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나무 숲 - 완전판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지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놀라울 정도의 '흡입력'으로 읽는 내내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들고, 시선은 행간을 뚫고 아래로아래로 내리꽂게 하며, 귀에선 천재음악가들의 음률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한 소설이었다. 근데 말이다. 언제나 '극찬'을 마치고 나면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린듯한 헛헛함에 빈구석을 채우기 위한 '비판'을 찾기 마련이다. 뜨거운 조명 아래서 배우들의 열띤 연극이 끝나고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던 관객들까지 모두 떠난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은 것처럼 말이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차가운 '분석'만 남고 만다. 이제 하지은의 소설을 처음으로 접한 '나의 리뷰'가 공연될 차례다.

 

  음악을 소재로 한 소설은 드물다. 귀로 듣는 음악이 가능한 뮤지컬, 오페라, 연극, 영화, 드라마 장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음악'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만화'로는 음악을 표현한 것들이 부쩍 늘기도 했다. 비록 귀로 들을 수는 없는 '그림'이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와, 음악을 듣는 청중, 그리고 '그림'으로 그린 음표와 선율 따위로 음악이 전하는 감동을 나름대로 표현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은 오직 글로만 음률과 박자, 그리고 멜로디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오직 '상상력'만을 발휘하도록 만들 뿐이다. 그래서 음악을 소재로 삼은 소설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크게 히트를 한 작품을 아직까지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 <얼음나무 숲>도 전형적인 '음악소설'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판타지소설'이나 '추리/공포소설'로 분류해야 마땅할 정도로 기괴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지은 장르소설'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다른 책들도 좀더 읽어보아야겠지만 말이다.

 

  암튼, <얼음나무 숲>의 첫 인상은 '그로테스크'였다. 기괴하다는 뜻인데, 음악으로 가득한 도시라는 설정도 뜻밖이었고, 그런 곳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도 의외였고, 그 사건속에서 밝혀지는 살인자가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정말 상상밖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얼음나무 숲>은 영락없는 '추리소설'이다. 실제로 살인사건을 파헤치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피해자'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인자가 밝혀지기까지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판타지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다. 애당초 '가상의 도시, 상상의 현실'에서 그려지는 소설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소설의 초반부에는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등장하며 전형적인 '로맨스소설'로 시작한다. 아니, 그렇기엔 '남녀커플'이 아니라 '남남커플'인 관계로 '브로맨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 그리고 '브로맨스소설'이 한데 어우러져 있으니, 어찌 기괴하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거기다 살인사건의 모티브가 되는 것은 음악도시 '에단'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니,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공포스럽다'고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얼음나무 숲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가 실체를 드러냈다.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언제나 음악이 들리고, 음악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음악도시, 에단에 천재적인 연주자 세 명이 등장했다. 하지만 수많은 청중들이 열광하는 인물은 오직 한 명이다.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나토제 바옐'이다. 그 바이올린 신동이 세계투어를 마치고 에단에 돌아오자, 곧이어 '악기경매'가 펼쳐졌고, 그곳에서 전설적인 악기 '여명'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옐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J 카논이라는 악기장인이 자신의 혼을 갈아넣어서 만들었다는 딱 하나 뿐인 바이올린인데, 여명을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30년' 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마침맞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하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관심은 바옐이 여명을 연주하고도 살아남느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옐이 여명을 연주하고 오랫동안 감춰졌던 '얼음나무 숲'으로 가는 길을 열자마자, 한 여인이 하룻밤 사이에 수십년 동안 방치되어 버린 것처럼 썩어버린 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여명'이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공교롭게도 그 죽은 여인은 바옐이 연주하던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명의 소리를 들었다는 정황이 밝혀졌다. 정말로 여명은 살인을 저지르는 악기였단 말인가? 근데 왜 연주를 한 당사자가 아니라 연주를 '들은' 사람이 죽었던 것일까? 혹시 그동안 여명을 연주했던 연주가의 실력이 형편없었기에 연주가들이 죽었었는데, 이번에 새로 주인이 된 '바옐'은 천재적인 연주가였기 때문에 살아남고, 오히려 듣는 사람의 수준이 떨어지면 죽게 된 것일까?

 

  하지만 이런 예상은 가뿐하게 즈려밟고 엉뚱한 피해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니라 '바옐'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 또는 '바옐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바옐은 아예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옐이 가장 아끼던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는데, 바옐은 사랑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진혼곡'을 연주하기에 이르렀고, 바옐의 진혼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미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바옐의 진혼곡을 듣기 위해 좀비처럼 달려들기 시작하는데, 과연 진정한 살인자는 누구이고,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음악을 사랑하는 도시 에단은 점점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둘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의 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도대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살인자의 실체는 뜻밖의 실마리가 잡히게 되고, 바옐과 그의 절친 '피아니스트 모르페'는 그 살인자와 살인사건을 막기 위해 '얼음나무 숲'으로 달려가게 된다. 과연 그 숲에서 벌어지는 결말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음악이 살인의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가? 그 비밀이 모두 풀리게 된다.

 

  그런데 '살인사건'과는 별개로 달달한 로맨스가 동시간대에 펼쳐진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사이에 말이다. 물론 둘 다 남자지만, 천재 음악가이기에 그 둘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찐하다. 더구나 그들의 신분은 평민과 귀족, 그렇기에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 셈이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은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관계'였기에 더욱 애뜻하게 펼쳐진다.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짝사랑'은 실체하지만, '짝우정'은 듣도 보도 못했기에, 그 둘의 사이는 '우정'보다는 '사랑'에 어울릴 것이다. 까닭인즉슨, 어릴 적부터 천재, 신동 소리를 듣던 바옐은 첫 눈에 초보 피아니스트 모르페를 보고서 '천재'인 걸 알아챘던 것이다. 그래서 바옐은 모르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연주를 해왔던 것인데, 모르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반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워 자신의 모자란 실력 따위에 자격지심을 갖기는커녕 되려 '바옐과 함께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해버리는, 아니 오히려 천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주하며, 바옐을 '동경'해 마지 않는 '단 하나 뿐인 청중'이 되기 위해 열심이다.

 

  반면에 바옐은 자신을 이길 생각도 없이 그저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버리는 모르페가 점점 실력이 늘어 자신의 실력을 앞지를 정도로 실력이 부쩍 늘어나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하게 된다. 허나 어릴 적부터 천재소릴 듣던 바옐이기에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실력을 향상시키며 모르페에게 범접하지 못할..아니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인식을 콱 심어주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위치까지 쑥쑥 성장하는 모르페를 바라보면서 진정한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모르페'라는 위기감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결코 티를 내지 않곤 한다. 그러면서 둘은 '함께' 연주를 하며 서로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친구가 되어 버렸다. 비록 모르페가 바옐을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허나 둘 사이를 가로막는 딱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 바로 '음의 언어'를 이해하는 바옐과 그렇지 못하는 모르페였기 때문이다. 바옐은 어느날 자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에서 '음'이 '말'로 들리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바옐은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한음 한음에 실어서 들려줄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연주를 하면서 '음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바옐은 거기서 심각한 공포를 느껴버렸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공포 말이다. 자신은 열심히 말하는데 상대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말에 '응답'하지 못하는 고독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절망에 빠져서 살게 된 셈이다. 한편, 모르페는 바옐의 연주가 '보통의 연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끝내 '바옐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오직 한 명인 '단 하나뿐인 청중'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남들이 자신을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부르게 된 까닭도 바로 '바옐의 전하는 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둘 사이는 '말하고' '들으려는' 밀접한 사이였던 셈이다. 이토록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최강의 짝꿍', '최고의 사랑'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만약 바옐이 연주하는 '음의 언어'를 이해하는 악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이 한순간에 '공포소설'로 변모하는 까닭은 바로 '음의 언어'를 알아듣는 악마의 등장 때문이다. 그 악마가 등장하므로써 소설은 삽시간에 '핑크빛'에서 '핏빛'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악마가 이해하는 '바옐의 음의 언어' 덕분에 바옐은 음악에 더욱 정진할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청중들은 그런 바옐의 멈출 줄 모르는 황홀한 연주에 열광을 하며 '음악도시 에단'을 더욱 들뜨게 만든다. 만약 사람을 신들린듯 미치게 만들고 황홀하게 죽일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단연 '음악'일 것이다. 마치 소프라노가 펼치는 '고음의 향연'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기절을 하며 픽픽 쓰러지는 청중들처럼 말이다. 바옐이 여명을 켤 때면 그런 일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렇게 악마는 바옐로 하여금 여명을 계속 켜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청중들은 더욱더 열광을 하며 바옐로 하여금 연주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곤 했다. 들을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픽픽 쓰러지는 일을 겪으면서도 말이다. 정말이지 좋아서 죽을 지경...아니, 죽어도 좋을 지경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악마는 자신조차 전율케 만드는 '바옐의 여명, 혹은 여명의 바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다 다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은 과연 어떻게 극복하게 될 것인가?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읽는이'로 하여금 전율할 수밖에 없게 만든 소설이 대단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그 전율이 끝나지 않으면 살인사건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죽고 죽이다보면 에단의 시민들도 다 죽을테고, 하나도 남지 않으면 '읽는이'까지 죽여버리고 말텐데,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 굴뚝 같은데, 죽기는 싫으니까...독자까지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까. 소설이 먼저 끝나고 말았다. 다 읽고 나니 '외전' 하나 남았고, 헛헛한 마음에 '외전'까지 후루룩 읽고마니 더욱더 갈증만 남게 되었다. 정말 죽어도 좋을만큼 짜릿했는데 말이다. 그 짜릿을 하지은의 다른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으로 보는 동양사 만화라서 더 재밌는 역사 이야기 2
살라흐 앗 딘 지음, 압둘와헤구루 그림 / 부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빠지지 않고 벌어졌다. 그리고 전쟁은 언제나 '최선의 순간'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최악의 순간'에 벌어졌다는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쟁은 최악 중의 최악으로 가장 나쁜 짓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은 전쟁을 되풀이 하는 것일까? '고장난명'이라고 했다.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전쟁도 홀로 치룰 수는 없는 법이다. 즉, 어느 한 쪽이 전쟁을 하자고 덤벼도 나머지 한 쪽이 제정신을 차리고 전쟁을 피하고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에서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논하려 든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인간은 오랜 역사속에서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과연 전쟁을 일으키고 참전했던 이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을까?

 

  이 책 <전쟁으로 보는 동양사>는 전작인 <전쟁으로 보는 서양사>에서 다루지 못한 동양의 전쟁사를 다뤘다. 하지만 영광스런 전쟁이라느니 정의로운 전쟁 따위의 메시지는 담지 않았다. 이런 점이 참 신선할 따름인데, 전쟁을 벌인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을 저질렀는지 새삼 돋보이게 전달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참 좋았다. 물론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참전해야 할 전쟁이라면 '승리'를 해야할 테지만,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이 승자든, 패자든, 얻는 것은 거의 없고, 잃는 것만 더 많은 법이기 때문에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꼭 전쟁을 치루고 난 뒤에야 깨닫곤 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러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전쟁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호전광들은 '그렇지 않다'고 외칠 것이다. 초전박살을 낼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기만 한다면 전쟁은 이롭기 그지 없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초반 상황'만 볼작시면, 그럴 듯해 보인다. 먼 과거의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처럼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사례를 들면서 강력한 군대를 앞세우면 못할 것이 없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로마제국이나 제국주의를 내세운 서구열강들도 그랬고,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패권주의'를 내세우는 오늘날의 미국이 그렇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전쟁사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폭망하게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고, 전쟁에서 승리해도 얻는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빚더미에 깔려 나라경제가 흔들리기 일쑤고, 젊은세대들은 전쟁터에 끌려나가 헛되이 목숨을 잃어버리고, 늙거나 어린 세대 들은 기울어진 경제를 되살릴 여력이 없어 결국엔 온 국민이 경제난에 허덕이게 될 뿐이다. 그럼 손실분만큼 패전국에게서 빼앗아오면 모자란 점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이득을 얻지 않겠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양의 전쟁사'를 통해서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자.

 

  고대 전제왕권시대에는 '왕의 명령' 하나로 전쟁을 벌이곤 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절대 전쟁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꼭 멍청한 임금들이 자신들의 못난 점을 가리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어김없이 '전쟁'을 통해서 문제해결을 일거에 해버리려 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전쟁에 승리해서 안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임금이나, 시대가 있었던가? 진시황이 오랜 전란으로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룩했다. 결국 15년 만에 폭망하고, 항우와 유방의 전쟁인 '초한지'가 펼쳐졌다. 유방이 한으로 다시 통일하고 난 뒤에는 어땠나? 전쟁에서 이겨 한나라가 흥했던가? 오래오래 태평했던가? 주변의 오랑캐들에게 시달리고 내부의 부정부패로 인해 혼란스럽지 않았던 때를 손꼽는 것이 훨씬 편했을 정도다. 이후에 송나라 때나, 원나라 때, 명나라 때, 청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전쟁에 시달려야 했고, 전쟁으로 망할 뿐이었다.

 

  전쟁으로 폭망한 아주 좋은 케이스가 바로 '군국주의 일본제국'였다.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에 성공하기 무섭게 '군사력'을 키워 무장을 하더니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으로 선빵을 날려 승리를 거둔 쾌거였다고 자평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챙겼고, 요동반도와 조선까지 일거에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야심을 감추지 않았더랬다. 허나 요동반도는 '삼국간섭'으로 도로 뱉어내야 했고, 조선마저 아직까지 집어삼키기에 이르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왜냐면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둘러 '러일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일전쟁'에서 얻어낸 배상금도 몽땅 '군사비용'으로 허비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손실을 본 비용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둬서 채울 생각이었다.

 

  허나 '러일전쟁'은 길고 긴 싸움이었다. 물론 요동반도와 발해만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궤멸시키고, 아프리카를 돌고 돌아서 1년 만에 겨우 대마도 앞까지 도착한 막강한 '발트함대'까지 '대마도해전'에서 몰살 시키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허나 러시아는 아직 전쟁을 시작하는 단계였을 뿐이고, 일본은 이미 총력전을 치룬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항복조차 하지 않고,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는대로 육군을 일본 본토에 상륙시켜 전쟁을 이어갈 태세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미 모든 전력을 투입한 일본으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주선을 하며 '러일전쟁'을 일단락시키긴 했지만, 명목상 아무도 패배하지 않은 전쟁이었기에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오직 조선에 대한 패권과 이권만 얻을 수 있었는데, 전쟁비용으로 허비한 것을 채우기에는 초라한 결과였던 셈이다.

 

  그렇게 착착 조선침략을 서두르더니, 결국엔 중국까지 차지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말았다. 조선과 만주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고, '병참기지화'를 빠르게 진행시키더니, 느닷없이 중국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선전포고 따윈 없었다. 일왕의 재가도 얻지 못한 상태로 '중일전쟁'은 돌입했고, 한 달만에 '북경'을 점령하고, 석 달만에 '상해'와 '남경'까지 점령하는 쾌거를 이뤘다. 허나 거대한 영토와 어마한 인구를 거느린 중국은 '결사항전'을 다질 뿐이었다. 전쟁은 점점 '장기전' 양상을 띠었고, 일제는 전쟁을 빨리 끝낼 욕심에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친짓을 그만 두라며 '석유수출'을 금지시켰고, 일제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동남아'로 전쟁을 확대시키며 '석유보충'을 하다가, 급기야 미국을 선제공격까지 감행하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을 하고 말았다. 이때는 선전포고를 했는데,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고 난 뒤였다.

 

  일제의 미친짓에 제대로 열이 받은 미국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일본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태평양 함대를 잃어버린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을 했지만,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승리', '이오지마섬 점령', '도쿄대공습', 그리고 '핵폭탄 투하'까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미국은 끝내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이렇게 일제는 전쟁으로 얻은 것도 별로 없었지만, 패전을 함으로써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만약 '공산주의 국가의 팽창'과 5년 뒤에 벌어진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지금껏 가난한 농경국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양쪽에서 벌인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미국은 전쟁으로 '최고의 이익'을 얻은 게 아닐까? 물론 1945년 이후의 미국은 '냉전체제'까지 승리(?)를 거두면서 일약 '패권국가'로 성장하며 '팍스 아메리카(미국에 의한 평화)'를 구축하며 명실상부한 초일류국가로 거듭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팍스 아메리카'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도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2024년일 뿐인데, 미국은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고, 대외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보이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양새가 점점 확연해지고 있단 말이다. 과연 미국은 그동안 벌인 '전쟁'에서 엄청난 이득을 챙기기나 했는지 모르겠고 말이다. 혹여 챙겼다손치더라도 그로 인해 미국에 영광보다는 더 큰 불이익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을까?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면서 베트남에서 깨지고, 아프간에서 터지고, 걸프만에서 된통 당하고, 급기야 '9·11사태'까지 겪게 되고, 이제는 동네북마냥 이나라 저나라에게 만만한 나라로 전락하고 만 듯 싶을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는 '초강대국' 역할을 하곤 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예전 같지 않다.

 

  자, 이래도 '전쟁'이 달갑게만 보이는가? 설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해도 그 영광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한 영광 때문에 '또 다시 전쟁'을 치뤄야 하는 어려움만 겪을 뿐이란 말이다. 과거의 서구열강들이 싸질러놓은 똥 때문에 아직까지도 전세계가 혼란스럽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최고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시점에 놓여 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오늘날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까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없는 전세계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우리가 '제2의 한국전쟁'까지 벌이지 않고, 평화체제를 유지하며 통일을 이룩하고, 지정학적인 '동아시아 화약고' 상황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거칠 것이 없는 선도국가로 우뚝 서게 될테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전쟁'을 치루는 순간 어떻게 될까? 단 한 번도 '침략의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명예로운 이득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고, 또 다시 침공을 받아 '전쟁터'로 전락하고 만다면 다시금 경제대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다. 설령 우리가 압도적인 군사력과 빵빵한 경제력으로 북한과 통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선족'이 살고 있는 만주땅까지 되찾고, 감히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열도를 점령하여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대제국'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언젠간 주변의 강대국들의 이익선 때문에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만 커지고, 우리가 일순간 확보했던 '짧은 달콤함'은 '오랜 쓴맛'을 작렬하게 경험할 뿐일 것이다. 이래도 '전쟁'을 옹호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얻은 달콤함은 결코 모든이들이 맛볼 수 없다. 단지 몇몇 소수만이 이익을 누릴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폐허가 된 터전에서 신음하고, 전장에 참전된 사람들은 헛된 목숨을 잃을 뿐일 것이다. 따라서 '전쟁영웅'은 없다. 오직 '잔인한 학살자'만 있을 뿐이다. 알렉산더,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도조 히데키...모두모두 잔인한 전쟁광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전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을 뿐이니 결코 자랑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전쟁사'를 다루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마록 2 : 국내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퇴마록-국내편>의 백미를 꼽는다면, 단연 '생명의 나무'와 '초치검의 비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나무' 편은 드디어 퇴마일행 4명이 모두 힘을 합쳐 '악령의 힘'을 물리치는 대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으며, '초치검의 비밀'에서는 퇴마사들의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며 각각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퇴마(또는 구마)의 힘은 '영능력자'마다 결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힘을 합친다거나 도움을 준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쉽게 이해하려면, 무당이 굿판을 벌이며 한창 신들리는 대목에 이르러서 마침내 악령을 물리치려는 대목에서 누군가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을 찾는 성경구절을 외거나 찬송가를 목청껏 부른다면 서로의 힘을 북돋기는커녕 도리어 악령의 힘에 영력자들이 다치고 말 것이다. 그런 판국에 기공술 같은 '외공'을 다루거나 '검기'를 뿜어내며 귀신을 썰어버리겠다고 나선다면 홍수를 불로 막겠다며 횃불을 들고 설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유파'의 영능력자들에게 힘을 보태주는 '힐러'가 등장해서 나머지 영능력자의 힘을 더해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 <퇴마록>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인 셈이다. 이렇게나 서로의 개성이 뚜렷한 서로 다른 퇴마사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딱 한 가지는 바로 '악을 물리치는 힘'에 있지 않고, 악령조차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따뜻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4명의 서로 다른 영능력자들의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퇴마사의 수장격인 박윤규 신부는 기이한 경험 때문에 늦은 나이에 가톨릭 신부가 되었으나 악령으로부터 가여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마행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결국 엄청난 영능력을 얻었지만 그 힘을 인정받지 못하고 '파문'을 당한다. 그럼에도 박신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더 많은 사람과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퇴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자 다짐할 뿐이다. 박신부의 영능력은 그리스도 신앙에서 말하는 '성령의 불꽃, 아우라'다. 대개는 박신부가 들고 다니는 '은십자가'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지만 기도력을 발하면 온몸을 통해서 그 힘을 발휘하며,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만큼 넓게 펼쳐낼 수도 있다. 아우라는 주로 악령을 제어하는 힘을 발휘할 뿐, '물리적인 타격'은 전혀 줄 수 없지만, 박신부의 아우라는 종종 악령뿐 아니라 영적인 힘이 실린 사물까지도 물리칠 수 있는 일종의 '보호막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승희의 도움을 받을 땐 아우라를 광폭으로 넓힐 수도 있고, 때때로 구체 형태로 뿜어서 내던질 수도 있다.

 

  기공술의 익힌 이현암은 '태극기공'을 홀로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 한빈거사를 만나 기이한 도움을 받아 주화입마에서 풀려나고 파사신검, 사자후, 부동심결을 익혔으나, 물귀신에게 죽임을 당한 여동생 현아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복수심에 불타서 무리하게 수련을 하다가 또 다시 주화입마를 당했는데, 또 다시 도혜스님의 공력을 받아 수십 년의 내공을 전수받게 되는 무술의 달인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외공과 내공을 모두 갖춘 기인이 등장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인데, 마침맞게 이현암에게도 아킬레스건과 같은 결점을 갖게 되었다. 바로 무리하게 고난도의 기공술을 익히다 꼬여버린 기혈 때문에 엄청난 내외공을 갖춘 고수임에도 겨우 상반신과 오른팔에만 기공을 모으고 뿜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켜버린 기혈을 뚫기 위해 '해동밀교'의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박신부와 주술의 신동 장준후와 만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주술을 다룰 수 있는 천재아이 장준후는 '해동밀교'의 수제자이자 유일한 전수자로 등장한다. 원래 밀교라는 것은 인도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뿌리는 '불교'와도 인연이 깊고, '도교'의 신선술과도 맥락을 같이 하며, 우리 토종신앙에 해당하는 '무당'의 모든 결을 한 몸에 흡수한 인재 중의 천재인 소년으로 등장하였다. 이 세 가지 유파는 공통적으로 '부적술'을 다루는데, 따라서 장준후는 동양의 모든 술법을 다룰 줄 아는 영능력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허나 불교과 도교, 무속신앙이라는 것조차 서로 다른 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이를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손치더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소설속에서는 '해동밀교'라는 비밀종파를 만들어서 서로 다른 주술을 한데 엮어낼 수 있도록 '5대 호법(장로)'가 몰래 기른 수제자라는 보충설명까지 하였다.

 

  마지막으로 현승희는 고고학을 전공한 유학파로 초기에는 별다른 영능력이 없는 캐릭터였다. 하이텔 연재 당시에도 애초부터 등장 계획이 없던 캐릭이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국내편에서는 별다른 능력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다만 승희의 아버지가 사물을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염력자인 관계로 승희도 애초부터 대단한 초능력을 소유할 것이라는 단초만 주어졌다가, <퇴마록>의 이야기가 점점 확장되면서 승희가 갖게 되는 영능력도 점차 대단하게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말세편'에서는 4명의 퇴마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아직 '국내편'에서는 그 힘에 눈을 뜨지 못하고, 다만 승희의 몸속에 '애염명왕'을 품고 있는 '아바타라(화신)'의 현신인 탓에 큰 힘을 밖으로 뿜어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몸은 보호할 수 있는 영능력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퇴마사에게 자신의 힘을 보태줄 수 있는 능력과 약간의 투시력(독심술)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다른 퇴마사에 비하면 '엑스트라(보조 출연자)'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4명의 퇴마사들이 처음 힘을 합쳐 활약하는 '생명의 나무'편에서는 수메르의 흑마술사들과 대결을 펼쳐야 했다. 특히, 브리트라라고 불리는 '거대한 뱀'을 불러 영생을 바라는 사악한 집단과의 대결이 압권이었다. 원래 뱀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주 출현하였다. 그 가운데 '브리트라'는 인도신앙에서 등장하는 악신으로 사악한 힘으로 사람을 유혹해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불살라 사라지게 만드는 악마로 등장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보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신비한 동물로 여기곤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악한 집단은 '뱀'을 숭배하는 것만으로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며 신도들을 속이는 '사이비 종교'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홀려 인생을 망치게 하곤 만들었다. 박신부를 비롯한 퇴마사들은 이러한 '사악한 종교'로부터 잘못된 믿음으로 삶을 송두리채 망치고 마는 어리석은 짓을 막고자 힘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초치검의 비밀'은 강화도에 감춰져 있던 '단군의 신물(흔히 '천부인'으로 불리며, 칼, 방울, 거울로 알려져 있으며 '천부삼인'이라 부르기도 한다)'을 빼앗으려는 일본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내의 지킴이들이 벌이는 대활극이다. 이 작품에서는 퇴마사들의 능력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덜 알려진 다른 유파의 능력자들까지 총출동하는데, 암튼 이 작품 한 편만으로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탄탄한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있다. <퇴마록>의 매력을 이 한 편에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정황까지 겸하 '팩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실감이 나고, 흔히 말하는 '국뽕'의 느낌도 가미되어 있으나, 단군을 섬기는 신앙이 '홍익인간(널리 이롭게 하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기에, 아무리 우리를 침략한 외적이라하더라도 목숨은 소중한 것이라는 메시지가 더 강하기 때문에 감히 '인류애'로 승화시킨 드라마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매력을 잠시 소개하자면, 우리 나라 강화도에 대단한 영능력의 소유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한날 한시'에 말이다. 여기에 신문기자와 퇴마사들까지 합류하여 대난장을 벌이게 되는데, 그 까닭은 다름 아니라, 고려말로 추정되는 5백명이 넘는 왜구들의 시체들이 온전한 형태의 해골 모습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신문기자들은 당연히 '역사적인 자료가 발굴되었다'면서 취재를 하러 도착했지만, 퇴마사들은 그보다는 심상치 않은 영의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기에 행여 사람들이 다칠까 걱정이 되어 강화도에 왔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5백이 넘는 왜구들이, 그것도 한 방향으로 자세를 잡은 채 가지런하게 출토된 것이 수상쩍기 그지 없기에, 이들이 단순한 도적질을 하러 온 왜구가 아니라 애초에 수상한 목적을 갖고 출병한 군대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수상한 왜구의 해골들이 온전한 형태의 모습으로 하나둘 땅속에서 솟아나게 되고, 이를 더욱 진행시키려는 '3명의 일본 영능력자들'과 여러 유파에서 한데 모여든 스무 명 남짓의 국내 영능력자들의 한 판 대결이 시작된다. 과연 왜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이 '일왕의 삼종신기' 가운데 하나인 '초치검'을 들고 왔으며, 그 초치검으로 우리 땅에서 훔쳐가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 걸까? 이야기를 직접 읽기 전에는 단순한 호기심뿐일테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가슴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왜놈들의 시커먼 속셈'이 속속 들어나게 되고, 영능력자들의 술수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점점 깊이 빠져들어서 헤어나올 수 없는 '몰입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설마 아직도 <퇴마록>을 읽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초치검의 비밀'부터 읽어도 좋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로 배우는 멸종과 진화 한빛비즈 교양툰 31
김도윤(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말해서, 김도윤 작가의 전작에 비해서 '몰입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이런 얘기를 했다가, 저런 얘기를 했다가...한빛비즈 교양툰의 선봉을 맡아 대쪽이 갈라지듯 쭉쭉 펼쳐나간 <곤충의 진화>와 <공룡의 생태>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멸종과 진화>는 앞선 두 권의 책의 '연장선'이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새로운 '도입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책에서 '진화'는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고, 이제 그 진화의 새로운 시작을 펼쳐내기 위해서 '멸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여섯 번째 대멸종'에 직면한 상황이다. 지난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그랬듯이 멸종은 '지구생명체'에게 치명적이었고, 특히 가장 번성했던 종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방식으로 지금껏 쭉 반복되었다. 그렇기에 이번 여섯 번째 대멸종은 현재 가장 번성하고 있는 '인간종'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류의 절멸'일 것이다. 그래서 지질학적 분류로 오늘날을 '인류세'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어쨌든 대멸종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그 멸종의 시작이 '언제'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소행성 충돌이 원인이라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기후변화가 원인이라면 '수십 년 안'이라고도 보고 있으며, 초대륙의 등장이 원인이라면 '대략 5천만 년 뒤'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멸종의 원인은 '인간' 때문일 거라는 확신이 가장 뚜렷하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간활동으로 인해 지구환경은 엄청나게 급격한 변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으며, 갑작스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것이 '진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적응에 실패하면 죽고 마는 것이 '진화의 매커니즘'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토록 급격한 환경변화를 '인간'이 주도하고 있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은 것이 문제다. 마치 인간은 결코 멸종의 대상이 아니라는 듯이 환경변화의 원인들에 대해서 경각심조차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이고, 이렇게 따뜻한 지구는 역설적이게도 지구를 꽁꽁 얼려버릴 '지구동결현상', 쉽게 말해 '빙하기'를 더 빨리 부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멸종'은 지금 빠르게 '진행중'인 상태다.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생물의 멸종은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시켜, 멸종의 속도를 더욱 촉진시키는 것이 문제이며, 이렇게 다양성이 무너진 생태계에 '대멸종'까지 겹치게 되면 지구에 다시 생물이 번성하게 되기까지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대멸종이 휘몰아친 와중에도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의 생존마저 그 확률이 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대멸종의 시나리오 속에서 인류조차 '생존'을 장담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해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지난 역사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해보자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지난 '대멸종'을 통해서 곧 닥칠 '지구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지난 '대멸종'의 가르침은 바로 '멸종'이었다. 가장 번성했던 종들이 결코 피할 수 없었던 '종의 절멸'을 말이다. 인간도 그렇지 않겠느냔 말이다. 진화의 나무에서 수없이 갈라진 가지들 중에 더는 이어지지 못하고 끝을 맺은 '종의 운명'을 떠올리잔 말이다. 인간이라고해서 유유히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의 진화'는 계속 이어지겠지만, 인류는 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쯤이나마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할 때에 '환경적응' 같은 것들은 절대로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대멸종을 더 빠르게 부르는 현실 앞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무엇'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생물 다양성을 지킨답시고 '멸종위기종 지정', '생태보존구역 설정', '치어 방류', '채식주의' 등등 열일하고 있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일을 한다고 대멸종을 막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대멸종은 '인간의 힘'으로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막 살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미 지난 대멸종 때에는 가장 번성했던,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종들은 그저 수수방관만 할 수밖에 없었지만, 현재 가장 번성한 인간종은 '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지구생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이 가진 힘'으로 무엇이라도 해볼 능력을 갖춘 종이다. 그렇다고 대멸종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만, 급격한 환경변화에 최대한 잘 적응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도 사실이다. 아쉽게도 인간종의 육체적 조건은 '급격한 환경변화'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는 나약함, 그 자체지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로 어떡해서든 대멸종을 이겨낼 힘을 쥐어짜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기술만 맹신해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다. 아무리 고도로 발달했을지라도 화산, 지진, 태풍 같은 자연적인 재해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은 인간의 과학기술이 해내야 할 일은 '원래의 자연상태'를 유지시켜, '생물의 다양성'을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내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멸종과 진화>의 매커니즘을 이해하고 생태와 환경을 '복원'시키는 일을 가능케 할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정신 좀 차리고 자연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부터 취하는 것이 시급하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리아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1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리아스>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이야기한 '서사시환(敍事詩環: 서사시를 모아 이야기 순서대로 모은 것)'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순서대로 제목을 나열하면, <퀴프리아>(스타시노스), <일리아스>(호메로스), <아이티오피스>(아르크티노스), <소 일리아스>(레스체스), <일리오스의 함락>(아르크티노스), <귀향>(아기아스 또는 에우멜노스), <오디세이아>(호메로스), <텔레고네이아>(에우감몬) 순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이야기는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디세우스의 이타케 귀환'까지 이어졌기에 전반적인 서사는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단편적인 내용만 남아 있기 때문에 나머지 작가의 이야기들마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같이' 수록되어 널리 읽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으로 <일리아스>의 시작과 끝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독자들이 훨씬 많을 것인데, 정확히 짚어보자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지 9년이 지나고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 의해 분노로 시작해서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11일동안 장례식이 치뤄지는 것으로 <일리아스>는 막을 내린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트로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꼽히는 '파리스의 심판'은 <일리아스>의 앞의 이야기에 해당하고, 더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가 등장하고 그리스연합군의 승리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킬레우스가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아 죽고 난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일리아스>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분을 삭히는 내용까지인 셈이다.

 

  그래서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단연 '아킬레우스'이고, 그가 '분노'한 까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작품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럼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하였는가? 그 까닭은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한 지도 어언 9년에 이를 정도로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총사령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차지할 생각만 앞세우고, 총사령관인데도 전쟁을 승리할 계책 따위조차 변변히 내놓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황이 그리스 쪽으로 우세했던 것도 오직 '아킬레우스' 덕분이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아가멤논은 전황이 불리하니 '신의 노여움(아폴론의 분노)'을 풀기 위해 아폴론 신전의 신녀를 풀어주라는 장수들의 건의에 호탕하게 '자기몫'을 내놓기는커녕 내놓은만큼 '자기몫'을 챙기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몫이었던 '브리세이아'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자기몫의 전리품도 잃고, 정정당당하게 차지한 전리품을 빼앗기는 명예도 잃고, 사랑하던 여인까지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지자 극도로 분노를 하고 '전장'에서 빠져 더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달래기는커녕 자기몫을 챙기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린다.

 

  이렇게 그리스군의 핵심이었던 '무적의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빠져버리자 전황은 역전되어 트로이군이 우세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의 장난에 의해 그리스군도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트로이를 밀어붙이게 된다. 이때 파리스가 성난 그리스군을 상대로 '일대일 대결'을 요청하니,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가 그 대결에 응하면서 잠시 대치상태를 만들게 되었다. 허나 파리스는 애초에 메넬라오스의 상대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창 한 자루 던지는 것으로 대결은 메넬라오스의 승리로 끝났고,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칼에 곧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애초에 트로이의 편을 들었던 여신 아프로디테가 파리스를 바람같이 낚아채서 헬레네가 있는 침실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파리스는 헬레네와 사랑을 나누고, 메넬라오스는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파리스를 겁쟁이, 비겁자라고 놀리면서 총공격의 선봉에 서니 트로이는 속수무책으로 성벽 앞까지 밀리고 만다.

 

  여기서 '신들의 참견'을 잠시 언급해보자. 그리스와 트로이가 전쟁을 벌이는 대서사시에 신들도 편을 갈라 양측을 응원할 뿐만 아니라 '참견'까지 하며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데 열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은 헤라와 아테나를 필두로 포세이돈(헤라 오빠니까), 헤파이스토스(헤라가 엄마니까), 테티스(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엄마니까) 등이고, 트로이를 편드는 신들은 아프로디테(파리스가 황금사과 찜콩했으니까)를 필두로, 아레스(아프로디테의 불륜남이니까), 아폴론(그리스군이 자신의 신전을 탈탈 털어 훔쳐갔으니까), 아르테미스(아폴론 동생이니까) 등등이 아주 시기적절하게 등장해서 전쟁을 북돋우고, 살육을 부추기며, 아주 지랄찬란하게 10년 동안 인간들을 갈갈 해버린다. 하지만 애초에 '트로이 전쟁'을 계획한 것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였다. 제우스가 맘 먹은대로,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의 이름이 영원토록 빛날 수 있도록 전쟁을 일으키고 조율했으며, 애초부터 트로이는 이 전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결말을 정해놓았으며, 비록 그리스가 승리를 거뒀을지라도 결코 손쉽게 이기지는 못하도록 10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이 참전하고 비명횡사하도록 안배해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우스 이외의 다른 신들은 '보조출연'일 뿐이고, 그런 신들이 열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제우스'가 일찍부터 정해놓은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트로이 전쟁'은 또 다른 이름으로 '신들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올림푸스에 오른 신들이 두 차례에 큰 위기인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를 극복한 뒤에 저들끼리 단단히 서열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한 판 승부를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 불사의 몸을 지닌 신들이 싸워봤자 승패를 가룰 수 없는 일이기에 신들을 숭배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의 전쟁을 대신 치르도록 안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들은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에 신들이 안배해놓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시험삼아 '대리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들의 대리전일 뿐이었던 '트로이 전쟁'으로 인해 이름을 길이길이 남긴 것은 '필멸의 존재'였던 인간들의 몫이었다. 무적의 용사 아킬레우스, 지혜보따리 오디세우스, 그리고 조국을 지키다 스러진 영웅 헥토르, 그리고 세계 최고의 미녀 헬레네 등등 이름만 들어도 그들의 업적이 줄줄 흘러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싸움에 휘말리게 만들었던 '신들의 이름'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신들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 셈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일리아스>를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는 이유는 고대인들이 감동했던 대목과는 사뭇 달라야 할 것이다. 고대인들은 '그들만의 영웅'이 전장의 꽃으로 산화하며 아름답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영웅적인 서사에 매료되어, 자신들도 전장에 나서면 그들처럼 용감히 싸우겠다고 다짐했을지 모르겠다. 허나 현대인들에게 <일리아스>는 그리 감동적이거나 격동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고작 전리품 하나 때문에 삐쳐서 전장에 나가지도 않고 동료 전우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킬레우스가 어떻게 해서 '영웅'이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아무리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하지만 적장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분풀이로 삼아 능욕을 저지르는 아킬레우스는 그저 미치광이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찌 이런 이야기에 감동 운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독자가 이 책을 읽고서 느껴야 할 바는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생각의 틀이 바뀌는 전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기원전 12세기 즈음에 벌어진 전쟁을 기원전 8세기 즈음에 살던 작가가 써낸 고대의 서사라는 점에서 완전히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현재의 독자들이 <일리아스>를 읽을 때에는 자연스레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읽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신들이 정한 '운명'을 거슬러 저마다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고대 독자들의 눈에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인간의 삶 때문에 더욱더 신을 경배하게 되었을지 몰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는 관점으로 <일리아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다시 말해, 아킬레우스는 비록 죽었을지언정 그의 영웅다운 용맹스러움을 배울 수 있으며, 헥토르도 비운의 죽음을 당하지만, 침공하는 적들과 맞서 조국을 수호하고, 백성을 지키며,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염려하며 지키려는 진정한 수호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모두가 죽고, 남겨진 것도, 얻은 것도 거의 없이, 오직 '허무'만 남게 되는 전쟁의 쓸모없음을 깨닫았으면 좋겠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트로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패망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남은 전리품과 인질들은 남김없이 그리스 참전장수들의 몫으로 분배된다. 전쟁의 원인으로 꼽혔던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도 원래의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에게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극적으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 만이 후손을 남겨 '로마'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했지만,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란중이다. 하지만 10년 전쟁으로 탕진한 것에 비한다면 초라한 승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끝자락은 언제나 허무하다. 승자도 물론이거니와 패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익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려고 하는 것일까? 고작 몇몇 사람들의 명예와 이득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국가나 민족의 자존심이 무어 그리 대단하길래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한단 말이냐? 결국엔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인데 말이다.

 

  이런대도 전쟁 운운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이 바로 '독재자'가 틀림없다. 그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면 나라를 망칠 원흉이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솎아내길 바란다.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강력한 무기와 막강한 화력으로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면 이득만 남는 전쟁을 할 수 있다며 달콤한 유혹을 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건 '무기매매상인'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전쟁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골빈놈이니 주디를 꼬매뿌려도 무방하다. 절대로 '전쟁'은 아니 될 말이다.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은 독자들이라면 '반전'은 상식일 것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관점으로 읽으면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