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하면 천동설보다 지동설이 더 효율적으로 설명 가능하므로 '진실'에 가깝다는 사고 방식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경우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르곤 하지만,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망설이다가 내놓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크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훗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의 책을 빌어서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내놓게 되자, 교황청은 부랴부랴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책까지도 '금서 목록'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코페르니쿠스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였기 때문에 좀 더 간결하게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지동설을 주장하긴 했지만, 지동설을 뒷받침할 만한 '명백한 증거'를 함께 내놓지는 못했다. 그저 직접 관찰을 해보니 그렇더라는 정도로 저술한 덕분이다. 그렇지만 갈릴레이는 달랐다. 그는 명석했기 때문에 '완벽한 수학적 계산'을 해냈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천동설이 틀렸고 지동설이 맞다는 것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두 개 체계에 대한 대화>에서 천동설을 믿는 교황을 우스개로 조롱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자신이 이를 가르치는 대화 형식으로 적나라하게 써놓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갈릴레이를 화형시킬 목적으로 종교재판에 회부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교회는 '마녀재판'을 일삼으며 교회의 지위를 악용해서 '근대의 계몽'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마터면 갈릴레이도 그 희생양이 될 뻔 했고 말이다. 이렇게 '과학적 관찰(경험론)'과 '수학적 근거(합리론)'까지 모두 마련해서 체계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앞당긴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세 번째 인물로 삼았다.

다음으로 네 번째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다. 각설하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까닭은 바로 '좌표평면'을 만들어서 '기하학'과 '대수학'을 하나로 묶은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단한 발견으로 데카르트 이전에는 원이나 삼각형과 같은 '기하학'은 기하학대로, 상수와 변수로 수식을 표현한 '대수학'은 대수학대로 따로 발전했지만, 데카르트 이후에는 '좌표평면'을 이용해서 원, 삼각형, 직선, 곡선 같은 기하학으로만 표현되던 것을 '숫자와 문자'로 표현하며 대수학처럼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수학의 언어'는 더 복잡한 세계까지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에 데카르트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은 아이작 뉴턴이다. 그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까닭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자연현상이라도 그걸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고, 심지어 정확한 계산까지 해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했다고 하는 '만유인력의 법칙'도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엄청나게 큰 천체(중력)는 더 무거운 질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힘도 약해지기 때문에, 인력은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에는 반비례한다는 유명한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뉴턴이 천재라고 칭송 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어떤 자연현상이라도 간단한 수식(수학공식)으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과학사'를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단편적인 지식'을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중요하니 무조건 암기하라는 식으로 쓰여 있지 않다. 우리가 초중고 12년 동안이나 공부에만 매진했는데도 성인이 되었을 때 '교과서'의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과서'가 엉터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배운 '지식'을 거의 다 까먹은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왜' 중요한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무작정 외우기만 한 지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왜 중요한가? 별다른 관측 장비를 갖추지 않고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맨눈으로 보이는 '천체의 움직임'을 척척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 '진리 탐구'를 최종 목적으로 하지만, 그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론 정립'이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이론'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을 하면서 연구를 더욱 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동설'은 지금은 틀린 이론이지만 우리에게 아주 귀중한 영감을 준다. 만약, 학창시절에 이런 식으로 '천동설'에 대해서 배웠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 최초로 '과학이론 정립'에 상당 부분 부합하는 설명을 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꼭 알아두어야 할 '지식'이라고 가르쳤다면 오래오래 기억하는 학생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설명해주고 있기에 대단한 책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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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9 : 세계의 탄생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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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9 : 세계의 탄생>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4)

[My Review MMLXIV / 돌핀북 9번째 리뷰] 우리는 얼마나 '우주'를 이해하고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우주란 이런 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주는 광활하고 넓은 공간이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공간조차 우리가 '관측 가능한 우주(약 400억 광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있을지, 아니면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공간이 펼쳐진 곳'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최근에 내린 결론은 우리가 사는 우주가 유일하다는 '유니버스(하나의 우주)'의 개념을 버리고, '멀티버스(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다중우주'라고 부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우주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있으며, 그 모든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양자물리학(쉽게 말해 '양자역학')'이 점점 발달하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우주의 개념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를 수학적으로 검증해보니 얼마든지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아주 색다른 우주가 우리에게 펼쳐진 셈이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 드라마, 그리고 소설 등에서 이런 '다중우주의 모습'을 구현하곤 하는데, 너무 난해한(?) 우주를 눈앞에 구현하기 힘든 까닭에 그 수많은 다중우주 가운데 한 가지인 '평행우주'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도 좋다. '평행우주'란 쉽게 말해 '내가 살고 있는 지구' 이외에 수많은 '또 다른 나'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지구'가 있는 우주가 존재하고, 그 우주를 '어떠한 방법(수단)'을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다는 세계관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세계관을 만들고서 나름의 스토리를 구현하면 재밌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멀티버스'가 구현되기 이전에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SF소설이나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시간여행은 '단 하나의 우주(유니버스)'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동일한 시공간(지구)'에서 벌어지는 즐겁고 신 나는 모험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멀티버스(다중우주)'의 세계관 속에선 단순하게 '단 하나의 시간선'을 따라서만 여행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갈래'로 벌어지는 복잡한 시간선(?)을 따라가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물론 너무 복잡하면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해가능한 시간선'으로 타협(?)을 하다보니 단순한(?) '평행우주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중우주를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주가 아무리 광활한 시공간이 펼쳐지는 곳이고, 우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수없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은 지구밖 우주에 겨우 우주선을 보내는 첫발을 뗐을 뿐이고, 그나마 가장 멀리 간 우주인이 지구의 위성인 '달'에 도착했을 뿐이다. 현재까지 가장 멀리 보낸 '탐사선'도 보이저 호로 이제 막 태양계의 행성 궤도를 넘어 '오르트구름' 속을 항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 오르트구름조차 '태양계의 품속'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인간은 '태양계 밖'을 나서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 시작을 '빅뱅'으로 생각했다. 왜냐면 현재에도 우주는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주가 팽창을 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큰 폭발과 같은 '에너지원'이 있었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그렇게 광활한 우주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다 보니 우주의 시작은 아주 작은 점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초창기의 '빅뱅 이론'은 터무니없다고 비웃음을 받았다.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우주의 팽창'을 관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는 원래부터 '커다란 공간'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빅뱅 이론'을 내놓은 풋내기(?) 과학자를 비웃으려는 의도로 "뭐라고? 우주가 '커다란 폭발'에 의해서 탄생했을 거라고? 엄청난 폭발, 다시 말해 '큰 꽝(Big Bang)'이로구만. 내 말이 틀림없지? 하하하"라고 놀림을 받던 것이 그대로 명칭으로 굳어진 셈이다. 훗날 '허블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했더니 우주 공간 어디를 비춰봐도 온통 '적색편이'만이 관측되자 과학자들은 '빅뱅 이론'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만약 우주가 팽창하지 않고 수축하는 곳이 있었다면 '청색편이'가 관측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색편이'는 관측되지 않았다. 그렇게 '빅뱅'을 시작으로 우리 우주는 현재 138억 년 동안 팽창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한 점'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지구는 빅뱅 이후 92억 년에 만들어졌다. 태양계가 형성된 지 46억 년이라고 말하는 근거다. 그럼 지구에 생명은 언제부터 살게 되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지질 시대'라는 명칭에 익숙해져야 한다. 지구 탄생 이후 약 38억 년 전까지는 '명왕누대'라고 부른다. 원시태양이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그 주위를 도는 수많은 소행성들이 합쳐지면서 '행성'으로서 점점 크기를 키워가던 시대이기도 하는데, 초기 지구의 공전궤도를 향해 날아온 '미행성 테이아'와 충돌을 하면서 현재의 지구 크기만 해졌고, 달도 이 때에 지구 주위를 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당시의 지구는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아주 뜨거웠기 때문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아직 '액체 상태의 물'도 없어서 메마른 땅 위에 용암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다 뜨거웠던 지구가 '물'을 품고 있는 혜성과 수없이 충돌하면서 차츰 식어갔는데, 아마도 이때 '첫 생명체'가 탄생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원시바다'가 이제 막 형성된 지구는 매우 척박하고 혹독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아주 단순하고 미세한 '원시생명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명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하다. 그래서 '숨을 은(隱)'를 써서 '은생누대'라고 명명했다. 38억 년 전부터 약 5억 7천만 년전까지를 말한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생누대'라고 부르는데 이 현생누대의 지층에서 대량의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생명체가 대폭발을 이루었다고 보고, 최초의 생명체를 '루카(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LUCA)'라고 부른단다. 수소, 물, 암모늄, 메테인 따위의 '무기물'에서 '아미노산'이 합성되면서 점점 복잡한 유기물(단백질, 또는 핵산)이 만들어지면서, 드디어 '원시 세포'를 형성하게 되면서 비로소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선 '살기 좋은 환경'에서 얌전하게 짠하고 탄생한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지구'는 아주 척박하고 혹독하며 생명체가 살기에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환경은 '생명체'가 살기에 너무나 위험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혹독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최초의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에너지원이 발생할 수도 없었기에 '생명의 신비'는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현재의 과학계에서도 도대체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뾰족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쨌든 지구에서 생명은 탄생했고,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진화'를 거쳐서 오늘날 다양한 생태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세포 수준의 조악한 생명체가 현재와 같은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한 것을 보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처럼 생명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아직까지도 너무도 많고, 모르는 것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신비를 현재까지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이론이 바로 '진화론'이다. 그러니 진화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생명의 신비'를 밝혀내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나 중요한 진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인간]이라는 식으로 '단선적'으로 진화를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조차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하빌리스-호모에렉투스-네안데르탈시스-호모사피엔스] 이런 식으로 일렬로 죽 늘어 놓고서는 구부정한 '원숭이'가 완벽한 '현대인'까지 진화했다고 오해하기 딱 좋게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진화'란 이런 것이 절대 아니다. 현재의 원숭이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결코 '인간'으로 진화(?)할 수는 없다. 원숭이는 그저 원숭이일 뿐이다. 굳이 거슬러올라간다면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 조상'이 있었고, 그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서' 영장류인 고릴라와 침팬지 등으로 진화했으며, 또 영장류의 한 갈래가 유인원으로 갈라져서 오늘날의 '현생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수많은 '호모속 인간들' 가운데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호모사피엔스'가 오늘날의 현생인류의 조상이 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진화의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열등한 생명체'에서 '고등한 생명체'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찮게 살게 된 환경에 '적응'을 해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아 '유전자'를 후손에게 남겨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의 환경'이 갑작스럽게 달라진다면 '그 환경'에 살아남기에 유리한 형질이 '유전자'를 남길 확률이 높기 때문에 진화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는 우연찮게 '돌연변이 유전자'를 품고 있어서 애초에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와는 '다른 유전자'를 갖게 되었는데, 마침맞게 바뀐 '환경'에 살아남기에 유리하다면, 그 '돌연변이 유전자'가 자손을 남길 확률이 높아지니 세대를 거듭할수록 '부모의 형질'과는 다른 '형질'을 갖게 되어서 외형이 점점 바뀌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화에 걸리는 시간은 수십 만 년에서 수백 만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진화의 방향이 꼭 '환경 적응에 유리한 쪽'으로 향하는 것도 아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힘든 쪽으로 진화를 하면 '후손을 남길 확률'이 적어져서 결국엔 '자연도태'되고 멸종의 길을 걷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진화가 꼭 좋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런 진화의 증거는 굉장히 많기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구하며 수많은 이론을 내놓으며 '진화론'을 더욱더 갈고 닦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잘못된 연구'와 만나게 되면 '우생학'과 같은 무시무시한 인종청소와 차별을 낳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애초에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할 때에는 '자연선택'을 통해서 지구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넘쳐나게 되었다고 얘기했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엉뚱하게(?) 이해하며 특정 인종이 더 우수하다는 잘못된 신념을 주장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종교적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당신의 조상이 원숭이였겠구려"라면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기도 했고, 사회정치적 의도를 내세운 사람들은 '백인우월주의'를 만들어내어 흑인들을 차별하고 더 나아가 유색인종들 모두를 '인종쓰레기'로 치부하는 범죄를 자행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렇게 인간이 부린 오만으로 인해 지구는 지금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이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인간들이 벌인 활동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가 지구생명체에게 엄청난 치명타를 가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도 멸종될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를 겪으면서 그 '경고'가 결코 허풍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령 '대멸종'까지 도달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맞이할 엄청난 재앙은 '기후위기' 뿐만이 아니다. 막대하게 소모하고 있는 지구자원이 결국 그 끝을 보이며 '고갈'된 자원으로 회복 불능이 되어 버린 '경제성장'이 곤두박질 치게 된다면 인류는 더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향후 인간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몹시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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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나라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2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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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2 : 환상의 나라 오즈>  라이먼 프랭크 바움 / 최인자 / 문학세계사 (개정판 2023 / 초판 2007) [원제 : The Marvelous Land of Oz(1904)]

[My Review MMLXIII / 문학세계사 5번째 리뷰] <오즈의 마법사>를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무려 13편이나 말이다. 그런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오즈의 마법사 1편>만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우연찮게 '오즈'라는 신비한 나라에 도착한 도로시와 토토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그리고 겁쟁이 사자와 함께 신 나는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참 재밌다. 딱히 교훈을 주는 내용도 없이 그저 신비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게 1900년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10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도 재밌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의 어린이 독자들은 <오즈의 마법사>를 읽고 난 뒤에 어떤 느낌이었을까? 요즘처럼 '볼 거리'가 넘쳐나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어린이 독자들이 '후속작'을 써달라고 작가에게 편지를 쓰고 또 썼단다.

그런데 정작 프랭크 바움이라는 작가는 <오즈의 마법사>의 뒷이야기를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그리 잘 된 것이 없었단다. 그러다 아내와 장모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어른들을 위한 쓴 책'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마더 구즈(서양판 '옛날 옛적 이야기')' 책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 결국 <오즈의 마법사>까지 쓰게 되었고, 이게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둔 뒤에 또다시 '어른책'을 몇 편 써냈는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단다. 그러다 3년 뒤에 어린이독자들의 편지에 힘을 얻어서 <오즈의 마법사> 후속작을 기획했고, 이듬해에 2편에 해당하는 <환상의 나라 오즈>를 쓰게 되었단다. 바로 이 책이다. 어린이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프랭크 바움은 죽는 날까지 '오즈 시리즈'만 쓰다 마지막 14권을 쓸 당시에 병원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마지막 책이 출간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나 사랑받은 책들인데, 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 까닭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애초에 '후속작'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상상력'이 발현되지 않았기에 이런 졸작(?)이 탄생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뒷이야기'에 목말랐던 당시의 어린이들은 다시 시작된 '신비한 오즈 이야기'에 열광을 했고, 작가는 '떨어지는 영감'을 붙잡아 쥐어 짰지만 별소득이 없자 '독자들이 보낸 편지의 요구사항'을 참고(?) 삼아서 뒷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느낌이 다분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개연성 부족'이 몰입감을 많이 떨어지게 만든다.

이를 테면, 전편에서 '사기꾼'으로 밝혀진 오즈의 마법사에 앞서 오즈를 다스리던 왕이 있었고, 그 왕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오즈마 공주'가 오즈의 적통 왕위승계자라는 이야기가 2편의 주된 줄거리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은 난데 없이 '팁'이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런 까닭에 주된 줄거리를 알기까지 소설의 중반부까지 모두 읽어야만 '핵심 이야기'에 겨우 돌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팁'이란 소년이 못된 마녀 몸비에게 노예처럼 억울하게 지내고 있었고, 그 마녀에게서 탈출을 감행하는데 하는 김에 '호박머리 잭'이라는 동료와 함께 떠나게 되는데, 이 호박머리 잭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것이 마녀 몸비라는 조금은 억지스런 상황으로 시작한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전혀 알 수도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팁은 '위대한 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오즈로 떠나게 되고, 처음엔 뚜벅뚜벅 걷다가 힘이 들어서 말을 타고 달려가고 싶은데, '없던 말'을 구할 수 없으니 못된 마녀에게서 훔쳐낸 마법가루를 이용해서 '목마'를 하나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타고 팀과 잭은 오즈로 향하는데, 허술하게 만들었기에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는 설정을 깔아놓았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다 알고 있으면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싶은 내용인데, 처음에 읽을 때에는 이게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가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 든다. 그나마 1편에 나온 주인공인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합류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오즈의 마법사'가 맞구나 싶지만, 이미 이야기는 중반이 넘었다. 그리고 난데 없이 등장한 '소녀들'로만 구성된 군인들이 뜨개질 나무꼬챙이를 무기 삼아 오즈의 에메랄드 성을 점령하더니 우두머리 소녀인 '진저 장군'이 허수아비 왕을 내쫓고 새로운 '오즈의 여왕'으로 등극하고 만다. 졸지에 성을 빼앗긴 허수아비는 성을 되찾기 위해서 양철 나무꾼이 황제로 머물고 있는 뭉크킨 나라로 갔다가 성을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더 큰 힘을 얻고자 착한 마녀 글린다가 살고 있는 남쪽 나라로 찾아간다. 그곳에 도착해서 도움을 얻으려 했는데 '정식 왕위승계자'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오즈마 공주'의 살았는지, 죽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에 수긍한 허수아비와 일행들은 글린다와 함께 오즈의 성을 탈환하기 위해 떠나는데...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결국엔 '오즈마 공주'를 무사히 찾아내고 오즈의 에메랄드 성의 주인으로 자리매김을 한다는 결말이다.

전편인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처음부터 확실한 목적이 있는 여행을 떠났다. 도로시는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나선다. 여행 도중에 만난 허수아비는 똑똑해지고 싶어서 위대한 마법사에게 '뇌'를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서였고, 양철 나무꾼은 인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으로 인해 따뜻한 마음도 잃고 차가운 몸뚱이만 남게 되었기에 '심장'을 얻고 싶어서였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얻기 위해서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4명의 주인공들은 각각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머나먼 여행길을 떠났고, 숱한 위기와 신 나는 모험을 겪었지만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우정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펼치며 결국은 모두 바라던 소원을 이루게 되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런데 후속작인 <환상의 나라 오즈>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그저 '작가의 필요'에 의해서 급조 된 듯 합류하게 된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오즈에 가기 위해서 '달리는 목마'를 만들어내고, 포위된 에메랄드 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날으는 검프(사슴을 닮은 동물)'를 만들어 등장시키고, 에메랄드 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글린다의 군대'가 동원된다. 애초에 허수아비가 잘 다스리고 있던 에메랄드 성을 빼앗은 '진저 장군'의 전쟁 목적도 허술하다.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것이 힘들고 하기 싫으니 에메랄드 성에 널려 있는 '에메랄드 보석'을 훔치러 수많은 소녀들이 모였고, 그런 소녀들을 이용해서 '진저 장군'이라 불리는 소녀는 허수아비를 내쫓고서 '여왕'으로 등극한 뒤에 오즈의 모든 남자들에게 여자가 하는 허드렛일을 강요하는 법을 만들고, 여자들은 예전의 남자들처럼 놀고 먹는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소녀들'이 전쟁을 일으킬 만한 정당한 명분이 되리라 보는가? 훗날 '글린다의 군대'가 동원되어 '진저 여왕'을 내쫓은 다음에 '오즈마 공주'가 정식 여왕으로 승계를 받은 뒤에 오즈의 남자들은 환호성을 외쳤단다. 더는 힘든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오즈의 여자들은 어땠을까? 역시 남자들과 똑같이 환호했단다. 그 까닭은 남자들이 만든 '맛없는 음식'을 더는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고, 여자들은 모두들 본래에 하던 '힘든 집안일'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차린 맛있는 음식을 남자들과 맛있게 먹었단다. 이럴 거면 '전쟁'은 왜 한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지만, 이건 좀...

이런 식으로 '개연성'이 매우 부족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서 솔직히 크게 감동을 받은 것이 없다. 100여 년 전 어린이들은 '환호'를 했을지 몰라도 21세기 어린이들은 그닥 '환호'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뒷이야기가 무려 12편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본편보다 나은 속편은 아닌 셈이지만, 이렇게나 얼렁뚱땅 펴낸 '속편'은 나머지 12편을 위한 '서론'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롭게 등장한 오즈의 진정한 주인공 '오즈마 공주'가 어떤 일을 펼쳐낼지 궁금하기도 하며, 아직 재등장할 기회가 없었던 '도로시'와 '겁쟁이 사자'가 남았다. 그리고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펼쳐낼 모험이야기도 아직 제대로 펼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관점으로 '희망'을 걸어본다면 나머지 뒷이야기는 좀 더 다채롭게 이야기가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속은 김에 제대로 속아보려 한다. 남은 12편의 이야기도 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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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1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파이로 매니악 1>  이우혁 / 미컴 (1998)

[My Review MMLXII / 미컴 1번째 리뷰] '퇴마록 2부'에 해당하는 <뉴 퇴마록(가제)>이 출간되길 기다리면서 이우혁 작가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17권짜리 소장판 <퇴마록>도 구했기에 '국내편'에 이어 '세계편'을 읽을 준비를 하고 있고, 말 많던 <치우천왕기>(엘릭시르)도 새로 읽고 있으며, 새롭게 탄생할 '이우혁의 세계관'이 가장 잘 드러난 <왜란종결자>를 읽을 준비를 하던 차에 아직까지 읽지도 못했던 이우혁의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책 <파이로 매니악(전3권)>을 비롯해서 <바이퍼케이션(전3권)>, <쾌자풍(전3권)>, <고타마(전2권)>라는 책이었다. <파이오 매니악>을 제외하고 나머지 책들은 2010~2012년 사이에 출간되었는데, 내가 이 당시에 '독서논술' 수업을 한창 하던 시기라서 [어린이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독파했을 때였다. 그래서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이 출간한 책인데도 그닥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 않은가.

그리고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이 또 있다. 바로 말 많았던 <치우천왕기>(들녘) 9권 모두를 사놓고 목놓아 기다리던 독자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5년 뒤에 느작 없이 '출판사(엘릭시르)'를 바꿔서 새로 쓰고 완간을 내놓았다고 하니, 일종의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애초의 출판사에서 '종결'이라도 내놓고서 '수정판'을 내놓았더라면 그나마 '더 좋은 작품을 쓰려고 고심이 많았구나' 하는 이해라도 했었을텐데, 그간 일언반구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 '연재'를 중단하더니, '완결'을 했다는 기쁜 소식도 무색하리만치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또 다른 책'을 썼다니...그럼 기존의 책(들녘)을 사모았던 독자들은 그냥 '바보'로 만드는 꼴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배신감에 이우혁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미 1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유독 '엘릭시르' 출판사의 책들은 사 모으지 않았는데, 작년에 쭉 읽어보니, 나름 괜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정판'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해묵은 미운 감정이 쬐끔은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늦은감이 많지만 이우혁의 다른 작품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은 바로 <파이로 매니악>이다. 1998년에 쓰였다는데, 미처 출간 소식을 접하지 못해서 읽지 못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 시절에는 서울 중심가에 있는 '큰 서적'이 아니면 '동네 서점'에서 오프라인으로 책을 구입해야 하던 시절이라 '서점 주인'이 책을 들여놓지 않으면 책을 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들리는 소문으로나마 '퇴마록의 작가가 <스포츠신문>에 소설을 연재한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실 '신문연재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다. 왜냐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 연재를 읽기 위해서라도 신문을 매일 사러 가는 수고를 해야 했는데, 그게 귀찮았고, 다른 하나는 신문을 일일이 사러 가기 귀찮았다면 '정기구독'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 당시엔 신문구독을 할 정도로 금전적 여유가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당시 '스포츠신문'이라면 조선일보(스포츠조선) 아니면 동아일보(일간스포츠)였을텐데, 조중동 같은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차로 <파이로 매니악>은 나와 인연이 없는 소설책이었던 셈이다.

암튼, 이제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막상 읽으니 이 소설...정말 '매니악'하다. 대한민국 사회의 '암적인 존재'를 리스트로 만들어서 '사재폭탄'으로 처형을 한다는 기막힌 발상이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첩보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대한민국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2025년인 지금도 경악스러울 내용인데, 만약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가 이 소설도 '소장'하게 되었다면, 어쩌면 내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내 전공이 '화공(유기화학)'쪽이기도 하고, 전공을 그대로 잘 살렸다면 '고층빌딩 폭파철거'쪽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화약놀이'를 좋아했던 터라 한창 때였던 20대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내 진로'도 그쪽으로 정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IMF를 맞아서 '취업'이 참 힘들 때였기 때문에 알바 같은 것을 하면서 '묻지마,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던 공시족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그즈음에 '발파 공법'과 관련된 자격증 시험도 준비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연이은 '불합격'으로 진로를 확 바꾸게 되었고, 그렇게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 '독서논술쌤'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읽던 '어린이책'에 깊은 감명을 얻고서 시작한 새 삶이었는데, 그때 만약 <파이로 매니악>같은 소설을 읽었다면 '발파 시공사'쪽을 전전하면서 '폭발물'을 다루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내용은 정말 그로테스크하다. '폭탄 전문가' 동훈과 '신문기자' 영이 우연찮게 만나서 의기투합을 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둘이 만나서 모의(?)를 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할 법한 암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작가가 한국사람이고, 등장인물과 배경도 모두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그런 무시무시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더란 말이다. 그런 끔찍한 내용을 써낸 작가도 대단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걸 읽고 있는 '독자(나를 비롯해서 말이다)'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칼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여 '처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짐승'이기에 사람이라 부르지도 않고 '죄수'라고 지칭하며 죽기에 꼭 알맞은 폭탄을 터뜨려서 '천벌'을 받았다는 느낌이 물씬 나도록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 죄수들의 신상을 살짝 이야기하자면, 독재정치를 벌여 저항하는 국민들을 조직적으로 폭행하는 '정치깡패두목'을 폭사시켜 죽였고, 친일파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제가 가공한 '식민사학'을 정통하다 주장하여 대한민국의 역사를 수치스럽게 만든 '사학교수'를 불태워 죽였으며, 정치적 부정부패와 비리를 감싸고 '엘로우저널'을 퍼뜨리던 악질적인 '신문사사장'을 엉덩이부터 면상까지 수많은 쇠구슬로 꿰뚫어버려서 시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으며, 부실공사로 애먼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중생들과 원조교제를 일삼던 '악덕업자'를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해서 그 아래 깔려 압사시켜 죽여버렸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벌 받아 마땅한 놈들만 골라(?) 죽이는 통쾌한 액션 같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파이로 매니악>이라는 것에서 덜컥 걸림돌이 꽉 막혀버리고 만다. 직역을 하면 '방화(파이로)+광의(매니악)'라고 해석이 되지만 조금만 풀이하면 '폭파 전문가'라고 해석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익스플로전(explosion)'이 아니라 '파이로(pyro)'라는 것은 우리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전문적인 방화'라고 해석할 수 있단다. 다시 말해, 수많은 인명살상을 위한 방화가 아니라 꼭 죽여야 할, 꼭 죽어 마땅한 '한 사람'만 골라서 죽일 수 있는 '특화된 폭발'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특화된 방화'가 가능한 인물이 바로 '동훈'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우리 사회에서 굴곡지고 어두운 단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신문기자 '영'과 만나게 되자 둘은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명은 '자살'을 하러 한강 다리로 갔고, 다른 한 명은 '청부살해'를 당해 포대에 담겨 한강에 빠져버렸는데, 그렇게 '생을 마감'할 뻔(?)했던 두 사람이 운명적이 아닌 '공교롭게' 만나는 바람에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처리(?)하고서 대한민국 사회를 좀 먹고 악영향을 끼치는 '죄수 리스트'를 만들어서 천벌을 단행하자고 했던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나쁜 놈들이 돈과 권력을 쥔 '사회고위층'이라는 이유로 법망을 피해서 유유자적하며 제멋대로 살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한민국에서 아주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꼬락서니가 몹시 불쾌했기 때문이다. 내란과 외환죄를 저지르고도 '인권' 운운하면서 법꾸라지처럼 대한민국의 법을 우롱(!)하고 있는 '내란세력들'만 봐도 딱 그렇다. 여기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면죄부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의 암적인 존재들이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이런 놈들만 딱 골라서 '천벌'을 내릴 수 있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듯도 싶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을 잡아 죽일 때도 그 처참한 광경에 눈과 귀를 막고, 역하고 비위 상하는 냄새가 한가득 뿜어져 나와서 구토를 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사람'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폭탄'으로 죽였는데, 그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는 살벌한 풍경을 보며 어찌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길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저 멀리서 터지는 미사일과 폭탄은 '불꽃놀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할 순 있겠으나,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 조각의 살점으로 분해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핏방울로 산화한 그 자리는 '화염'이 치솟아 불바다가 되었음에도 고기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누구도 쉽사리 다가가 '구조활동'을 하기 힘들게 만들고, 운이 좋아 팔다리만 잃은 채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지르는 신음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한 셈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끔찍한 장면 묘사'를 아주 생생하게 하고 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런 '충격'을 목격하고 고통 받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다. 심한 욕지기가 절로 나온다는 설명과 죄수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난 뒤에 구역질을 하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안 했으면 싶을 정도다. 그냥 통쾌하게 벌 받아 마땅한 놈들을 '처단'했다는 정도로 마무리하면 좋았으련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렇게 '잔혹한 묘사'를 거르지 않고 다 표현한 소설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전민희의 소설 <룬의 아이들 : 데모닉>이었다. 여기서 '전투인형'이 등장하는데 전쟁의 참혹함에서 '인명살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을 대신해서 싸우는 '인형'들이 존재하는데, 그 인형들조차 죽는 모습이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똑같은 외형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피부도 인간과 똑같고, 심지어 인형의 내부에는 '인간의 피'가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설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쟁의 참혹함은 사라지기는커녕 '전투인형들의 죽음'은 곧 '사람의 죽음'과 하등 다를 것이 전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끔찍한 일을 왜 하는걸까? 그 전투인형들과 함께 싸우는 인간들은 그 참혹한 장면을 직접 보고 겪으며 엄청난 공포를 느낄 정도인데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한마디는 "그래야 전쟁의 끔찍함을 깨달아서 전쟁을 멈출 것 아니에요. 전쟁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비참한 전투만이라도 덜 할 수 있다면, 이런 끔찍한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짓인지 잘 알 것 아니에요"였다. 끔찍하고 참혹한 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줘야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전쟁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에 머리를 한 대 쿵하고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파이로 매니악>의 작가 이우혁도 그런 의도가 다분했을 것으로 본다. 만약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을 깔끔하게(?) 죽여버리는 통쾌한 장면만 강조하고 말았다면 이걸 따라하려는 '범죄모방' 심리가 강하게 작동했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칼이나 총도 아니고 '폭탄'이 주요 소재인 소설이라서 더욱 조심스러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내가 이우혁 작가를 좋아하는 까닭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수단'을 쓰지만 결코 '그 수단'이 온전히 정당성을 갖추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와 방법으로도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인죄'를 저지르면 아무리 정상참작을 한다고 해도 '사형판결'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 법 체계상 사형판결을 오래도록 집행하지 않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사형판결'을 없애지 않고 있다. 아무리 '부작용'이 심하다고는 해도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사형제도'가 있다고해서 흉악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엄하게 죄를 물어서 엄한 벌을 준다'는 법의 존재만으로도 흉악범죄의 발생 비율이 낮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중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법이 존재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착한 사람'이 여전히 많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진짜 '나쁜 놈'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린다는 속담처럼 정말 '나쁜 몇 놈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쌀을 지푸리게 만든다. 정말이지 그런 나쁜 놈들만 골라서 딱딱 '천벌'을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멋진 상상을 하면서 2권을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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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8 : 개인 vs 사회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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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8 : 개인 VS 사회>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3)

[My Review MMLXI / 돌핀북 8번째 리뷰] 정치가 어려운 까닭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 없는 것'이 비단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치는 '실생활'과 밀접한 정도가 아니라 '실생활, 그 자체'인 까닭에 어떤 현안이 떠오르든 반드시 '옳은 정답'을 찾아야만 하겠기에 극도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를 들어서,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망설이게 된다.

홍수가 나서 댐이 범람할 위기에 처했다고 치자. 이대로 10분이 지나면 오메가시티가 그대로 물속에 잠길 위험에 놓였다. 물론 범람 위기경보가 조기에 울려서 시민들은 대부분 대피에 성공해서 도시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서 안전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대로 범람이 되어서 오메가시티를 덮친다면 수많은 공장과 회사들, 발전소와 군사시설, 병원, 교육시설, 박물관과 문화재들 모두가 물속에 잠겨서 복구하는데만도 엄청난 비용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당장 수도인 오메가시티가 기능을 상실한 틈을 타서 '적국'이 침공할 우려도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사시설'만큼은 지켜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범람할 물길을 돌릴 수 있는 '조그만 댐'을 하나 폭파시키면 오메가시티로 들어갈 물을 대부분 '알파 마을'로 돌릴 수 있어서 안전을 확보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 '사회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조그만 댐'을 폭파시켜서 범람을 '알파 마을'쪽으로 유도해야 옳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조그만 댐'을 폭파해서 물을 '알파 마을'로 돌린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여 명의 마을 주민들은 미처 대피할 시간이 없어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이제 남은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았고 '알파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노년층이라서 지금 당장 알린다고 해도 안전하게 대피할 시간도, 구조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마을의 늙은 주민들 백여 명을 '희생'시키면 오메가시티를 구할 수 있고, 오메가시티를 복구하는 비용보다는 훨씬 적은(?) 비용을 들여서 알파 마을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범람이 지나고 나면 '알파 마을'에 사는 사람도 더는 없을테니 복구비용 자체를 아낄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백여 명의 알파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정해야 할 '당신'의 부모님이 알파 마을의 주민이고 '당신'의 아이들마저 방학을 맞아 부모님댁에 놀러 가서 함께 머물고 있다. 과연 당신은 홍수라는 재난 앞에서 '사회의 이익'을 앞세워 오메가시티를 구할 것인가? '개인의 권리'를 생각해서 알파 마을을 구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60초 뒤에 공개하겠다.

우리는 개인의 권리를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 '개인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의 이익을 더 중시한다면 '집단주의'라고 말한다. 이 둘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면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웬만한 사안들은 '어느 쪽의 이익'이 더 크고, 더 중요한지를 따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극단적인 경향'을 띠게 되면 나타난다. 개인주의의 극단화는 '이기주의'이고, 집단주의의 극단화는 '전체주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문제다. 하지만 '이기주의'는 어느 정도 선에서는 '통제'가 가능하다. 사회 전체가 건전하다면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소수를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전체가 '이기주의'에 빠져서 저들의 욕심만 채우면 그뿐이라고 여긴다면 큰 문제겠지만, 그때에도 '다수의 이익'을 생각하는 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제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주의자'들을 혼내주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자칫 잘못 되었을 때 '사회 전체'를 불이익 줄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아주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바로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런 희생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는 종종 '광기 어린 폭력'을 자행하곤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주의'를 경계해야만 한다. 더구나 전체가 '비윤리적인 경향'을 띠어서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개인의 행동에 책임을 묻지도 않고, 잘못을 자행한 개인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책임은 '전체'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이 대표적인 '전체주의'가 보여준 폐해다. 이런 전체주의는 흔히 '독재자'를 낳고 독재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사상을 강제 주입시키며 사회 전체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그저 방치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망가지길 바란다. 그래야 자신의 '영구 독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럼 사회적인 관점에서 '좋은 일'과 '나쁜 짓'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윤리'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윤리'를 따르려는 까닭은 아무리 자신의 권리나 사회의 이익을 소중히 여겨서 그 권리와 이익이 더 많은 쪽으로 따르려 한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는 원칙이 '윤리'에 위반되는 것이라면 '나쁜 짓'으로 간주하고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윤리'조차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로 구분하곤 한다. 하나는 '의무론'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이라고 한다. 도덕 법칙이나 의무를 준수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생각하는 '의무론'과 다수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생각하는 '목적론'이다. 의무론을 따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또한 목적론을 따르는 대표적인 사람은 '안중근'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의무론'은 과거지향적이고, '목적론'은 미래지향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윤리조차 '절대적인 잣대'는 아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절대적인 도덕(정언명법)을 말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의 마음을 경외심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머리 위에 반짝이는 하늘의 별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라고 말이다. 칸트는 내가 하는 '착한 일'로, 세상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착한 일'을 따라하게 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한 선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모든 상황에서도 옳은 것, 다시 말해 '절대적인 도덕'을 법칙으로 세우면 도덕이 무너지는 시대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에 반론을 던진 이가 있었다. 바로 <공리주의>를 쓴 벤담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행복할수록 이익일 뿐이라면서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벤담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었기에 나중에 존 스튜어트 밀이 '원초적인 쾌락'만 따질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쾌락'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공리주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기도 했다. 뭐, 양적이냐 질적이냐도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에 어려운 문제겠지만 말이다.

어떤가? 정치, 참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분명히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가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것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람, 저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똑똑해야 한다. 그러나 똑똑하다고만 해서 정치를 잘 한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똑똑해도 '자기 이익'만 챙기려 들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정치가 아니라 '독재'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좀 잘 하는 사람을 뽑고 싶다면 '실력'도 갖췄으면서 '윤리'적인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적 흠결'이 전혀 없는 착한 사람만 뽑으라는 얘기도 아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을 고려해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지혜를 유용하게 써먹어야 한다. 대한민국 '검찰공화국'을 만들어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무턱대고 '범죄자 취급'하고 내로남불 했던 '윤석열과 아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은 생각도 않고, 남들이 저지른 행동 하나하나를 '법적으로' 따져서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결국엔 '깨끗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무리하게 감옥에 쳐넣으려고 하더니, 자신들은 내란과 외환이라는 무거운 죄를 저지르고도 '모든 사법절차'를 따져서 법망을 피해가려는 '법꾸라지 행태'를 자행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두 번 다시 '대한민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정치가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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