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9 :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9
손영운 글.기획, 이진영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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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3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책을 우리 나라에서는 6권으로 나누어 출간하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각권은 평균 700여 쪽에 달하는 '벽돌책'이다. 이렇게나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인만큼 사료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에 브로델을 일컫어 '노벨 역사학상 수장자'라고 불릴 정도란다. 안타깝게도 노벨상에는 '역사학 분야'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이 아무리 청소년에게 유익한 필독서라고 하더라도 꼭 읽기히게는 무리한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며, 방대한 원전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놓은 <해설서>라도 읽힐라치면 더욱 골머리를 싸잡아쥐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일 것이다. 앞서 <대승기신론>이란 석가모니의 말씀을 압축한 책에 '해석'이 분분하니 원효를 비롯해서 유명한 고승이 <대승기신론소>를 펼쳐내어 읽고 해석하기에 불편함이 없게 해주었으나, 그로 인해 <대승기신론>의 분량보다 10배가 더 많은 '주석'을 달아놓을 수밖에 없었음을 떠올린다면, 이 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또한 그럴 폐해가 얼마든지 나올 법 하다. 그런 까닭에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시리즈'가 대단한 시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쉽고 재미나게 읽으면서 '만화형식'으로 단번에 '원전의 이해'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가 아니라 '맛보기'에 불가하다는 지적을 피할 순 없겠지만 '청소년 독자'들에겐 유용한 시도가 분명할 것이다. 반드시 '원전'에 도전하겠다는 다짐만 얻어낼 수 있어도 이 책이 지닌 '의도'는 십분 발휘한 셈일 것이니 말이다.

 

  암튼,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리어 마땅한 '페르낭 브르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살짝 이해해보도록 하자. 먼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기준의 중요성'을 강조한 브로델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역사서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존의 왕조 중심(권력자)의 역사관이 아니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연구'를 통해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받았다. 또한,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역사를 '본기(제왕의 역사)', '열전(신하의 역사)', '지(법률, 경제, 사회의 역사)', '연표(역사적 흐름을 표로 정리)'로 정리하는 '기전체'라는 역사서술 방식을 확립하였다. 이후의 동양역사가들은 거의 대부분 사마천의 '기전체' 방식을 본따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에 반해 브로델은 역사를 '누구의 입장에서 기록할 것'인지 따져 물었단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발생하였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식의 서술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80세를 맞이하여 축하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더라도 '왕과 귀족'이 맞이한 80세 잔치와 일반 '평민과 천민'이 맞이한 80세 잔치는 극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또는 '교통사고'가 났더라도 고급차와 중고차라는 '대상'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점이 더해지면 더욱더 다양한 역사로 기록될 가능성이 농후해질 수밖에 없다. 브로델은 바로 이런 점을 중요시 여겼던 것이다. '역사기록'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역사학자가 역사를 기록한다면 분명 전문성이 높은 '정치/사회사 역사기록'이 서술되겠지만, 경제사학자가 똑같은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면 '경제사 역사기록'으로 서술되면서 '역사관점'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과학사학자나 미술사학자가 마찬가지로 기록한 '역사책들'은 기존의 역사책과 사뭇 다른 '역사관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사' 단위로 역사를 기록할 것인가? '국가' 단위로, 또는 '100년' 단위, '1000년' 단위 등등으로 여러 단위로 역사를 쓰게 되는 것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학파'가 결정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브로델은 인류 전체를 바라보는 '유연한 자세'를 강조하며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지나치게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러한 역사학파를 '아날 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는 1929년에 <경제사회사 연보(아날)>창간된 잡지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는데, 이 잡지의 이름은 각각 46년에 <아날, 경제, 사회, 문명>으로, 94년에 <아날, 역사와 사회과학>으로 바뀌었다. 아날 학파는 이러한 경향을 주도한 학자에 따라 3개의 세대로 나누는데 '페르낭 브로델'은 제2세대에 속하며 시기적으로 1945~1968년에 주름잡았다. 브로델이 '68혁명' 이듬해에 아날학파 편집위원직을 넘겨주었는데, 프랑스대혁명에 버금가는 '68혁명'의 주역들이 바로 브로델의 역사학을 맥락으로 잡아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반기를 든 대학생과 지식인이 연대를 하였으니, 유심히 지켜볼 시점임에 분명하다. 어찌보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란 저서는 아싸(아웃사이더)들의 개론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 어디를 찾아봐도 '혁명의 지침서'가 될 만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이 책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생각을 정확히 구현해낸 책이지만, 조금 달리 해석하면 '유럽은 어찌해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중국을 비롯한 동양은 어찌하며 쇠망하게 되었나'라는 자화자찬, 아전인수 격의 책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를 '짧은 시간'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해 지난한 과정과 여러 관점을 살펴보야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논조로 일관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극심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혁명의 논의'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으로 봤을 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허나 거대한 역사적 흐름속에서도 '프랑스대혁명' 같은 '혁명의 필연'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기에 이 책을 읽고 공감한 '68 혁명가들'도 꽤나 많았을 것이다. 이는 브로델의 삶속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보수권력자나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는 일관적인 논조를 유지하며, 어쩌면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오직 '학자의 길'만을 걷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진보적인 논객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는데,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유지하는 소신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브로델은 오직 '학자'로서 책임과 본분을 다할 뿐, 변화하는 세상사에 일일이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실천적 지성인'이었던 샤르트르에 대해서 칭찬과 비판을 계속하면서 '학자로서 중도의 길'을 지킬 뿐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그의 '물질문명'를 논할 때의 관점은 꽤나 '제국주의자들의 논조'와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서양의 성공과 동양의 실패'는 서양일변도의 제국주의의 성패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식민지에서의 생활을 겪어보았던터라 '식민지생활의 참담함'도 날카롭게 비판하며 마냥 제국주의를 옹호하지만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부자들에겐 천국을, 빈자들에겐 고통을 선사한다'는 논조로 비판하며 자본주의를 만병통치약처럼 신봉하는 부류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허나 정작 이 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책에는 그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어서 모호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사료'를 중시하는 '랑케의 사관'과 '해석'을 중시하는 '카의 사관'의 중간적인 시기에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통해 역사관을 사유해야 한다는 '총체적 역사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적 관점의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총체적 역사관'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에게 '랑케의 사관(실증사학)'은 식민사관이란 병폐를 낳았으며, '카의 사관'은 '친일적폐사관 vs 종북좌파사관'이라는 극심한 대립만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오직 역사만을 위한,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진데, 단순히 '정치사학'을 넘어서 '친일편향적인 경제사학' 또한 능가해버리고 '민족자존의 긍지'도 살리면서도 누가 보더라도 '공정하고 합당한 역사서' 편찬을 위해 노력해줄 이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정치성 편향'이란 잣대를 들이대는 반푼이들은 없길 바란다. 이런 반푼이들의 어줍잖은 공격을 가뿐히 넘어설 이 시대의 양심적 시민들이 넘쳐야할 까닭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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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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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플래쉬>에서 독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명성만을 위해 제자들에게 기꺼이 '채찍질'을 하는 교수가 등장한다. 이 영화가 상영할 당시 미국에서는 '교육적 관점'에서 매우 부정적인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자신에게 자녀가 있다면 '저따위' 교수에게는 교육받지 않게 하겠다고 말이다. 특히 교수의 '언어구사'에도 지적이 많았는데, 인종차별적이고 인격모독적인 욕설이 난무하여 수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단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는 '호평일색'이었던 것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말로 '뒤쳐진 자막'으로 인해 교수의 '폭력적인 언어'들이 상당히 순화(?)된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나라 교육현실이 그런 '언어폭력'에 길들여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교수의 폭력적인 언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고, '재즈음악의 강렬한 비트'에 몸이 들썩이는 흥겨움에 보는 내내 즐거웠다는 평과 함께, '성공'을 위해선 저 정도(?) 강도의 수업은 달게 받아야만 한다는 '강압적인 교육의 정당성'을 들이대며 제자의 성공을 위한 교수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평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과연 그럴까? '위플래쉬'라는 뜻이 채찍질을 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도 '선생님이 되다'는 뜻으로 '교편을 잡는다'고 표현하는데, '교편'이 바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면서 사용하는 가느다란 막대기를 이른다고 한다. 한때는 수업을 시작하거나 수업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바로 이 교편으로 교탁을 탕탕 두들겼고, 학생들의 훈육을 위해서 아이들의 엉덩이와 종아리, 손바닥, 옆구리, 명치, 관자놀이 등등 학생들의 신체를 가릴 것 없이 때리고 찌르고 패는데 썼던 '선생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로 주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흉악한 무기를 들고서 잘 휘둘러야만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면서 학생들에게 으레 내려졌던 '체벌'을 없애는 방향으로 우리 교육이 변화했던 것이다. 요새 이런 '학생인권'과 '선생님의 교권'에 대한 논란이 충돌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데 깊은 공감을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심도 깊게 이야기를 하겠다.

 

  암튼, 우리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모범생(한스 기벤라트)'와 '문제아(헤르만 하일너)'를 비교하며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기성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강변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한다. 우리 나라의 학생 대부분은 이 책을 읽으면서 '문제아'가 되면 퇴학조치를 당해 '성공의 지름길'을 갈 수 없으며, '모범생'으로 성실하게 학업에만 열심히 하는 학창시절을 잘 견디기만 하면 '인생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해석이 옳다면 '한스의 죽음'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어찌하여 '잘 나가던 모범생'이 친구의 죽음과 퇴학을 당하는 슬픈 경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끝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 시도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냔 말이다. 앞서 '모범생과 문제아의 관점'으로만 이 책을 읽게 되면 한스의 죽음은 고작 '불성실하고 의지박약한 모범생의 뻔한 귀결'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헤르만 헤세가 그런 메시지를 주제로 삼아 <수레바퀴 아래서>를 썼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분석될 만큼 '작가의 경험'이 잘 스며든 소설이다. 실제로 헤세도 학창시절 '두 번의 퇴학'을 당하고 '자살시도'도 했으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운 나날을 지내다가 어머님의 헌신과 친구들의 우정,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되면서 다시금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된 경험담이라고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목표를 상실하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공부만 강요당했던 학창시절이 끔찍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고백을 털어놓으며 <수레바퀴 아래서>를 쓰게 된 까닭도 밝혔다. 이런 '작가의 의도'를 투영하여 <수레바퀴 아래서>를 이해하게 되면 분명 '교육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한 소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기벤라트'에는 '충고(조언) 좀 해줘'라는 뜻이, '하일너'에는 '치유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면 한스와 하일너의 우정이 괜한 설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레바퀴'는 무엇을 의미할까? 왜 학생들은 그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일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있으면 한스 기벤라트의 주위 어른들이 모두 하나같이 '고지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스의 아버지는 공부성적이 뛰어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아들인 한스가 정작 무엇을 바라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 고루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저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훌륭히 성장해주기만을 바라는 욕망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막무가내일 뿐이었다. 또한, 학교 선생님들조차 한스를 '마을의 자랑'으로 여길 뿐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역시 '마을의 명성'을 빛낼 뛰어난 인재로서 한스를 대할 뿐, 한스의 방황과 실패 앞에서 그저 '방관자'로 일관할 뿐 '한스의 성적과 결과'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한편, 마을의 목사와 신학교의 교사들도 '미래에 걸출한 예비목사'로써만 한스를 대할 뿐, 그밖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행여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목사'가 아닌 다른 '존재'를 꿈꾼다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는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이렇게 '기성세대'가 만든 '기성사회'는 자신들의 성공(?)만이 유일한 정답인 것마냥 학생들에게 강요를 '되풀이'하는 반푼이였던 것이다. 수레바퀴는 바로 이런 '모자란 어른들'이 만든 맹목적인 사회를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이 고작해야 '수레바퀴 아래'에 학생들이 깔리지 않도록 '수레바퀴 위'로 끌어올려 '수레바퀴 안'에서 맴도는 삶을 가장 숭고한 업적으로 여기는 모지리들인 것이다.

 

  이런 모자란 어른들이 만든 사회에 반기를 든 학생이 바로 '헤르만 하일너'다. 그는 과감히 '수레바퀴'에 탑승을 거부하고 '수레바퀴 바깥세상'을 꿈꾸며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후일담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스 기벤라트'는 수레바퀴에 탑승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님을 직감하긴 했지만, 하일너처럼 '극복'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우울에 빠지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사회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 청소년으로 보여진다. 우리 주변의 청소년을 살펴보자. 그들이 되바라지고 싸가지도 없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존재'라는 비난을 들이대기에 앞서, 그들이 스스로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제대로 형성하고 있으며, 그렇게 꿈꾼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지 살펴보잔 말이다. 그때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시기적절한 '충고(조언)'가 필요한 것이다. 꼰대처럼 들릴 소리지만 '라떼'도 좀 섞어가면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리고 '돈(경제력)'도 잘 벌 수 있는 인생상담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를 비롯한 모든 어른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인 셈이다. 그리고 반성해야 할 주제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에겐 '왕의 DNA'가 있으니 특급서비스(?)를 해줘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학부모이자 고위관직자가 되어선 안 된다. 또한, 선생님들도 사랑스런 제자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서 '모범생'과 '문제아'로 구분하는 어리석음은 저질러선 안 된다. 진상짓만 골라서 하는 학부모들의 민원과 그런 학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교장 이하 '윗선'에 의한 고충은 별개로 치고 진정 자신의 제자를 위해서 해줘야 할 '충고'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고, 아끼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일선 선생님들의 고충은 알고도 남는다. 비록 사교육 과외교사에 불과하지만 나도 논술쌤으로 '교육상담'을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진상부모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어처구니 없는 학생들의 무도한 헛짓거리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찬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이기에 가슴에서 삭히고 가슴으로 품어야만 할 때가 더 많았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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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8 : 원효 대승기신론소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8
서기남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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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가운데 명백히 '우리 것'도 있는데, 실로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낮은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물론 학문의 경계가 따로 없고 '내것'과 '네것'으로 나눌 수도 없는 것이 '고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분명 '우리 고전'에는 한국적인 정신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을 헤아려 오늘에 맞게 되살리려는 노력이 부족한 듯 하여 아쉽다는 것이다.

 

  딴에는 '서양의 학문'이 체계적인 듯 싶고, 서양과 쌍벽을 이룬 듯한 '동양의 학문'은 대개 고대 중국과 인도에서 비롯한 것이 많다하여 '한국적인 것'을 따로 찾아내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허나 이웃한 '일본의 학문'은 그 뿌리가 조악하다 못해 베꼈다는 것이 명확한데도 '일본의 것'이라 당당히 밝히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이렇다 할 것을 내세우지도 못하고 '한국적인 무엇'을 내세우기 앞서 대개 '중국에서 유래한 것'을 우리의 형편에 맞게 '독자성'을 내세워 고쳐쓴다며 당당히 '원조'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외래에서 흘러온 것'을 우리의 정서와 형편에 맞게 '고쳐쓴 것'이라며 애써 '겸손'을 떨고 있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느끼고 있다. '우리의 독자성'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일단 '외래의 것'이 우리의 품안에 들어오면 '원래의 것'과는 사뭇 다른 '우리 것'으로 변화하여 '원래의 것'보다 훨씬 좋은 '한국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런 '한국적인 것'이 바로 '우리 것'이고, '우리 고전'인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우리 고전'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고, '원래의 것'보다 더 좋은 '한국의 것'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등한시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기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왕자 싯다르타(부처)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인도의 것'은 절대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는 '현지의 사정'에 알맞게 변해 왔고, 인도의 승려 마명이 쓴 <대승기신론>에 덧붙여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대승불교'로 모습을 바꾸었고 '대승불교적 관점'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신라의 원효에 의해 석가여래의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적 해석'을 담은 책이 바로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이다. 허나 1900여 년전에 마명이 산스크리트어로 썼다는 <대승기신론>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현재는 6세기 중국 양나라 승려 진제와 당나라 승려 살치난타가 쓴 책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고, <대승기신론>을 해석한 <대승기신론소>도 수나라 혜원, 신라 원효, 당나라 법장의 해석이 담긴 책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고 한다.

 

  헌데, 사실 <대승기신론>은 매우 짧은 책인데 반해 이에 대한 '해석'을 담은 <대승기신론소>는 두껍고 방대하기로 유명하다. 왜 그럴까? 그건 '불교 경전의 핵심'만 담아 놓은 <대승기신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서 그렇다. 아무런 주석도 달아놓지 않고 '경전의 핵심'만 간추려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라고 써놓았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이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당시, '붓다의 말씀'을 거의 직접적으로 옮겨놓다시피 했으니 담긴 내용이 얼마나 '함축적'일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천재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경전'이라 불리는 간편한(?) 책, <대승기신론>에 일일이 해석을 달아놓았으니, 누구라도 한 번 읽으면 단박에 이해가 될 정도로 쉽고 재밌는 책(?)이라 불리는 <대승기신론소>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크게 세 가지로 '경', '율', '논'로 나뉜단다. 경은 석가모니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이고, 율은 불교 교단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책이다. 그리고 논은 위대한 스승들이 경과 율을 해석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경은 '교과서', 율은 '교칙', 논은 '참고서'인 셈이다. 이렇게 경장, 율장, 논장, 셋을 함께 이르는 말이 바로 '삼장'인데,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는 바로 이 세 가지에 통달한 위대한 스승이란 뜻이다. 수천 권에 달하는 '불교경전'을 통달했으니 '삼장법사'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대단한 칭송인 셈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팔만대장경'이 불교경전을 압축해서 '팔만 개 이상의 목판'에 새겨넣은 것인데, 그걸 달달 외울 정도의 실력자(?)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소>는 '논'이란 글자가 보이니 불교의 위대한 스승들의 '해석'을 보다 쉽게 풀어놓은 해설집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깨달음'에 대한 해설집이다. 인간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고통', 그리고 연속적인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참고서, 달리 표현하자면, '안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자기개발서쯤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싶다. 그런데 그런 좋은 안내서가 너무 방대한 것이 탈이다. 그리고 쉽게 설명했다고 하지만 너무 오랜 옛이야기라서 '현대적 가치관'에서 보기에는 사뭇 이치에 맞지 않은 설명도 곳곳에 눈에 띄어서 오히려 읽기에 따분한 책이 되어 버린 듯도 싶다. 하지만 원효의 사상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에 함축되어 있기에 원효가 지은 <대승기신론소>의 핵심도 '원효 사상'에 입각해서 이해를 하면 그닥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원효의 대표적 사상인 '일체유심조'는 해골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일찍이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자 중국(당) 유학을 결심한 원효과 의상은 함께 중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가던 도중에 천재지변으로 인해 급히 몸만 피해 동굴에 들어갔을 때였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원효는 깜깜한 암흑속에서 '물바가지'를 찾아 맛있게 해갈을 하고 다시 잠에 들었는데, 날이 밝아 깨어보니 동굴이라 여겼던 것은 '무덤속'이었고, 맛있게 마셨던 물은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뇌수'였던 것이다. 한참을 역겨움을 느끼며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문득 어젯밤에 마셨던 맛있는 물과 시체의 썩은 물이 '똑같은 물'일진데, 어찌하여 '그때'는 맛있었고, '지금'은 역겨워 뱃속을 뒤집어 놓은 것인가 의문을 품은 끝에 세상 만사 '고통'이라 불리는 것도 오직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단박에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중국 유학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가 '유심종(마음먹기에 달렸다)'을 널리 퍼뜨렸으며, 의상은 계획대로 당 유학을 마치고 '화엄종(華嚴宗: 엄격함에서 빛이 남)'을 개창했으니 반듯한 의상대사의 인품이 더해져 '해동화엄종'을 널리 퍼뜨렸다. 암튼, 이런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가 어떤 깨달음을 담았는지 대충이라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전지전능한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누구나 도를 닦아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칠 뿐이다. 물론 누구나 '부처'가 될 수는 없다.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끝없는 고통과 욕심을 끊어버리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무아'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고작 '또다른나(異之我)'를 만들어 온갖 번민에서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해결을 위해선 '회피'가 아니라 당당히 '맞서야함'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허나 나를 대신해서 '대신' 두들겨 맞으며 온갖 역경을 이겨낸 '또다른나'는 대단히 맷집이 단련되었다. 그렇게 '무아'의 경지에 아직 도달하진 못했지만 '이지아'의 경지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나'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을 따름이다.

 

  암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도 석가모니 때에는 '누구나' 될 수 없었고, 오직 석가모니만이 유일한 '붓다'였을 뿐이다. 이런 불교의 교리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땐, 대승(큰수레)적인 가르침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마치 유대의 하느님이 유대인만을 '선택'하였는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들이 '온인류'에게 사랑을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교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 나라에 전래된 '대승불교'는 누구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을 이어받아 원효대사는 세상만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 신분의 높고 낮음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비록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읽기에 부담스런 책일지는 몰라도 원효대사가 남긴 가장 한국적인 정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을 되살려 읽어내면 한국의 고전을 읽는 맛도 색다르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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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착각 - 몸과 마음에 대한 통념을 부수는 에이징 심리학
베카 레비 지음, 김효정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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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노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경로석'을 따로 마련해서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경로석은 '노약자석'으로 이름을 바꾸고 노인을 비롯한 약자까지 배려(?)하는 좌석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 '노약자석'에 누가 앉아 있는가? 대부분 '먼저 탄 사람'이 앉아 있곤 한다. 물론 여전히 노인이 승차를 하면 굳이 '노약자석'이 아니라도 젊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표정까지 아름답진 않다. 마지 못해 자리를 비켜주는 듯 벌레 씹은 표정을 애써 감춘 '무표정'을 지으려 노력하지만 말이다. 왜 '무표정'인가? 우리 사회발전을 위해 일찍이 공헌을 한 노인분들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 예절바른 행동을 몸소 실천했는데 말이다.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오히려 먼저 자리를 내어주지 못해 죄송스럽고 더 편한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치열한(?) 예절경쟁이 벌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경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노화'에 대한 인식이 이미 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젊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 싶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한 살'이라도 더 많게 나이를 속여 어른대접을 받고 싶어했는데 반해, 근래에는 '한 살'이라도 어리게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다 못해 '어려 보인다'는 말이 어느새 칭찬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30대는 40대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20대는 30대를 불쌍히 여긴다. 심지어 10대는 20대가 되길 '거부'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이 되기 싫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굉장히 복합적인 사회적 원인이 작용한 탓이 크겠지만, 여기서는 '노화'에 관한 원인만 따져보려 한다. 이 책의 제목이 <나이가 든다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는 다름 아닌 '긍정적인 연령 인식이 주는 굉장한 긍정 효과'다. 간단히 말해서, 노화(늙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만 바꿔도 '노인성 치매' 등과 같은 노년 질병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100세 시대 장수 비결'의 으뜸으로 꼽고 있다.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이를 잊고 살기'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나이를 잊을 정도로 활동적인 어르신들이 '무병 장수'를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팩트가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심지어 '알츠하이머 유발 인자'라고 불리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도 '연령 인식'을 나이가 들수록 지혜롭다, 경험이 많을수록 능력자다 등과 같이 긍정적으로 가지는 것만으로도 질병에 걸릴 확률을 현저히 낮출 수 있고, 질병에 걸리거나 다쳤을지라도 '회복'이 훨씬 빠르다는 근거를 글쓴이는 강조하면서 '긍정적 연령 인식'이 가져오는 건강한 삶을 주장했다.

 

  과연 '생각(인식)'만 바꾸는 것으로 그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동물원에서 쇼를 공연하는 두 마리의 물개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한 물개에겐 무조건 '긍정적 표현(칭찬)'만 하고, 다른 물개에겐 무조건 '부정적 표현(꾸중)'만 한다고 치자. 어느 물개가 공연에서 훌륭한 묘기를 펼칠 수 있을까? 당연히 '칭찬'만 들은 물개가 훨씬 잘 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개를 대신해서 '자녀'라고 대입을 해보면 어떨까? 더 길게 기간을 잡아 '청년'때까지 계속 칭찬과 꾸중만을 계속 대입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청년들이 늙어서 '노인'이 된 뒤에도 주위에선 끊임없이 '긍정과 부정의 표현'을 편향적으로 계속 이어나갔다면 두 노인 가운데 누가 더 장수할 가능성이 크겠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노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노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인식을 바꿔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거의 대부분 '무병장수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선 '노인' 한 명이 죽으면 온 부족원들이 크게 슬퍼한다고 한다. 까닭인 즉슨,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부족원들은 '문자기록'보다는 '구술기록'에 익숙한 탓에 매일 저녁마다 모닥불 앞에 모여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의 '경험담'을 모든 부족원들이 듣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60년 이상의 인생경험을 갖고 있는 부족원을 잃어 다시는 그 '경험담'을 들을 수 없다고 하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경로사상'을 다시금 불러 일으켜야만 할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대접'받고, 나이가 많을수록 '할일'이 더 많은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너무나도 많은 지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에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일 수도 있다. 자칭 '애국보수'라는 이름을 내걸고 성조기를 흔들고, '엄마부대'란 이름으로 일장기를 휘날리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미국과 일본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외치며, 수구꼴통과 사이비종교가, 거기에 삿된 무당들과 낡은 풍수가들까지 끌어들이는 못난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존경해 마지않을 노인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눈에 띈다면 주저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우리의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나이 먹고도 철없는 노인분들은 빼고 말이다.

 

  그리고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일랑 하덜 말자. 특히 '스트레스'를 가장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기 때문이고, 스트레스만 쌓였을 뿐인데도 우리 몸에 '염증수치'를 높여 나을 병도 낫지 않게 만든다고 한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스트레스' 받을 일이 점점 많아지겠지만, 그럼에도 스트레스 따위 훌훌 털어내버릴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하잔 말이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긍정적 연령 인식'이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이 주변에 계시다면 위로부터 건내기 전에 '칭찬'부터 시작해보자. 잘 생겼다, 참 예쁘다, 중후하다, 고우시다는 말도 아끼지 말고, '경험담'을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 있게 기꺼이 말벗이 되어주고 옛이야기도 부탁해보자. 그리고 노인이어도 '활동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운동과 여행, 그리고 취미생활도 즐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없다지만 이젠 달라져야만 한다. 아니 예전처럼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런데 늙으면 늙을수록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 구박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 아니 늙으면 아예 '제거'해버려야 속시원한 사회를 만들고도 두렵지 않은가 말이다. 걸핏하면 '100세 시대'라고 부르면서 어찌하여 점점 늙은이를 폄훼하는 시대를 살아가느냔 말이다. 그렇게 노인을 증오하며 80세 이상을 제거해버리면, 다음엔 70세 이상을 제거하려 들 것이고, 머지 않아 60세, 50세로 점점 각박해지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연령 인식'을 달리하게 되면 60세가 넘어서도 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는 노인이 될 것이라 이 책이 호언장담하고 있다. 70세가 넘어서도 젊은이 못지 않은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도 말한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하더라도 금세 회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여러 증거자료를 내놓으며 확신하고 있다. 심지어 '치매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발병하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연령 인식'만 갖고 있으면 말이다. 자, 지금 당장 '나이가 든다는 착각'은 떨쳐버리고 '나이'를 잊고 살길 바란다. 그럼 '무병장수'도 절로 따라온다고 한다. 어차피 '믿으면 본전' 아니겠는가.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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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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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지성클래식'도 다른 인문학책 못지 않게 애정하던 시리즈였는데, 개인적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어느덧 친근하게 리뷰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겨우 5권째 리뷰이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리뷰하고자 한다. 맘만 먹으면 '100리뷰 달성'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아직은 맘이 먹어지지 않는다.

 

  암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너무나도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이제야 겨우 휘뚜루마뚜루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이들이 왜 <월든>을 필독서로 꼽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움이고, 둘째는 문학적 감수성으로 써내려간 아름다움이고, 셋째는 올곧고 올바른 예의바름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로의 글을 읽으면 먼저 가슴이 뜨거워지고 생각이 냉철해지며 행동거지 하나라도 허투루하지 않겠다는 마음씨가 새록새록 샘솟게 만들곤 한다. 이런 책을 어찌 읽지 않을 수 있느냔 말이다. 미국 교육정책으로 소로의 <월든>을 으뜸 필독서로 삼은 까닭도 정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난 이 책의 소중한 까닭 가운데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공학도의 시선'으로 책을 읽어내려갔기 때문인 듯 싶은데, 소로의 해박하고 유쾌한 '비유적 표현'들이 공학도의 눈에서는 그저 '자연풍경'을 '글자'로 옮겨 놓은 것으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겨우 '뒤친이(역자)의 주석'을 읽고 나서야 깊은 사색과 시인의 마음으로 써낸 '감성적이고 중의적인 시적 표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기에 안타깝게도 난 <월든>의 아름다움을 반의 반의 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소로의 위대함은 '정의로움'과 '예의바름'을 통해서도 굉장하다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특히나 이 책의 말미에 함께 수록된 <시민불복종>의 내용은 한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깊이 매료되고 말았다. "정부는 기껏해야 시민 편의에 봉사하기 위한 조직일 뿐이다"라는 문구만 읽어도 가슴속에 뻥뚫린 듯 시원상쾌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기반한 소로는 불의한 미정부가 부과한 세금을 내지 않은 탓에 수배를 당했고, 그 때문에 '월든 숲'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살아갔던 것이다. 소로는 그곳에서 2년여 동안 지내면서 '시민불복종'을 몸소 실천했으며, 월든 숲과 호수가 제공하는 자연에서 적응하는 것을 넘어 '자연예찬'을 적극적으로 하는 신봉자가 되길 기꺼워하며 스스로 은둔생활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소로는 비록 깊은 숲속에서 홀로 지내지만 '문명인'의 모습을 내던지고 야성을 간직한 '야만인'으로 살아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가장 문명인답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경>과 <신화>를 벗삼고 중국과 인도 등 '동양사상의 경전'을 살펴보며 인간이 갖추어야 할 '지성'과 '도덕', 그리고 '생존'을 위해 농사와 사냥, 낚시 등을 직접 하면서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월든>을 남겼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6차례나 '수정'을 거듭하며 마치 '팔만대장경'을 한자한자 깎아내듯 정확하고 올곧게, 그리고 올바른 마음을 수양하면서 써내려갔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월든>을 써낸 소로는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정부정책'을 왈가왈부하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허나 옳지 못하고 부당한 '정부정책'을 향해 온몸으로 거부하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로 인해 수감이 되고 '자유'를 억압 당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덕분에 <월든>은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위대한 위인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단다. 지금도 불의한 정부정책에 바르고 따끔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월든>은 큰 힘이 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대한민국에도 꼭 필요한 책임에 틀림없다. 특히나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에게 꼭 읽혀야 하는 중요한 책일 것이다. 그리고 '달걀로 바위치기의 교훈'을 의미심장하게 되새길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분명 '잘 깨지는' 달걀 따위로 '단단하기' 이를데 없는 바위를 깨부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허나 던져진 달걀을 맞은 바위는 반드시 '더러워'진다. 시간이 지나면 더럽다 못해 '달걀 썩는 냄새'로 뒤덮여서 코를 틀어쥐고 막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달걀을 연이어 맞게 된 바위는 깨어지지는 않을지언정 더럽고 냄새가 지독해져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게 된다. 자, 이제 그 바위의 실체를 까발려보자. 단단하기 그지 없는 바위는 '권력자'를 뜻한다. 그런데 권력자가 부당한 짓을 일삼고도 잘못을 바로 잡지 않으려고 할 때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반드시 '달걀'을 던져야만 한다. 그렇게 던진 달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쏟아진다면 '더럽고 냄새나는 권력자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달걀을 던지는 것으로 그쳐선 절대 안 된다. 코를 틀어쥐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고약한 썩은내를 풍기는 '바위'는 반드시 치워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시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소로는 '멕시코 전쟁', '노예주 확장 문제' 등을 이유로 19세기말 미국 정부정책의 불의함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비록 현실에서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백인의 이득'을 위해 정부정책이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소로의 <월든>을 통해서 우리는 잘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바꾸지도 않고, 감추기에 급급했던 '불의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오늘날에는 두 번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되는 부당함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미국의 양심'이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물론 '불의한 정부'는 계속 나타날 것이다. 불의를 통해서 얻게 될 '달콤한 이익'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소로의 <월든> 덕분에, <시민불복종> 덕분에 아무리 달달한 이익이 눈앞에 있더라도 '불의한 짓'을 저지르면 언제고 '책임'을 져야만 하게 되고, 그 책임은 달달했던 이득보다 훨씬 더 무겁게 치뤄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나야만 한다.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불의한 정부와 부당한 정책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하고, 이를 제때에 막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은 우리 모두가, 아니 정확히는 '우리의 후손'이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면한 과제를 절대 외면해선 안 된다. 그 과제가 무엇인지는 잘 알 것이다. 당신은 '이미' 깨어있는 현명한 시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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