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8 - 완결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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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8>  추공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2019)

[My Review MMXXXVI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8번째 리뷰]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서 '절대자'는 무료함을 잊기 위해 여흥을 즐기려 한다. 그래서 창조해 낸 것이 바로 '지배자'와 '군주' 들이다. 그리고 그 여흥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 둘 사이에 싸움을 붙였다. 절대자는 흥겨웠다. 지배자와 군주 들의 싸움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좋았고, 팽팽하면 팽팽할수록 흥겨웠기 때문이다. 허나 지배자도 군주 들도 어엿한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기에 죽거나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살육전'에서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서로를 향한 '파괴 본능'만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렇게 치열한 전쟁 속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투 특성' 때문에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숱하게 싸우고 또 싸우고 난 뒤에야 깨진 균형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균형은 점점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죽음의 왕, 그림자 군주'의 힘 때문이었다.

애초에 7명의 지배자와 9명의 군주 들은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싸움이 계속 되는데, 결국은 지배자와 군주 들도 '죽음'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절대자'가 창조한 존재인 까닭에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완전 소멸'은 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지배자와 군주 들을 따르는 종(부하)들의 경우엔 달랐다. 그 종들은 죽고 난 뒤에 '그림자 군주'를 따르는 '그림자 군단'에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애초에는 7명의 지배자들과 9명의 군주들이 나뉘어서 싸워도 서로 대등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림자 군주' 홀로 모든 지배자들과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지배자 군단들과도 맞서 싸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싸움에 질 때마다 '윤회의 잔'을 이용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패배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반복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가 창조한 존재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시간'을 거스른다고해도 '과거의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지엄한 존재들의 경우에는 '윤회의 잔'을 뒤집기 이전의 기억까지 다 가지고 '똑같은 시간'만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 차례로 거듭해서 싸우다가 '군주들'이 배신을 하고 말았다. 그림자 군주가 거느린 '그림자 군단'이 너무 커져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 군주를 제외한 나머지 군주들이 지배자와 맞서서 홀로 싸우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뒷통수를 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지배자와 그림자 군주가 치열한 싸움 끝에 둘 다 기진맥진해진 상황에 '나머지 군주들'이 먼저 그림자 군주를 제거하고, 그림자 군주에 의해 제압 당한 '지배자들'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때 배신을 지휘한 우두머리가 바로 '파멸의 군주, 용제'다.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그가 자신과 유일하게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여긴 '그림자 군주'를 제거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파멸의 군주에 의해서 제거된 '지배자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서 '광휘의 파편'을 지구 곳곳으로 보냈고, 그 파편 조각이 몸속에 스며든 인간들은 엄청난 에너지원인 '마나의 영향력'을 받아 '국가 권력급 헌터'로 거듭 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마나의 양'이 충분하지 않은 지구를 찾아온 '파멸의 군주(용제)'의 종(카미쉬)을 보내 '광휘의 파편 조각'마저 제거하려 했으나, 전세계 국가 권력급 헌터들이 모여서 카미쉬를 물리치는 위업을 펼친 것이다. 한편, 군주들에 의해 배신을 당한 '그림자 군주'는 자신이 '죽음의 신'인 탓에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허나 파멸의 군주에게 당한 데미지가 너무 컸기에 회복하기에 너무 오래 걸릴 것으로 짐작되자, 한 가지 묘책을 내놓게 된다. 바로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키우려 한 것이다. 마치 지배자들이 '광휘의 파편 조각'으로 국가 권력급 헌터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암튼, 그렇게해서 '설계자'에 의해 낙점을 받은 후계자가 바로 E급 헌터, 성진우였다.

E급 헌터는 '일반인'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마나의 힘'이 약한 헌터로 각성한 자다. 그래서 게이트를 통해서 나타나는 마수들과 싸울 힘을 갖고는 있지만, 마나의 힘이 없어 싸울 수 없는 일반인처럼 마수들에 의해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을 맡게 된 셈이다. 그렇게 약한 헌터가 바로 '성진우'였다. 그런데도 성진우는 '죽음'을 무릅쓰고 던전을 돌면서 마수 사냥에 나섰다. 왜냐면 초창기 헌터로 각성한 아버지는 던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는 '익면증'에 걸려서 잠이 든 것처럼 쓰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뿐인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서 '소년 가장'이 되어 버린 성진우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헌터의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필 E급 헌터로 각성하는 바람에 원하던 큰 돈은 벌지도 못하고, '헌터협회'에서 주최하는 던전 사냥에 참가하는 대가로 받은 지원금으로 값비싼 어머니의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를 겨우겨우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원금을 다 써버린 성진우는 변변한 무기나 방어구도 구하지 못하고 겨우 마련한 칼 한 자루를 들고서 겨우겨우 던전을 돌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던전 참가를 통해서 얻게 된 별명이 '최약 병기'였다. 가뜩이나 약한 E급 헌터로 각성한데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E급이나 D급 게이트를 돌고 있었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사실 던전 게이트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보다 '등급'이 낮은 마력을 뿜어내는 게이트라면 별탈이 없겠지만, '동급'이거나 '상위' 등급의 게이트에 들어가서 마수 사냥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깐의 방심만으로도 마수들의 공격에 순식간에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진우도 D급 게이트에 참가했다가 심각한 치명상을 받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등급과 동급인 E급 게이트에서도 가장 약한 마수인 '고블린'에게 치명상을 당할 정도로 약해 빠진 헌터였던 것이다. 그러니 헌터들에게 게이트 참가를 권할 때에 8명 이상의 헌터로 구성을 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할 정도였다. 그래도 게이트는 끊임없이 나타났고, 헌터의 수는 늘 부족했기 때문에 '협회'에서도 헌터들이 생명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험한 배정은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진우 헌터가 참가하는 던전은 늘 '최약체 마수'만 등장한다는 공식(?)이 소문으로 나돌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만큼 '안전한(?) 레이드'라는 보장이었기에 성진우가 참가하는 게이트 사냥은 안심하고 참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하고 참여한 게이트에서 '이중 던전'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중 던전'은 바로 그림자 군주의 의뢰를 통해서 '설계자'가 꾸민 게이트였던 것이다. 이 게이트에서 성진우는 '죽을 위기'를 극복하고 '플레이어'로 다시 재각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된 성진우는 끝없는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계자'의 친절한(?) 안내를 착실하게 따르면서 성진우는 '그림자 군주'가 될 훈련을 착착 해냈던 것이다. 그렇게 레벨 100을 넘기고 진정한 '그림자 군주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때쯤, 제주도를 넘어 일본에서 '거인들의 왕(군주 가운데 한 명)'을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의 군주'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주한 엄청난 힘을 가진 '군주들'과 마주하게 되고,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도 떠올리며 진정한 '그림자 군주'의 힘을 개방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의 군주, 용제'와의 한 판 승부를 펼치는데, 결국 최종 승리는 성진우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성진우가 승리하긴 했지만 '파멸의 군주'가 남긴 상처와 그에게 당한 희생자는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종지부를 찍게 되면 성진우가 '알고 있던 세상'은 한 켠이 무너진 채로 남게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성진우는 지배자들에게 '윤회의 잔'을 이용할 수 있게 부탁을 했고, 그 힘을 통해서 '시간'을 되돌릴 작정을 한다. 그렇게 되면 성진우는 이미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는데, 처음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길 원했기에 아무도 성진우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예정대로 '파멸의 군주'는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파멸의 군주'를 상대할 것이냐는 지배자의 물음에 성진우는 분명히 말한다. 자기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말이다. 지배자들의 도움도 필요 없다면서 말이다. 진정한 '그림자 군주'의 힘을 개방한 성진우로서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지만, 그럴 경우에는 아무도 성진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배자들의 경고가 있는데도, 성진우는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결정을 선택한다. 세상은 온전히 지킬 수 있겠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그런 선택을 말이다.

그렇게 성진우는 다시 한 번 '최후의 싸움'을 다시 치루고 승리를 거둔다. 다시 한 번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된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서 이야기는 <외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미 끝난 이야기에 이어지는 '뒷이야기'가 김이 빠질 법도 하다. 그런데 <나 혼자만 레벨업>은 그게 아니다. 다 끝난 듯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서 '그 뒷이야기'를 하면서 더 신 나고 재미난 이야기를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보통 <외전>의 생명은 '디테일'에 있다. 굵직굵직한 주요 이야기의 빈틈을 완벽하게 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혼자만 레벨업>에서는 '외전'이 사실상 '본편'이라고 할 만큼 자세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 '세계관'으로 다시금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그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다. 마치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을 하고 난 뒤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서 끝나버린 이야기의 뒤를 이어나가면서 '어떻게' 행복한지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레벨업>이 바로 그렇다. 성진우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세상에서 성진우는 다시 '중학생'이 되어서 곧이어 찾아올 '파멸의 군주'를 물리치고 또 한 번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으나,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상에 한가롭게 살아간다. 그 이야기가 몹시 흥미롭게 진행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그 <외전>마저 끝마쳤을 때, '또 다른 이야기'로 다시 찾아왔으면 하는 아쉬움만 가득할 것이다. 정말 간만에 '여운' 가득한 판타지 소설을 만나고 즐겼다. 기회가 된다면 또 리뷰하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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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 몸과 의학의 한국사
신동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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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 몸과 의학의 한국사>  신동원 / 역사비평사 (2004)

[My Review MMXXXV / 역사비평사 2번째 리뷰] 우리 나라 의학은 그 기원이 꽤나 오래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학의 아류'라는 헛소문으로 인해 '한(韓)의학'이 크게 주목 받지 못했고, 그나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향약집성방>과 같은 우리 의학서가 나오기는 했으나 오래도록 '중국의 의서'인 <황제내경> 같은 책들에 의존하는 바람에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조 때 허준에 의해 집필된 <동의보감>이 쓰여지고 나서는 '한의학'도 새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약재로 중국에서 들여온 비싼 약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약재를 도용하였고, 우리의 풍토와 기질에 맞는 처방법을 시행하면서 독자적인 체계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한의학'이 다시 한 번 위축되었으며, 일제감정기를 거치면서 '근대의학'은 서양의학으로 완전히 굳혀지는 듯 싶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학체계가 이대로 '서양의학'을 기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정녕 '한의학'은 건강보조식품 취급하듯이 뒷전으로 밀려나야 올바른 것인가? 이런 의문이 끝없이 되묻게 된다. 서양의학이라고해서 '근대 이전'부터 획기적인 시술 방법을 선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의학사를 뒤적거리면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잔인하고 끔찍하고 몰상식(?)한 방식으로 환자의 몸을 다뤘다는 점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동양의 의학'은 꽤나 점잖은 편이다. 적어도 환자의 몸을 가르고 째면서 살풍경한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맥과 침, 뜸을 이용하여 환자의 기운을 먼저 보살핀 다음에 '병의 근원'을 치유해나가는 방식이 꽤나 고급져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과 의학기술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인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이른바 '과학적인 관점'에서 서양의학의 압승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동양의학'은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 정도로 내쳐지고 말았다.

그렇다고해서 '서양의학'만을 현대의학의 바람직한 기저로 보는 지금의 의료계 실태가 진정 바람직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분명히 우리의 '한의학'도 바로 설 자리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요즘도 수많은 환자들이 '양약'이 아닌 '한약'을 더 선호하는 편이고, 정형외과적인 시술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고 한의사의 시술(침, 뜸 등등)을 받고서 더 회복이 빨랐다는 예는 정말 많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에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서로 콜라보를 해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며 '협진'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현실에서는 이게 녹록치 않다는 것만 재확인할 뿐이다. 흔히 말하는 '밥그릇 싸움'에 비견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이게 정말 그럴 정도로 싸울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의사들 말로는 '환자'를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정말 '환자'를 위한다면 양의학과 한의학을 가리지 않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치료를 하려고 서로의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연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비의료진'의 짧은 소견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책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가 반가웠다. 비록 책의 내용은 '논문'조로 쓰여져서 읽기에 딱딱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의학의 역사를 '서양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비판 아닌 비난만 늘어놓은 책이 아니라 '한의학'도 애초에 사람을 살리려던 목적으로 연구되었다는 긍정적인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참 좋았다. 비록 우리의 의학수준이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서 무당을 빌어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써서 붙이고 태워서 먹이고 허공에 날리며 귀신을 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근대의학'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간절한 바람이었고, 최고의 주술적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랬던 우리가 구한말에 '서양의사'를 만나면서 새로운 의학을 접할 수 있었고, 일제가 '세균'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여주면서 병의 기원이 세균에서 비롯되었다며 '위생'을 깨우치던 조선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부터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방법으로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기염을 토할 정도가 된 셈이다. 이렇게 발달한 대한민국의 현대의학이 오롯이 '서양의학'에 의한 것인지는 한 번 따져볼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 오래 동안 습득하고 발달 시켜왔던 '한의학'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오히려 서양의학을 연구한 권위자들마저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한약'을 챙겨 먹는 일도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건강을 챙기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에 한정되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요즘 사람들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환자들이 119구급차를 타고서 '대학(대형)병원 응급실'이 아닌 '동네 한의원'을 찾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기껏 발전시킨 '서양의학의 토대'를 완전히 뒤바꿔서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 선생님들에게 '한의학'까지 배우라고 강제적인 학과 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거듭 밝힌다.

하지만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서로 만나서 서로 공통으로 다루거나 완전 다른 점을 서로 비교할 수는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불치병'이나 '난치병'의 경우에 획기적인 접근법으로 치유와 치료법을 머리를 맞대고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일 수는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들 처지에서는 정작 자신의 아픔을 다스려줄 사람이 '양의사'인지 '한의사'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하나 뿐인 생명을 두고서 '이런 실험', '저런 실험'을 하며 가지고 놀듯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 분야'만 심도 있게 파고 들어도 힘든 과정인데, 그렇게 힘들고 빠듯한 과정에 서로 연관성이 '1도' 없는 양의학과 한의학을 콜라보 하라니 참으로 한가한 소리나 한다는 불평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시간 정도만이라도 할애를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보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서 '의료진' 스스로 결정을 내리라고 권유하고 싶다. 우리 전통 의학의 역사를 마주한다는 열린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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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소녀 루오카 1 - 인어 리듬 매니큐어 마법 소녀 루오카 1
미야시타 에마 지음, 고우사기 그림, 고향옥 옮김 / 가람어린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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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소녀 루오카 1 : 인어 리듬 매니큐어>  미야시타 에마 / 고향옥 / 가람어린이 (2023)

[My Review MMXXXIV / 가람어린이 1번째 리뷰] '마법 소녀' 이야기 이전에는 '요술 공주' 시리즈가 있었다. <요술 공주 세리>, <요술 공주 밍키>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술 공주' 이야기를 쏟아낸 뒤에는 '마법 소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론 <카드캡터 체리>(원제에는 '사쿠라'라는 이름이다)를 가장 좋아했다.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 걸~"이라는 주제가도 흥얼거렸고 말이다. 특히나 "어둠의 힘을 지닌 열쇠여, 진정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라 너와의 계약에 따라, 나 체라가 명한다. 봉인해제!"라고 외우면 '크로우카드'에 봉인 되었던 마법의 힘이 풀려나며 평범한 소녀였던 체리도 어느새 마법 소녀로 변신하게 되었다. 예쁜 일러스터가 내 마음을 사로...쿨럭쿨럭

암튼, <마법 소녀 루오카> 시리즈에는 '두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욕심꾸러기 소녀 카오루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마법 소녀 루오카다. 두 소녀의 이름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눈썰미가 대단한 셈이다. 애초에 '인간 세계'와 '마법 세계'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는 별개의 세계다. 하지만 두 세계가 아주 떨어진 것은 아니고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서로 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었고, 그 연결고리를 통해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을 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두 소녀가 그 통로를 이용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카오루는 땅에 떨어진 '카드 한 장'을 얻게 되었는데, 그 카드를 손에 들고서 잠시 넘어질 뻔 했다가 '마법의 힘'이 담겨 있는 엘릭서를 구매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원하는 '마법 엘릭서'를 구매(?)했는데, 이 엘릭서라는 것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조차 그 엘릭서 안에 담긴 마법을 쓸 수 있는 엄청난 도구였다. 마침 카오루는 합창 대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었는데, 문제는 카오루의 피아노 연주 실력이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엘릭서를 판매하는 거리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곳에서 '인어 리듬 매니큐어'라는 엘릭서를 구매해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게 된다. 그 엘릭서의 힘이 담긴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르기만 하면 피아노를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더라도 뛰어난 실력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핑크 색깔'에 담긴 엘릭서의 힘은 바로 '아주 즐겁게 연주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카오루는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지 못해서 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는데, 바로 이 '인어 리듬 매니큐어'의 힘을 빌어서 아주 뛰어난 연주 솜씨를 뽐내고 난 뒤에는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즐겁게' 피아노 연주를 즐기다 보면 저절로 연주 실력이 늘고 즐거운 마음으로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신기한 카드'를 얻게 된 카오루의 하루하루가 즐거운 한편으로, '신기한 카드'를 버렸던 원래의 주인이 이야기에 등장하게 된다. 바로 마법 세계의 소녀인 '루오카'다. 그녀의 마법 실력은 '같은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그도 그럴 것이 루오카의 어머니가 마법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었기 때문에, 루오카는 집에 있는 '마법책'을 어릴 적부터 곧잘 훔쳐보고 따라 해보았기에 어쩔 수 없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 학교'에서 또래들이 배우는 마법따위는 선생님들에게 배우지 않고도 이미 알고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즐겁기는커녕 재미가 하나도 없다. 그런 루오카의 소원은 바로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인데, 마법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엄마이기에 잠시도 루오카와 함께 있어줄 시간이 없어서 루오카는 늘 집안에서 혼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루오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엄마는 루오카가 불편을 느끼거나 하지 않도록 '신기한 카드'를 주고서, 루오카 또래가 가장 좋아하는 '엘릭서 가게'가 즐비한 곳에서 마음껏 쇼핑할 수 있도록 선물을 해준 것인데, 정작 루오카는 그 카드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숲속의 늪에 들어가서 그 '신가한 카드'를 버렸던 것인데, 그게 마침 카오루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과연 두 소녀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전형적인 일본의 '마법 소녀'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지만, 전혀 지루한 느낌은 없다. 더구나 '판타지 동화'속에 마법 아이템이나 마법 주문 따위를 소개하며 다양한 굿즈(?) 판매까지 완비하고 있어서 일본스럽구나 싶을 정도지만, 구태의연한 상술과는 상관 없이 '이거다!'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 법이다. 앞으로 펼쳐질 두 소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벌써부터 소녀 독자들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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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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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 전미연 / 열린책들 (2014) [원제 : Stupeur et tremblements (1999년)]

[My Review MMXXXIII / 열린책들 23번째 리뷰] 아멜리 노통브를 극찬하는 이들은 그녀의 문체에서 '잔인함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을 늘어놓는다. 인정한다. 그녀에겐 유머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유머와 함께 곁들여진 '잔혹함'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그런 그녀의 문체가 혐오스러워졌다. 그로테스크(기괴함)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잔혹한 유머에 나는 왜 한때 나마 열광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 뿐만 아니다. 그녀의 모든 소설이 다 그렇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보냈던 '나의 찬사' 위에 덧바르는 리뷰를 쓰고자 한다. 잘못 썼다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녀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에 뒤를 이은 '실시간적 배경'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녀의 첫 소설이 공전의 대히트를 치고 난 앞뒤의 '전후사정'을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도 이브도 없는>에서 소회를 밝힌 '연애담(아멜리의 첫사랑)'의 뒷부분에 소개된 '첫 직장 뒷담화(?)'가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벨기에 사람 '아멜리'가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프랑스어 과외'를 하던 중에 얻어 걸린 '번듯한 직장'에서 경험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의 문화는 '서양인'에게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이질감)를 아주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음으로 일본인 독자들도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 아멜리 노통브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식으로 비유하며 정리하자면, 우리 나라에서 태어난 '서양여자'가 다섯 살까지 살다 고국으로 되돌아 갔는데, 어릴 적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그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어른이 되어 다시 대한민국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대한민국'에 눌러 앉기 위해 '직장'까지 얻게 되었는데, 한국의 직장 문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만 잔뜩 겪다가 꼴랑 1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서 고국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1년 간의 경험담을 소재로 삼아서 쓴 소설을 '고국의 독자들'에게 먼저 선보이고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다. 고국의 독자들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직장 문화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서양인이 견뎌내기에 너무도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우스개소리'를 곁들여서 잔혹하게 묘사했는데, 이걸 '한국의 출판사'가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서양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버젓이 '뒤침(번역)'을 한 뒤에 출간을 했더니, 한국의 독자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더라는 식이다.

딴에는 이게 맞는 듯 싶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조차 너무도 일본스럽기 때문이다. 애초에 '누구'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하는가? 다름 아닌 '일본의 왕(천황)' 앞에서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양인들도 예외는 없다는 식으로 제목을 갖다 붙이고서, 어느 한 일본대기업의 직장문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문화들을 '일본의 전통(?)'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대기업이 '외국 사원'을 뽑아놓고 '자국의 문화'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알맞게 적응을 해야 한다고 우겼던 것일까?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아멜리는 점점 더 '한직(한가한 직책)'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끝내는 '화장실'을 사무실 삼아 '화장지 바꾸는 작업(미화원이 해도 될 일)'을 외국계 직원이 해야 마땅할 직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이런 하릴없는 '고급 인력낭비'를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리고서 이를 '일본 사람들의 체면치레'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서양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열이면 열, 모두 '일본은 이상한 나라'로 읽고 말 것이다. 왜냐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들조차, 일본기업의 이상한 직장 문화에 특별히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치려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고초를 겪은 아멜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전할 뿐, 그녀의 퇴직을 만류하거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본의 문화가 원래부터 그런 것이니 '서양 사람'인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극복할 수 없을테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사하는 것이 일본기업이나 당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서술하는데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도리어 '아멜리 노통브의 농담'이 시의적절했다면서 이 소설을 계기로 '일본의 문화'를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앞으로는 더욱 더 '일본의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의 도전을 환영한다는 '프론티어(?) 정신'을 설파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듯 싶다. 여기에 한국의 독자들도 '반면교사'로 삼는 누를 범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직장문화도 '잘못되고 고쳐야 할 점'이 많으니, 아멜리와 같은 서양사람들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유럽)의 기업에 취직했다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비판'을 넘어 '맹비난'을 퍼부은 소설을 쓰면, 서양도 그 책을 기꺼이 뒤쳐내어 자국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일게다. 오히려 무례하고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이 소설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걸까? 나는 매우 불쾌하다. 아멜리, 당신이 뭐 돼? 67년생이면 87년도에 일본기업의 문화가 비판을 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만큼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일본의 경제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경제 2위'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어마어마한 성장을 하고, 전세계가 '일본의 선진 기업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 당시 일본 기업의 행태는 끔찍할 정도의 '고강도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른 '인권유린의 현장'일 수 있지만, 적어도 1999년 당시에만 해도 맹비난을 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멜리는 그런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인지, 모르고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소설을 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일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표현은 잊지 않고 꺼내든다. 맹비난을 아낌없이 선사했지만 애정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듯이 말이다.

정녕 사랑하기 때문에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후드러 팬 것일까? 하지만 사랑했다고 보기에는 소설속에서 묘사된 '일본인의 모습'은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어쩜 인간이 '저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자기(아멜리) 편'을 들어준 일본인에 대한 애정 어린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편'을 들지 않은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없이 뭇매를 선사했다. 인격 이하의 비난도 빼놓지 않고서 말이다. 이런 걸 '유머'라고 할 수 있을까? '잔혹한 유머'라고 설명하면 좀 덜 창피하고 덜 노여울까? 아니, 난 그렇지 않았다. 같은 동양인의 관점에서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이따위 소설을 '소설'이라고 펴낸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노여움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일본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삐뚫어진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따위 기괴한 애정 표현을 '사랑'으로 포장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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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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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장 지글러 / 유영미 / 갈라파고스 (2016) [원제 :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1999년)]

[My Review MMXXXII / 갈라파고스 6번째 리뷰] 이 책의 물음은 간단하다. 지구에 사는 인구가 120억이 넘는다고 해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넉넉하게 식량을 생산하고 있는데, 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5초에 1명 꼴로 죽어가야만 한단 말인가? 글쓴이는 이런 물음에 명확한 답을 한다. 첫째, '부자들의 욕심'이 너무 과한 탓이고, 둘째, '선진국들의 경제구조적 문제' 때문에 넉넉한 식량을 제대로 나눠주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가난한 나라들의 불안정한 정치구조적 문제'를 꼽았고, 마지막으로는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그리고 '전쟁(내전 포함)'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가 버젓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기아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 이게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가난'에 대해서 잘 배우지 않는다. 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크게 선회한 뒤부터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기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으며, 교육현장에 몸 담고 있는 선생님들조차 '기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한민국에서는 '광고'에서나마 아프리카 빈민국들의 실상을 보여주며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들에게 후원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더구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는데, "한국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배불리 먹일 생각할 바에야 한국의 빈민들부터 먹여 살려라"라는 목소리가 드높은 실정이다. 불과 70여 년 전에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굶주리던 한국 국민들이 하는 소리라고 본다면, 정말 끔찍한 태세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겨낸 가난이고, 굶주림인데 말야. 너희들도 그런 고통에서 면하려면 '근면 성실'하게 일을 해서 정당하게 대가를 받을 생각을 해야지 '구걸'부터 할 요량이면 너희들은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악담(?)을 서슴지 않고 말하기도 한다.

딴에는 틀린 말도 아니지만 실상을 알면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아프리카나 아시아 곳곳의 나라들이 '빈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자국민들을 '기아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까닭은 다름 아닌 '식민정책의 후유증' 때문에 경제성장의 발목이 붙잡혔고, '후진적인 정치관료의 부패'로 인해서 식량원조 받은 것조차 제대로 된 분배 되지 않으며, 심각한 경우에는 해묵은 '정치적 갈등', '경제 이권'을 두고 벌이는 내전으로 인해서 세계적인 구호활동조차 보호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는 '근면 성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다. 실제로 빈국들의 농부들은 정말 열심히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풍족하게 수확하기도 하지만 '굶주림'을 개선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왜냐면 그들이 생산하는 것은 '자신들이 먹을 것'이 아닌 '외국에 수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들의 정부는 이렇게 수출하고 받은 돈으로 '자국민'들을 먹일 식량을 수입해 오는 방식을 쓰는데, 이게 꽤나 비효율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정부관료의 부패로 인해서 제대로 분배조차 되지 않아 근면 성실한 국민들을 굶주리게 만든다고 한다.

그나마 이렇게 굶주리는 나라는 양반 축에 든다. 내전이라도 벌어지는 나라는 농부들이 일상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터전에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의 전투라도 벌어지면 삽시간에 일가족 모두가 사살되기도 하고,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약탈이 벌어지며, 어느 한 쪽을 돕기라도 하면 반대측에서 끔찍한 보복을 저질러서 일상 생활조차 편하게 할 수 없을 지경에 빠지고 만다.

이런 모든 비극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농부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다. 빈국들의 농사법은 선진국에 비해 '생산량'이 극도로 떨어진다. 비싼 농기계를 쓰지 못할 뿐더러 소와 같은 동물의 힘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온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한다. 그나마 '비료'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오직 '비옥한 땅의 힘'에만 의지할 뿐이고, 그마저도 '날씨(적당한 강수량)'가 돕지 않아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한 해 농사는 망쳐버리고 만다. 그러면 또다시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의 식량원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굶주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낭만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선진국 정부가 이런 일련의 '기아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돕겠다고 나서면 '다국적 기업'은 자신들의 경제적 손해를 들어서 이런 정책들을 맹렬하게 반대하고 저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도 이런 반대여론에 부딪혀 '인도주의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슬그머니 기업의 편을 들어 슬그머니 지원 정책을 내려놓고 만다. 그럼 UN 같은 곳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좋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하지만, 정작 문제는 '재정적 어려움'을 내세워 이마저도 제대로 원조하지 못하고, 설령 식량원조를 했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나라에 딱 맞는 지원 정책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색(?)내는 용도로 천편일률적인 지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정작 굶주리고 있는 이들에게 제대로 지원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를 테면, 북한의 기아 주민들을 위해 쌀 100만 톤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를 정확하고 골고루 분배할 수 있는 인력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북한 주민'이 아닌 '북한 군부대'와 '군간부'가 중간에서 착복을 해도 나몰라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강력한 제재'를 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왜냐면 지원 받는 나라에서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고 거부하면 딱히 제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래서 문제, 저래도 문제라면 도대체 '기아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없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딱히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사람들의 '공감'과 더불어서 '연대'가 꼭 필요하고, 그리고 이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기아 문제'에 대한 실태는커녕 그런 일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 해결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가난'은 게으른 사람들의 필연이고, 이들을 돕는 일은 '게으름'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으름'을 조장하는 일이라면서,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한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서 죽어버려도 괜찮은 사람들로 치부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를 '구조적 문제'라고 하는데,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부를 쌓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문제'가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오늘날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완전자유시장'을 추구하기보다는 '강력한 정부의 규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부의 재분배'가 실현되어야 하고, '복지정책'을 늘려서 먹고 사는 문제만이라도 해결해주어야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세금'을 늘리고(부의 재분배), '복지 정책'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부자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반발이 심해진다는 점이다. 이들의 불만은 '경제불황'을 불러왔고, 사회 전반에 경제 침체를 불러와서 모든 사람들이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다시금 '부익부 빈익빈 문제'를 불거지게 만드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자들도 만족하고, 빈자들도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방안이다. 왜냐면 부자들이 빈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주머니를 열고서 자발적인 '부의 재분배'를 이루어야 하며, 동시에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고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세금'을 납부하고, 넉넉한 '복지 정책'으로 온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여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글쓴이인 장 지글러는 '낭만적인 해결법'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우리가 '기아의 고통'을 제대로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면 적어도 '배가 고파서 죽는 어린이'가 발생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당신은 전세계적으로 5초에 1명 꼴로 어린이들이 굶어서 고통 받다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셈인가 라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사람이 아직 많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지)'을 모으면 문제 해결은 오히려 쉬울 수 있다고 당부를 하기도 한다. 다분히 '측은지심'에 호소하는 소극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오히려 실현가능한 방법 같지 않은가? 몰랐다면 돕지 않겠지만 알고 나면 돕지 않을 수 없다면서 말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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