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6 열린책들 세계문학 141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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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IX / 열린책들 17번째 리뷰] 드디어 다 읽었다. 숨가쁘게 읽는 바람에 '책의 진수'를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천일야화>를 '완독했다'는 뿌듯함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이 그닥 벅차오르지는 않았다. 왜냐면 모처럼 완독했는데 그 누구와도 <천일야화>에 대한 담론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아무도 <천일야화>를 완독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주변엔 말이다. 이게 '고전명작'을 완독한 이들의 고독감이다. 누구나 제목만 대면 단번에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렇게나 유명한 고전을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느껴야만 한다. <알라딘과 요술램프>라는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까지 다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작품이 <천일야화>속 이야기의 일부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더구나 8권(버튼판 <천일야화>)의 분량이라고 하면 읽기도 전에 거부감을 표하곤 한다. 이 책은 6권(갈랑판 <천일야화>)으로 분량이 조금 더 적으니 권해봐도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 뿐이다. 막상 읽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는데 왜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우리 나라에 <천일야화>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 엮은 10권 분량의 <천일야화>가 먼저 소개되었다. 책 분량의 방대함도 유명했지만 내용이 '난삽한 성행위 묘사'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세를 높였다. 그런 까닭에 <천일야화>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소설로 '청소년필독서' 목록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음에도, 노골적인 성묘사가 가득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권장도서'가 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도 낯뜨거운 대목이 담겨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도서관'에서 추방시켜야 하고, 청소년권장 도서목록에서도 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 뉴스를 장식하지 않았던가. 버튼판 <천일야화>도 딱 그런 분위기였다. 당시엔 뉴스에 오를 정도로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학교선생님도 <천일야화>를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권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서른살이 넘어서 버튼판 <천일야화>를 처음 접했지만, 2권을 넘기지 못했다. 이건 뭐 이야기속에 야한 이야기, 그속에 또다른 야한 이야기가 멈추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기에 도저히 책장을 넘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럴 정도였기에 그 누구도 당시 <천일야화>를 '완독'했다는 자랑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유명한 책을 알고 있다는 정도로 점잖게 애둘러서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천일야화>는 어른들만 읽을 수 있는 '성인용 고전'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애초에 '버튼판 <천일야화>'가 나오기 전에 프랑스 작가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버튼조차 '갈랑판 <천일야화>'를 참고해서 자신의 책을 엮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원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갈랑판 <천일야화>'가 뒤늦게 출간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천일야화>는 '야화'라는 이미지로 굳어서 '야한 소설'로 이해하고 있었고, 청소년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건전한 내용'으로 점잖은 '갈랑판 <천일야화>'도 도매금으로 넘겨짚어서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갈랑판 <천일야화>'가 소개된 이후에는 하릴없이 난삽한 낯뜨거운 묘사를 싹 걸러낸 '단행본 <천일야화>'가 많이 출간되었다. 어린이책으로 출간된 <천일야화>도 모두 '갈랑판본'으로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께서 자녀에게 <천일야화>를 읽혀주고 싶다면 책의 저자가 '앙투안 갈랑'인지 먼저 확인하면 된다. 혹시라도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라고 적혀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성인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기적으로도 '갈랑판본(프랑스어)'이 18세기에 만들어졌고, '버튼판본(영어)'이 19세기에 출간되었다. 애초에 '아랍어'로 적혀 있는 '원본'은 따로 없고, '출처'도 불분명할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아랍어'에 정통한 앙투안 갈랑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흩어져 있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출간을 했고, 이 책을 다시 중동을 비롯해서 전세계로 수출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은 이런 '갈랑판본'을 참고로 하여, 자신이 직접 찾은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더하고, 여기에 '낯뜨거운 묘사'까지 잘 버무려서 또 다른 <천일야화>를 내놓았다. 이것이 '영문판'으로 소개된 덕분에 전세계로 빠르게 퍼뜨려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바로 이 '버튼판본'이 먼저 소개된 셈이다. 그래서 두 개의 '판본'을 모두 읽은 사람은 이 책들이 서로 '같은 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딴판'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헤라자드가 샤리아 술탄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이야기 설정은 '같지만', 그밖의 이야기 순서라든지, 심지어 이야기 내용까지 사뭇 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읽어보면 알 게 된다. '버튼판본'보다 '갈랑판본'이 훨씬 읽었을 때 감동이 더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내용이 '점잖치 못하고', '점잖고'의 차이만 보이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서사 방식 자체가 완전 다르다. 버튼판본은 '음담패설'을 읽는 듯 시시껄렁한 시정잡배가 들려주는 분위기가 연출된다면, 갈랑판본은 아버지가 침대맡에서 어린 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사랑스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제목인데도 이토록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버튼판본'은 <아라비안 나이트>(동서문화사)로 검색을 해야 찾을 수 있다. '성인용'이긴 하지만 읽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감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덜 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야한 고전소설'만 따로 골라서 소개를 해드려도 좋을 듯 싶다. 사드 백작의 소설들이나 <데카메론>을 비롯해서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도 말이다. 점잖치는 않지만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많다. 왜 그런 비평을 했는지 '공감'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뭐, 나중의 일이고. 이번 기회에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완독할 수 있어서 기뻤다. 언젠가 <천일야화>를 다시금 소개하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셰에라자드가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수많은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마치 '온세상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조'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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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5 열린책들 세계문학 140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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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II / 열린책들 16번째 리뷰] 드디어 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가 말이다. 갈랑의 <천일야화>에서는 이 이야기의 원제를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라고 전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수없이 많은 버전의 이야기로 각색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실사 영화(2019)도 같은 제목)으로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천일야화>속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성도 비슷하긴 하지만, 애초에 담고 있는 '주제' 또한 사뭇 달라서 애니메이션을 즐긴 뒤에 원작이야기를 읽으면 살짝 뚱한 표정을 짓는 어린이들도 상당히 많이 보았다. 왜냐면 나와 같이 '원작이야기'를 먼저 읽고서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바로 원작에선 '알라딘의 재치'가 돋보인다면, 애니메이션에선 '램프의 요정 지니'가 거의 다 해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으로 올수록 '알라딘의 재치'보다는 '요정 지니의 익살'이 더 인상 깊기에 그럴 것이다. 자, 원작과 비교를 해보자.

원작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영향을 받는 '중국의 한 왕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굳이 역사적인 고증을 하자면, 중국의 서쪽 변경의 제후국이라고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곳에서 알라딘은 망나니 소년으로 등장한다. 재봉사인 아버지가 죽고나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 바로 알라딘이다. 그런데 이 소년이 아주 철부지다. 일 하기는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방탕하기 그지 없어서 날이면 날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그런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한편, 애니에서는 고아소년으로 등장한다. 직업도 없어서 좀도둑이다. 애초에 둘 다 '빈털털이 가난뱅이'라는 설정은 유사하지만 '어머니의 존재 여부'가 사뭇 다르다. 이렇게 어머니가 살아계신 원작에서는 훗날 알라딘이 왕국의 공주(바드룰부두르)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역할을 하지만,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의 도움을 받아 뚝딱 해치우고 만다. 일륜지대사에 속하는 혼인인데, 원작에서처럼 '격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전통(상견례 포함)'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요즘에는 젊은 두 남녀가 '직접 연애'를 한 뒤에 사랑만으로 뚝딱 결혼을 할지언정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에서는 알라딘과 공주가 혼인과 동시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연을 맺고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애정을 강조한데 반해서, 애니에서는 그런 끈끈한 연보다는 '사랑의 조건'을 따지면서 헤어질 수 있으면 헤어지는 게 '맞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으니 좀 아쉬운 설정이다. 아무리 젊은 감성일지라도 '부부의 연'을 그렇게 쉽게 끊을 수도 있다는 설정은 애초에 '예시'로라도 보여주어선 안 되는 건데 말이다. 부부사이에 '사랑'이 식으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성립한다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장해선 안 된다고 본다. 물론 '폭력이 가득한 부부'까지 붙들어 매어야 옳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아무튼 이런 등장인물의 차이점은 또 있다.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 지니' 뿐만 아니라 '원숭이 아부', '마법양탄자'까지 나와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과 '반지의 정령'이 등장할 뿐, 원숭이나 양탄자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애니에서는 '마법사 자파'가 홀로 악역을 맡지만, 원작에서는 '아프리카 마법사와 그 동생'까지 악역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알라딘과 공주에게 온갖 시련과 위기를 맞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말의 차이점'이다. 애니에서는 쟈스민 공주가 지혜를 발휘해서 마법사 자파를 '새로운 램프의 요정'으로 바꾸어서 스스로 파멸하게 만들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의 도움'을 받은 알라딘이 나쁜 두 마법사를 처리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맡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에서는 알라딘과 쟈스민의 행복한 결혼으로 끝맺지만, 원작에서는 국왕 사망하자 바드룰부두르 공주가 '왕위의 계승'을 받아 왕권을 거머쥐고, 남편인 알라딘과 공동통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는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원작을 살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니만 기억하고, 원작을 잊어버린 평론가들이 실사 영화를 '패미니즘의 구현'이라고 논평한 것이 어색할 지경이다.

이렇게 차이가 많기에 '원작'만의 매력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철없던 소년이 온갖 시련과 행운을 연이어 겪으면서 끝내 한 나라의 통치자까지 되는 행복한 결말 말이다. 이게 원작의 주제다.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교훈'까지 솎아낼 수 있기에 원작이야기를 나는 더 좋아한다. 이런 교훈은 애니와 실사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재미로 시작해서 재미로 끝날 뿐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사랑은 아름답다' 정도일까?

한편, 원작에서는 '소원의 갯수'가 무제한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들은 '주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준다. 물론, 금기되고 터부시 되는 것들이 있긴 하다. 금기 되는 것은 '상위 정령이 해놓은 일'을 '하위 정령'이 어쩔 수는 없다는 것이고, 터부시 되는 것은 '정령의 주인(로크 새)'을 해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아무리 '램프의 주인'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소원은 딱 세 가지뿐'이다. 좀 째째하다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횟수'를 한정해놓으면 더욱 신중한 소원을 빌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원작보다 더 능가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소원의 남발'을 하지 않고 '한정된 느낌'을 주고는 있다. 바로 알라딘이 순박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소원을 남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라딘이 비는 소원이 워낙 '검소(?)한 편'이라서 그러한 방만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딱 '세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고 한정해 놓았기에 알라딘을 비롯한 '램프의 주인들'은 모두 신중하게 소원을 빌게 된다. 하긴 바라는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인생만큼 식상한 인생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무한정 소원을 들어주면 행복할 거라고? 배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배부른 자(부자)의 행복이 배고픈 자(빈자)의 행복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한정 이루어지는 소원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론은 진리다.

암튼, 나는 <천일야화>속 이야기 중에서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는 읽고 또 읽었던 추억이 서려있기도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정이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빌었던 소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그 소원은 점점 구체적이 되었지만 결코 실현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떠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소원'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 진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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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4 열린책들 세계문학 139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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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I / 열린책들 15번째 리뷰] 셰에라자드의 여동생 '디나르자드'의 역할은 감초 역할일까? '약방의 감초'란 말은 여러 한약처방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감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지랖'이란 말뜻과 비슷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 감초 역할이라고 하면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쓰디쓴 한약재를 그나마 마시기 좋게, 마시기 편하게 '해주는 역할'이라는 긍정적인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디나르자드의 역할이 딱 그런 역할 아니겠는가.

언니 셰에라자드의 부탁으로 '왕비의 침실'에 함께 머물게 된 디나르자드는 '아침 해가 뜨기 한 시간 전'에 언니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야만 한다. 어찌 보면 매일밤, 언니가 '페르시아 대제국 술탄의 명령'에 따라서 처형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모면하게 만들어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만약 이렇게 졸라대는 듯한 말투가 '술탄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면, 재미난 이야기고 뭐고 간에 술탄은 셰에라자드를 처형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작두를 탄다'는 느낌으로 간절한 호소를 해야하는 역할인 셈이다. 또다시 만약 '디나르자드'가 없이 셰에라자드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간청을 한다면, 이는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고자 하는 뻔한 수작이라며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니가 처형되고 나면 이렇게나 재밌는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라는 느낌을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않게 딱 적당히 간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나르자드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일밤 '똑같거나 비슷한 멘트'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어서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디나르자드야 하나뿐인 언니를 구명하기 위한 최선일 수 있겠지만, 똑같은 멘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디나르자드의 호소는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딴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앙투안 갈랑이 <천일야화>를 출간하면서 독자들의 불만을 적극 수용한 결과 (이 책 기준으로) 4권부터는 '며칠째 밤'이라는 구분도 삭제하고, '디나르자드의 등장'도 최소한으로 축약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전체 6권 분량 가운데 딱 절반부터는 '그런 구분'이 사라지고, 독자들은 훨씬 더 편하게 <천일야화> 이야기에 심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긴 했는데, 나는 '읽는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셰에라자드와 샤리아 사이에 디나르자드까지 함께 어우려져서 '셋이서' 쑥떡대는 무언가, 그것만의 '매력'이 있었는데, 그게 실종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나는 '매일밤'마다 구분하며 들려주는 토막이야기를 통해서 '낮동안에 일어난 샤리아 술탄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디나르자드의 감초 역할을 쏙 빼버리고나니 '두 배로 즐기던 재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온통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만 읽어나가야 했다. 이래선 '보통의 소설(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게 된 셈이다. 아직 '버튼의 <천일야화>'도 이런 식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예전에 10권 분량의 '버튼 <천일야화>'를 읽을 때에는 초반만 읽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확인을 해봐야겠다.

더구나 '디나르자드'의 분량을 빼버리니 '샤리아'의 분량마저 함께 토막나고 말았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판소리'에 비유하자면, 소리꾼에 비유할 수 있겠고, 디나르자드는 '고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소리꾼이 아무리 명창이라도 고수의 '추임새'가 없으면 고무줄 없는 팬티 신세가 아닐까 싶다. 아무런 '약효'를 갖지 못한 감초일지라도 한약재에서 감초를 덜어내면 너무 써서 좋은 약도 먹지 못해 효과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감초 역할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귀찮아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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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3 열린책들 세계문학 138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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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 / 열린책들 14번째 리뷰] <천일야화>의 중요 화자는 셰에라자드다. 그녀는 샤리아 왕이 왕비를 간택하고 '첫날밤'이 지나면 처형을 하는 국법을 알고도 샤리아 왕의 아내가 되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무려 천하룻밤 동안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바로 매일밤 동트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 동생인 '디나르자드'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셰에라자드가 여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지만 '같은 침실'에 머물고 있었기에 샤리아 왕도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해가 뜨면 '국왕의 명령'대로 처형을 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샤리아 왕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해서 처형을 미루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니 어느덧 백여날 밤이 지났다. 샤리아 왕은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자신의 명령'대로 셰에라자드를 처형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은 것 같을 정도다.

하지만 샤리아 왕이 단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서 세에라자드의 처형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만큼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은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어디 '이야기'만 그럴까. 이야기의 서사를 갖고 있는 모든 매체가 '동일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단 1편의 웹툰'만 무료인 이유가 그렇다. 1편만 '눈도장'을 받으면 그 다음 연재부터는 '유료'여도 보게 된다. 만화책도, 드라마도, 모두 그런 힘이 발휘되면 초대박을 터뜨리기 마련이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천일야화>도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샤리아 왕도 셰에라자드가 무심코 던진 '이야기 1화'가 지닌 매력이자 덫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라 봐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한 나라의 임금 '역할'을 맡은 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평범해서야 말이 될까? 더구나 실제 존재했던 왕이 아니더라도 설정상 '중동지역과 인도까지' 광대한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왕인데 말이다. 무슬림들의 말로 술탄이자 '정통 칼리프'에 버금가는 대제국의 으뜸인데, 고작 여인네의 이야기 보따리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못난 역할을 맡은 것이 전부일까? 하지만 알 수 없다. <천일야화>에서는 오직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간'을 읽듯 <천일야화>가 이야기하지 못한 '빈틈', 또는 '여백'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안목을 발휘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밤의 화자는 '셰에라자드'지만, 낮의 화자는 '샤리아 왕'일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를 끝맺는 시간은 늘 '동트기 직전'이다. 무슬림들의 하루는 '아침기도'로 시작한다. 이는 국왕일지라도 어길 수 없는 '의무'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국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밤새 쌓인 '국정'을 처리해야 한단 말이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국정'을 본 샤리아 왕은 늦은 밤에 침실로 돌아와 '왕비의 의무'를 받아들이고 취침에 들 것이다. 그리고나서 다시 '동 틀 녘'에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일과'를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바쁜 임금의 일상을 앞두고 그저 '재미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기에 천하룻날이나 '자신의 명령'을 미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재미와 흥미, 그 이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실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다른 나라의 임금'이 등장하기도 하고, '왕비'가 등장하기도 하며, 그밖에 귀족이나 재상, 그리고 부자와 빈자, 도둑이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신'이라 불리는 정령이나 악마 같은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사건사고 들이 하나같이 '교훈'을 담고 있다. 샤리아 왕은 매일 아침 '교훈'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셈이다. 뛰어나고 현명한 국왕이 그 정도 주제파악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테니, 낮에 일을 보면서 그렇게 '득템한 지혜'를 써먹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남자는 '성취욕'이 대단히 강한 존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해내려는 욕구가 매우 높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들이 '성과'를 빠르게 올리고 '승진'이 빠른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샤리아 왕이 '지엄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셰에라자드의 처형을 미루게 된 까닭도 이런 욕구와 성향이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샤리아 왕이 '낮동안'에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어디에도 묘사되거나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작은 가능할 것이다. 바로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물론, 셰에라자드가 종종 빼먹지 않은 이야기는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악독한 아내를 만나 폐가망신한 남편도 등장하지만, 지혜로운 아내(몸종출신도 있다)가 헌신을 다해 남편을 섬긴 덕분에 남편이 복을 받게 되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이는 셰에라자드,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밖에도 '재상이야기'가 참 많이 등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셰에라자드가 '정치참여'를 하고 있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직업이 재상이었기에 '잘 아는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신분제도가 뚜렷한 전제왕권시절에 '여성의 정치참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재상'인데, 아버지의 '업무상 특성'을 너무도 잘 아는 척을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재상이 '비밀유지'도 하지 못하고 딸에게 '나랏일'을 떠벌리고 다녔다고 의심하기 딱 좋지 않느냔 말이다. 셰에라자드도 멍청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에서 '재상이야기'를 했을까?

그건 낮동안 샤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사건사고에 대한 귀띔을 셰에라자드가 듣고서 '영감'을 얻어서 아침마다 샤리아 왕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래를 펼치면 <천일야화>는 단숨에 '두 배나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방대한 천하룻밤 동안의 이야기에 '천하룻날의 낮이야기'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당신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시도해봄직할 것이다. 이름하야 <천일주(晝)화>가 펼쳐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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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2 열린책들 세계문학 137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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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 / 열린책들 13번째 리뷰]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는 원래의 '아랍어로 적힌 원작'의 내용의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앙투안 갈랑이 살던 18세기에도 '원작 <천일야화>'가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한 원작'에서 너무 야하고 비상식적인 내용은 도려내듯 걸러낸 뒤에 '남은 것'만을 옮겨 적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천일야화>는 이토록 방대하다. 또 하나의 <천일야화>인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의 책에는 갈랑의 책을 참고했다고도 전해지지만 '분량'면에서는 훨씬 더 많다. 애초에 '야한 내용'을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작'이 불완전하기에 버튼의 <천일야화>도 완전한 책은 아니다. 게다가 살짝 MSG도 첨가한 듯 싶다. 그렇기에 두 가지 <천일야화>는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는 갈랑의 <천일야화>로 출간하였고, '동서문화사'에서는 버튼의 <아라비안 나이트>로 출간했기 때문에 앞으론 둘을 이렇게 구분하고자 한다.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을 소개하는 까닭은 두 작품의 '목차'부터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분량도 차이가 나지만 수록된 이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은 무슨 까닭 때문인 건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은 '단행본'과 '어린이책'에서도 마찬가지다. 1권 짜리 '단행본'이야 애초에 주요 이야기만 추려서 냈을 것이고, '어린이책'이야 어린이가 읽어도 될 정도로 각색까지 했을테니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건전한 내용으로 펴낸 '갈랑의 <천일야화>' 스타일을 본땄을 텐데도, 이야기가 실려 있는 순서가 사뭇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걸까? 셰에라자드(이름도 천차만별인데, '세헤라자드'가 가장 보편적이지만, 이 책에서는 셰에라자드로 표기했으니 따르려 한다)가 매일 아침 동트기 전까지 샤리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순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만일 '샤리아 왕'이 실존 인물이었다면 이런 차이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샤리아(Shariah)'는 이슬람세계의 '율법'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로 <천일야화>를 이해하면 매일밤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이슬람율법'을 앞에 두고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할 수 있다. 마치 최종판결을 앞둔 피고인이 '최후변론'을 하는 느낌으로 읽힐 수도 있는 대목이다. 허나 이슬람사회에서 '샤리아'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가타부타 따지며 '해석'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최후변론'을 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셰에라자드는 결국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다. 율법 앞에서 '관대함'을 요청할지언정 '율법,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최후변론을 무려 '천하룻밤'동안 한 셈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절대불변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융통성'이라는 빈틈을 파고들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샤리아 왕과 셰에라자드 왕비는 매일밤 동침을 하는 부부사이다. 물론 율법은 '부부사이'도 갈라놓을만큼 엄정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천일야화>의 이야기 순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싶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하든, 저 이야기를 먼저 하든 샤리아 왕의 부당한 법집행 아래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서 매일밤마다 '생명연장', '집행연기'를 위해서 네버엔딩 스토리, 다시 말해, '끝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몇 번째 날 밤'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어차피 진술한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일야화>에 담긴 이야기가 지닌 속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건 다음 리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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