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2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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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을 할수록 이야기는 더욱 방대하고 흥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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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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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MX / 문학세계사 4번째 리뷰]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1)을 내놓은 이후에 아멜리 노통브는 '히트제조기'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내놓는 소설마다 상을 휩쓸었고, 평단의 호평과 함께 독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었다. '천재 작가'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아주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독특한 소설들을 쏟아냈다. '다작 작가'답게 매년 그녀의 소설이 출간될 정도였으니, 2025년인 지금까지 단순 계산을 해봐도 35권 이상의 소설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만큼의 수를 헤아릴 정도로 많은 소설을 읽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소설이 더는 흥미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처음 <살인자의 건강법>(우리 나라에서는 2004년에 첫 출간)을 접하고서 5권 정도의 소설을 더 읽었는데,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더는 새로운 면모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2010년이 되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들을 다시 읽고 있다. <아담도 이브도 없는> 이 책은 지금 처음 읽었다. 그녀의 첫사랑에 관한 장편소설이란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멜리 노통브의 첫사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대는 한 살 어린 일본남성이었고, 90년도 당시엔 '대학생'이었단다. 그래도 재벌 못지 않은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콘크리트 성(城)'에 부모와 조부모도 함께 살고 있었으며, 흰색 벤츠를 승용차를 직접 몰고 다닐 정도로 부티나게 사는 남자였다. 물론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는 건실한 청년이기도 했다. 그리고 외국여자의 마음을 훔칠 정도로 젠틀한 매너남이었고, 무엇보다 화를 내지 않는 상냥한 성품과 귀여움까지 탑재한 멋진 남성이었다. 이런 남성과 찐한 연애를 하고 청혼(?)까지 받았지만, 노통브는 결혼식도 치루지 않고 고국인 벨기에로 냅다(?) 도망친 뒤에, 그녀의 첫 소설인 <살인자의 건강법>을 내놓고 '인기작가'로 등극하였다. 이게 이 책의 결론이다. 물론 그 앞의 줄거리에는 그녀가 그 남자(이름은 '린리'다)와 사랑(愛)에 빠질 수는 없었고, 연인(戀) 사이까지는 될 수 있었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늘어놓았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사랑하는 사이끼리도 '알러뷰(愛, Love)'라고 하는 표현 대신 '코이비토(戀, 사모하다)'라고 하는 '연인관계'라는 표현을 즐기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둘러대지만, 정작 노통브 그녀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서양인(벨기에 국적)'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왜 일본인이라도 된 듯이 변명을 늘어놓는가?

사실, 노통브는 태어난 곳이 '일본'이었단다. 그리고 다섯 살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외교관 출신'이었던 탓에 노통브는 어린 시절을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국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인 유모가 그녀를 돌봐준 탓에 '일본풍습'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후지산'에 대한 애정도 꽤나 남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일본인 흉내'를 곧잘 내다가, 자기에게 불리할 때에는 어엿한 '서양인(이 책에서는 '자라투스트라 혈통'을 꽤나 강조한다)이라면서 상황을 모면하려 든다.

린리와의 연애담도 그렇다. 분명 '좋아하는 감정'이 분명하다. 그런데 '심각한 사이'가 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둘러댄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처음엔 나이가 어려서, 연애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일본의 풍습이 낯설어서, 중반을 넘어서자 일본남성의 단점이 보였기 때문이고, 종반에는 사랑의 감정은 있지만 결혼까지는 아직 결심이 서지 않는다는 핑계를 둘러대다가, 잠결에 실수로 린리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뒷감당을 할 수 없자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로 날아가버린다. 끝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관계'를 매정하게 끊어버릴 정도로 매몰찬 여자라는 얘기는 듣기 싫으니, 그냥 사라지는 편이 더 낫다는 식으로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나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다들 이런 식인가? 여자들은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는가? 싫으면 싫다든가, 실수라면 실수였다고 말이라도 해줘야지. 이것 저것 '불편한 상황'을 연출할 수 없으니 냅다 도망쳐 놓고서는 천연덕스런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래놓고서 자신의 첫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이 초대박을 치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출간한 기념으로 '6년만의 귀향(?)'이란 소감을 발표하듯 '린리와의 뜨거운(?) 재회'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써놓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린리,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네가 보내준 '청첩장'을 받고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널 뜨겁게 사랑하고 있어. 우린 아직도 '연인'사이가 맞는거지?'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것도 그거지만, 아멜리 노통브는 이 책 <아담과 이브도 없는>에서 동양에 대한 '비하 발언'이 정말 수위를 넘어섰다고 본다. 자신이 태어난 땅에 대한 애찬은 늘어놓으면서 '일본의 문화'는 서양에 비해서 한참 수준이 낮다고 애둘러 표현하고, 정작 자신의 '일본어 수준'은 형편 없으면서 일본인들의 '프랑스 발음'이나 '영어 발음'은 정말 형편없다고 깎아내리고, 정작 일본남성과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일본인 폄하'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경제, 전통문화 등등에는 아낌없는 칭찬을 퍼붓는다. 그렇지만 자신이 취직한 '일본 기업문화'는 지독하다는, 자신은 '서양여자'인데 왜 '일본인'처럼 일을 부려먹으려 드느냐는 식의 투정(?)을 있는대로 부리곤 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이 일본에서 호평일색이었다고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는 팬레터도 상당수 받았다면서 말이다. 대놓고 비하를 하고 있구만, 서양인이 쓴 소설에 '일본'을 소개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는 것인가? 하긴 일본인들은 오페라 <나비부인>에도 열광한다고 하니 말 다한 셈이다. 서양 남자에게 버림받아 자결을 한 일본여성의 비극적 사랑이야기인데, 왜 분노를 하지 않는가? 그건 그렇고 이 책이 한국에서 '호평'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는 할까? 소설의 전반부에 '일본인 린리'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낸 남성운전자가 있는데, 린리가 그 남성의 화를 받아내고도 참은 이유가 '한국인(칸코쿠진)이라서'라고 설명한다. 이걸 노통브는 '이해했다'는 식으로 린리가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무턱대고 화를 낸 남성이 참으로 무례(!)하다는 식으로 찌끄렸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 눈쌀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냔 말이다.

이걸 두고서 '뒤친이(역자)'는 노통브가 이 소설에 '패러디'를 잔뜩 담아놓아서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장면이 수두룩하다는 해설을 늘어놓았다. 특히 노통브가 '언어학 전공'을 했기 때문에 '언어유희'와 더불어서 수많은 '패러디 장면'을 담아둔 명저라는 소개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한국독자는 '뒤쳐진 한국어'로 읽고 있는데, 프랑스어와 일본어 사이의 미묘한 표현차이에서 벌어지는 '언어유희'를 어떻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이런 이유로 노통브는 '표현적 실수(이중부정문)'로 린리가 보낸 청혼의 메시지에 승낙하는 대답을 하고서도 이를 끝내 정정하지 않고 훌쩍 사라져버리는 '도망자'가 되고 만다. 이걸 '언어유희와 패러디가 낳은 유쾌한 사랑의 도피'라고 이해해야 할까? 설령 '뒤친이의 느낌'은 그렇더라도 '독자의 느낌'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굳이 노통브의 실수(?)가 아니라면 '뒤친이의 실패'가 확실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책도 두 번 다시 읽을 리 없는 책으로 결론을 내렸다. 노통브의 사랑이야기는 더더욱 사양하련다. 그녀의 소설 가운데 그나마 볼만한 내용은 '살인' 뿐이니 말이다. 그냥 예쁘게 죽여주면 봐줄만 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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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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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MIX / 민음사 23번째 리뷰] 며칠째, 오십견이 도져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욱씬거리는 팔을 붙들고 지쳐쓰려져 잠이 들었다. 간만에 리뷰를 쓰려니 감이 잘 오지 않는데, 그래도 쓸 건 써야겠다. 밀려오는 고통과 번뇌에서 해방하고자 오랜만에 헤세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싯다르타>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의 평온이 찾아온다. 그리고 위대한 지혜의 눈이 새롭게 뜨이곤 한다. 그러면서 내 안에 깃들었던 한톨의 나쁜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무엇이 찾아오곤 한다. 나이 오십줄에 '지천명'이라고 소감을 밝힌 공자의 혜안에 새삼 존경을 표하는 바다. 어릴 적엔 당췌 뭔 소리인지 감을 잡지 못했던 <싯다르타>였는데, 역시 연륜이 쌓이고 나니 저절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럼 고타마 싯다르타가 열반의 경지에 오르게 된 이야기를 풀어보련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실존인물 '석가모니의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소한 이야기에 반감이 들 정도였다.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붓다의 일화들을 헤세의 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불리는 '동명이인'의 생애를 다룬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허구의 세계'에서 '필연적인 사실'만을 추구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주제'를 탐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깨달음 주제는 두 친구 '고타마'와 '고빈다'가 도(道, 깨달음)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각설하고, 두 친구는 대성현 싯다르타를 만나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받고 감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자의 길'을 걸었지만, 고타마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한 가지 의문'을 품고 다시 '사문(탁발승)의 길'을 걸으려 친구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둘은 똑같은 '구도의 길',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지만 서로 추구하는 방향은 달랐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해골물 사건'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신라시대 의상과 원효는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으나 한밤중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겨우 찾은 동굴속에서 지친 몸을 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목마름을 느끼고 마침맞게 물이 담긴 바가지를 찾아들고 둘은 시원하게 해갈을 하고 잠이 들었는데, 동이 터서 해가 떠오르자 주변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고, 둘은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된다. 먼저 동굴인 줄 알았던 곳은 사실 '허물어진 무덤속'이었고, 간밤에 마신 시원한 물은 사실 '사람의 해골이 썩어서 부패한 뇌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의상과 원효 두 스님은 토악질을 하면서 뱃속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 와중에 원효는 번뜩이는 깨달음 얻게 된다. 분명 완전한 어둠속에 있을 때엔 무덤속일지라도 '편안한 잠자리'를 잘 수 있었고, 해골이 썩은물조차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마신 것으로 알고 갈증을 깔끔하게 해소했으며 배가 뒤틀리는 고통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날이 밝아 '사실'을 깨닫자 편안함과 시원함은 온데 간데 찾을 수 없이 불편함과 뒤틀림이란 '고통'만이 찾아왔던 것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나?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광명 속에 놓인 것의 차이점밖에 없다. 간밤에 마신 물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완연하게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원효,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원효는 '득도'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諍)사상'을 주장하며 불교의 대중화를 꾀한다. 당시 불교는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에 일반백성들은 가까이하기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처에게 갖다 바칠 헌물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사찰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고, 글자도 깨치지 못한 일반 민중들은 불경을 읽을 수도 없고,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니,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원효는 그런 것이 다 무슨 쓸모가 있느냐면서 부처에게 갖다 바칠 재산이 없으면 '마음'을 바치면 되고, 어려운 불경 따위 읽지 않아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부처님께 귀의하고 보살님을 바라봅니다)'만 외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평생을 '불교대중화'에 뜻을 두고 몸소 실천을 하니, 많은 이들이 큰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라하여 '원효대사'라 높여 불렀다.

한편, 유학길을 멈출 수 없었던 의상은 그 길로 서해바다를 건너 당나라에서 '화엄사상'을 배워서 돌아온다. 그가 집필한 <화염경>은 우리 나라 불교경전 가운데 최고로 친다. 당시 불교는 수많은 종파 간의 다툼으로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에 '화엄사상'으로 갈라진 종파를 한데 엮어 사상적 통합을 꾀한 이가 바로 '의상대사의 업적'이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통합을 이룬 한국의 불교는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천태종, 교종)'과 '보조국사 지눌(조계종, 선종)'으로 갈라져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렇게 원효와 의상은 갈라진 종파를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면, 의천과 지눌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방법을 구체화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즉, 교종은 '경전연구'를 중심으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교리를 연마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선종은 깨달음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깨우치는 것이니 교리에 충실하기보다는 몸소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면서 '돈오점수'니, '정혜쌍수' 같은 말을 들어서 익히 알 것이다.

다시 말해, 고타마는 우리의 원효나 지눌의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고빈다는 의상과 의천의 방법으로 진리를 깨치려 했던 셈이다. 방법의 차이일 뿐,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의 순수함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싯다르타>의 결말에서는 고빈다가 고타마에게 진심이 담긴 큰절을 하면서 끝을 맺지만, 이를 두고 고타마는 '싯다르타'가 되고, 고빈다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그 순간 둘은 모두 '싯다르타'가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존경받는 '위치'에 올라섰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제삼자가 볼 때 고타마는 빤쓰 한 장 걸치고 강가에서 배를 모는 '뱃사람'에 불과했고, 고빈다는 찬란한 법복을 몸에 두른 고승이었기 때문에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섰는지는 자명하게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화려한 법복을 입은 승려가 빤쓰 한 장 달랑 입고 헐벗은 뱃사공에게 절을 올리는 까닭은 고타마의 깨달음이 '열반'에 들 정도로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고타마도 스스로 '싯다르타의 경지'에 오른 것을 깨닫게 된다. 고빈다가 몸을 숙이지 않았다면 제삼자의 눈에는 그저 빤쓰 한 장 달랑 입는 뱃사공에 불과했을테니 말이다.

사실, 교종이나 선종이나 어느 것이 더 나은 방식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깨달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일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은 얻기 힘드니 '방식의 차이'에만 몰두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경건하고 엄숙한 종교의 모습에 반해서 '그쪽의 길'이 옳다고 믿거나, 겉보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깨끗한 것이 중요하다며 거지꼴을 마다 않고 '수행의 길'로 빠져드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구교와 신교로 갈라져 죽을 때까지 싸우길 멈추지 않는 어리석음도 만만치 않다. 구교(가톨릭)의 신(神)이나 신교(프로테스탄트)의 신이 다르지 않고 하나뿐인 '유일신'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의 종교(그리스도교)'와 '이스마엘의 종교(이슬람교)'가 다르지 않고, '야훼와 예수, 그리고 알라'가 이름만 다를 뿐, 우리가 믿는 '오직 한 분'인 것을 부정할 사람도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현자가 '달'을 가리키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달은 보지 않고 '현자의 손가락'만 쳐다본다고 한다. '싯다르타'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을 터득하고도 '열반(해탈의 경지)'에 들기보다 '속세의 쾌락'에 빠져 또 다른 고통을 스스로 맛보려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곤 한다. 책속에서도 고타마는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려고 애쓰고, '부자로 성공하는 길'을 개척하며, 인생의 온갖 '쾌락'을 맛보며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허나 고타마는 그런 쾌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앎'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앎'에서 또 다른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자신은 크게 깨달았으니 세상의 온갖 고통이 닥친다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타마는 거대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깨달음을 정진하는 삶을 살아갔지만, '자식이 받는 고통'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주기만 하는 '일방적인 사랑'에 불과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자식의 선택'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절대 '온전한 사랑'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을 놔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식이 제갈길을 가게 두면, 다시 말해, '독립'을 하게 되면,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파온다.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 다시 자식을 품에 안고, 곁에 가까이 두려하면 결국 자식을 망칠 수 있기에 아파도 모른 척 하려고 노력하지만, 애초에 부모 마음은 그럴 수 없다. 이때 고타마는 불현듯 자신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자기 자신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문의 길'로 뛰어들었던 과거를 말이다. 거대한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떠난 '고타마'처럼 고타마도 아버지의 처지가 되어 자식의 떠남으로 인해 그 상처와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그 아픔을 참지 못해 '윤회'를 거스르지 못하고, 또 다시 자식에게 '윤회의 고통'을 심어줄 참인가? 그게 아니라면 과감히 아픔을 이겨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어내고, 자식에게 고통을 되물림하는 일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비록 고타마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식에겐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넘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온갖 '쾌락과 고통'을 몸소 겪고 난 뒤에야 고타마는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고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친구였던 고빈다의 '과정'과는 사뭇 다르게 말이다. 근데 그게 중요한가? 과정의 다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좋다는 식이어서도 안 될 일이지만, 결국 '깨달음'을 깨우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딱 맞는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은 누구라도 얻을 수 있다. 마음의 평온을 얻는 일인데 높으신 양반들만 얻으라는 법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속세를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도 결국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열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고통을 면하게 되는 깨달음도 참은 아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자식들'은 그 넉넉함과 풍요로움으로 인해 '또 다른 고통'에 신음하며 패가망신하는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득도의 길은 어렵지도, 그렇다고 쉽지도 않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부끄러워하고, 실수를 하면 반성할 줄 알고, 실력이 부족해서 남을 피곤하게 하고 남에게 일을 떠넘기면 자기 스스로 '무책임'한 것을 깨우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쉬우면서도 참 어려운 게 바로 '인생'이다. 적어도 그걸 깨달았다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살아있는 싯다르타(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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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5 : 자본주의의 역습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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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MVIII / 돌핀북 5번째 리뷰] 이 책 참 재밌다. 아마 누가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를 할 때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기적의 공부법'이 완성되는 것처럼 '경제적 관점'으로 모든 학문을 읽으면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먹고 사는 문제(흔히 '먹사니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흘러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런 와중에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풀어놓은 부분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는 부유해지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딱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잉여생산물'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부자는 유일했다.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만이 찐 부자였던 것이다. 단순히 '잉여생산물'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오래도록 부를 소유하고 있을 수 없었다. 흔히 '탈무드 격언'이라고 소개되는 말로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 물고기를 주는 방법으로도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또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또다시' 물고기를 구걸해야만 할 것이다. 반면에 물고기 잡는 방법을 터득하면 배가 고플 때마다 스스로 배를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잉여생산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한 부를 쌓았다고 할 수 없다. 언젠간 다 소모해버릴 것이고, 운이 나쁘면 한 순간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허나 '생산수단'을 갖고 있으면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생산'해서 만들어 쓰거나 팔거나 어쨌든 '마르지 않는 샘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전근대 시대'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는 '권력자'뿐이었다. 정치적 우두머리거나 종교적 수장이 되어야 안정적으로 생산수단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시대'가 되면서 권력의 향방은 종교가 무너지고 이성이 빛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로 인해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에게 '생산수단'을 차지할 권리와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자본주의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 자본주의를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하였다. '초기 자본주의'(애덤 스미스), '후기 자본주의'(케인스), '신자유주의'(하이에크, 시카고학파)로 말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가장 처음 등장한 자본주의로 '정부의 개입이 없고, 세금도 거의 없는 상태'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에는 자유가 필요하다'면서 자유롭게 방치한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시장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결국엔 안정을 찾아간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간섭이 없어야 시장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해서, 규제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규제 없는 과열 경쟁은 곧 '공급 과잉'을 불렀고, 결국 '경제대공황'으로 시장은 낭패를 보게 되었다.

이런 문제점을 수정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후기 자본주의(수정 자본주의)'다.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며, 땅속 깊은 곳에 돈을 묻어두면 그 돈을 찾으려 모든 사람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될 것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이른바 '뉴딜 정책'이 그런 것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세금'으로 공공사업을 벌이고, 그렇게 벌인 공공사업으로 실업자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소득'이 생긴 노동자가 소비를 활성화하고,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였기에, 정부는 '세금'을 걷어들이고, 다시 그 세금으로 '복지정책'을 펼쳐서 국민들을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부를 재분배하면서 자본의 독점을 막자, 그 부작용으로 경기 침체, 장기 불황,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말았다.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을 보장하지 않고서 강한 규제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로 인한 시장 불균형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침해하자 손해를 크게 본 자본가들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지 않아 '경기 침체'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서 '장기 불황'까지 이어지자 '물가 상승'을 동반한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나빠진 경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강조된 것이 바로 '자유로운 시장'이었다. 다시 '초기 자본주의 시기'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오늘날 '주류 경제체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경기가 활성화된 것은 좋았는데, 돈이 없는 '중소기업'보다는 돈이 많은 '대기업'에게 더욱 유리해지게 되었고, 대기업보다 더 유리해지고 이득을 많이 본 것은 '다국적기업'이었다. 왜냐면 정부의 규제를 철폐하다시피 했고, 세금도 현저히 낮췄기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이들은 '돈 많은 자본가들'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돈 없는 노동자들은 '세금이 낮아진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왜냐면 이들은 애초에 낼 세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더욱더 올리기 위해서 '임금인상'은 해주지 않으면서, 수익손실이 날 때 잽싸게 손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인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리는 꼼수를 썼다. 그동안에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노동자 해고'를 함부로 하지 못했지만, 비정규직은 그런 규제에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는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는 더욱 빈자가 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점점 더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과연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일까? 과거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이론이 대안을 제시하곤 했는데, 과연 '신자유주의'의 문제점도 해결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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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 2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MVII / 열린책들 20번째 리뷰] 노통브의 책들을 '관통'하고 있다. 원래는 '독파'하려고 했으나, 지금 그녀의 책들을 2~3권씩 동시다발적으로 읽어재끼고 있는데, 내가 그녀의 책들을 10여 년 전에 읽다가 그만 두었는지 이제 막 기억이 떠올랐기에 '관통'하려고 든 것이다. 긴 말 할 것도 없이 노통브의 책들은 '흥미, 그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이 그 당시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주 자극적인 소재들로 어그로를 잔뜩 끌어모은 뒤에 살인, 강간, 정신병 같은 것들로도 모자라서 온갖 '그로테스크(기괴한, 괴상망측한)'한 것들만 잔뜩 늘어놓고 나서야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짖궂은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물론 노통브의 소설들이 '읽을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면 그녀의 소설엔 '기발함'도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을 끌어내는데 천재적인 솜씨를 지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전공분야인 '언어학'적으로는 천재가 맞고 말이다. 그러나 절대 친절하지는 않다. 그 천재적인 솜씨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조곤조곤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걸 굳이 살인자 캐릭터나 끔찍한 범죄자의 말과 행동에다가 교묘하게 숨겨두고 독자들로 하여금 직접 찾게 만들곤 한다. 그렇다고 굉장한 '추리소설'을 쓴 것도 아니어서 읽는데 '몰입감' 따위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녀의 주특기는 '말장난(언어유희)'이 전부인 탓에 추리를 하기 위한 '단서'에 대한 암시나 복선 따위를 대놓고 제시해 놓았기에 그녀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대개 '뒷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예측까지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결론이 뻔한 이야기어도 '읽을 가치'가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로테스크함으로 치덕치덕 잔뜩 발라놓은 탓에 '두 번'은 읽고 싶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도 10여 년 전에 '읽다가 만 책'이라는 것을 중간쯤 읽고 나서야 기억에 떠올랐다. 그래서 미리 말하지만 별로 강추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취향이 독특하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라면 도전할 만도 하겠지만 말이다.

<시간의 옷>의 기발함은 '폼페이가 사라진 날'이 서기 79년이 아니라 서기 2579년이라고 주장하는 26세기 서방국 집권자 중 한 사람이자, 자칭 '미남'이라고 불리는 셀시우스(맞다! 우리가 온도 단위로 부르는 '섭씨'의 원래 이름이다)가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를 한 '아멜리 노통브(맞다! 작가 본인이다)'가 1995년에서 '타임슬립(?)'을 해서 26세기 어느 날, 어떤 방에서 마주친 미남(?)과의 대화록이다. 여기에 그로테스크함은 그녀가 수술대 위에 올랐다가 깨어보니 26세기인 2580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책을 다 덮고 나면 <시간의 옷>이란 소설은 다 뻥이란 소리다. 그런데도 온갖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대담이 오고 간다. 한마디로 궤변의 장광설만이 전부란 소리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하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녀의 '입담'만큼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마주하고서 오직 '입씨름'만으로 무사귀환(?)할 수 있었다. 논리정연함이 단 1도 없는데, 그녀는 논리정연하게 '셀시우스'라는 자칭 '천재적 미남(?)'과의 논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실질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기에,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생환'을 한 셈이고, 죽음으로 내몰고 간 저승사자와의 논쟁에서 이겨냄으로써 저승사자의 버림(?)을 받고 다시 살아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수술대 위에서 마취되었다가 마취가 풀려서 깨어난 것에 불과한데도 그녀는 그동안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 생생한 기억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독자라면 이렇게 읽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오컬트적이고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든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셀시우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시록>의 예언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 말들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지력을 발휘할 대목이라도 있는 듯이 탐욕스럽게 주워담기를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미래 시대의 비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게 또 별것 아니다. 90년대 쓰여진 소설이라서, '세기말'에 예측한 약 600년 뒤의 미래 모습이 전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경험했던가. 경제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위기'를 겪었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최악의 '기후재앙'을 맞고 있으며, 대체에너지는커녕 '화석연료'를 끊지 못해서 지구는 불과 100년 뒤에는 회생불능의 지구환경을 맞이할 것으로 과학자들이 전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핵전쟁'으로 인해서 지구가 작살이 나고서야 온 인류가 반성을 하고 '완전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 겨우겨우 어둠을 밝히는 정도로 살고 있다고? 그러는 자칭 미남씨는 '화산폭발'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정도로 에너지를 펑펑 쓰면서 말이다. 뭐, 어느 정도 앞뒤 맥락이 맞는 뻥을 쳐야 '읽을 맛'이라도 날 것이 아닌가?

결론만 말하자면, 노통브의 책 가운데 이 책은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현재는 '절판' 상태다. 그래도 노통브의 책들은 이번 기회에 전작을 완독할 예정이다. 아직 십여 권 정도...많이 남았다. 천재 소설가의 민낯은 궁금하지 않지만, 그녀의 유명세,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적어도 내 취향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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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4-22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노통브의 책을
읽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어느 순간, 끊어 버렸구요.
이 리뷰로 갈음해도 될 것 같습니다.

異之我_또다른나 2025-04-22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통브에 대한 평가들이 다들 대동단결하네요.
그 옛날에는 왜들 그렇게 환호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