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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5 - 열도의 게임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5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3권에 이어, 다시 '일본'이다. 지난 3권에서는 일본이 '개항'을 하면서 겪은 혼란을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개항으로 인한 일본 내부의 파장과 분열, 그리고 대혼란으로 이어지는 대환장 스토리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건 지사(사무라이)들이 있다. 우리로 치면 벼슬도 없는 시골양반이나 뭣도 없이 기개만 높은 젊은 유생쯤으로 여기면 좋을 듯 싶지만, 이들이 들고 있는 것이 '붓'이 아니라 '칼'을 든 사무라이라는 점이 일본을 대혼란으로 치닫게 만든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해진 셈이다. 일단 '존왕양이 지사'에 대한 탄생부터 이야기하련다.
그들의 탄생은 지난 3권에서 자세히 다뤘다. 오랜 평화를 지속했던 일본이 빗장을 닫아 걸고 쇄국을 해왔던 것은 다들 알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오랜 평화는 묘한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바로 일왕가(천황)와 쇼군가(정이대장군)라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일본의 정국을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왕은 일찍부터 권세를 잃고, 막부(사무라이 정부)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다시 말해, 권력의 명분은 일왕이, 권력의 실체는 막부가 갖고 있는 요상한 일이 벌어진 셈인데, 우리도 고려시대 무신정부가 들어서면서 고려왕을 대신해서 '최씨무신정부'가 60여년 간 실세 역할을 한 경험을 비춰볼 때 그다지 낯선 정부형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요상한 까닭은 그런 형태로 230여 년, 아니 그 이상을 버텨왔기 때문이다. 거기다 실세인 '막부'도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번(지방세력)'으로 나뉘어 '다이묘(지방영주)'가 각 지역을 다스리면서 막부에 충성을 하는 '봉건제 형태'로 지속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왕이 있으나 '충성'은 막부의 수장인 '장군(쇼군)'에게 바치는 형태로 오랫동안 지속해왔단 말이다.
일본이 이런 형태로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영향'을 덜 받은 까닭이 크다. 같은 시기 중국과 한국의 여러 왕조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중앙집권제'가 일반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같은 '유교권 국가'였는데도, 일본은 명분과 권력의 향방이 서로 다른 체제로 지내왔던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평화가 지속되다보니 '권력층의 분화'가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섬나라 일본의 특성상 밖으로 분출하는 것보다 속으로 곪아가는 것을 택하는 방식이 더 자연스러웠던 관계로, 개항을 할 즈음의 '지사(志士)'들이 심취한 것은 바로 '학문'이었다. 다시 말해, 칼을 든 사무라이들이 칼질보다 학문을 파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파고든 학문은 크게 두 갈래였는데, 바로 '난학(네덜란드 상인들이 주로 전파한 서양학문)'과 '유학(전통적인 동양학문)'이었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하면서 일찍이 일본이 서양학문에 눈을 떠서 동양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썰을 푸는 이들이 많지만, 이 당시에 '난학 열풍'이 분 것은 사실이지만,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쇄국의 영향으로 외국인(네덜란드인은 제외)이 풍랑으로 일본해안에 떠밀려오면 사형을 시키던 상황에서 대놓고 '서양학문'을 공부하고 있다고 자랑할 사무라이들은 그닥 많지 않았었다. 그보다는 사상적으로 친숙했던 동양의 학문인 '유학'에 빠져드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던 모양이다. 헌데 '유학'이 강조하는 사상은 바로 '충(忠)'인 관계로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유학에 심취하면 할수록 묘한 괴리감에 빠져들게 된다. 다름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옳으냐, 장군에게 충성하는 것은 그르냐..하는 혼란 말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본래 왕족과 귀족이 아닌 '평민계층'이었다. 이들 로열패밀리들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울 때 '무사'가 필요하니, 전쟁을 수행하고 자신을 보호할 칼 쓰는 '싸울아비('사무라이'의 어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함)' 필요했기에 칼 좀 쓰는 이들이 대거 '전문화 과정(?)'을 거쳐 '무사집단'을 형성하였고, 이들이 나중에 무능한 귀족을 썰어버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일왕을 '바지 임금'으로 만들고서 자신들이 권력행사를 해왔던 것이다. 기왕 권력쟁탈에 성공했으면 스스로 '왕좌'를 차지할 법도 하련만, 섬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조화(섭리)'를 깨는 것을 매우 기피한다고 해서 차마 '왕족'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하고, 그렇게 간판은 '일왕(명분)'으로 내걸고서 실권은 '장군(실리)'이 챙기는 형태로 이어왔던 셈이다. 물론, 이를 반대하던 반란세력이 있어 여러 차례 '막부'를 치는 '반막부 세력'이 등장해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도 실행되곤 했지만, 번번히 실패를 하고 '반세력'을 처단했단다. 물론, '간판'은 내비두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막부'가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을 선택하니, 뜻 있는 사무라이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이른바 '존왕양이(나라에 충성하고 서양오랑캐를 무찌르자)'를 내세운 것이다. 이는 그만큼 '막부의 힘'이 약해지고 무력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평화를 구축해오면서 '막부'는 사실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여러 번'들을 지배하는 구조를 이어왔는데, 페리제독의 함포 몇 방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백기를 든 막부에 대한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못난 막부가 하는 짓이라고는 '권력다툼'과 '내부총질' 뿐이었고, 그로 인해 '민생경제'는 파탄에 이르고, 급기야 서양세력의 꼼수(환수이익)로 인해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 엄청나게 오르는 등 민심마저 '막부'를 등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렁해진 '막부'를 향해 가장 먼저 칼을 빼든 것은 '다이묘(지방영주)'들이었다. 특히, 막부와 친하지 않았던 다이묘들, 다시 말해, 막부에게 멸시받던 지방영주들이 먼저 반기를 들어 막부를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물렁해졌다고 해도 막부는 막부. 힘겨운 과정을 통해 '반막부 세력'을 처단하였지만, 이번엔 '일왕'쪽에서 막부를 공격했다. 이것이 좀 묘한데, 서양 세력의 힘이 무서워서, 일단 '개항'에 도장을 찍긴 했지만, 명목상으론 '일본의 대표'는 일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항'을 결정한 막부는 '일왕'에게 사건의 일말을 보고하고 '도장'을 받기로 했건만, 돌연 '일왕'이 도장찍기를 거부하고 나선 것임. 이를 부추긴 세력이 바로 '존왕양이 지사'들이고 말이다. 모처럼 일본이 충성을 바쳐야 할 '방향성'을 제대로 잡긴 했지만, 그 방향이 하필이면 아무런 힘도 없는 '일왕가'였고, 당연히 실세였던 막부로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존왕양이 지사'들에게 기름을 부으며 불을 지핀 세력이 바로 '반막부파'였고 말이다.
막부로서는 밖으론 서양세력의 압력에 쩔쩔 맸고, 안으론 '말 안 듣는 세력'이 생겨나 일본을 위기에서 구해낼 '핵심주체'인데도 이도저도 못하는 사단이 나고 만 셈이다. 이를 난제를 풀기 위해 꼼수를 생각해냈으니 바로 '공무합체(일왕가와 막부가가 서로 혼인을 해서 한 가족이 되는 것)'였다. 이는 '명분'과 '실세'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니, 어려운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묘수가 될 수도 있었으나, 이는 물과 기름을 하나로 섞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물색없는 핑계만 대려는 꼼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찌 '개항'을 하면서 동시에 '양이(또는 쇄국)'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일본은 늘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던지라 '핵심관계자'들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물에 물 탄듯, 술에 물 탄듯 어물쩍 넘어가버린다.
하지만 '존왕양이 지사'들은 이런 뜨뜻미지근한 해법에 가만 있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충성'만을 외치며 일본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고, 이런 똘끼를 보이는 시골무사들에게 일본의 민중은 외세에 꿀리지 않는 자긍심을 느끼며 지지의사를 보내게 된다. 여기에 똘끼로 똘똘 뭉친 두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 번이었다. 이 두 개의 번은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서양 학문과 무기를 배우고 익힌 자신감과 더불어 자신들이 일본의 마지막 충의지사라는 자부심까지 갖게 되자. 아주 지독한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일왕과 막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안달을 냈다. 그로 인해 개항 이후 무역을 위해 일본 내에 들어온 외국인 관리와 상인을 향한 무차별 사냥(?)에 나설 정도였고, 막부쪽 사람이라면 암살도 자행하는 등 막가파식으로 '양이'를 실천하곤 했다.
이렇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등의 열강들은 군함을 보내 일본에 실력행사를 하려 했고, 막부는 이런 분란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디까지나 '조슈와 사쓰마'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선을 긋고, 열강들이 '그쪽'만 공격하는 것에 '이면합의'까지 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셈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편전쟁'에서 확인되었 듯이 일본이 자력으로 서양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음을 직시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서양함대를 상대로 꽤나 분전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함대를 보내 조슈와 사쓰마를 공격해서 상당한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도 큰 피해를 보았고, 특히, 조슈 번은 좁다란 해로를 막아 서양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데 성공함으로써 완전한 패배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서양도 청 왕조와는 달리 큰 이득이 없는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확대하는 뜻이 없었기에 이쯤해서 물러나는 것(물론, 막부로부터 엄청난 배상금은 챙기고서)으로 마무리하였다.
이제 억울한 것은 일왕에게 충성을 받쳤지만 일왕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조슈 번은 일왕이 머무는 '교토(京)'로 억울한 사연을 전하러 군대를 보내고, 막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교토로 오는 길을 막는다. 물론 실질적인 군대를 보낸 것은 '친막부파'였던 지방영주들이었고, 사쓰마 번의 영주는 이번 전쟁을 치루면서 막부가 옳았음을 지지하며 조슈 번에게 칼을 겨누게 되니, 홀로 남은 조슈 번은 외로운 전투를 벌이다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받고 본진으로 후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리는 듯, 전투중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일왕이 머무는 교토 전체가 불타는 '교토 대화재'로 번지니, 앞으로의 일본 향방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