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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1권 - 개화기편,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7)
[My Review MMCLIII / 인물과사상사 25번째 리뷰] 강준만은 '사회문화 비평가'로 소개되고 있다. 현재에는 '보수적인 경향'을 드러낸 논객이라고 보여지지만, 이 책이 쓰여질 당시만해도 '보수와 진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잡힌 시선으로 글을 썼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 근거는 이 책에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사학자들의 연구자료들을 '비교분석'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만 봐도 그렇다. 보수쪽의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의 지평을 나열하였으면, 반드시 진보쪽의 견해로 이를 비판하며 균형추를 맞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은 역사에 관한 많은 관심만으로도 '독자만의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2025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혼돈과 난맥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금 재조명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찰나에 떠오른 책이 바로 강준만의 '근현대사 산책' 시리즈였다. 비록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지난 옛 책이긴 하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던 시기에 쓰여진 역사책이기에 '역사교과서 논란'을 전후로 한 한국사 재평가를 논하던 시점에 쓰여진 책이기에, 지금과 같은 빠르게 변모하는 '변곡기'에 딱 어울릴 책이라고 여겨 다시금 리뷰를 기획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꾸준히 리뷰해보겠다.
2025년 현재 '한국사'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은둔의 나라'였기에 아무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나라의 역사였는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 하나로 일약 '전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로 등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만화영화만 인기를 끌고 만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적인 것으로 관심이 확장되면서 '한국의 위상'이 재정립되어 국제적으로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탄탄한 입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1년 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지만, 국민들이 저지해내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까지 이뤄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운 것도 놀라운데, G7, APEC, G20까지 일사천리로 성과를 거두면서 '대한민국의 놀라운 민주회복력'을 전세계에 각인 시켜줬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MAGA 정책'에 발맞춰 전세계를 향해 '관세폭탄'을 던지는 와중에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구금사태'가 벌어지자 한국은 신속하게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고, 끝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켜내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며 초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달성해내는 위업을 보여주었기 때문에라도 '대한민국'은 위풍당당하게 전세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자평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일어섰다.
암튼, 이런 위상에 걸맞는 '역사 평가'를 다시 매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한국사는 다분히 위축된 역사관을 보여줬고, 세계사적으로도 미미한 영향력을 보여준 '약소국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국사/세계사]로 따로 구분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경향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그러다보니 '자국의 역사'를 배우면서도 아이들의 입에서 "한국사는 부끄러워서 배우기 싫어요"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고, 이런 말을 들은 역사교사조차 별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부끄러워하는 아이에게만 면박을 주는 일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세계가 대한민국을 부러워하고 있는 까닭은 '제국주의적 만행'을 저지르지 않고도 세계적으로 강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절대 미움 받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는 전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런 나라의 역사를 왜 부끄러워 해야 하느냔 말이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사를 다시금 써나가야 할 것이다. 식민주의 사관으로 위축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 사관으로 과장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도, 자긍심이 넘치도록 말이다. 그간 우리 역사에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하는 역사가 없이, 외국의 침략에 맞서 지켜내는 역사만을 가르치면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위인으로 알렉산더, 칭기스칸, 나폴레옹 등을 거들먹거렸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 않았던가? 정복의 역사가 없는 '선한 국민성'을 자랑하면서, 내심으로는 '세계정복의 꿈'을 꾸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반된 가치관'을 어린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했으니, 앞서 나왔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답할 것도 마땅히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당당히 가르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한 민족이었고, 오늘날에는 그런 비폭력적이고 선한 영향력만으로 전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러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우리 민족은 한 점 부끄럼 없이 이 땅을 당당히 지켜왔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사'는 재조명해야만 한다.
이 책 <한국 근대사 산책 1>은 조선이 서양과 조우한 명백한 증거인 '천주교 박해'부터 급진개화파가 저지른 성급한 실책, '갑신정변의 실패'까지 여러 사학자들의 견해를 아우르고 있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 했듯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수많은 견해들 속에서 '비교분석'하기 딱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조선 후기 '개화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은 청 문물을 기꺼이 수용해서 먼저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자고 주장했던 '북학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청을 통해서 접한 문물 가운데 '천주교'도 있었다. 허나 조선 민중이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유교가 정치사회적으로 민중들의 의식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유일신 사상'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종교 개혁'을 하기에는 너무 앞선 일이었으며, 그게 가능하리라 믿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종교가 아닌 학문적 성격이 강한 '서학'으로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조선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문구를 전파했고, 소수이지만 '모두가 귀천이 없이 평등한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줬다. 그래서 서학(천주학)은 이런 매력으로 조선사회에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대목이 무엇일까? 바로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실망감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귀천을 막론하고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꿈꾸었던 것이 바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꿈을 갖게 된 이들이 이후에 벌어진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과 부합하게 된다. 당시 '한자 성경'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글 성경'이 많이 보급되었을리 만무하다. 그럼 대부분 '영어'나 '불어', '독어' 같은 '외국어 성경'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직접 읽을 수 없는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 신부의 말을 '통역'해주는 역관들의 도움으로 성경구절의 몇 마디만 겨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구절 몇 마디만 알고 있던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이 '독실한 신앙심'으로 절두산에 올라 기꺼이 순교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 그것보다는 성경 말씀에 기초한 '평등사상'이 너무 옳다고 믿었고, 자신의 세대에선 이루기 힘들지라도 '자식의 세대'에선 가능할 거란 희망을 품고 배교를 거부하고 기꺼이 순교의 길로 들어서길 바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 삽시간에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간 것을 당연한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 사상]'이라는 평등사상을 주장한 동학은 만나기 힘들고, 믿음을 유지하기 힘든 '천주교'보다 수월하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때는 '안동 김씨'를 위시한 세도정치가 횡행하던 엄혹한 시절이었고, 동학세력은 자연스레 '저항의 중심'으로 힘을 모아 마침맞게 일어난 '농민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항쟁'으로 커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학농민항쟁'은 훗날 '반외세'를 불러일으키며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에 앞서, '정부의 탄압'이라는 내부의 억압과 먼저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는 당시 지배세력인 '양반사회'가 지닌 모순과 세계 정세에 어두운 권력계층의 무능부터 타파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영민한들 '시대를 앞선 천재'가 맞은 불운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물론 동학교도들이 '시민교육'을 받지 못한 미성숙한 면이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허나 당시의 사회상이 99%가 농민이던 시절에 하루종일 농사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교육수준'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시대를 앞선 비판에 앞서서 당시 조선사람들이 사상적, 문화적으로 변모해나가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암튼, 세도정치의 명맥을 끊은 영웅은 '흥선대원군의 등장'이다. 열두 살 난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상왕의 입지에 올라 향후 10년 간 조선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흔든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먼저 조선 민중과 개혁세력은 대원군의 등장을 환영했다. 그가 시작한 일이 '세도정치의 종지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도 가문의 본거지였던 '서원'을 철폐했고,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걷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권력의 향배가 '세도가문'에서 '대원군'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는 이후에 '왕권 강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간 억압 받고 착취 당하던 조선 민중들은 대원군의 집권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허나 이런 분위기가 오래 가지 못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인해 두 차례의 양요가 벌어졌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지는 등 '개항'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에서 대원군이 실책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원군이 실책을 하는 과정중에 '고종의 친정'을 둘러싼 '민비와 대원군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사이에 '경복궁 중건'은 대원군의 뼈아픈 실책이 되었고, 기대했던 '왕권강화'를 달성하기도 전에 '원납전 실시'로 양반들의 불신을 불러왔고,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물가상승으로 백성들의 원망까지 덤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운양호) 사건'까지 연이어 벌어지며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과도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고종의 친정'을 도모하는 '민비 세력'은 새로운 정치권력을 불러들여 치열한 권력다툼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전차로 조선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그리고 '위정척사파'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개화파는 '진보', 위정척사파'는 '보수'의 성격을 띤 정치집단이라는 것은 명백한데, 진보세력이 '급진'과 '온건'으로 나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급진개화파는 외세를 불러들여 빠르게 개혁을 완수하자는 쪽이었고, 온건개화파는 개항을 통해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실력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점진적으로 개혁을 하자는 원론적인 분파였으면 이해하기도 쉬웠겠지만, 개화파들의 주장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었고, 권력의 향방이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서 치열한 대립양상을 띨 때, 이런 혼란을 틈타서 저들만의 계략(?)을 꾸며 구국을 위한 결단과는 상관없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만을 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는 개화파의 활약보다 '위정척사파'의 활약에 더욱 명분이 서는 모습이었다. 허나 위정척사파는 너무 고루했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조선은 '변함없이' 가려고만 했으니 실익이 전무했던 것이다. 다만 '의기'만 충만했다. 강력한 외세의 등장에도 조선이 보여줄 '당당한 성리학적 명분'만 내세우면 도덕적으로 열세(?)인 야만스런 서양오랑캐들이 저절로 물러설 것이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조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운양호 사건' 이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으로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을 시작으로 서구열강들과 차례대로 '불평등조약(최혜국대우)'을 맺게 된다. 자연스럽게 조선의 이권이 서구열강과 일제에게 넘어가기 시작한 셈이다. 이때 일본의 근대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획책하게 된다. 조선의 개화파를 가르쳐(!)서 일본의 꼬붕 역할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야심을 꿈꾼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게 된 인물들이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당의 핵심 인사들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 '장기말'이었던 셈이다. 물론 김옥균 등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충성심에서 나온 애국적 행위라 철떡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변'을 일으킬 정도로 혁명적인 사상에 충실했던 인물이 자국내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오직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만 믿고서 순진하게 일을 벌였다는 것이 참으로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래서 갑신정변은 오늘날까지도 그 평가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서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긴 했으나, '정변을 일으킬 정도'로 급박할 사정이 무엇이었느냐를 두고서 논란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획 하에 김옥균 등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발빠르게 추진하려 했으나, 조선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변수를 미리 짐작하지 못한 후쿠자와의 오판으로 인해 갑신정변을 무리하게 추진했고, 청병 1500여 명을 미리 주둔시켰던 원세개(위안스카이)의 발빠른 진압에 '일본공사관'의 소수의 병력은 정변을 돕기는커녕 도망가기 급급했고, 일본의 군대와 지원금만 믿고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유일한 희망이었던 '고종'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개화파에 대한 불신만 키우게 만들어서 김옥균 등을 '역적'으로 결단케 만들었기에 결국 '3일 천하'로 끝맺게 된 것이다.
허나 이런 실패조차 일제의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일본 군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노선을 더욱 확고히 했고, 후쿠자와조차 '탈아론'을 주장하며 "동양의 후진국과 교제하지 말고 그들을 유럽인들이 대하듯 대하라"는 메시지를 내세웠고, 이는 '흥아론'으로 확장되어 "같은 문자를 쓰는 같은 아시아 민족이 일본을 맹주로 대동단결하여 서구열강을 아시아에서 물리치고 부흥시키자"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후쿠자와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대륙침략에 앞장서게 된다.
이런 일본의 야만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과 이웃한 나라임에도 우리가 '경계대상 1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백한 근거다. 이런 야만적인 이웃 나라를 두고도 '침략과 정복'을 기치로 삼지 않은 대한민국이 더욱 돋보이지 않는가? 2권에서는 우리가 받게 된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용이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