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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4 - 태평천국 Downfall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4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2월
평점 :
지난 2권에 이어 다시 '태평천국'이다. 각설하고, 태평천국 운동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서구열강의 힘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청 왕조'가 무너져가는 와중에 안팎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내세우며 등장한 '태평천국 운동'은 끝내 청 왕조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아니었다. 아편은 여전히 중국을 병들게 만들고 있었고, 관료주의의 부정부패는 여전했으며, 외부의 침략에 무력한 대응으로 백성들의 삶은 나락을 전전하게 만들고 삶의 희망을 꺾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4억 인구의 청 왕조에서 3천 만명이 때죽음 당하고 말았으니 피비린내 나는 전장속에서 백성들의 삶이 비참했을지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1851년부터 1864년까지 무려 14년 동안에 벌어진 비극이다. 전체인구의 약 7%의 피를 부른 이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 것일까? 주목해야 할 점은 '사이비교주'에게 속아 피해를 당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이었고, 너무나도 많은 희생이었다. 그렇기에 '태평천국 운동'을 그저 그런 난리로 치부하기엔 궁금증을 자아내는 점이 너무나도 많다. 먼저 태평천국 운동이 내세웠던 기치는 '반봉건', '반외세'였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 왕조의 무능력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이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 중국인이고, 그가 바로 홍수전이다'라는 사이비종교의 냄새가 물씬 나더라도, 민생을 우선으로 삼고, 남녀평등을 주장했으며, 사회부조리한 정책(변발, 전족 금지 등)에 반대를 분명히 하면서 교인들끼리 서로 궁휼히 여기는 태평천국의 사상은 '초기 사회주의'에 버금갈 정도로 혁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마르크스조차 초기에는 '태평천국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태평천국 운동'은 중국사회에 보기 드문 '개혁운동'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러나 남경(난징)을 수도로 삼고 반군을 조성해 청 왕조의 수도인 북경(베이징)을 공격하면서부터 태평천국 운동은 '초심'을 잃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북경 공략이 예상과 달리 실패하면서 운동의 핵심인사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도부의 '권력다툼'이 심화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청 왕조는 애로우 사건이 원인이 되어 '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며 무능함을 여전히 증명하고 있었지만, 태평천국 운동은 내부갈등을 겪으며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태평천국 운동의 영향력은 건재했던지라 장강(양쯔강) 이남에서 보여주는 위력은 대단했고, 중국대륙의 남동부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른다. 서구열강에게도 못난 모습을 보이던 '청 왕조'는 태평천국 세력과의 대결에서도 여전히 못나게만 굴 뿐이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태평천국 세력'은 힘을 다시 모았고, 다시금 세력확장을 도모하며 내부결속을 다졌고, 동서 양쪽 방향으로 정벌을 떠나게 된다. 이 와중에 '청 왕조'는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에게 밀려 '북경 함락'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직면하고, 황제(함풍제)가 열하로 피난을 갔으며, 보물창고인 '원명원'이 죄다 털리고 방화로 인해 전부 불타버리는 웃지 못할 비극이 벌어진다. 청 왕조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도 '태평천국 운동'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그건 서양세력이 원치 않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목적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차지해 무역으로 이득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 나게 '청 왕조'를 두들겨(?) 유리한 조약(!)을 얻어냈는데, 이것이 새로운 태평천국 세력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꼴이 된다면, 그들의 이득에 큰 손실이 날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북경을 한창 두들겨패고 있는 와중에도 상해(상하이)쪽에서는 청 왕조를 도와 '태평천국 세력'과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여기서 서구열강들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게 된 셈이다. 그들은 '문명개화'를 목표로 전쟁도 불사한다고 하지만, 개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등쳐먹고 빨대 꽂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중국은 스스로 '근대화의 문'을 열 수도 있었던 '태평천국 운동'을 그저그런 난리로 치부하며 '태평천국의 난'으로 확정짓고 마무리 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럼에도 14년간이나 태평천국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져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민중의 각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 왕조의 지배 아래에서는 살 수 없겠다는 깨우침이 '태평천국 운동'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이쪽도 저쪽도 살 수 없겠다 싶은 민중들은 비록 '노예 같은 삶'일지라도 외국으로 발길을 돌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는 쪽으로 결론을 내었기 때문이다. 마침, 서구열강에서도 수많은 인력이 필요(특히, 미국)했던지라 중국인의 해외진출을 돕는 방향으로 청 왕조를 압박했고, 이때를 계기로 전세계로 뻗어간 중국인들은 '차이나타운'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태평천국 운동' 때문에 이 모든 결과를 도출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이견들이 많다. 그 덕분에 '태평천국 운동'에 대한 평가 또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린 결과치고는 좀 허무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것으로 일단락 지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