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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평점 :
영화 <위플래쉬>에서 독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명성만을 위해 제자들에게 기꺼이 '채찍질'을 하는 교수가 등장한다. 이 영화가 상영할 당시 미국에서는 '교육적 관점'에서 매우 부정적인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자신에게 자녀가 있다면 '저따위' 교수에게는 교육받지 않게 하겠다고 말이다. 특히 교수의 '언어구사'에도 지적이 많았는데, 인종차별적이고 인격모독적인 욕설이 난무하여 수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단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는 '호평일색'이었던 것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말로 '뒤쳐진 자막'으로 인해 교수의 '폭력적인 언어'들이 상당히 순화(?)된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나라 교육현실이 그런 '언어폭력'에 길들여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교수의 폭력적인 언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고, '재즈음악의 강렬한 비트'에 몸이 들썩이는 흥겨움에 보는 내내 즐거웠다는 평과 함께, '성공'을 위해선 저 정도(?) 강도의 수업은 달게 받아야만 한다는 '강압적인 교육의 정당성'을 들이대며 제자의 성공을 위한 교수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평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과연 그럴까? '위플래쉬'라는 뜻이 채찍질을 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도 '선생님이 되다'는 뜻으로 '교편을 잡는다'고 표현하는데, '교편'이 바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면서 사용하는 가느다란 막대기를 이른다고 한다. 한때는 수업을 시작하거나 수업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바로 이 교편으로 교탁을 탕탕 두들겼고, 학생들의 훈육을 위해서 아이들의 엉덩이와 종아리, 손바닥, 옆구리, 명치, 관자놀이 등등 학생들의 신체를 가릴 것 없이 때리고 찌르고 패는데 썼던 '선생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로 주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흉악한 무기를 들고서 잘 휘둘러야만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면서 학생들에게 으레 내려졌던 '체벌'을 없애는 방향으로 우리 교육이 변화했던 것이다. 요새 이런 '학생인권'과 '선생님의 교권'에 대한 논란이 충돌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데 깊은 공감을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심도 깊게 이야기를 하겠다.
암튼, 우리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모범생(한스 기벤라트)'와 '문제아(헤르만 하일너)'를 비교하며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기성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강변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한다. 우리 나라의 학생 대부분은 이 책을 읽으면서 '문제아'가 되면 퇴학조치를 당해 '성공의 지름길'을 갈 수 없으며, '모범생'으로 성실하게 학업에만 열심히 하는 학창시절을 잘 견디기만 하면 '인생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해석이 옳다면 '한스의 죽음'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어찌하여 '잘 나가던 모범생'이 친구의 죽음과 퇴학을 당하는 슬픈 경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끝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 시도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냔 말이다. 앞서 '모범생과 문제아의 관점'으로만 이 책을 읽게 되면 한스의 죽음은 고작 '불성실하고 의지박약한 모범생의 뻔한 귀결'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헤르만 헤세가 그런 메시지를 주제로 삼아 <수레바퀴 아래서>를 썼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분석될 만큼 '작가의 경험'이 잘 스며든 소설이다. 실제로 헤세도 학창시절 '두 번의 퇴학'을 당하고 '자살시도'도 했으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운 나날을 지내다가 어머님의 헌신과 친구들의 우정,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되면서 다시금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된 경험담이라고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목표를 상실하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공부만 강요당했던 학창시절이 끔찍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고백을 털어놓으며 <수레바퀴 아래서>를 쓰게 된 까닭도 밝혔다. 이런 '작가의 의도'를 투영하여 <수레바퀴 아래서>를 이해하게 되면 분명 '교육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한 소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기벤라트'에는 '충고(조언) 좀 해줘'라는 뜻이, '하일너'에는 '치유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면 한스와 하일너의 우정이 괜한 설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레바퀴'는 무엇을 의미할까? 왜 학생들은 그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일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있으면 한스 기벤라트의 주위 어른들이 모두 하나같이 '고지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스의 아버지는 공부성적이 뛰어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아들인 한스가 정작 무엇을 바라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 고루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저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훌륭히 성장해주기만을 바라는 욕망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막무가내일 뿐이었다. 또한, 학교 선생님들조차 한스를 '마을의 자랑'으로 여길 뿐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역시 '마을의 명성'을 빛낼 뛰어난 인재로서 한스를 대할 뿐, 한스의 방황과 실패 앞에서 그저 '방관자'로 일관할 뿐 '한스의 성적과 결과'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한편, 마을의 목사와 신학교의 교사들도 '미래에 걸출한 예비목사'로써만 한스를 대할 뿐, 그밖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행여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목사'가 아닌 다른 '존재'를 꿈꾼다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는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이렇게 '기성세대'가 만든 '기성사회'는 자신들의 성공(?)만이 유일한 정답인 것마냥 학생들에게 강요를 '되풀이'하는 반푼이였던 것이다. 수레바퀴는 바로 이런 '모자란 어른들'이 만든 맹목적인 사회를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이 고작해야 '수레바퀴 아래'에 학생들이 깔리지 않도록 '수레바퀴 위'로 끌어올려 '수레바퀴 안'에서 맴도는 삶을 가장 숭고한 업적으로 여기는 모지리들인 것이다.
이런 모자란 어른들이 만든 사회에 반기를 든 학생이 바로 '헤르만 하일너'다. 그는 과감히 '수레바퀴'에 탑승을 거부하고 '수레바퀴 바깥세상'을 꿈꾸며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후일담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스 기벤라트'는 수레바퀴에 탑승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님을 직감하긴 했지만, 하일너처럼 '극복'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우울에 빠지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사회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 청소년으로 보여진다. 우리 주변의 청소년을 살펴보자. 그들이 되바라지고 싸가지도 없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존재'라는 비난을 들이대기에 앞서, 그들이 스스로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제대로 형성하고 있으며, 그렇게 꿈꾼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지 살펴보잔 말이다. 그때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시기적절한 '충고(조언)'가 필요한 것이다. 꼰대처럼 들릴 소리지만 '라떼'도 좀 섞어가면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리고 '돈(경제력)'도 잘 벌 수 있는 인생상담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를 비롯한 모든 어른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인 셈이다. 그리고 반성해야 할 주제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에겐 '왕의 DNA'가 있으니 특급서비스(?)를 해줘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학부모이자 고위관직자가 되어선 안 된다. 또한, 선생님들도 사랑스런 제자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서 '모범생'과 '문제아'로 구분하는 어리석음은 저질러선 안 된다. 진상짓만 골라서 하는 학부모들의 민원과 그런 학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교장 이하 '윗선'에 의한 고충은 별개로 치고 진정 자신의 제자를 위해서 해줘야 할 '충고'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고, 아끼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일선 선생님들의 고충은 알고도 남는다. 비록 사교육 과외교사에 불과하지만 나도 논술쌤으로 '교육상담'을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진상부모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어처구니 없는 학생들의 무도한 헛짓거리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찬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이기에 가슴에서 삭히고 가슴으로 품어야만 할 때가 더 많았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