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히어로즈 1 : 보스턴 차 사건 - 세계사 판타지 그래픽 노블 히스토리 히어로즈 1
정명섭 지음, 최활 그림, 김봉중 감수 / 아울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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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어린이책을 고르는 기준은 언제나 '이해'하기 쉽고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 어느 장르를 고르던 이 두 가지만 명심하면 후회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독자인 어린이들이 책을 딱 한 번만 읽지 않기 때문이다. 다 읽은 뒤에 또 한 번 읽고 다시 꺼내 읽는 '어린이들의 독서 취향'을 고려할 때 반드시 고려해보아야 할 점이다. 여기에 또 하나 고려하면 좋은 기준은 바로 '유익함'이다. 물론 자신들이 읽을 책을 스스로 골라 읽는다면 정말 훌륭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풍부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럼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겐 '어떻게' 책을 골라주어야 하는가? 그건 바로 '부모님'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요즘 '어린이책'을 가장 많이 읽는 연령대가 바로 30대, 40대 학부모들이다. 부모들이 먼저 읽고 '좋은책'을 선택해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등 청소년책을 골라주기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초등 어린이책이라면 '전문가가 아니어도' 충분히 골라줄 수 있다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번 [아울북]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히스토리 히어로즈> 시리즈는 '세계사'이 중요성을 잘 아는 초등 학부모들에게 아주 좋은 책일 것이다. 초등 역사에서는 무엇보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위인)'을 중점으로 풀어나가야 어린이들이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바다를 마주하고도 겁먹지 않고,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장장 반만 년의 시간을 다루며, 그 유구한 시간을 '역사사료'라는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유추하고 추론해야 한다. 마치 고깔을 얼굴에 쓰고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거대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큼 막막한 공부인 것이다. 그렇기에 차근차근히 살펴보고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나가지 않으면 절대로 역사를 다잡을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나 어려운 공부가 '역사'인데도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가르치는 까닭은 그만큼 중요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내일'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조차 하지 않으면 다가올 미래도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올바른 역사를 배우고 잘한 점은 되살리고 바르지 못한 역사도 배워서 잘못한 점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게 노력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또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 것이다. 또한 역사공부는 '자긍심'을 배우는 학문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의 빛나는 업적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아낌없이 노력하는 위인들의 삶을 엿보면서 꿈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히스토리 히어로즈>의 내용을 살펴보자. 책속의 배경은 2125년 미래이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지구가 황폐해지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머지 않은 미래에 자원이 고갈되고 강대국들이 '남은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다 결국은 지구를 파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만 것이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을 벌인 어리석은 지구인과는 달리 평화를 사랑하고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에코시티'를 만들어 그 안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인 '알파센타우리'로 이주 계획을 세우고 착착 진행중에 있다. 더는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힘든 환경속에서 '인류의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한마디로 '역사'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에 타임머신을 이용해서 '과거의 기록'을 직접 눈으로 보고 되살리는 '히스토리 히어로즈'가 활약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작업을 하는 일원 중에 삐딱선을 타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타임X'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역사기록을 복원하는 일에 실증을 내고 '역사를 제멋대로 바꾸려는 음모'를 꿈꾸게 된다. 이런 악당이 등장한다면 당연히 악당을 저지할 영웅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타임X'는 그런 것도 이미 예상이나 한 것처럼 타임머신을 폭파시켜 버리고 만다. 그런데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조잡한(?) 타임머신이 남아 있었다. 그 타임머신이 '선택'한 히어로즈(영웅들)는 다름 아닌 두 명의 어린이였다. 이제 인류의 역사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지 전에 '타임X'의 음모를 막을 사람은 두 어린이의 활약에 달린 것이다. 자, 과연 '히스토리 히어로즈'는 인류의 역사를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첫번째 이야기는 '보스턴 차 사건'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과도한 영국의 세금정책에 불만을 터뜨리며 '독립운동'을 시발점 역할을 했던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에 사건을 주도한 인물들은 '자유의 아들들'이란 비밀조직을 이끌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라 불리는 존 핸콕과 새뮤얼 아담스, 그리고 16살 어린 나이에 '보스턴 차 사건'에서 인디언으로 분장을 하고 참여한 조슈아 와이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보스턴 차 사건'이 중요한 까닭은 "대표가 없으면 세금도 없다"는 자유를 위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곳곳에서 벌인 전쟁으로 인해 돈이 궁해지고 말았는데, 이를 '세금'으로 충당하려 했던 것이다. 허나 영국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경우, 가뜩이나 무리한 전쟁을 벌여 고달픈데 과세까지 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사람들에게 '세금'을 매기는 정책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미국사람들도 처음에는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이었던 탓에 '영국이 매긴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세금과 '생활 필수품'에까지 마구잡이로 세금을 부과하게 되자 점점 불만이 쌓였던 것이다. 더구나 과세정책을 결정한 '영국의회'에는 미국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도 없었기에 불만은 더욱더 커져만 갔던 것이다. 영국도 처음에는 미국사람들의 불만을 인정하고 '세금부과'를 없던 일로 되돌리기도 했지만, 영국정부는 돈이 궁해지면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부당한 역할을 도맡아 했던 회사가 바로 '동인도회사'였고, 마침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 있던 '홍차'를 싣고 있던 배에 몰래 잠입해서 차를 바다에 던지는 일을 벌였던 것이다. 이 사건이 촉발이 되어 영국은 미국에 엄청난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고, 미국은 '민병대(미니트맨)'를 조직해서 저항해 나갔다. 드디어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자유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 '내 몫의 자유'를 침해하려 들면 자연스레 부당함을 느끼게 되고, 억압하려 들면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자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권리' 중 으뜸인 것이다. 미국사람들에게 '자유'는 영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미국의 주요 수입원이 '해상무역'이던 시절에 막강한 영국해군은 미국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상선'을 보호해주는 아주 고마운 존재였다. 그런데 그걸 빌미로 영국은 사사건건 '미국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해주며 '대가'를 바라게 되자, 더는 '영국의 보호'가 필요없다고 선언을 한 셈이다. 더 솔직하게는 '영국의 간섭' 따위는 필요없다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이런 미국사람들의 당연한 권리행사에 '실력행사(군사시위)'로 대답을 하니, 드디어 미국사람들도 자유를 위한 저항으로 대답을 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를 위한 저항'은 인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자유를 위해서 사람들이 벌였던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역사공부를 하는 것도 꽤나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역사공부는 결코 '달달 외우는 지식'에서 머물면 안 된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얻은 지식'의 의의를 깊이 헤아려 '살아있는 지식'으로 만들고, 그 생생한 지식을 '내것'으로 만들 때 비로소 올바른 역사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히스토리 히어로즈> 시리즈로 역사공부를 쉽고 재미나게 즐겨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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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 - 패권전쟁으로 이해하는 역사의 흐름
썬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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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냉전시대'를 이끈 두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난 원인도 바로 이 두 나라 때문이었던걸 감안하면,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단순히 '이분법적인 논리'대로 미국은 착한 우리 편, 소련(현 러시아)은 나쁜 북한 편이라고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다. 이래서는 복잡하고 첨예한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기 힘들다. 특히나 우리 나라는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외교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외교력은 형편 없는 지경이다. 우리 외교의 기본 방침은 '자국이익'이어야만 하는데,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미국진영'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거의 '의탁'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균형'을 잃어버리고 강대국들의 '대리전'을 치루는 전쟁터로 전락할 가능성만 높여줄 뿐이다.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었다. 그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목소리'에 무게감을 높이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누구도 허투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에게 '이로운 목소리'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의 지혜에서 그 목소리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은 '미국과 소련'이 탄생하기까지 그 배경을 중심으로 풀어나갔다. 먼저 미국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북미대륙에 정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북미대륙의 원주민'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을 것인데, 이민자들은 그런 관계를 '대량학살'로 싹 정리해버리고 만다. 그런 와중에 '독립혁명의 바람'이 불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탈피하고 드디어 '미국(아메리카합중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서 미국은 정책적으로 '영토확장'을 우선적으로 삼는다. 이른바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프랑스 나폴레옹으로부터 거대한 루이지애나를 사들이고,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강제로 빼앗고, 멕시코와 스페인과도 전쟁을 서슴지 않고 벌여서 '미국의 영토'로 넓혀 나갔다.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인 것은 화룡점정이었다. 그 뒤로도 미국의 확장정책은 멈추지 않는다. 태평양을 넘어 동아시아 대륙까지 영토확장의 꿈을 펼쳐나갔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덕분에 급부상하게 되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무적을 자랑하던 나폴레옹의 원정군을 보기 좋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는 물리칠 수 있었지만 '프랑스의 혁명정신'은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정신은 러시아를 강타한 '굶주림'과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굶주림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그 원인을 적확하게 분석했다는 '마르크시즘'이 러시아에 휘몰아치게 되었다. 그래서 러시아 민중들은 '황제'를 몰아내고 혁명을 이끌던 '레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러시아는 사라지고 '소비에트연방'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러시아혁명의 과정'은 굉장히 복잡하게 진행된다. 굶주림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제정러시아의 탄압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볼세비키혁명 또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리고 난 뒤에야 겨우 '소련'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두 나라가 '강대국'이 되어 냉전을 이끌게 된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바로 '균형과 견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천하통일이나 일당 독재는 모든 '권력자의 꿈'이겠지만, 하나로 뭉치면 반드시 쪼개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차피 '분열'이 숙명이라면 서로 균형점을 찾아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것이 '국제관계'를 현명하게 끌어가는 최선일 것이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명실공히 최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으로서는 자신과 힘을 겨룰 '파트너'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절대악'이 필요했을지언정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련이 붕괴된 직후에 '새로운 파트너'로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오늘날의 G2 경쟁은 과거의 '냉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21세기에 '낡은 이데올로기'가 다시금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 등장하면서 우리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우리와 상관이 없는 건 좀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와 따로 떨어져서 벌어지는 '사건'은 없다. 특히 근현대 한국사에서 벌어진 사건 가운데 미국과 소련(구 러시아, 현 러시아 포함)이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일제가 우리를 식민통치하게 된 것도 제국주의시절 전세계를 '땅따먹기'하던 서구열강들 때문이다. 그들이 암묵적으로 일제의 조선침략을 눈감아줬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나갈 여력을 짓밟고 저들의 이익만을 추구한 덕분에 우리는 '해방이후'에도 오래도록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전범국'인 일제가 패망하면서 우리는 온전한 독립을 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패전국인 일본을 '대신'해서 분단이라는 형벌을 받아야 했고, 냉전 갈등의 분출구로 전락해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전쟁'을 치뤄야했다. 그 대가로 '분단 70년'이 지난 지금도 좀처럼 해결법을 찾지 못하고 '핵전쟁의 위협'까지 치닫고 말았다. 이런 우리의 현실이 모두 일본, 미국, 러시아, 그리고 중국의 '자국이기주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냉엄한 국제관계속에서 '자국이기주의'는 무엇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옮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일본의 이익을 챙겨줄 것이며 미국의 노예로 살 것이냔 말이다. 우리의 첫번째 이익은 '통일'에 있다. 단순히 북한과의 통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는 만주의 조선족과 연해주의 동포, 그리고 '고려인'이라고 차별받는 모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한민족대통합'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의 화교와 이스라엘의 유대인 들이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저들은 세계 곳곳에서 살면서도 '조국의 부름'에 언제든 '응'하는 무한이기주의를 표방한다. 우리는 왜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끼리' 분열하고 싸워야만 하는가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뭉쳐야 하는 이유를 내세워야 할 때다.

 

  두번째 이익은 '중립'에 있다. 괜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는 없단 얘기다. 미국과 중국이 싸운다면 우리는 '어느 편'도 들지 말고 두 나라에 꼭 필요한 나라가 되어 양쪽을 이용해먹을 수 있어야 한다. '한쪽 편'을 드는 순간 균형은 깨지고 강대국의 속국이 되어 '강한 상대의 먹잇감'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편이라 믿었던 강대국 또한 우리를 자신들의 '총알받이, 그 잡채'로 이용해먹을 것이 뻔한 이치 아니냔 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란 것도 결국엔 '저들의 전쟁'을 대신 치루는 전장터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강해져야만 한다. 강대국의 힘을 빌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오직 독자적인 힘으로 얻은 '중립'이어야만 한다.

 

  마지막 이익은 '활용'에 있다. 현실적으로 통일과 중립은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없는 궁극적인 목표다. 그 전단계로써 강대국들을 충분히 활용해서 우리의 이익을 챙겨야만 한다. 한마디로 '뽕'을 뽑으란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면 저들이 우리의 이익을 함부로 빼앗아갈 수 없도록 치밀한 계획을 짜야한다. 여차하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도 있다는 카드도 만지작거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시작전권'도 하루 빨리 회수해야 한다. 그래야 '미국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을 위해 외교력을 충실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특히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그동안에는 우리보다 기술이 앞선 나라들을 '눈가린 경주마'처럼 무작정 따라하기만해도 충분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우리의 기술을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는 '세계대회'에서 1등을 따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우리 스스로 '세계대회'를 개최하고, 우리만의 '기준'으로 세계시장을 포맷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한류열풍'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전세계가 '한국표준(코리아스텐다드)'에 맞추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절실함을 심어주어야 한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춰야' 대흥행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기준에 '따라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부심을 내비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이익을 추구하는 최선의 활용은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닌 '개최'에 방범을 찍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세계사 완전 정복>이라서 몇 자 찌끄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전세계가 '한류'에 미치듯이 새로운 '한국표준'을 내세우면 이 또한 미친듯이 따라올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의 1020세대들이 반드시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푸른 꿈을 활짝 펼칠 수 있도록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저들이 고민하는 '내집마련 걱정', '사교육비 부담' 등과 같은 어려움을 완벽히 해결해줘야 한다. 늙은이들의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시시각각 급변하는 '시사'와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하는 '역사'에 관심을 모아야 할 때다. 역사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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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5 -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의 대격변 시대 벌거벗은 세계사 5
최호정 그림, 김우람 글, 조한욱.김대보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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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을 집중조명 해본다. 이 두 인물이 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말이 있는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드세요"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이다. 사실 두 말은 모두 '가짜'에 가깝다. 다시 말해 두 인물이 직접적으로 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들이 전해지는 것일까? 그건 바로 '군중'이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했는지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자연스런 흐름이 두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편, 프랑스 혁명은 기존의 계급사회(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혁명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혁명정신으로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라는 세 가지를 내세우며 국가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질서체계인 '공화제'에 대한 민중의 열의를 잘 드러내주었다. 그 과도기적인 혁명 와중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나갔으며, '나폴레옹'은 제3신분(평민)으로 왕이 사라진 혼란한 정국의 안정시키는 영웅으로 등장했다가 황제의 자리에서 몰락하고 만다. 그런 까닭에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어린이책'이다.

 

  그렇다면 어린이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달달 암기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또한 '미래 예측'을 위해서 과거를 분석하는 것도 어린이들에게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어린이들이 '역사적 사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딱 두 가지다. 바로 '역사적 사실'이 지닌 의미를 알고, '역사적 인물'의 삶을 통해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인류의 발자취를 통해 인간이 저지른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게 되면 어른들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이치를 깨닫게 되고, 그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명한 인물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삶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고, 어떤 삶이 가치가 있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 역사책은 '사건'과 '인물'을 적절히 조율하면서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떻게 조명하면 좋을 것인가? 역사에서 다루는 '여성'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가 '남성중심'적이라는 그릇된 편견으로 오래도록 써왔다는 비판으로 시작해서,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여성'에 관한 올바른 시선까지 자세하게 풀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성편향적인 관점'은 또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게 되므로 지양해야 하며, 늘 '양성평등적인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을 가르지 않는 똑같은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 프랑스 사회가 얼마나 '잘못된 시선'으로 평가를 받았는지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속에서도 단지 '여성',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편,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지, 아니면 탐욕스런 권력욕만 가득한 잔혹한 독재자인지 조명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런 정치국면을 빠르게 안정시킨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리더)였으며, 외국의 침공을 무수히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총제, 집정관,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장기간 차지하면서 저지른 끔찍한 학살과 반대파를 향한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자행한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한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일부분'만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너무 극단적인 '두 가지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나폴레옹 같은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준점'을 정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였고, 이를 내세워 주변국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던 점에서 평가를 내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혁명군의 수장이 되어 주변국의 민중을 해방시키는 목적을 내세워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영웅조차 '권력의 맛'을 본 뒤의 행동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만행들이었다. 황제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가짜뉴스'를 퍼뜨려 민중의 인기를 끌어모으는데만 신경 쓴 탓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숙청해버리는 모습이나, 프랑스가 식민통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고, 자신의 군대를 앞세워 다른 나라의 왕위를 빼앗아놓고도 저항을 하면 어김없이 탄압하고 목숨을 빼앗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신나간 독재자가 분명하다. 이런 독재자에게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나폴레옹은 애초부터 '혁명정신의 수호자'라기보다는 그저 '신분상승'에 눈 멀어 오직 '권력욕'만을 탐한 독재자였다는 평가가 정당할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 인물을 집중조명할 때에는 '명백한 기준'을 정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단지 부자가 되어 풍요롭고 안락한 생을 꿈꾸는 것이 아닌 '진짜 인생'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역사의 수많은 전쟁영웅들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시대를 겪었기에 나타났을 뿐이다. 그런 혼란스런 시대에도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모두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선택한 인물들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런 영웅들은 평화로운 시대에서도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살아갔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그런 영웅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역사'를 잘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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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7 : 망촉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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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유비에게 머물고 다스릴 영지가 마련되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세상을 만들 터전이 생긴 것이다. 바로 '형주'다. 조조의 100만 대군에 맞서 유비와 손권은 손을 잡고 '불의'에 맞선 다음에 유비가 갖게 된 영지인 셈인데, 실상을 좀 들여다보면, '적벽대전'은 결국 '조조 vs 손권'의 싸움이었는데, 싸움의 패자인 조조는 수많은 군대와 강남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잃은데 반해, 싸움의 승자인 손권은 조조의 세력을 '강북(장강 이북)'으로 내몰았을 뿐,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되었다. 옛 유표의 영지였던 '형주땅(양양, 강릉, 강하 등등)'은 유비가 홀랑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적벽의 승리'는 손권, 혼자만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유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지만, 손권으로서는 큰 승리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되었으니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유비가 애써 얻은 '형주땅'은 온전히 자신의 땅이 아닌 손권에게서 '빌려 왔다'는 형태로 끝을 맺게 된다. 훗날 유비가 '촉땅(익주)'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유비와 손권이 서로 불화를 겪게 될 빌미가 된 사연이다. 암튼, 유비는 '형주'를 발판 삼아 제갈량이 구상했다고 전해지는 '천하삼분지계'를 실현시키려 한다. 비로소 '위촉오, 삼국의 시대'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하지만 '천하삼분지계'는 좋은 구상은 아니었다. 앞으로 유비가 얻게 될 '촉땅'은 조조가 차지한 중원땅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고, 험한 지세로 가로막혀 있어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기 힘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좋은 땅'은 이미 조조와 손권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유비가 뒤늦게 발판을 마련한 것도 너무 늦은 감이 든다. 그런 까닭에 유비에게 '형주땅'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외진 촉땅'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비록 촉의 북쪽에 있는 '한중땅'이 있기는 했지만, 그쪽도 결국엔 '조조의 세력'이 선점을 해버린 까닭에 유비는 애써 얻은 촉땅이건만 뻗어 나갈 수 있는 '문'이 꼭 닫혀진 셈이다. 나중 일이긴 하지만, 유비와 조조가 죽은 뒤에는 더욱더 꽉 막힌 형세가 유지되고, 촉과 동오의 관계가 험악해진 까닭에 '제갈량의 출사표'는 유명무실해질 뿐이었다. 그 까닭은 바로 '인재의 부족'에 원인이 있다. 애써 땅을 얻었지만 그 땅을 다스리고 지켜낼 '사람'이 부족해진 촉은 너무나도 불리한 형세에 놓이게 된 셈이다. 그런 까닭에 '천하삼분'이란 이름은 그저 이름에 그쳐 버리고 '한나라'는 멸망의 절차를 밟게 될 뿐이다. 그리고 뒤이어 펼쳐진 '위진남북조', '5호16국' 시대는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였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적벽대전'을 거쳐 '유비의 혼인', '마등의 죽음', 그리고 '유비의 입촉'까지 펼쳐진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이는 '어린 봉황(봉추)'이라 불리는 '방통'이다.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도착했을 때 사마휘가 "와룡과 봉추 중 하나라도 얻게 된다면 천하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유비의 입촉 과정중에 방통은 '낙봉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람이 태부족한 유비의 세력에겐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던 셈이다. 방통이 온전히 살아서 유비의 입촉을 도왔다면, 촉땅엔 제갈량이, 형주엔 방통이 머물면서 온전히 지켜냄은 물론이고, 훗날 유비가 중원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화수분'처럼 쏟아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정을 취하고서 북쪽의 '한중땅'을 넘어 중원의 서쪽과 남쪽에서 조조 세력을 공략했으면 빵빵한 물자를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위엄도 충분히 뿜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도 '유비가 오래 살았다'는 가정하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면 유비가 겪는 인재부족은 그의 아들인 '아두의 모지람'이 최정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의 성품을 반의 반만이라도 갖췄다면 좋았을 것을 애초의 그릇이 작은 탓에 제갈량조차 십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방통의 이른 죽음'으로 벌어진 일이니, 그의 죽음이 더욱더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더욱 어이 없던 죽음은 바로 '주유와 마등의 죽음'이다. 주유는 제갈량과 더불어 적벽의 대승리를 거두는 일등공신이었건만, 속이 너무 좁은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의 재능보다 더한 제갈량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한 덕분에 제 명을 다 살지도 못하고 죽은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인 것을 어찌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능력'을 질투하고,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죽는단 말인가. 만년 2인자로 살아야만 했던 '폭풍저그 홍진호'도 자신의 능력을 '스타크래프트'라는 한계에 가두지 않고 프로게이머를 넘어 다양한 재능을 펼치며 '화려한 재기'를 보여주고 있건만, 어찌하여 주유는 오직 제갈량이라는 산을 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속좁게 운명을 한줌의 재로 불사르고 말았느냔 말이다. 오나라에 주유보다 못한 인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인물도 제각기 능력을 발휘하며 오래오래 살았건만, 주유는 그러지 못했으니 속좁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등은 서량땅에서 힘을 길러 '헌제의 밀지'를 받아 역적 조조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을 얻었는데도 조조가 펼쳐놓은 '그물망'을 피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마초'는 아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한순간이나마 조조를 궁지로 내모는 역량을 발휘했으나, 지혜가 부족한 탓에 '조조의 모사꾼들'에게 휘둘리다가 마등과 의형제를 맺은 한수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스스로 몰락하고 만다. 훗날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복수를 하려 들지만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만다.

 

  어찌 이야기를 풀어내다보니 어느덧 <삼국지>도 종반을 향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은 하나둘 떠나보낼 시간이 된 것이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본격적인 '위촉오, 삼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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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국가 전체를 뒤집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 이를 태면, 혹시라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집단'이 생긴다면, 국가는 그 '집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국가 전복위험성'이 짙은 사안들을 거르고 골라서 국가의 평화와 국민들의 안녕을 해친다는 죄를 물어 단죄하는 것은 정당한걸까? 만약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런 집단을 색출해내기 위해 반항적인 국민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애초에 막기 위해 철저한 '감시사회'를 만드는 것도 용인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온국민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모조리 CCTV로 '지켜보고' 도청장치로 '엿듣는' 단 말이다. 사생활이 보호받아야 마땅한 '장소'까지 빠짐없이 말이다. 조지 오웰은 그런 '감시사회'를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려냈다. 소설 <1984>가 바로 그렇다.

 

  이 책이 오웰의 유고작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겠지만, 책이 출간된 해가 1949년이라는 사실도 꽤 중요해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시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 진영'이 서로 대립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영국사람'인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당연히 '공산주의(사회주의)'일 것으로 보이지만, 소설속의 배경은 의외로 '영국'이었다. 분명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자본주의 진영'이었음에도 오웰은 '영국'을 감시사회의 최정점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웰은 전후복구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영국 사회의 혼란'과 '무능력함'을 비꼬기 위해서 이런 소설을 구상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도 의아함은 여전히 남는다. 소설속의 '절대권력'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는 '공산주의'를 딱히 옹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 '군국주의'를 아우르는 '전체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소설 속에서 '런던'은 [오세아니아]에 속했고, [오세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던 상대는 [유라시아]였다. 하지만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오세아니아]는 상대를 바꾸어 [동아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그러다 막판이 되면 [유라시아]와 다시 전쟁을 벌이는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전세계가 '세 개의 대륙'으로 쪼개지거나 누구와 누구가 싸우는 것도 왜 싸우는지도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벌이는 전쟁은 단순히 저마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소모전'일 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쟁을 통해 국민들을 불안감에 빠뜨리고 위기감을 조성하고서 '집권당'에 비판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온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은 서로를 향해 큰 피해를 주지도 않으면서 전투를 치루며 그저 '끊임없는 소모'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불안요소를 만들어 '권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이 전하는 전황 소식은 꽤나 심각하게 전해진다. 그래야 국민들이 적절한 불안감에 빠져 '빈곤한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심각한 불평등을 조장해도 국민들이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1984>에서는 국민들이 '무식'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방치할 뿐이다. 왜냐면 그것이 '장기집권'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권력을 차지한 '내부당'의 일인자는 '무지는 힘', '자유는 속박', '전쟁은 평화' 따위 같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을 국민 모두가 믿도록 강요한다. 한마디로 '우매한 군중'으로 만들어 지배하기 쉬운 '사회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당의 최우선 목표인 셈이다. 행여나 이런 부조리한 국가지배구조가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잘못을 수정하려 '내부당'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들어진다면, 그런 세력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사상경찰'과 '군인' 들을 풀어서 잡아들이고 감옥 같은 곳에 가둬두고 모진 고문과 세뇌 과정을 거쳐 저항을 하지 못하게 '원천봉쇄'를 하고 있다.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상범'이나 '저항군'을 잡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공개처형'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거나 '우상'으로 만드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거나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통해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끔찍하게 처형함으로써 권력의 지속을 꾀했으나, 끝내는 실패를 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내부당의 독재'에 반기를 드는 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를 잡아다 가두어두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당한 권력'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부정'하게끔 만드는 집요한 고문을 시작한다. 허나 결코 고문중에 사망에 이르는 일은 없도록 철저히 조심한단다. 그렇게 죽고 만다면 그것조차 '당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란다. 오직 그들이 모진 고문을 통해 '죽을만큼' 괴로운 고통을 끊임없이 받으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고문을 이어갈 뿐이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당에 충성하겠다는 '거짓자백'은 소용이 없다. 단지 고통을 못이겨 억지로 한 '거짓'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죽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의식'에서라도 저항하길 포기하고 철저히 당에 충성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당이 원하는 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단계, 이를 테면, 2+2=5가 맞다고 당이 원하면, '그것'이 곧 진리라고 순응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겨우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풀려난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당을 배신한 자에겐 '총살'이 곧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단지 '언제' 총살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때고 당이 '원하는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넣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세아니아]의 사형방법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원스턴 스미스'는 그렇게 철젛나 '감시사회' 속에서 당이 하는 일에 '의문'을 품고 은밀히 접근한 '저항세력'의 손을 잡고, 아내가 아닌 줄리아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이들을 감시하던 '내부당'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발각이 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고 모진 고문을 받다 겨우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 못이겨 '스스로 저항'하길 포기하고 얻어낸 '자유의 삶'인 까닭에 윈스턴은 행복할 리가 없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모두를 '배신'해야만 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사랑했던 '줄리아'가 그 고통을 대신해야 마땅하다는 자백을 꺼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했던 마지막 '인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난 뒤에야 당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윈스턴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윈스턴은 '이미'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독재자의 말로는 끝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독재자의 승리'를 결말로 장식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권력을 위해서라면 온국민을 '감시'하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권력'에 반하는 세력은 끔찍한 방법으로 분쇄시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국에는 '독재자의 권력'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사회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런 끔찍한 사회가 영원토록 존속하게끔 '결말'을 지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1984>년에 말이다.

 

  물론, 지금은 1984년을 훌쩍 지난 시점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도 '전두환'이란 독재자를 맞아 이도저도 못하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꽤나 관심 받던 소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1987>을 맞아 민주화의 물꼬를 틔우게 되었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은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1984>에선 부당한 권력이 집권한 채로 결말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평론가는 이를 두고 비전문소설가인 조지 오웰의 '한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허나 아무리 비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뛰어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이 마땅한 '사회비판'도 없는 소설을 써냈으라곤 쉬이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암울한 미래'를 그려서라도 결단코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의도'가 깔렸던 것은 아닐까? 부당한 독재권력이 영원토록 집권하기 위한 '유일한 꼼수'가 바로 '폭력'이니, 독재자가 들 '몽둥이'만 제거하면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는 없다는 명백한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이다.

 

  부당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지독한 악취'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공작'을 벌이고, 무고한 이들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워 자신들의 악취를 감춰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상대의 잘못'을 지적해 똑같이 '더러운 짓'을 했으니 쌤쌤이다..라는 전략을 곧잘 쓰곤 하는데...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대국민쇼'에 속아넘어가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긴 하겠으나, 결코 속지 않는 '똑똑한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똑똑한 국민들은 부당한 권력자를 온전히 놔두질 않았다. 4·19혁명, 5·18민주화혁명, 6월혁명,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정당한 저항의 물결'은 멈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또다시 부당한 세력이 득세하는 시절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가만히 지켜만 볼 국민들이 아니다. 비록 <1984>에선 저항에 실패한 주인공의 나약한 모습이 연출되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의 <1984>는 '미완성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결말을 도려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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