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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3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8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My Review MCMXLVI / 열린책들 14번째 리뷰] <천일야화>의 중요 화자는 셰에라자드다. 그녀는 샤리아 왕이 왕비를 간택하고 '첫날밤'이 지나면 처형을 하는 국법을 알고도 샤리아 왕의 아내가 되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무려 천하룻밤 동안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바로 매일밤 동트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 동생인 '디나르자드'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셰에라자드가 여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지만 '같은 침실'에 머물고 있었기에 샤리아 왕도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해가 뜨면 '국왕의 명령'대로 처형을 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샤리아 왕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해서 처형을 미루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니 어느덧 백여날 밤이 지났다. 샤리아 왕은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자신의 명령'대로 셰에라자드를 처형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은 것 같을 정도다.
하지만 샤리아 왕이 단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서 세에라자드의 처형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만큼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은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어디 '이야기'만 그럴까. 이야기의 서사를 갖고 있는 모든 매체가 '동일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단 1편의 웹툰'만 무료인 이유가 그렇다. 1편만 '눈도장'을 받으면 그 다음 연재부터는 '유료'여도 보게 된다. 만화책도, 드라마도, 모두 그런 힘이 발휘되면 초대박을 터뜨리기 마련이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천일야화>도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샤리아 왕도 셰에라자드가 무심코 던진 '이야기 1화'가 지닌 매력이자 덫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라 봐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한 나라의 임금 '역할'을 맡은 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평범해서야 말이 될까? 더구나 실제 존재했던 왕이 아니더라도 설정상 '중동지역과 인도까지' 광대한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왕인데 말이다. 무슬림들의 말로 술탄이자 '정통 칼리프'에 버금가는 대제국의 으뜸인데, 고작 여인네의 이야기 보따리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못난 역할을 맡은 것이 전부일까? 하지만 알 수 없다. <천일야화>에서는 오직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간'을 읽듯 <천일야화>가 이야기하지 못한 '빈틈', 또는 '여백'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안목을 발휘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밤의 화자는 '셰에라자드'지만, 낮의 화자는 '샤리아 왕'일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를 끝맺는 시간은 늘 '동트기 직전'이다. 무슬림들의 하루는 '아침기도'로 시작한다. 이는 국왕일지라도 어길 수 없는 '의무'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국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밤새 쌓인 '국정'을 처리해야 한단 말이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국정'을 본 샤리아 왕은 늦은 밤에 침실로 돌아와 '왕비의 의무'를 받아들이고 취침에 들 것이다. 그리고나서 다시 '동 틀 녘'에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일과'를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바쁜 임금의 일상을 앞두고 그저 '재미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기에 천하룻날이나 '자신의 명령'을 미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재미와 흥미, 그 이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실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다른 나라의 임금'이 등장하기도 하고, '왕비'가 등장하기도 하며, 그밖에 귀족이나 재상, 그리고 부자와 빈자, 도둑이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신'이라 불리는 정령이나 악마 같은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사건사고 들이 하나같이 '교훈'을 담고 있다. 샤리아 왕은 매일 아침 '교훈'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셈이다. 뛰어나고 현명한 국왕이 그 정도 주제파악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테니, 낮에 일을 보면서 그렇게 '득템한 지혜'를 써먹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남자는 '성취욕'이 대단히 강한 존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해내려는 욕구가 매우 높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들이 '성과'를 빠르게 올리고 '승진'이 빠른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샤리아 왕이 '지엄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셰에라자드의 처형을 미루게 된 까닭도 이런 욕구와 성향이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샤리아 왕이 '낮동안'에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어디에도 묘사되거나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작은 가능할 것이다. 바로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물론, 셰에라자드가 종종 빼먹지 않은 이야기는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악독한 아내를 만나 폐가망신한 남편도 등장하지만, 지혜로운 아내(몸종출신도 있다)가 헌신을 다해 남편을 섬긴 덕분에 남편이 복을 받게 되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이는 셰에라자드,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밖에도 '재상이야기'가 참 많이 등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셰에라자드가 '정치참여'를 하고 있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직업이 재상이었기에 '잘 아는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신분제도가 뚜렷한 전제왕권시절에 '여성의 정치참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재상'인데, 아버지의 '업무상 특성'을 너무도 잘 아는 척을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재상이 '비밀유지'도 하지 못하고 딸에게 '나랏일'을 떠벌리고 다녔다고 의심하기 딱 좋지 않느냔 말이다. 셰에라자드도 멍청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에서 '재상이야기'를 했을까?
그건 낮동안 샤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사건사고에 대한 귀띔을 셰에라자드가 듣고서 '영감'을 얻어서 아침마다 샤리아 왕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래를 펼치면 <천일야화>는 단숨에 '두 배나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방대한 천하룻밤 동안의 이야기에 '천하룻날의 낮이야기'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당신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시도해봄직할 것이다. 이름하야 <천일주(晝)화>가 펼쳐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