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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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IX / 문학동네 20번째 리뷰] 제주 4·3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요원하다. 짙은 안갯속을 헤매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 앞에서 '근거'를 내놓으라며 다그치는 사람들이 맞서는 형국이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이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법적 정의'에 기대어 합법적인 판결로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의 횡포와 초강대국 미국의 압박 아래 어쩔 수 없이 희생된 사건이니,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다짐을 받겠다는 국민들의 열의를 그동안의 정부는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나마 '진보정권'이라 불리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는 미약하나마 진상조사를 진행하고서 국가차원의 사과를 받긴 했지만, 이로써 모든 원한이 해소 되었을까?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학살한 사건을 그 어떤 명분으로 일거에 해소할 수 있겠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45분경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선포'를 느닷없이 발표하였다. '포고령'에는 정치인들의 일체 정치행위를 금지하며, 국회를 봉쇄하고, 선거관리원을 점거하고, 전공의 파업을 전면 금지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이에 국민들은 국회로 달려갔고 계엄군과 맞서 민주주의 질서를 지켜냈다. 그사이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고 경찰의 제지를 뚫고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비상계엄 무효'를 이끌어냈고, 새벽 5시즈음 윤석열은 '무효 선언'을 발표했다. 한밤의 헤프닝으로 끝나야 마땅하고, 윤석열은 '내란우두머리'로 즉각 파면되어 국정 안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이 모든 과정을 법적인 판결로 심판을 받겠다며 '헌법재판소'에 모든 공을 돌려버렸다. 국회는 연이은 특검과 탄핵소추로 국정은 마비가 되었고, 행정부는 '거부권 남발'과 '적법절차'를 따지며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심각성은 망각한채 그저 '위법'이냐 아니냐, '위헌'이냐 아니냐만을 따지겠다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제 모든 공은 '사법부의 판결'만으로 해결하겠다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그 사이에 정부와 국회는 각각 '여론전'에 돌입했고, 국민들은 여당과 야당 편으로 갈라져서 첨예한 갈등만 양산하게 되었다. 흡사 '대선경쟁'처럼 말이다. 외신들은 이런 혼란속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평화적이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했지만, 이런 평가가 무색하게 '서부지법 폭동사건'이 벌어지면서 단 한 방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급락하고, 그동안의 평가는 버블이었으며 다시금 '저평가'할 수밖에 없으며, 성급한 평가였다며 조심스런 관망 모드로 후퇴하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다. 트럼프발 관세정책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수장 공백사태'는 해결기미도 없이 국론은 분열되었고, 이대로라면 윤석열이 복귀하든, 새 대통령이 당선되든 불신과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다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원하는 형국은 또다시 대한민국에 '독재자'가 등장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제주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도 '이승만 독재정권'이 국론분열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고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경제지원을 이끌어내는 문제까지 일거에 해소하려는 '극약처방'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러한 '과거사'를 알게 된 전세계 선진국들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문제를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소하려는 것인지 지켜보겠다며 물러선 셈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선택만 남은 셈이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윤석열 복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는 자신과 마누라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또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설령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도 국정운영에 대한 '무능력'으로 일관한 탓에 결국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국정파탄을 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그럼 윤석열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으로 현 지지율 1위인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까? 지금의 '국론분열'된 상황에서 반이재명 측에서 벌이고 있는 '사법리스크'로 계속 국정을 흔들고 폭동도 불사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 결론으로 나더라도 대한민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결말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사법부의 판단'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로 정의를 세울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았다.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승복한 뒤에' 벌어질 민주주의 질서 회복이다. 폭력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 어차피 정치인은 다 그놈이 그놈이다. 정치인 한 명 바뀐다고 대한민국이 바뀌지는 않는다. 허나 국민이 바뀌면 대한민국은 바뀐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는 '원칙'만 지켜진다면 법은 어떤 법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제는 국민들이 질서회복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정치인 한 명의 독단으로 온나라가 흔들리고 말 거라면 차라리 그런 국민들은 학살 당해도 싸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응원봉을 들고 단합된 '한 목소리'를 낸다면 독재자라도 물리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엄령이 떨어지자 '계엄군'이 총 한 방도 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들은 온몸으로 계엄군을 막고 총부리조차 겁내지 않고 맞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계엄령이 해제된 것이다. 이게 '한 목소리의 힘'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진 '정부여당'과 '사법부', 심지어 '헌재'까지 어땠나? 대한민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최적의 판결'을 내린 것이 있던가? 정부여당은 헛소리로 일관하며 국정마비의 원인을 '야당탓'으로 돌리고, 사법부는 '적법절차'를 따지며 판례에도 없는 괴상망측한 논리로 내란우두머리를 수사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헌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헌법해석'에 골머리를 썩고 있느냔 말이다. 당신들의 오판 하나로 대한민국에 '지옥문'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정녕 국민들을 '제주 4·3 사건 당시'로 되돌리고자 한단 말인가?

서론이 길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위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줄거리가 담겨 있다. '죽은자'가 '산자'에게 들려주는 간절한 소망만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소망은 '살아달라'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었더라도 죽고 난 다음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살아서 하고픈 말을 다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때를 기다리라고 전하고 있다. 손가락이 잘리는 고통보다 '손가락의 신경을 되살리는 과정'이 더욱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은 '신경세포'를 일깨우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다친 부위를 찌르고, 바늘을 꽂았던 곳의 상처가 아물면 또다시 찔러 피를 내서 계속 '상처인 채'로 남겨두어야 신경이 완전히 되살아나는 혹독하고 끔찍한 과정이다. 그 극심한 고통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할 수 없으니 '간병인'이 주기적으로 찌르고 또 찌르면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도록 관리해야만 한다. 언제까지인지는 분명하다. '신경'이 제자리를 찾고 다시 원래의 '감각'을 되찾을 때까지 반복할 것이다.

인선이 목공일을 하다가 전기톱날에 손가락이 짤리는 사고를 당한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이었을 것이다. 산간마을 속에서 홀로 깊숙히 숨어들어 살고 있었으니 병원에 실려가 응급조치를 받고 수술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을 것이다. 까딱했으면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허나 손가락이 잘린 뒤에 치료과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평생 불구로 살며 '손가락'을 포기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온전한 '손가락'으로 되돌리려 끔찍한 고통을 참고 또 참아내는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는 삶이다. 이쯤하면 '손가락 절단 사고'가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한밤중에 '앵무새 한 마리'를 살리려 제주도로 날아간다. 그리고 무릎까지 쌓은 눈을 헤치고 인선의 외딴집으로 들어가 '인선의 과거'와 마주한다. 그곳에서 경하는 인선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하지만, 끝내 성냥불 하나에 온 희망을 다 거는 간절한 소망을 말한다. '살아 달라'고 말이다.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간절히 소망한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행불자'가 되었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을 추적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말이다. 분명 '여기'서 '저기'로 보냈다는데, '저기'에서는 '온 적'도 없다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국민이 사라졌는데도 이 나라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는 논리로 그냥 밀어붙인 것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고, '산 사람'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엄혹한 시절을 보냈다. 이제 대한민국도 갈림길에 선 것이다. 살았든 죽었든 '할 말'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듣기 싫은 말'을 할라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도 족치고서는 '법치주의'의 뒤에 숨어서 '사법정의' 수호에 매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환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 환부에 '제 신경'이 되돌아 올 수 있게 찔러서 피를 흘리는 일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게 싫으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만 한다. 그조차 싫다면 우리의 아픈 부위를 찌르고 또 찔러서 피를 흘리게 만들어야 한다. 피의 복수, 정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폭력을 행사하자는 말이 아니다. 99.9% 사기꾼이 틀림없는 정치꾼에게 일침을 가하고,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라고 계속 찔러줘야 한다. 무뢰한 저들에게 '계몽령' 소리를 듣고도 참고 아무런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는 셈이다.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국민들이 참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 폭력이 아닌 '한 목소리'로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일궈온 대한민국인데 이렇게 한 순간에 병신꼴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라! 자랑스런 대한민국과 영원히 작별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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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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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III / 이봄 9번째 리뷰] 직장에 다니다보면 '좋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죄다 '싫은 사람' 투성이다. 내가 가장 싫어 하는 유형은 '무능력'한 사람도 아니고 '사고 많이 치는' 사람도 아니고 바로 '얌체 같은' 사람이다. 하는 일마다 얌생이처럼 해야 할 일은 '하는척'만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말고, 같은 팀 안에서 팀원들을 '갈라치기'해서 이간질 시키고, 그런 짓만 저지르다가 책임져야 할 경우가 생기면 '발뺌'을 하고서는 나몰라라하는 얌체 같은 놈팡이는 정말이지 딱 질색이다. 여기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도 그런 얌생이가 한마리 있다. 바로 카페 주인의 딸, '무카이'다.

무카이는 늘 뒷담화를 달고 산다. 막말도 함부러 지껄여서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처까지 주고야 만다. 그러고도 '농담~'이라면서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듯 그깟일로 화를 내거나 상처 받는다면 '그건 니탓'이라는 듯 재수없게 말을 하는 상종 못할 계집애다. 그런데 더 고까운 것은 '주인의 딸'임을 내세워 '카페 점장'의 정당한 지시사항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처리를 하기 일쑤라는 점이다. '주말근무표'를 정하는 것도, '신메뉴'를 정하는 것도, '정사원 건의 권한'도 모두 점장에게 있는데, 점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주인의 딸'인 자신이 다 결정을 했으니 점장은 알고 있으라는 식으로 통보(?)만 하고 만다는 점이다. 이런 '부하직원'이 있으면 일이 될 턱이 없다. 직원간 '불화'는 더욱 커지게 되고, '팀워크'는 깨져서,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지점'은 결국 운영마비가 되고 말게 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답은 딱 두 가지다. '점장'의 손을 들어주던가? 아니면 '주인의 딸'이 새로운 점장이 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래야 '주인'으로서는 손해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의 입장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이로울까? '수익'만 따진다면 수짱의 능력을 인정해서 점장으로 직급을 올려준 자신의 결정을 믿고 수짱을 지지해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자면 매장 불화의 원인인 '자신의 딸, 무카이'를 다른 지점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팔은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딸'을 새로운 점장자리에 올리기 십상이다. 그게 다행히 '수짱'이 점장으로 있는 지점이 아니라 '다른 지점'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수짱을 내쫓거나 '공동 점장'이라는 묘안을 내놓는다면, 일은 더욱더 하기 싫어질게다. 사사건건 부딪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수짱이 '완벽하게 꼬리를 내리는 방법'이다. 어차피 '주인의 딸'이 점장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일이 되든지 말든지 '주인의 딸'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냥 맡겨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수짱이야 일만하고 월급만 따박따박 받으면 그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지점 매출이 하락하고, 매장 직원들간 불화가 심각해져서 퇴사자가 속출하든지 말든지 그건 '카페 주인의 몫'이 될테니 말이다. 그때서야 '주인의 딸'에게 책임을 돌리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하라고 하고, 수짱은 그저 묵묵히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하며 '월급만' 따박따박 챙기며 지내면 될 일이다.

물론 그래도 짤릴 가능성은 있다. '주인의 딸'이 벌이는 횡포(?)는 어차피 카페 주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리스크'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여러 지점을 가지고 있는 주인의 경우에는 몇 개의 지점이 망하더라도 큰 손실은 아니다. 이익이 큰 쪽에서 메꾸면 그만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짤릴 경우에 우리 나라에서는 '재취업의 기회'와 더불어서 '실업급여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마냥 손해만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수짱의 나이가 좀 많은 것이 살짝 불리하게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일본에도 그런 제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수짱의 선택은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어차피 수짱이 없어도 돌아가는 카페였다. 도심지의 전문점들은 '맛'으로 승부하는 곳이 아니라 '브랜드'로 이미 찾아올 손님은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정적인 수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매장 직원이 '특별히 더 잘해서' 매장의 이익을 눈에 띄게 올려주는 그런 기적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뭐 매장 직원의 외모가 '아이돌급'이어서 매출이 확 늘어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또라이'가 점장을 하든, '싸가지'가 써빙을 하든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매장에서 알바하는 젊은 사람들만 '일할 맛'을 잃어버리고 말 뿐이다.

그래서 '주인의 딸, 무카이'가 저지르고 있는 얌체짓이 더욱 괘씸한 것이다. 저 얌체는 지가 저딴 식으로 행동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맘껏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는 개나 줘버리고, 매장에서 '일할 맛'이 나게,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일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해버리는 셈이다.

한편, 사와코가 일하는 직장에도 그런 '싫은 사람'이 있다. 기본적인 업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부하직원에게 의지하는 무능한 상사', 응접실 뒷정리나 사소한 심부름 같은 것은 한가한(?) 여자 직원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꼰대 상사' 따위다. 물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며 "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당당히 선언을 하고 각자 제 몫을 제대로 하라고, 자신은 더는 그런 '부당한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당당히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쎈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1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회사일에 충성을 다했지만, 그래도 '착한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한번 두번 해주다보니 어느새 그런 일까지 '자신의 업무'가 되어버리는 억울한 사연을 갖게 된 것이다. 적당한 때가 되면 다른 신입직원이 그런 일을 '당번'처럼 도맡게 배려(?)해준다면 억울할 일도 없겠구만, 한 번 만만하게 보이면 계속 만만하게 보이고 만다는 절대불변의 법칙이 생겨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사와코는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급속도로 '결혼이야기'를 꺼내고서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때려치겠다는 야망(?)을 갖는다. 그래서 남자가 맘에 들지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결혼은 추진하고 있다. 맘에 들지 않는 점이란 '식당종업원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버릇'이라거나, '사와코에게 임신이 가능한지 건강증명서를 요구한다'거나, 결혼을 하자면서 막상 '결혼준비'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무심한 남자라는 점 등이다. 그러다 남자가 '전근'을 가게 되니 사와코와 함께 가자며 결혼을 서두르자 사와코도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왜냐면 직장에 '싫은 사람'을 더는 보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행복감에 승낙을 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게 마냥 행복해할 일이 아니었다. 남자를 따라서 직장을 그만 둘 경우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맞벌이'를 하길 남자쪽에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전근'을 아주 가는 것이 아니라 2년이면 다시 도쿄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남자는 원래 직장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지만, 사와코는 잘 다니던 '정사원'직을 포기하고, '프리랜서'나 '프리타(시간알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결혼을 2년 뒤로 미루고 자신은 계속 이 직장을 다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결혼을 하거나 퇴사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수짱의 경우는 아예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결심했으니 상황이 다르다. 참고 버티는 것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결론이 나자, 쓰지도 않고 아껴둔 '월차'도 맘껏 쓰고, 새직장에 면접을 보러다니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인 셈이다. 그렇게 수짱은 떠났다. 바로 옆 가게 서점에서 일하는 '남자'와 인연이 남았다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그런 다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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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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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II / 이봄 8번째 리뷰] '수짱 시리즈' 2번째 책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3명이다. 지난 편에서 '카페 점장'으로 승진한 서른다섯 살의 수짱, 13년 동안 섹스는커녕 데이트도 하지 못한 사랑꾼 커리어우먼 사와코, 그리고 지난 편에서 갑자기(?) 결혼에 성공하고 지금은 예비엄마가 된 마이코가 주인공들이다. 세 여성의 공통점은 모두 '고민'이 많다는 것이다. 삼십대 중반의 독신여성이 할 법한 고민들을 토로하고 있어서 작가인 '마스다 미리'를 일본 2,30대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25년인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은 그 위상이 하락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면 현재의 2,30대 여성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바뀐 듯 싶어서 말이다. 정작 나는 '여성'이 아니라서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이 불가하지만 말이다. 최대한 그 고민에 '공감'하려 노력하는 노총각이라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30대 중반 독신 여성을 대변하는 '수짱의 최대 고민'은 결혼이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가임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초조하지만, 딱히 결혼상대로 꼽을만한 '적당한 남자'가 없다는 점이 수짱이 결혼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유다. 남자를 만나야 연애를 하든, 섹스를 하든, 결혼을 하든 '선택'이라도 할텐데,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서는 100% 여성 근무자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자연스런 만남'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딱히 '맞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받는 노력(?)도 하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다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그렇다보니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그리 불평불만 따위는 없다. 하지만 녹초가 되어 퇴근을 할 때에는 '고민'이 밀려 온다. 과연 이대로 늙어가도 괜찮은 걸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고 돈도 풍족하지 않은 상태로 노후를 맞이하는 것도 괜찮을까? 등등으로 점점 불안이 엄습해오고 있음을 느낄 때인 것이다.

한편, 사와코는 남자를 원한다. 직장여성(오피스레이디)으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대단한 경력'은 아니고 회사에서 중역을 맞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13년 동안 섹스..아니 '데이트'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와코는 '사랑'이 고픈 상태다. 하지만 결혼만이 능사도 아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고 엄마가 할머니를 홀로 돌보고 있기 때문에 사와코가 결혼을 해서 떠나면 그 힘든 일을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결혼을 더 미루고 나이만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정도다.

마이코도 지난 편에서는 '사와코'와 비슷한 고민을 했더랬다. 그러다 유부남과의 불륜을 정리하고 연상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서 '전업주부'가 되어 현재는 '임신중'이다. 이제 아이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제까지의 나'와 이별해야 하는 것에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끼며 우울해하는 마이코, 예비엄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2013년에 개봉했다던데, 일본여성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세계 삼십대 독신여성들의 공통적인 고민이기에 화제가 되었을 법하던데, 아직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여러 평론을 읽어보니 '영화'보다는 '원작 만화'가 더 호평일색이다. 아무래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원작에, '기대감'이 증폭되다보니 영화에서는 이를 극복해낸 '한방'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연기가 부족했던, 연출이 부족했던, 원작에서는 '다양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대목을 연기자와 연출자의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만으론 아마도 부족했을 것이다.

암튼, 여성에게 '결혼'은 자신의 일상이 싹 바뀌는 변화를 감수해야만 한다. 또한 '임신과 출산, 육아'도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소중한 새생명의 탄생이라는 기쁨을 주는 일이지만, '산모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고, 또한 기쁨을 물색하게 만들 정도로 고된 '육아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철없는 20대에 덜컥하게 되는 '결혼과 임신'이 아니라 뭘 좀 알 나이인 '30대'가 되면 여성에게 결혼은 해도 걱정, 안 하면 더 걱정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마스다 미리의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고민을 '대신'해서 해주니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막상 읽어보니 답답하다. 결코 쉽지 않은 고민이라 쉬이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뭔가 답을 내주기 바라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리가 아닐까?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읽다보면 '문제제기'만 실컷하고서는 '대안제시'나 '해결방법'을 내놓지 않고 여전히 '고민중'이라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고 있어서 좀 답답하다. 하나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 같아도, '또 다른 고민'이 계속 튀어나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알겠는데, 그런 식의 고민만 잔뜩하고 있으면 '독자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고, 그저 '공감'만하고서 끝을 내는 것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원래 여자들의 수다에 '목적'도 없고, '결론'도 없다지만, 결국 '나이'는 먹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마스다 미리씨~ 도대체 결혼은 하는게 좋다는 거예요? 하지 않는게 좋다는 거예요? 고민만 '대신'해주지 마시고, 답도 좀 '대신' 내려보시라고요~ 그래야 이 책이 좋다 싫다 결론을 내릴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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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툰 1 - 가족의 탄생 비빔툰 (문학과지성사) 1
홍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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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I / 문학과지성사 4번째 리뷰] 21세기가 시작하면서 나는 진정한 독립을 하게 되었다. 비록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긴 했지만 더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고서 '경제독립'을 하고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빌린 대출금도 내가 대신 갚아나가는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문구독'도 이때 처음 했다. '접이식 자전거'를 공짜로 주겠다던 <조선일보>를 거절하고, '한달 구독료 면제'를 내건 <한겨레신문>을 구독했다. 그때 재미나게 보던 만화가 바로 <비빔툰>이었다. 그러다 <비빔툰> 연재가 종료되고 얼마 안 되어 한겨레 구독도 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재종료와 상관없이 '내 주머니 사정'이 당시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추억이 담겨 있지만 <비빔툰>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내 추억일 뿐이다. 하지만 <비빔툰>을 연재한 홍승우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서 유독 '추억'을 자주 다루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도 자꾸 옛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읽고 있는 '마스다 마리'의 <수짱 시리즈>와 언뜻 비슷한 점이 보인다. 물론 겉으로는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수짱은 '삼십대 미혼여성' 이야기인데 반해, 정보통과 생활미는 '삼십대 초반과 이십대 후반(3살 차이)'에 서로 만나 초고속(?)으로 결혼까지 골인하여 '신혼살림과 육아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이기에 사뭇 다른 내용이다. 출생연도는 홍승우가 1968년, 마스다 마리가 1969년이고, <비빔툰>은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연재했고, <수짱 시리즈>는 2006년에 화제를 몰고 와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비빔툰>이 더 일찍 선보인 작품인데 작품의 분위기는 <수짱 시리즈>가 더 연배가 많은 사람의 작품처럼 보인다.

이런 차이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90년대 미일간 '플라자 합의'를 통해서 일본에 '부동산 경기'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된 '잃어버린 10년 시리즈'가 90년대 불고 있어서 만화에서조차 그런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함'이 깔려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 2000년대에는 '잃어버린 20년'차로 접어들면서 '여성의 맞벌이'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일본 여성들이 결혼을 뒤로 미루고 경제활동에 매진하게 되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과 사랑'을 병행하지 못한 일본여성의 고뇌를 <수짱 시리즈>에 잘 녹아낸 것 같은 느낌이다. 반면에 <비빔툰>도 1997년 IMF 경제체제를 맞이한 '한국경제의 위기 상황'속에서 연재를 시작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정보통과 생활미는 '일과 사랑'을 모두 잡고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며 가족만이 누릴 수 있는 알콩달콩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속에도 '불경기'로 인한 가정불화가 은근히 깔려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이기 때문에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찾아내고, 그것을 '웃음과 재미'로 승화시킨 작품이 <비빔툰>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수짱 시리즈>는 오직 '여성의 관점'에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지만, <비빔툰>은 정보통으로 대변되는 '30대 가장의 관점'과 '20대 주부의 관점'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신혼부부이자 초보부부, 그리고 한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다양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어서 좀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일 것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두 작품은 꽤나 공통점이 많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어려움과 고민'을 녹아내어서 그들 나름의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고, 또한 이를 '만화형식'으로 풀어내고 있기에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문제제기]와 [대안제시]가 꾸준히 반복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두 작품 모두 읽고 있으면 처음엔 재밌어서 웃지만 웃음이 잦아들 때즈음에는 진지한 '생각할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점이 꼭 닮았다.

하지만 <비빔툰>은 힘들어도 웃고 살자는 메시지를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 <수짱 시리즈>는 30대 독신여성의 고민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끝내 '결혼'을 대안으로 삼지 않았다. 여성의 독립을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수짱과 그녀의 친구들도 모두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리고 결혼을 한 몇몇 친구들도 그리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고, '여성의 고민'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계속 생기기 마련이라는 투로 풀어냈을 뿐이다. 그래서 좀 답답한 느낌이려나? 그럴 거면 왜 그렇게 고민을 했는지, '고민하기 전의 상황'과 달라진 것은 결국 한살한살 먹어가는 '나이'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빔툰>은 화끈했다.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는 한국인답게 연애도, 결혼도 속전속결, 육아전투도 각개전투와 연합작전을 펼치며, 시댁과 처댁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극복과정, 직장과 가정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문제해결 겸 부부싸움, 그럼에도 칼로 물 베는 화목한(?) 가족의 탄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진짜 20년도 더 넘어서 <비빔툰>에 연재된 내용들을 다시 들춰보니 감회가 새로와졌다. 근데 '시즌2'가 나왔더라. '시즌1'도 9편의 단행본이 나왔던데, 아무래도 '시즌2'를 먼저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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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5 - 개혁의 실패와 망국으로의 길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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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 / 휴머니스트 43번째 리뷰] 제5권은 고려 26대 충선왕부터 34대 공양왕까지의 고려사를 다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간섭기'에 이은 '여말선초'에 해당하는 500여년 고려사의 후기의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한 부분은 '공민왕'부터 우왕, 창왕에 이은 '공양왕'까지의 시기만 자세히 배울 뿐이다. 고려 임금의 시호가 '충'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사실상 '원나라의 간섭'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고려임금이라도 고려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었고, 원나라 황제 또한 간섭했다고는하나, 실상은 실세를 누리던 '원나라의 환관(고려출신)'과 '고려의 권문세족(기황후세력)'에 의해 혹세무민하던 암울한 시기였을 뿐이라며 웬만한 역사책에서조차 대충 넘어가던 시절이다. 그나마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많이 다루는 내용이지만, 끝내 '실패한 개혁'이라서 그리 중차대하게 다루지 않고 곧이어 벌어진 '역성혁명의 과정'을 위한 들러리(?) 역할로 끝맺음을 해버리는 것이 고려사 후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박시백의 고려사>는 달랐다. 비록 허약한 왕조로 이어진 '충'자 들어간 임금일망정 비중 높게 다루어서, 그 시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었다. 더구나 '공민왕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 끝에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또한 자세히 조명하였다. 그리고 개혁이 실패하자 맞붙게 된 '친원파(권문세족)'과 '친명파(신진사대부)'가 대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수미쌍관구조를 이루며 마무리하였다. 저자가 밝힌 소감은 '두 저서'의 시간적 공백이 무려 20년인데, '20년 전의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어서 격세지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50대의 노련한 저자가 30대의 패기와 마주하고 있으니 오죽이나 그랬을까. 마치 '노쇠한 왕조'가 저물어가고 '산뜻한 왕조'가 새롭게 떠오르는 장면이 묘하게 마주치는 명장면을 연출했다고나 할까? 암튼 <박시백의 고려사>도 이렇게 마무리 되면서 <조선왕조실록>과 <35년>까지 장장 1000년의 우리 역사를 아우르게 되었다. 이후에는 '격동의 현대사'를 다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그럼 '몽골제국'과 '원나라'는 같은 나라로 보아야 할까? 사실상 '유라시아 대륙'을 거의 다 점령통치한 '몽골제국'은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제국이다. 그런데 '원나라 황제'가 제국의 변방인 여러 '한(칸)국'까지 통치력이 닿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고려'는 비록 원나라에 항복을 하고 '내정간섭'을 받았으나 끝끝내 '원나라'에 복속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오히려 '부마국의 지위'를 얻어서 원나라 황실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원나라가 내부적 혼란으로 약화되었을 때 '주원장'을 비롯한 반원세력이 활약을 할 때, 고려도 '공민왕'에 의해 '반원자주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독립적인 지위와 권력이 없는 상태였다면 그렇게 발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고, '역성혁명' 또한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려의 위상'을 다시금 조정해야만 한다. 고려는 유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력한 나라였기에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고 보전할 수 있었으며, 기회를 틈타 '잃어버린 자주성'을 되찾아 오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고 말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 휘둘리기만 한 '약소국'이었다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힘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제 풀에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고, 주변 강국들이 이를 그냥 좌시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시기적으로도 엄청난 위기속에서 해낸 업적이기도 하다. 즉,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시절에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안으로는 왕권을 침해하는 난이 그칠 줄 몰랐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온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안가는 물론 수도인 개경까지 쳐들어오는 난리통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슬기롭게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들이 겉핥기식으로 대충 보면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끝끝내 망하지 않고 이겨냈다는 점에서 '고려'의 대단한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무려 500여년이다. 태조 왕건이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태조 이성계가 1392년 다시 나라를 세우기까지 무려 5세기에 걸쳐 '강력한 파워'를 보여주어, 근근히 명맥만 유지한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당당히 맞서싸우고 지킬 건 지켰으며 챙길 건 다 챙겨놓고 그 위에 화려한 문화까지 꽃피운 나라가 바로 '고려'라는 나라였음을 우리는 기록에 새겨넣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호'로 '조선'이란 이름을 가장 먼저 썼고, 뒤이어 '한'을 썼고, 뒤이어 '고려'를 썼다. 그 사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라는 <삼국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나라이름을 썼으나, 현재는 '조선', '한', 그리고 '고려'라는 이름을 가장 널리 쓰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를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대한민국'이라 부르는 것, 북쪽의 동포들이 '조선'이라 칭하는 것에서 낯선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국호를 쓰면서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는 자긍심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때 '까레이스키(러시아)', '커우리(중국)'라면서 우리의 '고려'를 낮잡아 불렀다. 또한 '조센징(일본)'이라면서 우리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으려던 치욕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대로' 되갚아주어야 한다. 그 방법은 우리의 <상소리 사전>에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욕설을 등재하는 것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했던 방식 '고대로' 되돌려주는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저들이 욕설로 썼던 우리의 나라이름을 만천하에 자랑스럽게 공포하는 것이다. '조선', '고려', 그리고 '대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고 강력한 나라의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역사'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할 사명이 있는 셈이다. 수많은 외침을 받고도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계승한 것으로도 모자라 더욱 발전시켜서 전세계에 '문화'를 전파하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고 말이다. 오늘날의 '한류열풍'은 우연히 운이 좋아서 불어재끼는 바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저력'이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에서 비롯하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자부심으로 삼아 당당히 보여주어야 한다.

논술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날, 한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왜 한국사는 재미가 없는 거죠? 만날 '침략'만 당하고 땅뙈기도 쬐끄마하고, 그나마 반토막으로 나뉘어서 초라하기 짝이 없네요. 이런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거죠? 부끄럽기만 하잖아요. 저는 차라리 세계사나 배울래요."라고 말이다. 그 당시에는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그 학생에게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유구한 우리 역사의 당당한 모습'을 설파하여 반격을 하려고 했는데, 고조선도 망하고, 삼국도 망하고, 통일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망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강대국들의 전쟁에 휘말려 '대리전'까지 치루고서도 남북대치, 여야와 보수진보 간의 갈등양상에, 현재에도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다 못해 경제까지 휘청거리던 나라꼴 때문에 반박할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결국 답을 찾았다. '대한민국'이 진짜 대단한 이유를 말이다. 그럴듯한 비유를 하자면, 대한민국은 '전세계 5위'를 하는 실력이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대단한 실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건 전세계 1등부터 5등까지 '한 클라스'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10위권, 100위 권 밖에 있는 있는 나라들은 저 멀리에 있고, 하필이면 전교 1등(미국), 2등(중국), 3등(러시아), 4등(일본), 그리고 5등(대한민국)이 한 반에 모여 있어서 '세계적인 클라스'인데도 그 실력이 제대로 돋보이질 않는 셈이다. 대략 전세계 50등을 하고 있어도 아프리카 한복판에 있었다면 '대빵 노릇'하며 저 커다란 대륙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을텐데, 하필 '최상위 클라스'가 대한민국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니 제대로 된 실력을 뽐내질 못하는 셈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전세계 꼴찌'에 '깡패 국가'인 북한도 한 클라스에 속해 있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속에서 '대한민국'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시간속에서 세계적인 탑클라스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 우리가 '한국사'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반만년'동안이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고대문명국의 지위'를 누려도 좋고,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할 수도 있고, '화려한 문화유산'도 풍족하니, 어디에 내놔도 빼어난 역사임에 틀림없다. 또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고유한 문화'를 빼앗기고서 다시 되찾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증거로, 거대한 중국대륙에 속해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았으나 '고유한 언어'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중국 역사속에 등장하는 수없이 '사라진 민족들'을 보라. 그들은 고유한 언어와 글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는 자취를 찾아볼 수조차 없지 않은가. 한때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우리말글'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되찾았고, 오히려 '한자'를 쓰지 않고도 '전세계 모든 문자와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위대함만 세계 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본어'라는 '한글'을 차용해서 일본어를 구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박시백의 고려사>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고려의 위대함'을 일깨우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우리는 더 나아가서 '위대한 한국사'로 새로 정립하여 우리의 자랑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고려사'가 부끄럽지 않게 되었는데, 다른 역사를 부끄럽게 여길 까닭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국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국중심주의에 빠져 역사적 사실까지 날조하고 왜곡하고 곡해해서 유리하게 해석하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사'에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빼앗아 내것으로 만들고도 반성하지 않는 '제국주의적 역사관'이 없기에 자랑스러워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도 전세계 탑클라스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선진국이라 일컫는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우리와 다르다. 그네들은 '침략'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 '문명개화'를 핑계삼아야 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침략을 받은 '피해국가'인데도 꿋꿋하게 버티고 고난을 감내하여 끝끝내 기적을 이루어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걸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에 '침략의 야욕'을 뿜뿜하며 '젊은 청년들'을 생지옥과 같은 전쟁터로 내몰고서 살아돌아오면 '영웅 대접'하며, 장렬히 전사하면 '신과 동급'으로 추증하여 참배라도 올려야 자랑스럽게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사'를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을 펼쳐봐도 감히 그 누구도, 그 어느 나라도 우릴 함부로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저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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