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리우바 가브리엘레 지음, 천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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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그림책'으로 엮어낸 책으로 소개하면 좋을 듯 싶다. 요즘엔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느 그래픽노블보다 훨씬 '색채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100여 쪽에 달하는 그림책으로 소개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책 읽는 부담은 한껏 낮추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을 읽어나갈 마중물로 삼기에 딱 적당한 느낌이었다. 사실 아직까지 그녀의 책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편집>으로는 몇몇 작품을 읽어보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소설을 차마 읽지는 못했다. 왜냐면 그녀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과 친해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때는 '조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쾌활한 성향을 내비치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한없이 침울해져서 주위의 사람들까지 '전염'시켜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랑꼴리한 여친과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 근데 그런 사랑을 내가 했다. 그것도 끝내는 짝사랑으로 말이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장'이 없던 그녀와 끝을 내는 것이 그렇게나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에서 '우울했던 그녀'를 발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다. 색감에서 느껴지기도 하고, '무표정'한 모습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생애가 그러했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책의 내용은 그녀가 '동성애' 상대였다는 '비타 색빌웨스트'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평생을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던 그녀도 '뜨거운 사랑'을 나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사람냄새'가 나기도 했을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만을 바라봤던 남편과 나눈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녀도 가슴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평범한 여자'였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뜨거웠는데 버지니아는 '버림'을 받았고, 끝내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안타깝다기보다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엉뚱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 왜냐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원래 그런 것 같기에 말이다. 허나 이런 엉뚱한 느낌은 내가 아직 그녀의 소설들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테다.

 

  이제 그녀의 소설속에서 그 까닭을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목적은 '버지니아 울프=우울=자살'이라는 등식을 깨버리기 위해서다. 한 여자의 생애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온통 차갑고 어둡게 만들기는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도 가슴 따뜻한 여인이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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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 열하일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박교영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박지원 원작 / 채우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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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은 오랑캐에게 굴복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쪽으로 북벌의 명분을 세워야 마땅하거늘, 엉뚱하게도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북벌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이른바 '사대주의'다. 허나 실상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마냥 큰 개 앞에서 물지도 못하고 앙앙 짖어대는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것이 더욱 치욕스럽다. 자존심도 없고 자립심도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이르렀는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명을 대신해서 강성해진 청에게 '사대'를 하더니, 열강의 강탈 앞에 청나라도 맥을 못추게 되니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이 패망하니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더니, 명실공히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에 아직도 '친일파'가 득세하고, '친미파'가 권세를 누리는 형국이니 말이다.

 

  애초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사대주의'를 표방한 것은 큰 나라를 '견재'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뿐인데, 지배층인 사대부가 큰 뜻을 품기는커녕 점점 나약해지다가 끝내는 '붕당'을 이루어 사단칠정 따위의 뜬구름만 잡기에 이르니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결국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앞서 말한 '자존심'도 버리고 '자립심'도 내다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멍멍 짖어대는 바로 그 '개나리'들이 말이다.

 

  이런 무능한 집권층을 한껏 비웃어주고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위대한 풍자가가 있었으니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시험 따위는 집어치우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기로 한다. 영조로부터 친히 칭찬을 들으며 과거를 보아 급제하라고 권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과거장에 들어선 그가 목격한 것은 벼슬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현장이었으며, 온갖 부정행위를 눈감아주는 난장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도 억지로 주위에서 떠미니 과거장에 다시 들어가긴 했으나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답안지에 수묵화를 그려내고 뛰쳐나와 버렸단다. 애써 벼슬자리에 오른다하더라도 썩은내 풀풀나는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북학'을 주장하는 까닭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로 손자병법에도 나온 '적을 이기기 위해선 필히 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말로는 치욕을 씻고 오랑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서, 청나라의 홍이포에 대적할 변변한 '기술력'조차 갖추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예병인 '팔기군'을 상대하려면 '기마부대'를 양성하고, '기마술'을 단련해야 할텐데, 그 기본이 될 '준마'를 기르기를 게을리해서 겨우 '조랑말'로 하루 반나절밖에 달리지 못하는 기병에, 소매는 넓고 바짓단은 치렁해서 혼자서는 절대 말을 몰지 못하는 양반네들이 대다수인데도, 입만 열만 '북벌'을 외치고, 명나라에 '보은'하자고 나불댄다. 다 부질없는 소리다. 청나라를 이기자면 청나라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옳은 방법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박지원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단에 꼽사리 낄 수 있게 되어 여행을 했다가 기록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보통은 황제가 북경에 머물고 있으니 대부분의 조선사신단이 다녀온 뒤에 쓴 기록은 <연행일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박지원이 사신을 갈 때에는 황제가 더위를 피해 '열하'로 피서를 갔기 때문에 조선사신단도 덩달아서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박지원은 다른 사신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오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다른 기록보다 더욱 많은 견문을 담을 수 있었다.

 

  허나 보고 들은 것이 더 많은 것보다 <열하일기>가 소중한 까닭은 연암의 문체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대부들이 쓰던 방식은 '고전체'라고 해서 옛 경전을 따라 쓰는 것을 최고로 쳤다. 허나 이런 글을 읽기에 너무 딱딱해서 금방 지루하고 따분해지는 경향이라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고루한 지식인들의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을 것이다. 허나 '연암체'는 달랐다. 억지로 점잖고 고상한 체하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듯 써냈으니 얼마나 읽기에도 시원시원하고, 엣 중국의 것을 빗대어 표현하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현재'를 [날것, 그대로] 가감없이 속시원히 써내렸고, 거기에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얼마나 신선했겠느냔 말이다. 이런 '연암체'로 쓰여진 <열하일기>는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너무 많은 인기탓에 '베껴쓰기'로 유통이 되니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문예부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암체는 곧 명맥이 끊기고 만다. 권좌의 불안함을 '반듯함'으로 자리보전하던 정조가 '문체반정'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문체반정이란 '패관문학' 같은 잡스런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고전체'만을 바른형식이라고 못박아 버린 것을 일컫는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두 번 다시 '연암체'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 않으면 벌을 내릴 것이고, 맹세를 한다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연암이 연암스럽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 '연암체'를 따라쓰지 못하니 제대로 부흥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문학'은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북학'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그라들게 된 것이다. 정조의 이른 죽음과 '세도정치의 폐단'이 조선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더니 끝내 근대화가 움트던 시기에 일제에게 더욱더 치욕스런 강제병탄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열하일기>는 다양한 관점으로 읽기를 거듭해야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조선 양반들의 무능함'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유쾌함 뿐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그속에 '조선의 미래'를 위해 꼭 해야만 할 것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도 매우 중요하다. '북학파'를 재조명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이용후생(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도구나 물건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쓴다), 실사구시(이론만이 아닌 실제 경험과 사실을 통해 진리를 탐구한다) 같은 당시의 구호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당시 조선 사대부의 무능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다면서 입으로만 나불대고, 실제로 검증하고 '팩트체크'를 하자고 하면 궤변을 늘어놓거나 '권위'를 앞세워 윽박지르기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일본 핵오염수'가 위험하다고 지적하면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미친소리만 늘어놓다가 '직접 떠다가' 마셔보라고 하면,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내보내는 폐수가 더 위험한대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다고 딴소리하고, 중국이 오래전부터 핵오염수를 방류해서 서해바다가 오염되었는데도 그동안 잘 먹어오지 않았느냐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만 있다. 오늘날에 연암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가 쓴 <호질>에는 북곽선생과 과부 동리자와 그의 어리석은 다섯 아들을 '누구'에 빗대어 썼을지 몹시 궁금하다. <허생전>에서 이완대장은 현재의 누가 제격일까? 그리고 <광문자전>과 <예덕선생전>은 어느 분에게 걸맞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누군가 그랬다. 시절이 어지러울 때 '남의 고전'에서 지혜를 얻으려 들지 말고, '우리 고전'에서 지혜를 찾으라고 말이다. 우리 현실에 딱맞는 열쇠는 우리의 선조들이 미리 만들어 두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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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무지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알랭 바디우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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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데 나 역시 '철학적 사유'가 쉽지는 않다. 허나 철학도 읽다보면 그닥 어렵지 않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철학 따위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철학자, 그들'이 쓰는 용어가 낯설기 때문이다. 일상용어와는 사뭇 다른 뜻을 지니고, 단어만 보아서는 그 뜻을 쉬이 짐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심리학'의 관점에서 과학적 연구를 거듭한 분야인 까닭에 정신분석적인 용어도 '철학용어'만큼 낯설고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을 포함한 [Umbr(a)](이하 '엄브라') 시리즈도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이 참여하였기에 꽤나 난해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독자들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고민하던 내용들이 촘촘히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리뷰도 그런 발견의 일부로 봐주면 좋겠다.

 

  대한민국은 때아닌 '검찰공화국'을 경험하고 있다. 바로 검사출신 대통령이 출현했기 때문인데 이런 '법조인 출신'이 정치를 하니 대한민국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일명 '눈 떠보니 후진국'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 셈이다. 분명 판검사 나으리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하고 어릴 적부터 수재소리를 듣던 '똑똑한 양반'임에 틀림없을 텐데, 어째 하는 일마다 '얼뜨기'처럼 엉망이고, 잘 하는 것이라곤 '저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재주 뿐이란 말이냐. 어느 방송인의 말마따나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에서 '검사출신'은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속내가 얼마나 시커먼지 이번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뼈저리게 느꼈을테니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은 제목에 있다. 책 내용의 '현란함'이 결국 '제목'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법의 무지'는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고, 동시에 '법은 오직 '사건의 경위'만을 따질 뿐, '개인의 사정'에는 눈을 감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법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우리는 '법이 공정하다'고 느끼게 된다. 개개인의 사정에 무지하고 오직 사안에만 집중해서 법을 어겼으면 벌을 주고, 법을 어겼다고 보기 어려우면 무죄를 선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법적 판결'이 이상하다고 느끼곤 한다. 분명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인이 지난한 법정다툼을 거쳐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아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쳐들고 부끄럼도 없이 당당한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반성의 기미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공공연하게 밝히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희화화한 <시카고>라는 뮤지컬을 관람하기도 하잖느냔 말이다. 반면에 우발적인 범죄를 저질렀을 뿐인데 너무나도 과한 형벌을 받는 억울한 이들도 많고, 자신보다 남을 위하고 사리사욕을 버리고 나라사랑을 더 많이 했을 뿐인데 부정한 정치인의 '표적수사'의 희생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법을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뜻밖에도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오히려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넘치도록 많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법의 판결'에 순순히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다. 법은 우리 모두가 합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따라야만 하고, 만약 법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폐기하거나 고쳐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도 '악법도 법이다'라면서 자신에게 언도된 부당한 판결에 당당히 맞서 독배를 마셨다. 이는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죽게 만든 법은 '악법'이 틀림없으니 마땅히 고쳐야 한다는 의미였고, 법을 악용해서 선량한 희생자를 만든 '장본인'들을 더욱더 부끄럽게 만드는 대철학자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는 법 자체의 문제점보다 '법을 다루는 사람'에게 문제가 더 많음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법의 무지'는 법에 관해서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버젓이 법을 악용하는 세력이 진짜 나쁜 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의외로 법에 무관심하며 '법적절차'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기 늘 속고 당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법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법에 대해서 잘 아는 국민 앞에서는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한들 '법조인 관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처럼 해결하기 쉽지 않은 까닭은 '법률용어'가 너무 난해하다는데 있다. 또한 '법적절차'가 대부분 오랜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반짝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 대다수가 생업으로 먹고 살기 바쁜데 언제 일일이 '법조항과 절차'를 속속들이 따져가며 지켜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법조인들의 사기행각'과 '국민들을 우롱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날 뿐이다. 과정을 감추고 결과만 통보하는 일이 계속 반복하니 몇몇 식견있는 국민들의 반발이 먹혀 들어가겠느냔 말이다.

 

  그럼 효과적인 대안은 없는 걸까? 대다수의 국민들이 '법에 관해 무지'하고, 법조인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과정은 쉬쉬하고 결과만 통보하는 꼼수 앞에 선량한 국민들은 그저 '눈 뜨고 코 베는 일'을 그저 당하고만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더구나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 입장에서 시시콜콜히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그럴 때 유일한 방법은 딱 하나다. 결과를 통보할 때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명명백백한 시비를 가리도록 '요구'하는 일이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재차', '삼차', '사차'...온국민들이 이해할 때까지 '해명'하도록 요구하는 일이다. 그 결과에 만족하는 국민들이 과반이 넘을 때까지 국가는 의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고 확답을 받아내야 한다. 그럼 적어도 '꼼수'는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비열한 '정적 죽이기'로 멀쩡한 법을 악용하는 일도 근절될 것이다.

 

  그럼에도 애매한 일은 여전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사례를 들고 있는 '안티고네의 비극'처럼 말이다. 국법을 따르자니 천륜을 어기게 되고, 인간답게 행동하려니 조국을 배신하게 되는 일 앞에 우리는 '어떤 선택이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 책의 '정신분석적인 내용들'은 대부분 이렇게 애매모호한 사항에 대한 '가치관 논쟁'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논쟁의 결은 죄다 '철학적 사유'로 도배했다. 그러니 일반독자들은 철학논쟁에서 살짝 비켜나서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예시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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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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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논란이 되는 점부터 말해보련다. 닐이라는 학생이 자살을 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한창 꽃피울 고등학생 청년이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한밤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닐은 웰튼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학업성적도 우수했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여러 동아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범생으로 미국의 명문대인 하버드 의대에 입학할 것으로 점쳐질 정도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웰튼고에 존 키팅이라는 국어선생이 새로 부임하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조직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고, 부모님 몰래 연극 오디션을 보고 연극무대의 초연을 펼친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를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꾸중을 들었던 그날밤에 자살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이미 보았기에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 정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닐의 죽음'은 강압적인 아버지의 교육관이 문제의 발단이었고, '지옥고(Hellton)'라고 불리는 '웰튼고'의 엄격한 교육시스템이 한 몫 단단히 한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존 키팅'이라는 한 줄기 희망이 등장했던 것이다. 딱딱하기만 한 수업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깨닫음'을 추구하는 키팅의 교육관이 '성적지상주의'로 일관하는 웰튼고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조직이 생겨나면서 일부 학생들이 키팅의 교육관을 몸소 실행에 옮기게 되었고, 그 조직원 가운데 리더였던 닐은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최대 걸림돌이었던 '아버지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닐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욕망이란 하나 뿐인 자식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끔 전폭적인 뒷바라지는 마다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뒷바라지가 닐에겐 '끔찍할 정도의 억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닐의 의견이나 생각 따위는 듣지도 않은채 아버지가 이미 정해놓은 '닐의 미래(성공)'를 강제적으로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닐은 이런 아버지의 강압에 늘 불만이었지만 '자식의 성공이 보장된 삶'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 앞에서 한마디 의견도 내놓지 못한채 그저 묵묵히 따르고만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직 어린 학생에 불과하니 어른들이 말하는 '성공비결'에 반박할 다른 의견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닐 자신도 훗날 의대를 졸업한 뒤에 '역대 연봉'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는 삶이 싫지 않았기에 그저 부모님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 정작 닐 자신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것이 '성공지름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일'이라 말하는 부모님의 말씀과 명문고 임직원의 조언 때문에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을 억누르며 공부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이런 차에 '키팅 선생님'이 웰튼고에 부임했다. 키팅도 웰튼고 졸업생이었으며 명문대인 옥스포드 수석장학생으로 명예로운 졸업한 뒤에 다시 모교에 부임했던 것이다. 그래서 웰튼고교의 교장선생도 키팅 선생님에 대해 기대가 컸다. 워낙 '전통'과 '명예', '규율', '최고'를 추구하는 학교였으니 그런 쪽으로 스팩이 빵빵한 키팅 선생님이 모교에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명문고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팅의 생각은 달랐다. 오직 명문대 진학율만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전통'이라 내세우며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즐거움' 대신 지옥과 같은 '입시교육'만을 강요하는 웰튼의 교육방식과는 정반대의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키팅은 첫 수업에서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라는 라틴어 격언을 수업했다.

 

  '오늘을 즐겨라', '현재에 충실하라'라는 뜻을 가진 '카르페 디엠'에는 사실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다. 이어서 말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뿐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고 오늘을 즐기라는 뜻이다. 이 두 문장을 줄이면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수업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뜻과는 달리 학업만을 강요하던 학교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맹목적인 공부만 하던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나중에 후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어떤 삶'을 살든 후회할 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닐이 무사히(?) 하버드 의대를 마치고 '억대 연봉의 의사선생'이 되어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남이 시키는대로'만 하다가 어른이 되었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 닐의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의대에 진학했으나 더는 적성에도 맞지 않고 '학업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중도포기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 어른이 되었다면, 학창시절에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분노만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닐이 학업에 충실하면서도 '하고팠던' 연극무대에 마음껏 올랐더라면 무사히 의사선생이 된 뒤에도 그때를 추억하며 행복했을 것이고, 반대로 나락으로 떨어진 삶으로 전락했을지라도 행복했던 추억 때문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한 삶(카르페 디엠)'은 중요한 것이다. 아직 미성숙한 학생의 '선택'일지라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닐을 죽음으로 내몰고 키팅선생을 사건의 주동자(?)로 떠넘겨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교장과 닐의 아버지는 나쁘기만 할까? 닐이 불쌍하니 닐의 아빠는 나쁘고, 키팅 선생이 훌륭하니 교장의 낡은 신념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닐의 아빠도 웰튼고의 교장도 나쁘지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문고-명문대-상류사회'라는 성공의 지름길을 설계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간은 '욕망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보장된 성공시스템'을 만들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적극적인 '관리'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회제공', '적극관리'를 전통이랍시고 모든 학생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밀어붙인 점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일망정 수많은 학생들을 '아이비리그'라는 명문대학에 비중있게 진학시킨 '검증된 방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하면, 많은 독자들이 키팅선생님을 존경어린 시선으로 추종함에 따라 '웰튼고'와 같은 맹목적인 교육시스템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허나 인간은 욕망덩어리이고 '웰튼고'가 많은 이들에게 성공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면 '비난'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비판을 하고 시정을 요구한들 '키팅의 제자들'이 대성공을 거두어 사회의 지배구조를 싹 바꾸어놓지 않은 이상 욕망덩어리들을 배출하는 '웰튼고'와 같은 시스템은 꾸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어느 한 쪽이 무한하게 나쁘다는 비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적확한 비판의식을 키워 교육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웰튼의 장단점'과 '키팅의 장단점'이 서로 공정하게 경쟁하며 학생들의 본연에 맞게 각자의 꿈을 성장발전시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형성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우리의 교육시스템도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말았다. 허구헌 날 '대입제도'만 바꿔온 터라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판 도박을 걸게 만들었고, 이런 문제점을 바꿔보겠다고 '외국의 시스템'을 아무런 성찰없이 '우리의 현실'에 끼워맞추는 통에 정작 '우리 교육'은 설곳을 잃고 휘청거릴 뿐이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백년대계'라면서 흔들리지 않는 교육정책을 추진하겠다고 곧잘 말한다. 허나 대한민국 입시정책은 해마다 바뀌었다. 윤석열의 '킬링문항 삭제' 지침은 희대의 촌극이었고 말이다. 변별력을 무색하게 만들면 학생들의 실력검증은 무엇으로 하란 말인가? 만일 '킬러문항'이 정말 문제였다면, '대입시험'을 없애고 무시험제도로 입학허가를 한 뒤에 대학자체적으로 무한경쟁을 시키는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 또한 문제점이 많은 방식이지만 말이다.

 

  한편, 우리에겐 여전히 '키팅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우리 학생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학생의 희망찬 미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불철주야 교육에 매진하는, 그런 선생님들 말이다. 그리고 제발 그런 선생님들이 소신껏 교육을 펼칠 수 있도록 '갑질하는 학부모들'은 좀 꺼져줬으면 좋겠다. 선생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냔 말이다. 몰지각한 학부모들 밑에서 커온 어린 학생들이 선생을 우습게 만드는 현실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그렇다. 제발 우리 선생님들이 '검은 리본'을 거둘 수 있도록 관심을 모았으면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꼭 멋진 선생님이 되시길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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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또 당선작으로 선정해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역시나 알라딘은 열심히 리뷰하면 보답을 받는군요.

이래서 알라딘알라딘 하는가 봅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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