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산책 9 - 뉴 프런티어와 위대한 사회 미국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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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X / 인물과사상사 16번째 리뷰] 1960년대 미국의 대통령은 JFK와 LBJ이었다. 다시 말해,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말이다. 케네디가 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 때 존슨은 부통령을 지냈고,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대통령직을 위임 받았다가 3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진보적 정책을 착실히 실행하였다. 허나 두 대통령은 서로 경쟁 상대였다.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스타일도 달랐는데, 직무적인 능력으로 본다면 젊은 케네디 보다는 연륜 넘치는 존슨이 더 신중하고 착실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단다. 하지만 대중은 케네디를 더 선호했다. 아니 열광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널리 보급되던 시절이었기에 '보여주기'에 능했던 케네디가 미국 시민들에게 더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케네디는 '얼굴과 말만 번지르르한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일은 꼬였고 성과는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섣불리 쿠바를 침공했다가 '소련제 미사일'이 미국의 앞마당(쿠바)에 설치되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에 위기를 초래하는 젊고 방탕한(?) 대통령이 못마땅한 것이었던지 케네디는 끝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온갖 미스터리만 남기고 '암살자'로 지목 당한 오스왈드 또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케네디가 수 발의 총탄에 저격 당해 죽었는데, 오스왈드는 단 한 발의 총알만 쏘았을 뿐이고 그가 쏜 방향(5시 방향)과는 전혀 다른 (11시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케네디의 시신은 '공개부검'도 받지 않고 서둘러 장례식을 치뤘고, 케네디의 부인과 자식들은 장례식장에서 너무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암살자로 지목된 오스왈드는 제대로 된 변론도 받지 못한 채,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기자들을 향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 순간 괴한이 등장해서 오스왈드는 총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사망을 했다. 오스왈드가 총격을 받을 당시에 괴한을 저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괴한은 너무도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렇게 케네디의 암살은 '음모론'이 만들어지기 딱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JFK>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단다.

  하지만 케네디는 미국시민들에게 '전설'로 남았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발표했던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뉴 프런티어'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은 위대한 사회다...그런 미국의 정부는 해줄 것이 없다. 오히려 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미국인들 자신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메시지로 전해지며, 위대한 미국은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젊은 대통령이 이렇게 말을 하니, 뭔가 있어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대통령이 젊은 나이에 암살을 당하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한 일이 별볼일 없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추켜세워준 '미국인의 자긍심'에 더 열렬히 반응했던 것이다.

  이런 '케네디의 전설'을 가장 싫어했던 인물이 바로 '린든 존슨'이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이었고, 자신이 공약한 것은 '해내고 마는 실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텔레비젼 시대'에 걸맞지 않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눌한 말솜씨에 긴장한 것이 역력한 굳은 표정을 짓곤 했던 탓에 국민들로부터 그닥 호감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카메라'나 '녹음기'가 없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게 직무를 다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케네디보다 존슨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지만, 호사가들에겐 존슨은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탓인지 존슨은 '케네디'를 너무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열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활짝 웃기만 해도 "케네디를 따라한다"한다는 언론의 반응을 받게 되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전한다. 그는 그렇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발을 담근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60년대 미국 사회는 '마틴 루터 킹'과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시끌벅적했다. 링컨 대통령 시절에 '흑인노예 해방선언'을 했는데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에 이은 또 하나의 '이기지 못하는 전쟁'에 참전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더구나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을 한다는 명분에 걸맞지 않게 '사살한 베트콩의 귀를 잘라내는 장면'이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송출된 것을 지켜본 미국시민들의 '반전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미정부는 서둘러 '참혹한 전쟁 참상'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입까지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참전용사들 가운데 '흑인병사들'에게는 더 위험한 전투에 투입하는 '차별'이 자행되자, 인종차별에 반전시위까지 미국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1961년 박정희는 5·16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미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를 푸대접하고 만다. 하지만 63년에 케네디가 암살 당하고 64년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자 린든 존슨 행정부는 박정희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인 박정희는 린든 존슨에게 환대를 받았고, 박정희도 린든 존슨을 격렬하게 대접한다. 이렇게 한미간의 혈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날로 커져가는 '공산진영의 확장'에 맞서 한미일 공조를 견고하게 쌓고 싶어하는 미국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일시위를 벌이며 '반성과 사죄 없는'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며 결사반대를 외치지만,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던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게 된다.

  이런 한국국민들의 반대시위를 무마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국경제의 빠른 성장'이라는 선물(?)을 마련하는데, 이른바 '경제성장 5단계설'이다. 날로 확장되는 '공산진영'과는 상반된 성공 케이스로 한국이 낙점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출품을 미국이 대량으로 사들이는 정책을 폈으며, 한국이 원활한 수출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은 '일본배상금'이 아닌 '일본차관'으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성사시켰다. 당장 배가 고팠던 한국의 경제 상황으로서는 피치 못할 '당근책'이었으며, 이로써 한국경제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세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이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주도로 밀어붙인 '한일 국교정상화'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도 없고, 배상금도 한 푼 들지 않은 '면죄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에 대한 처벌은커녕 '피해국의 위기'를 이용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당한 논리'로 벌어들인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피해국을 '놀림거리'로 삼는 일본의 우익집단들의 행패가 날로 심해지는데도 이에 대한 제지도 하지 않고 '당연한 귀결'로 치부하고, 미국은 이를 그저 방관만 하며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태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과연 '무엇'으로 납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된 처사다. 미국은 고종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미국 사회에 날로 번져가는 '반전시위'로 베트남에 파병할 장병이 절대부족해지자 미국정부는 '우방국(?)'들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는데,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가 바로 '박정희 정부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비전투병력인 '비둘기 부대'를 시작으로 '청룡, 맹호 부대'에 이어 '백마 부대'까지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파병되었지만, 그렇게 파병된 '한국군'이 받는 월급은 미군의 6분의 1, 필리핀이나 태국 군인의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군도 미군과 똑같은 수준으로 월급을 올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과 시위가 있었으나, 미국정부는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애초에 '용병 취급'으로 값싼 비용으로 합의한 박정희 정부의 요구와 상반되기 때문이란다. 과연 미국은 '대한민국'을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요리해야 마땅한 것일까?

  '굴욕외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방'이니 '혈맹'이니 떠들기에 앞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얻는 것'도 없이 '퍼줄 것'만 생각하는 자세가 바로 '굴욕외교의 시작'이다. '우방'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차원에서 '도청'을 허용할 거라면 공평하게 서로 도청하는 것을 '합법화'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에게 대놓고 욕할 자신은 없으면서, 대한민국 입법부(국회)를 향한 욕지거리였다는 변명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굴욕외교'란 말이다. 외교관계에 '겸손'을 떨 필요는 없다. 서로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갈라서는 것이 '외교관례'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외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미국의 약점'을 파헤쳐서라도 미국을 꼼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다 못해 '대의명분'에서라도 미국보다 우위에 서서 미국 스스로 쪽팔리게 만들어야 '다음 외교'에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약소국의 비애'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그러니 외교에서 절대 물러서는 모습이나 뒤처지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꿀리지 말라!'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로 결론이 나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된 '대의명분'이 더 크게 작용하는 법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이 고려에 참패한 것도 '외교전'에서 기선제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은 고려를 침공할 '명분'이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더라도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거란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려침공을 했음에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반면에 절대적인 약세였던 고려는 '대의명분'에서 꿀릴 것이 없었기에 싸움에 나서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분 위에 '실력'이 더해지니 불리했던 것이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실력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을 '압도'한다. 하지만 미국은 절대로 한국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 발을 빼는 순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이어 지금까지 '휴전'하고 있는 한국전쟁까지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익이 없어 한국에서 발을 뺀다하더라도 그 순간 미국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보다 형편없는 실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기에 미국은 더욱더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이 미국에 설설 기는 굴종외교를 이어가는가? 과연 굴종외교를 통해 한국이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절대로 고개 숙이지 말라. 우리는 미국을 철저히 이용해 먹어야 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줘서 대한민국이 '대신' 받은 불이익과 불명예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착실히 힘을 키워나가 미국과 일본에게 퍼주다시피 내어준 '국익'을 톡톡히 받아내야만 한다. 그러기 전까지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등쳐먹고 내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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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8 - 미국인의 풍요와 고독 미국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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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II / 인물과사상사 15번째 리뷰]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질 '제3차 세계대전'의 대리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 결과론이라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이다. 글쓴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남북한의 첨예한 갈등부터 '김일성의 오판과 이승만의 무능'에 이르기까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무엇'으로 단정하기엔 너무나도 복잡다단한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분만 보고서 전체를 확증하는 식으로 '한국전쟁'을 논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세계가 '경제특수'를 맞이한 것은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바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도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경기가 되살아나는 것이 눈에 드러날 정도로 확연했기에, '돈벌이'가 된다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국전쟁'에 발이라도 담궈보려 무진 애를 썼다. 이런 호황속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한국민족' 뿐이었다. 한국전쟁 이전 남북한 통틀어 3000만 명이던 인구가 정전 이후에는 24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전쟁통이라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었겠지만, 불과 3년 만에 600만 명이나 죽은 것이다. 이조차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수가 대부분일 것이며, 폭격과 공습, 그리고 학살로 인한 민간인의 사상자까지 포함한다면 가히 1000만 명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중공군의 참전 이후 미군의 대공습과 함포사격은 날마다 이어졌고, '휴전협정'을 체결하기 한 달 전인 53년 6월 한 달만해도 남북한 사상자가 도합 6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7월 27일 이전까지의 한 달간에는 10만 명이 증발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원산 폭격'에서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전쟁기록 하나를 남겼다고 한다. 휴전이 이루어지기 하루 전날 24시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함포사격과 폭격, 그리고 대공습이 이루어졌단다. 당시 함포에서 발사 되는 포탄 한 발의 가격이 '캐딜락 한 대 가격'과 맞먹는다고 했는데, 그걸 24시간 동안 계속 쏘아댈 정도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퍼부은 셈이다.

  이렇게 한반도는 작살이 났지만, 세계경제는 호황을 이루었다.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1차 경제부흥'에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으로 '2차 경제대부흥'에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경제특수를 이룬 나라는 따로 있다. 바로 일본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일본을 '전진기지'로 삼아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생산해서 한반도에 퍼날랐더랬다. 총탄과 포탄 등 전쟁물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리산 빨치산의 투항을 권고하는 종이전단지까지 일본에서 생산해서 한국에 뿌려댔단다. 일본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제 일본은 살았다"라고 말했다고 하고, 한국전쟁을 일컫어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평가했단다. 한국전쟁이 일본에게 준 선물은 이뿐 아니다. 51년에는 미일 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서둘러 맺으며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에게 '면죄부'를 안겨주며 거의 모든 방면으로 일본은 '미국의 파트너'로 승격되어, 일본을 묶어두었던 제재들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미국은 한술 더 떠서 일본을 세계무대에서 '전쟁 가해국'이 아닌 '전쟁 피해국'으로 이미지를 바꿔줄 정도로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정도였단다.

  이로 인해 일본은 '우경화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한국전쟁이란 발등의 불이 떨어진 미국을 돕기 위해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우익인사들이 대거 정계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미국의 비위를 맞춰주었고, 그 덕분에 회생을 넘어 특수까지 얻게 되니, 그로 인해 쌓은 부를 통해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50년대 기적 같은 '흑자전환'을 이루고 60년대 '경제성장'을 이루고 70년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은 풍요로운 경제를 누리며 한국을 비웃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단다.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받은데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일본의 우월감'이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풍조는 일본의 우익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패전으로 인해 '패배감'에 찌들어 살 걱정을 할 정도로 절망에 빠졌는데, '한국전쟁'으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버린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도움으로 '패전국의 멍에'까지 훌훌 벗어던지고 '피해국 코스프레'를 통해 미국과 함께 당당히 세계무대를 누빌 수 있을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8권에서 다룬 '한국전쟁' 부분은 가히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알지 못했던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기 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난 뒤에 세세한 내용을 되새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먼저 미국은 세계대전을 성황리에 마치며 경제대국에 걸맞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더욱 크게 만들었고,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미소 간의 '냉전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냉전의 갈등은 고스란히 '한반도'로 쏠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아픔은 전세계의 경제부흥을 안겨주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미국은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명실공히 '초일류 경제대국'으로 거듭나며 풍요로움의 극치를 누리게 되었고, 유럽과 다른 나라들까지 경제성장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만큼 대박을 터트린 나라는 없었다. 경제호황을 넘어 '전범국가'라는 이미지까지 벗어던지며 미국의 소개를 받아 세계무대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니 말이다. 물론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의 '꼬붕'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꼬붕인 나라가 '경제대국 2위'의 반열에 오르니 꼬붕 노릇을 마다할 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공산주의' 때려잡기에 열을 올리며 풍요로움을 한껏 누렸다. 미국의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문화, 거의 모든 점에서 '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며 나쁜 일도 따라오는 법이다. 그렇게 떵떵거리던 미국이 '한국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휴전 협정'으로 한 발 물러서려 했다. 초강대국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쉬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희생자는 점점 불어났으며, 그로 인핸 피로감은 점점 누적되었고, 이제 슬슬 전쟁이 지겨워질 때가 된 것이다. 미국인들의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급기야 미국대통령은 정당이 바뀌고 말았다. 트루먼(민주당)에서 아이젠하워(공화당)로 말이다. 무려 20년간 민주당에서 배출하던 대통령을 공화당에게 빼앗기도 만 것이다. 그것도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에게 말이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끝이 보였다. 그리고 이를 환영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과 중국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북한은 38선 이북지역이 서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미국은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뽐내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폭탄세례를 안겨준 것이다. 그래도 북한은 낮에는 땅굴속에 숨고 밤이면 게릴라전을 펼치며 끝도 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이는 인해전술을 펼치던 중국군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피로감이 쌓여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은 것이 미국과 유엔군이었다. 계속 전쟁을 하기 바란 것은 오직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는 이승만 뿐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사람들을 총동원시켜서 북진통일을 세뇌시켰으며, 1000만 학도병이 통일을 위해 준비되었으니 미국은 '무기' 지원해달라, 우리는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구호를 앞세워 미국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아이젠하워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을 피해다닐 정도였단다.

  그래도 미국은 '휴전협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주면 휴전을 받아들이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렸고, 미국은 통제할 수 없는 이승만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 조약을 맺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자 이승만도 조약 없이는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으름장을 내놓았다. 졸지에 모두가 원하는 '휴전'을, 대한민국만 바리지 않는 꼴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국군과 한국인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거졌다. 그래도 이승만은 오직 '북진통일론'만 내세우며 국민들을 시위에 동참하도록 내몰았단다. 그렇게 '휴전'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이승만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는데, 전쟁을 종식하고 포로교환을 성사시키려던 미국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마저 '석방포로'를 재수용을 요구하며 진정시키려 했는데, 이승만은 결사반대를 외치며 휴전협정을 완강히 거부하고 만다. 그럼에도 휴전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되었다.

  휴전이 성립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더이상 전쟁을 치룰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8선 이북 전지역이 초토화 되었고 희생자는 날로 늘어나고 미군의 포격은 끝도 없이 이어지니 하루도 편히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투는 지리멸렬하게 막상막하의 공방을 이루었다. 고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마다 땅따먹기하기가 일쑤였고, 그로 인해 수 만의 전사자가 날마다 나왔고, 수십 만의 전사자가 매달 나왔으며, 수백 만명의 전사자가 해가 넘어갈수록 넘쳐났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한국전쟁'을 애초에 시작한 이가 '김일성'이었단 것이다. 그가 시작한 전쟁인데 이기지도 못하고 휴전을 하면서 '성공'이라고 자축하고 있으니 '한국전쟁'이 얼마나 오판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만 하다.

  이승만의 무능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전쟁이 발발할 조짐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을 갔으며, 국민들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통령 자리보존'에만 열을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자 모든 권한을 '위임'해버리는 무능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깽판을 놓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는지 가는 곳마다 '트러블메이커'로 톡톡히 일을 해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전쟁을 빠르게 종식할 수도 있었는데, 북진통일을 외치며 한국군 단독작전으로 북진을 했다. 흥남철수와 일사후퇴로 마무리 되었는데도 미군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북진통일'을 외쳤고, 서울재수복을 하고 난 뒤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든 권한을 위임해버려 할 일이 없음에도 국민들을 선동질시켜 '반공정신'만 투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온국민을 '희생양'으로 삼고서 얻고자 한 것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온국민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오죽했으면 미국이 앞장 서서 '이승만 암살'을 논의했겠는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이고, 예측불허의 사람으로 타고난 협잡꾼 노릇만 일삼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온 국민들은 이승만 편을 들었다. 이승만의 말이 백 번 옳다고 두둔했다. 이승만이 원하면 무슨 일이라도 따랐다.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국민들이 정말 대단할 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어디 갔는가? 이승만이 내세운 '북진통일론'을 온국민의 90%가 찬성하고 지지했단다. 행여나 반대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가는 현실속에서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리 전쟁통이라고는 하나 '자성의 목소리'는 귀 기울일 법도 하다. 전세계가 바라는 '휴전'인데, 당장에 죽어나가는 국군과 한국민간인 들은 안중에도 없었단 말인가? 끝내 휴전에 반대해서 이승만은 '휴전협정서'에 사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종식되자 북한 김일성은 매년 7월 27일을 '승전기념일'로 삼아 대대적으로 축제를 벌이고 공휴일로 삼았단다. 미국의 오바마는 7월 27일을 '한국전쟁참전용사의 날'로 정해 조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하자며 성조기를 조기로 달며 매년 기념을 한단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무런 입장 발표가 없다. 휴전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국군장병들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이승만은 그토록 '북진통일'을 바라며 온국민들을 전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왜 그들의 공로와 아픔을 치하하지도 보듬어 주지도 않았느냔 말이다. 이승만의 뒤를 이은 정권들도 묵묵부답이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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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7 - '뜨거운 전쟁'과 '차가운 전쟁' 미국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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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I / 인물과사상사 14번째 리뷰] 이 책의 구성은 '미국사'를 중심으로 한 편년체 방식(연월일 시대순)으로 기술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 사이사이에 벌어졌던 '주요사건들'을 기사본말체(사건별로 역사서술) 방식으로 풀어낸 역사책이다. 특히, 미국과 관련된 '한국사'에 대한 비중도 깊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사에 대한 서술이 일품인 책이다. 7권에서 다룬 내용 가운데 한국사와 관련이 깊은 내용은 '해방 뒤에 분단된 한국'과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즈음에 미국은 이미 패권국가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으며 '가공할 만한 힘'을 전세계에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히틀러'를 찍어 누를 때와 '히로히토 일왕'을 압박할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일이 패망할 즈음에 히틀러는 '자살'을 할 지경이었지만, 일제가 패망할 때에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랜 친구를 배려(?)하듯 최대한 양보하는 듯한 뉘앙스가 엿보일 정도였다. 이는 전범을 다루는 '방향'에 대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독일은 그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특히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에 대해서 추호의 용서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일제의 처우는 달랐다.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에 대해서 관대하기 짝이 없게 단 7명에 대해서만 사형을 집행했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머지 잡범(?)들은 석방되었고, 심지어 과거의 경력을 높이 사서 일본의 주요관직에 속속 복귀할 수 있었다. 조선인을 비롯해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부대 관련자들은 '연구자료'를 미국에 고스란히 넘기는 조건으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강연에 초빙을 받아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발표할 정도로 안락한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누구도 불명예를 받지 않았고 유명 대학과 제약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호의호식을 받으며 살아갈 지경이었단다.

  오히려 해방 이후 일제의 범죄에 대한 죄값을 받은 건 '한국'이었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패망하고 분단되었어먀 마땅했는데, 오히려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맥아더의 호의(?) 덕분에 분단이 아닌 '통일'을 유지했는데, 한국은 북쪽으론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군사정권'을 만들어 신탁통치를 강요받은 것이다. 이유는 한국에서 일어날 소요사태를 단속하고 통일정부를 이끌어나갈 정도로 막강한 단체나 지도자를 내세울 수 없을 정도로 '지도부의 분열'과 더불어 '국민들의 사상적 분열'이 매우 심각했다는 분석 때문이었단다. 이는 해방이 되자 서로 일제로부터 '정권 이양'을 받겠다는 인물이 스무 명도 넘게 등장했고, 단체 또한 너무 많았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이 때문에 한국 분단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에서 찾는 경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국의 철저한 '한국 무관심'에서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국은 분명 제국주의의 피해당사자인데도 미국 행정부는 이를 '완벽한 무지'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무시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서 입국할 때 환영하는 한국인들이 치안을 맡은 '일제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한국인을 죽인 일제경찰에 대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팩트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군은 한국을 '해방' 시킨 것이 아니라 '점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렇게 주둔하게 된 미군은 한국을 다스리면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보다 더욱 가혹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일본인들을 철저히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뒤에 쥐 죽은듯이 얌전한 일본인들 부드럽게(?) 다스린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초지일관' 무관용으로 대응하며 '공산주의의 확산'만을 면밀히 주시하며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런 미군정의 자세는 일제가 물러난 한국에 비극의 씨앗을 남겨주었다. 바로 독립운동을 한 이들에게는 모욕감을 주고, 친일행적을 일삼았던 무리에게는 영예를 안겨 준 것이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했던 나라는 한반도의 조선 뿐만이 아니었다. 만주국을 세워 수많은 만주인과 몽골인 들도 일제의 식민통치로 억압을 받았으며, 대만도 총통을 둘 정도로 철저한 관리를 했고, 유럽 열강의 통치를 받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제도의 식민지들을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점령을 하고 억압하고 수탈했었다. 그 가운데 일제에 끈질긴 항거를 하고 전투를 일삼고 끝까지 저항을 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조선인들에게 치열한 투쟁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한국인'들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강제 점령(?)을 강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게 적절한 어필을 못한 탓으로 봐야할까? 유럽과 태평양이라는 '양대 전선'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쥔 초강대국에게 우리가 어필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38선을 긋는 것도 고작 '30분간의 회의' 끝에 일방적으로 그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개무시를 하는 미국에게 우리의 어필이 통하기나 했을까?

  물론, 미국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을 것이다. 바로 '공산주의와의 대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에 곧바로 '냉전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뜨거운 전쟁에서 차가운 전쟁으로의 전환은 이미 독일과 일제가 패망하기 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북쪽에 '소련군'이 진군하였고, 이미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발빠른 진격(?)'은 미국으로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 몰랐던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한 것부터 오판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일제가 허무하게 항복할 줄도 몰랐고, 소련군이 일본 본토가 아닌 한반도로 진격해갈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소련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도선'으로 한반도를 양분하기로 통보한 것이고, 이는 두 나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단다. 미국은 소련이 순순히 받아들일 줄 몰랐고, 소련은 미국이 이처럼 후하게 남하할 수 있도록 배려(?)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그어져버린 '38도선'은 지금까지 한반도를 '분단'시켜 버린 원흉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미국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미국 사회는 온통 '자신감'으로 넘쳐났고, 그런 자신감은 '힘의 과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에 '고립주의'를 외치던 미국은 이제 본격적인 '세계화'에 나서며 국력을 과시하고 국익이 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1945년 이후 미국은 '자본주의'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전세계를 주름잡으려는 포부를 공공연하게 내비쳤다. 반면에 소련은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뽐내며 초강대국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존심을 넘어 '압도'할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미국적인 세계화에 번번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른바 '냉전시대'다. 그리고 그 냉전의 종착점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미국내에서는 '매카시 광풍'이 불면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데 열을 올리며,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가릴 것이 없이 탄압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그 광란의 분출구를 빠르게 한반도로 '유도'하는 양상이었다. 그에 반해 소련은 한국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탄탄히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며 미군에게 무기를 달라고만 요구했다. 이승만에게 그럴 듯한 대안이라도 있었다면 미국이 '무기'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 못지 않게 '반공주의' 노선을 확고히 했던 이승만이 고마워서라도 도와주는게 인지상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언제나 말로만 앞세웠고, 실제로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를 간파한 미국은 오히려 '미군철수'와 동시에 쓸만 한 무기로 일체 회수해가버렸다. 무기를 남겨두었을 때 이승만이 저지를 무모함을 우려한 탓이다. 거기에 '애치슨 라인'까지 그으며 한국에서 철저히 발을 빼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냉전'이 새로운 '열전'으로 전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할 수만 있다면 소련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은 참전했고 '노근리 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적 행태는 한국전쟁을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었다'는 언론의 보도보다 더 끔찍하게 한반도를 달구었다. 그 참혹한 전황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으로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다. 당시 트루먼 미대통령은 '38도선의 회복'으로 전쟁을 일단락 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선넘는' 무모함은 전쟁을 장기화 시켰으며 중공군의 참전을 불렀고, '흥남철수'와 '일사후퇴'로 전황은 더욱 급박해졌고 전투는 더더욱 치열해졌다. 서로 물고 물리는 악전고투 속에 양측의 '희생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전선은 사나운 맹수의 아가리처럼 들쭉날쭉 하길 반복했다. 이런 와중에 맥아더는 중국본토에 원자탄 26발을 투하하여 공산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이미 세워두었단다. 이를 내심 바랐던 것이 이승만이고 말이다. 허나 맥아더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을 통해 전세계 공산세력을 궤멸시켜 냉전까지 종식시키겠다는 야심에 있었다. 이에 반해 트루먼은 전쟁은 '한반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입장이어서 둘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승자는 맥아더가 아니었다.

  만약, 맥아더의 야심대로 중국 본토와 만주에 원자탄을 떨어뜨리고, 대만의 장제스가 본토 진격을 했다면, '한국전쟁'은 곧바로 종전을 했고, 이승만은 통일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기 때문이라는 환상(!)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일제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매일 반복되는 미군의 '대공습'으로 이미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서두른 것도 아니었다. 항복을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미군에 피해를 안겨 유리한 고지를 점한 뒤에 '협상 테이블'에서 항복을 조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서둘러 미국에 항복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속셈으로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중공군을 지휘하는 모택동(마오쩌둥)은 항복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원자탄 26발을 얻어 맞으면 전쟁이 종식되고, 전세계 공산세력도 함께 궤멸할 것이라는 환상은 빨리 깨는 것이 다행이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구상은 오히려 소련의 한국전쟁 참전을 불러 일으켰을 공산이 크며, 그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와중에 '한반도'는 어땠을까?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이 되어 한반도는 조금이나마 평화로웠을까?

  이와 더불어서 맥아더를 '한국전쟁의 우상'으로 삼는 것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백인우월주의자였다. 실제로 그는 항복문서를 조인한 '일왕'을 대신해서 일본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즐기던 고루한 인간이었다. 전근대적인 정복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을 넘어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수호받는 것이 마땅한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단 말이다. 만약 그가 '한국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면 일본에 이어 한국마저 '자신의 왕국'으로 삼았을 것이다. 무능한 이승만은 그런 맥아더의 뒤치닥거리나 하면서 콩고물 얻어 먹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과거에 젖어서 현재를 망각하고 미래를 망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 곤란하다. 남북분단에 이어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도 아픈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정'을 걷어찰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다시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은 '지상천국'으로 여겨질 것이다. 절대로 전쟁만큼은 두 번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선 안 된다. 우리에게 '미국사 공부'가 필요한 까닭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닌 대한민국의 이익을 우선하기 위해서다. 철저히 공부해서 우리가 당한 만큼(?) 미국을 이용해먹자는 거다. 그들이 우릴 이용해 먹는 것이 '국제관계의 민낯'일텐데, 우리라도 당하고만 있어야겠느냔 말이다. 제대로 빨대 꽂고 쪽쪽 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버릴 수 없다. 대한민국을 잃으면 미국도 잃을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갑질'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역사를 꿰뚫어보면 그 방법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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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협려 1 - 활사인묘
김용 지음, 이덕옥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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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 / 김영사 31번째 리뷰] 이 책 <신조협려>는 김용이 쓴 '영웅전 3부작'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부에 해당하는 <사조영웅전>의 주제가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면, <신조협려>는 '정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정(情)을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신조협려>의 무협영웅들은 하나 같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애정에 집착하고 목숨까지 걸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신조협려>의 주제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 도입부는 너무도 유명해서 '홍콩영화'를 즐겨본 이들이라면 한 번만 들어도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원래는 금나라 시인 원호문의 '안구사'의 한 대목인데, 김용은 이 시를 통해서 <신조협려>를 통으로 써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조협려>의 등장인물들은, 특히 젊은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조협려>의 시대배경은 금나라와 몽골이 한창 싸우던 '남송시대'지만, 칭기스칸이 죽은 뒤에 몽골이 금을 멸한 뒤에 남송까지 차지하려 야욕을 드러는 때다. 이에 한족(남송인)들은 몽골의 군대에 맞서 결사항전을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몽골이 중원을 차지한 뒤 '원나라'를 세우기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소설속에서는 곽정과 황용이 한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끝까지 항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곽정과 황용이 승승장구하는 반면에 전세는 기울어 남송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고 만다. 이런 시기인데도 젊은 남녀들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려 싸우기보다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살짝 의아스럽기까지 하지만, 피비린내나는 전장터에서도 사랑은 꽃을 피우기 마련(?)이라는 것인지 김용은 과연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과 사를 같이하느냐?'고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신조협려>의 주인공은 단연 '양과와 소용녀'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양과는 <사조영웅전>에서 곽정과 의형제를 맺었던 '양강의 아들'이다. 양강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를 아버지로 섬기는 패륜을 일삼다 비명횡사한 탓에 양강의 아내였던 목염자는 아비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를 낳고 외롭게 살아간다. 이를 딱히 여긴 곽정과 황용이 목염자를 돌봐주려 하지만 거절하고 만다. 하지만 의형제 사이였던 곽정의 호의마저 거절할 순 없었기에 양강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되는데, 이름은 '과', 자는 '개지'로 한다. 아비의 과오를 잊지 말고 잘못을 고치라는 뜻을 담았다. 우리식으로 이름을 지으면 '양잘못', '뉘우침' 정도가 될텐데, 외국의 이름은 이렇게나 '직설적'이라서 황당한 경우가 많다. 아무리 아비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이름을 '부정적'으로 짓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굳이 우리식으로 이름을 말하자면, '양바름'이른 뜻을 담아 '양정(楊正)'이라고 지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소용녀는 양과보다 두 살 많은 설정이지만, 어릴 적부터 무덤속에서 살아온 터라 피부가 새하얗고 청순가련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20대가 넘어서도 소녀 같은 미모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허나 무덤에서 적막하게 살았고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는 탓에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성미라서 아이돌급의 미소녀인데도 냉랭하기 그지없..좋게 말해 차분한 미녀다.

  결국,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소용녀가 젊은 나이에 죽기 때문인데, 양과는 팔 한 쪽을 잃고 외팔이가 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키고 싶었던 첫사랑의 여인이 죽자 평생을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잘생김'은 떨쳐내지 못한 탓에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고 마는데, 그 가운데 곽정의 둘째딸인 '곽양'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용녀를 잃고 아파하는 양과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양과 때문에 곽양도 평생을 홀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홀로 무예를 닦아 '아미파'를 창시하게 되니, 훗날 3부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아미파의 여검사 주지약의 오랜 선배가 된다. 이렇듯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야기'가 <신조협려>의 이야기는 수많은 '무협지'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만들게 된 '암연소혼장'이란 무술에서 따온 고한우의 <암연>이라는 노래는 그 쓸쓸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하겠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늘만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와
   마주댄 그대 볼에 눈물이 느껴질 때는 나도 참지 못하고 울어 버렸어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은 이렇듯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런 둘의 사랑을 멀찍이 바라보던 '곽양'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픔에 빠져버렸고 말이다. 어쩌면 <신조협려>에서 사랑에 성공한 이들은 '찐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닌 것처럼 가슴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협려> 1권에서 이야기의 서문을 여는 것도 바로 사랑이다. 적련선자 이막수와 육전원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외모를 지닌 청춘남녀였는데, 둘은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냐면 육전원의 앞에 '하원군'이라는 절세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육전원과 하원군은 서로 첫 눈에 사랑에 빠져서 만나자마자 혼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막수는 육전원과 썸만 타다가 '사랑고백'을 하기도 전에 사랑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렇게 첫사랑에 실패한 이막수는 '악독한 미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살생을 저지르는 악행을 일삼는데, 그 첫 번째 행패가 바로 육전원과 하원군의 혼례식이었다. 그때 대리국 천룡사의 고승에게 제압 당한 이막수는 앞으로 10년간 이 부부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났는데, 시간을 훌쩍 지나 바로 10년 째 되는 그날에 이막수가 찾아와 육전원 부부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진즉에 틀어져 육전원과 하원군은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일찍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런데도 이막수는 육전원의 동생 내외를 비롯해서 그 집의 식솔들을 전부 살육하겠다고 쳐들어오니, 과연 사랑에 눈 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서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도 있고, 사랑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미워하고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마저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분노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음..여자 손목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총각은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다(--)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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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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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 / 파람북 1번째 리뷰] 나는 학창시절에 '작문시간'이 가장 싫었다. 책읽기를 딱히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읽으라고 나를 내모는 것이 너무 싫어 책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참 싫어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쓴 글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늘 낮은 평가만 받고 질책만 받으니 쓰기 싫었던 거다. 내가 쓴 글이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합당'했다. 지금의 나라도 어린 내가 쓴 글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내가 쓴 글에 '내 생각'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 글에 낮은 점수를 주면서 '느낀점(생각)'을 함께 쓰라고 한결같이 지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좀처럼 '느낀점'을 쓸 수가 없었다. 왜냐면 책속의 내용은 다 기억이 나고 줄거리도 줄줄 읊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데, 뭘 더 '생각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펀지, 그 자체'였다. 줄줄 외우고 따라하는 것들은 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을 표현하라는 것에는 늘 빵점이었다. 이를 테면, '이것'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물음에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그런 나를 다그치면 난 늘 '이것'에 대한 '사실적인 답변(정보)'만 줄줄 말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런 거' 말고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다! 라고 다그쳤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이란 걸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각'만 나에게 강요할 뿐, '내 생각'을 말하면 버릇 없다, 발칙하다, 그런 걸 도대체 누구에게 배웠느냐 면서 늘 혼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눅이 든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길 꺼렸었다. 아니, '내 생각' 따위를 표현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자기방어'를 먼저 배운 나는 그저 '어른들의 생각'을 외워서 얘기할 뿐이었다. 그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책속의 내용을 달달 외워서 글로 옮겨 적을 뿐, 내 생각을 담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던 나는 학창시절 내내 고통스런 작문시간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도 나는 '학력고사 세대'였다. 그래서 달달 외운 것만으로도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저마다 다른 것에 대해 나는 깜짝 놀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들을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이 나에겐 너무도 낯설었다. 도대체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마다 생각을 줄줄 읊어대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꽤나 흥분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나는 말 한마디 뻥긋할 수 없었다.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여서 나는 그 후로도 10여 년간 '표현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으며, 아기가 '첫 단어'를 내뱉는 것과 같은 긴 기다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 즈음이 되어 만난 쥐스킨트의 <향수>를 리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그 책을 소개했다. '그루누이는 사람들의 정과 사랑에 굶주린 절대고독에 빠진 존재이다'라고 말이다. 그루누이는 살인자다. 최고의 향수를 제작하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만을 골라 '그녀들의 채취'만을 뽑아내 절대적인 매혹의 향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맡으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을 못차리고 오직 '본능적인 인간, 그 자체'가 되게 만드는..그야말로 '냄새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매우 흡족해하며 '냄새'로 온갖 것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는 권능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 그루누이는 공포심에 깃들게 된다. 온갖 냄새를 구분하고 심지어 부릴 줄(?)도 알게 된 자신에게서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루누이는 채취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루누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어깨라도 부딪히면 부딪힌 상대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분명히 '느끼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딪혔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래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마저 제조해버린다. 달리 '냄새의 신'인가. 그루누이는 땀냄새를 비롯해서 구취, 암내, 발꼬랑내까지 손수 만들어서 알맞은 부위에 적절하게 뿌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루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냄새를 풍기는 그루누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루누이는 그 평온한 일상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자신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찰나에 그루누이는 자신이 벌인 '엽기적인 살해 행각'이 발각되고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그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결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 슬퍼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향수병을 열고 향수를 뿌린다. 자신이 제조한 최고의 향수를 말이다.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제정신을 못차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행복감에 충만한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루누이는 또다시 '군중속의 고독'을 절감하게 된다. 자신은 또다시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다. 제정신을 차린 군중을 자신을 죽이려 들테고, 제정신 못차린 군중은 자신을 추앙할테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은 설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느라 광란에 빠진 광장을 벗어난 그루누이는 한때거리의 사람들을 만나자 자신의 온몸에 '그 향수'를 뿌리고 만다. 향기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고 향기에 취해 그루누이를 탐하고 그자리에서 그루누이를 먹어버리고 만다. 그루누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평생을 외롭고 쓸쓸한 절대고독자로 살아온 그루누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뱃속에서나마 존재감을 드러냈다. '포만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내용으로 <향수>를 리뷰하게 되면서 나는 '나만의 표현법'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리뷰를 했지만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은 분명히 '이때'부터였다.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나만의 글'을 쓰는 첫발을 내민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리뷰어가 되었다. 돈벌이가 되지 않아 '본업'이 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내 목표가 있다면 내가 쓴 글로 엮은 책을 내는 것이다. 아직 그럴 정도로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으며 실력은 더욱 형편이 없지만 말이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을 읽으며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글쓴이 김미옥의 글을 읽으며 한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도 했더랬다. 글쓴이와는 달리 나에겐 책을 읽고 '책이야기'를 나눌 지인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책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가족 가운데 책을 읽는 이가 아무도 없고, 절친이라고 할만한 친구들도 '책이야기'라면 쥐똥만큼도 듣지를 않으며, 책모임 같은 곳을 찾아다닌 적도 있지만, 책은 핑계일 뿐 뒷풀이로 즐기는 술을 마실 생각뿐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나도 글쓴이만큼 '활자중독자'로 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변엔 '나의 생각'을 공감해줄 사람이 거의 없다. 딴에는 내가 <향수>에 흠뻑 빠진 것도 이런 환경탓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루누이처럼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은..아직 '냄새의 신'에 버금가는 '리뷰의 신'이 되지 못한 형편없는 내 글빨 덕일지도...

  서론은 이쯤하고,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쉽게 말해 '독후감 모음집'이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에세이 형식'으로 옮겨 적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난 수필보다 '독후감'이란 표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김미옥 글쓴이가 쓴 글은 분명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글'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뭉뚱그려 '신변잡기적인 글모음'이라는 수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독후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글쓴이가 이 책에서 밝힌 '책목록'과 '내가 여태껏 읽은 책목록'이 사뭇 달라 '독후감'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글쓴이가 읽은 책의 '주제'는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이 언급하는 내용과 '상통'하는 주제들이 많았기에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독후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사실 '독후감'과 비슷한 용어로 '서평'이나 '리뷰'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솔직히 '서평, 리뷰'따위는 '독후감'에 비하면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전자는 '홍보, 광고효과'를 노리고 마켓팅의 일환으로 쓰여지는 일이 빈번하지만, 후자인 '독후감'은 직접 책을 사서 읽고 느낀점을 썼다는 느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표현'에 연연하지 않고 쓰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분류법'으로 나누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리뷰'가 더 정진을 해야만 '나의 독후감'으로 승격될 것이라고 본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암튼, 글쓴이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책을 읽되 책의 내용을 '옮겨' 적는 수준을 넘어 '나만의 느낌이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써야 제대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갈고 닦아나가면 '내 글(독후감)'을 읽는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것을 글쓴이의 표현에 빗대자면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것일테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김미옥 글쓴이는 수많은 팬들에게 "어떻게 하면 글쓴이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어요?"라는 질문도 상당히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이는 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물음에 답을 알고 있다. "읽지만 말고 쓰세요." 글쓴이도 똑같은 답변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읽으면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멤돌게 하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 생각을 말과 글로 비로소 '표현'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서로의 생각을 비교분석하면서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책속의 명문장을 '베껴 적는 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법적으로 '표절'이며,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굶어죽는 현실에서 '남의 글을 베껴서 옮기는 일'만큼은 좀 자제했으면 싶다. 물론 널리 알리고픈 순수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굶어죽는 비극은 여전하다. 그러니 감동스런 책을 읽었다면 '그 감동'을 자신만의 느낌을 살려 표현해서 '그 책'을 직접 사서 읽게 해주면 비극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모르겠다. 쨌든, 그렇게 글을 차곡차곡 써나가다보면 어느새 '김미옥' 글쓴이처럼 독후감을 써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글쓴이도 답을 달았을 것이다. 왜? 내가 바로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정말 글을 못쓰는 잼병이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을 소개하는 한 문장을 남기고 글을 마치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한데, [읽거나 죽거나(Read or Die)]다. 수많은 활자중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독서가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읽는 것'은 행복이다. 그 행복에 충분히 젖어야 비로소 글도 써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 된다. 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바로 그 '또 다른 행복'을 전해주는 책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다.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지만 오직 '읽힌 책'만이 행복을 전할 수 있고, 그 행복을 만끽한 독자만이 '또 다른 행복'을 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찐한 행복을 담은 독후감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이 된다. 앞으로 '활자중독자'가 아닌 '예술가 김미옥'을 만나고 싶다.

파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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