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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1 : 위대한 마법사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
L. 프랭크 바움 지음, W.W. 덴슬로우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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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 / 문학세계사 2번째 리뷰] 우리에게 익숙한 <오즈의 마법사>의 원래 제목은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프랭크 바움이 쓴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출간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독자들이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후속작'을 써달라고 요청을 했고, 이에 바움이 첫 책을 출간한 지 1년 뒤에 '후속작'을 쓴 것을 시작으로 무려 14편의 시리즈를 펴냈고, 그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서 <오즈의 마법사>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무려 100년도 더 된 1900년에 쓰여졌다. 이렇게나 오래된 동화책이 오늘날까지도 전세계 어린들을 매혹한 까닭은 무엇일까? 안델센이나 라퐁텐의 동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공주와 그런 공주를 찾아다니는 백마 탄 왕자가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년과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온갖 동물과 사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마녀가 등장하는 '환상의 나라' 오즈에서 뜻밖의 모험을 펼치기 때문에 현대의 어린이 독자들도 쉽게 빠져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것이 더 '환상적'일지도 모르겠으나 말이다.

  암튼, 14편이라는 대작의 첫 번째 이야기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캔자스에 살고 있던 도로시라는 소녀가 엄청난 소용돌이(토네이도)에 날려가다 우연히 도착한 '오즈'라는 나라에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다. 그렇게 도착한 도로시는 도착하자마자 사고를 치게 된다. 바로 바람에 실려 날아간 집이 '동쪽나라의 마녀'의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즉사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도로시가 원했던 것이 아니지만 '나쁜 마녀'에게 시달리던 뭉크킨(오즈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뭉크킨 사람들은 도로시에게 감사를 표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도로시는 원래 살던 캔자스로 돌아가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 슬퍼할 아저씨와 아줌마가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즈에 살고 있는 뭉크킨들은 '캔자스'가 어디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어 도와줄 수가 없게 된다. 이때 마침 '나쁜 마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착한 북쪽 마녀'가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보라고 말한다. 오즈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위험과 마주할 수 있으니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키스 마크)'을 도로시의 이마에 찍어준다. 그리고 동쪽 마녀가 죽고서 남겨둔 '은구두'도 챙겨 신고 말이다.

  그렇게 떠난 길에 도로시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그리고 '사자'를 동료로 만난다. 이들도 각각 오즈에게 말할 소원을 갖고 있는데 허수아비는 '생각할 수 있는 뇌'를 갖고 싶어 했고, 양철 나무꾼은 '마음 따뜻한 심장', 그리고 사자는 겁이 많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였다. 그렇게 도로시와 세 명의 동료는 오즈를 찾아 함께 떠난다. 물론 도로시와 함께 오즈의 나라에 도착한 강아지 토토도 함께 말이다. 그리고서 이들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숱한 모험을 겪게 된다. 그때마다 허수아비는 '반짝이는 생각'으로, 양철 나무꾼은 '따뜻한 마음'으로, 겁쟁이 사자는 '물러서지 않는 용기'로 위기의 순간을 이겨내게 된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에매랄드 성'에서 오즈와 만나게 되지만, 오즈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에 '서쪽 나라의 마녀'를 죽이고 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게 또다시 모험을 떠나게 된 '도로시 일행'은 나쁜 마녀의 강력한 힘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꼼짝하지 못하게 당하고, 도로시와 사자는 마녀의 노예로 잡혀가게 된다. 서쪽 마녀는 도로시가 신고 있는 '은구두'를 뺏기 위해 도로시와 사자를 당장 죽여버리려 하지만,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이 새겨진 도로시를 어찌하지 못하고, 도로시는 사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죽더라도 마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노예처럼 마녀의 시중을 들던 도로시는 서쪽 마녀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서쪽 마녀에게 물을 끼얹어셔 죽여버리고, 마녀가 갖고 있던 '황금모자'를 이용해서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사자와 함께 오즈가 살고 있는 에매랄드 성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제 오즈가 도로시 일행의 소원을 들어줄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 오즈는 '위대한 마법사'가 아니라 '위대한 사기꾼'이었다. 오즈라 불리는 아저씨도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서커스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열기구에 올랐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곳, 오즈까지 날아오게 되었고, 하늘에서 날아온 아저씨를 '위대한 마법사'로 착각한 오즈의 사람들은 그를 왕처럼 모시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사기꾼의 기술을 이용해서 마녀가 살고 있는 '오즈'를 잘 다스려왔지만, 나쁜 마녀가 살고 있는 동쪽과 서쪽의 마녀를 처치할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쁜 마녀들이 에매랄드 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까닭도 역시 '사기꾼의 기질' 덕분이었다. 그러다 동쪽 마녀를 단번에 죽여버린 도로시를 이용해서 서쪽 마녀까지 없앨 수 있었으니, 비록 사기꾼에 불과했지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사자의 소원을 일사천리로 들어주며 해결을 하지만, 도로시의 소원인 캔자스로 되돌아가기는 '속임수'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즈는 거대한 열기구를 만들어서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약속했지만, 약속시간에 토토가 달아나는 바람에 도로시를 태우지 못한 열기구가 훌쩍 날아가버리고 만다. 홀로 남겨진 도로시는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이제 도로시 일행들은 착한 마녀가 살고 있다는 오즈의 남쪽나라로 향한다. 그 사이에 허수아비는 에매랄드 성의 왕이 되지만 남쪽으로 함께 떠난다. 자신들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아직 도로시의 소원이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남쪽 마녀 글린다가 살고 있는 곳까지 찾아갔지만, 마녀에게는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로시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왜냐면 동쪽 마녀가 신고 있던 '은구두'에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쪽 마녀가 탐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기뻐서 얼른 '은구두'를 이용해 토토와 함께 아저씨와 아줌마가 살고 있는 캔자스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위대한 마법사 오즈>에 깔려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애초에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뛰어난 자산과 재능을 갖춘 능력자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란 말이다. 허수아비는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갖고 싶어한다.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자신'의 몸뚱이로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뇌'를 가지게 되면 그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만나러 모험을 떠났지만, 허수아비의 소원은 이미 모험을 떠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허수아비가 일행이 위기에 겪을 때마다 '뛰어난 판단'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양철 나무꾼도 마찬가지다. 차디찬 양철로 자신의 몸을 바꾸어 버리자 자신에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그건 사실 뭉크킨 처녀와 너무나도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었다. 이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도 늘 겪는 아픔이다. 그래도 차가운 마음이 아닌 뜨거운 심장을 갖고 싶었던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 일행과 모험을 떠나면서 '따뜻한 마음'을 되찾게 된다. 일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단단하고 튼튼한 '몸'을 이용해서 도로시 일행을 위기에서 구해냈기 때문이다. 이는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겁쟁이 사자는 어떠했는가? '동물의 왕'답지 않게 조그만 몸집의 강아지 토토와 들쥐를 보고도 깜짝 놀라는 겁쟁이처럼 보였지만, 이는 사자가 '착한 마음'을 지녔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왜냐면 사자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무서운 괴물과도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용기가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던 일이다. 더구나 도로시 일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 '사자의 용맹함'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떠난 모험은 진즉에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로시도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힘'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다. 바로 오즈의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동쪽나라 나쁜 마녀'의 은구두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부터' 능력을 갖고 있던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와는 조금 다른 성격이긴 하지만, 이는 도로시가 '환상의 나라'에 도착하면서 갖추게 된 힘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즈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그런 힘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애초부터 소원을 이룰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이들은 '모험'을 떠난다. 왜? 그 모험은 바로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깨우치는 과정이자 동시에 계기였던 것이다. 만약 도로시 일행이 '모험'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써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이 이루고 싶었던 소원도 영원히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모험은 이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읽은 독자들도 '모험'을 망설일 까닭이 없다. 아니 '모험'을 떠나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모험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이라고 살짝 바꾸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색다른 곳'을 경험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몸으로 직접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모험을 떠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 여러분들이 '독서'를 하고, '학업'을 하는 것도 모험을 떠나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직접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체험'말고 '간접체험'으로도 얼마든지 견문을 넓히고, 사고력과 안목을 높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행하는 실천력이다. 도로시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목적'을 정하고 떠나보는 것이다. 오즈에서처럼 '노란 벽돌길'을 따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미 '검증된 방법'이고, '능력자들'이 미리 걸어봤던 길이기에 아주 좋은 가이드(멘토)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떠나는 모험도 좋다. 그렇지만 때로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해보는 용기를 가져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더구나 그 길은 '당신이 처음 개척하는 길'이 될테니, 그 길을 통과해서 '성공'에 다다른다면 선구자가 될 수도 있고, 뛰어난 리더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애초에' 당신이 가진 능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 가운데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만큼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동화이며,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끄집어낸 실력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중요한 것은 '알면, 실천하라'는 단순한 진리다. 그 진리는 '애초부터' 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으로 찬란히 빛나게 된다. 이런 진리는 '어린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시작'만 한다면 가능케 할 것이다. 진리는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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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2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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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LIII / 넥서스Friends 2번째 리뷰] 이 책은 <전천당>으로 유명한 히로시마 레이코의 어린이 소설이다. <전천당>에서도 기발한 에피소드를 펼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선보였는데,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그 기발함과 흥미로움은 난형난제라 할 것이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요괴인 '우부메의 집'을 망가뜨린 죄로 우부메를 대신해서 '요괴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거리 속에 요괴의 특징이 드러나는 '자잘한 에피소드'를 펼쳐내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 형태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전형적인 '시리즈물' 구성이지만 전혀 식상하지 않은 것이 '레이코 소설'의 장점일 것이다. 이번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요괴 아이의 혼'을 빨아들이고 '인간의 시체'를 잡아먹는 포식자 요괴와 살아있는 인간과 꼭 닮은 인형을 만드는 재주를 가진 '인형술사'가 메인 스토리다. 언뜻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등장인물이지만, '생명연장'이라는 인간의 탐욕과 결합하면 이 둘의 조합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쳐서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죽는다. 이는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사랑하는 존재'가 영원히 나와 함께 하길 바란다.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시들지 않는 꽃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길 바란다. 그런데 여기 '인형술사'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꼭 닮은 인형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형술사 말이다. 그런데 인형술사는 자신의 인형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모습만 꼭 닮아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포식자 요괴'에게 먹이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받은 '무엇'을 이용해서 자신이 만든 인형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주문'이 넘쳐난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다시 살아난 듯 싶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려내는 듯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거래를 한 '인형'이 망가져도 다시 새것처럼 '고치면' 그뿐이다. 이렇게 죽은 사람도 되살려내는 '인형술사'의 꿈은 자기 자신을 '완벽한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형술사는 '요괴의 아이'와 '죽은 시체'를 포식자 요괴에게 먹잇감으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인형술사'는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만드는 유용한 재료를 챙긴다. 그렇게해서 근래에 행방불명된 요괴의 아이와 분명히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괴 돌보미 야스케는 이 사건들을 어떻게 해쳐나갈까?

  신기하고 흥미로운 요괴이야기를 읽다가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만나면 즐겁기 그지 없다. 우선, "생명연장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생명을 연장하겠습니까?"라는 질문부터 던져보자. 인간이 영생, 즉 '영원한 삶'을 꿈꾼 것은 아주 오래 되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탐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고, 이집트의 미라도 '부활'을 꿈꾸며 육신이 썩지 않게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다. 현대의 기술발달은 '냉동인간'도 가능케 했고,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간복제'도 가능케 했으며, 뇌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뇌'를 대신할 기기만 있다면 '뇌를 담을 그릇'인 몸은 무엇으로든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전한다. 물론, 아직까진 '실용화 단계'까지 성공한 생명연장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요점은 '생명연장'이 어렵지 않게 가능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생명연장'에 오케이하겠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닥 높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많은 까닭으로는 '인간답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동의한다. 과거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서도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는 그 꿈을 포기하고 만다. 애초에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는 아주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생명연장'은 어떤 방법이어야 하는가? 그건 바로 '젊음의 유지'다. 스물다섯 살의 모습 그대로 늙지도 아프지도 않고 오래도록 유지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젊음의 유지는커녕 건강 유지조차 힘겨운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인형술사'처럼 삐뚫어진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탐욕으로 그릇된 행동을 일삼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망가지기 마련이다. 단 한 사람이라의 탐욕이라도 말이다.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은 줄을 지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탐욕'을 경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병들어 가는 시점에서 인간이 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량학살'을 계획중이라면 어떻겠는가? 대찬성인가? 물론 지구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대찬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지구가 병들어가는 것과 '인구 증가'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 지구환경파괴는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파괴가 심각해진 탓이고,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갈 터전인 숲마저 '인간을 위한다'는 논리로 파괴하고 도시나 농경지, 또는 공장지대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연 생태계는 파괴되어 제 기능을 잃어버렸고, 인간을 보호하던 자연이 도리어 인간을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증거가 바로 '지구온난화', '해수면상승', '기후변화' 등이고,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덩달아서 전세계적인 대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괴의 생명'도 소중할 수밖에 없다. 비록 요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만, 요괴 하나하나가 '만물'에서 비롯되었다는 '애니미즘 사상'을 확대하면 요괴의 생명은 곧바로 '자연의 생명력'과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요괴들도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탄생'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야스케의 마음은 그대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또한, 인간이 만든 물건일망정 그 재료는 '자연'에서 얻은 것이기에 소중히 다루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어떤가? 어린이책으로 철학을 하는 것도 재미나지 않은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시작된 물음에서 '지나친 욕심(탐욕)'은 도리어 화를 부른다는 결론과 인간이 아닌 생명도 소중히 다뤄야 마땅하는 결론까지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정답'은 없다. 탐욕은 나쁘지만 욕심이 없는 세상도 활기를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이 될 우려도 있으며,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지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해충과 병균'마저 사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더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은 혼자 읽고 말 것이 아니라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어야 더욱 지혜로운 법이다. 또래와도 생각을 나누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면 더할나위가 없다. 그래서 '좋은책'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은 책' 모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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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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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서스Friends 1번째 리뷰] 히로시마 레이코 작가는 <전천당> 이후 두 번째 소설로 접하게 됐다. 이 소설도 <전천당>과 비슷한 느낌이다. 일본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현대의 사상'을 담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배경은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에도 시대'를 펼쳐 냈다. 17세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가문이 권세를 누리던 '에도 막부시대'라고 해야 하겠으나,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칼잡이(무사)'의 활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마을의 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요괴 대소동인 까닭에 '막부'라고 하는 거창한 시대극(사극)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인간의 아이'가 '요괴'를 돌보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잔잔하게 펼쳐지는 '주니어소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애초부터 '주니어소설'로 쓰여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레이코 작가가 스스로 밝히길 이 책은 '성인소설'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 <귀멸의 칼날>이 방영하던 시기였던 탓에 좀 더 '호러물'에 가깝고 피와 시체가 나뒹구는 잔혹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반려하면서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다시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새로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분량도 줄어들고 에피소드도 덜어내야만 했단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어린이도 읽고 즐길 수 있는 책이 되었다. 하지만 애초의 '스토리'는 유지한 탓에 책내용이 담고 있는 주제가 '성인용(?)'이라는 느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탓에 논술쌤의 관점에서 이 책을 '초등학생'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귀멸의 칼날>도 '19세 미만 관람불가'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 성인용도 아니기 때문에...애매한 책이다.

  1권의 내용은 주인공인 '야스케'란 소년이 길가에 있는 '하얀 돌'을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실수로 떨어뜨려 깨뜨리고 만다. 그저 돌멩이를 깼을 뿐이니 별일 아닌 듯 싶었지만, 사실 그 돌에는 '요괴의 아이'를 돌봐주는 요괴 '우부메의 집'이었던 것이다. 돌이 깨짐과 동시에 우부메도 떠나버렸고, 요괴의 아이를 돌볼 요괴가 사라지자 '요괴 봉행소(재판을 담당하던 에도시대 관청 이름)'가 요란스러워졌고, 결국 돌을 깨뜨린 범인 야스케가 요괴에게 잡혀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벌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대신 맡게 된 것이다. 우부메가 다시 돌아와 요괴의 아이를 돌봐줄 때까지 말이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뒤에 이어질 내용이 얼마나 기괴하고 음산한 요괴들이 등장할지 자못 궁금해질 테지만, 막상 뒷이야기를 읽어 보면, 살짝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특히 '호러 마니아'라면 말이다. 왜냐면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처음으로 돌보게 된 요괴 아이가 바로 '매실절임(일본 장아찌)'이기 때문이다. 정말 귀염뽀짝이다.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개작했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괴는 요괴다. 인간을 해치는 '포식자 요괴'는 아니지만, 요괴이니만큼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전천당>의 느낌이 물씬 났다. 특정 년도가 적힌 동전에 해당하는 물건만이 가진 독특하고 신비한 능력 때문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가득했던 것처럼,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요괴마다 독특한 특징과 사건이 벌어지며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하지만 시대배경이 옛날이고, 요괴가 등장하는 몽환적인 배경이 자못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일본에는 특히나 '요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본의 애니미즘은 좀 더 유별 날 정도로 많은 요괴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괴들은 '장난꾸러기 님프'나 '괴팍한 고블린'처럼 사람에게 크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의 전설에는 섬뜩한 요괴들도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고, 이런 요괴들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살육을 즐기는 끔찍한 괴물로 등장하곤 한다. 한국형 귀신은 '원한'을 품은 경우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일본형 요괴는 원한의 유무와 상관없이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고, 살육을 거듭하며 능력을 키우는 요상한 취향까지 거침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유독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특성을 닮은 듯도 싶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는데 무슨 원한을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막 싹쓸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요괴들의 성격도 그런 모양인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는 그런 끔찍한 요괴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시대배경은 '과거'의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은 '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전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겠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사고방식은 분명 요즘 것이다. 바로 '인간의 권리'를 담은 인권사상이 엿보인다. 물론 등장인물 태반이 '요괴'인 탓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동물의 모습이긴 하다. 그치만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주제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이 책을 '성인호러물'이 아니라 '어린이용'으로 출간해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단순히 피와 살이 튀기는 끔찍함이 아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고귀한 생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요괴는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이 아닐 뿐더러 '살아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천 년을 훌쩍 넘겨서 살아가는 요괴들의 삶에 고귀함 따윈 애초부터 없다. 백 년을 살아도 지겨운 것이 '인생'인데, 천 년을 살면 지겹다 못해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고 심심풀이로 인간을 잡아 먹는 요괴들의 삶을 그려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코 작가가 그린 '요괴'는 좀 달랐다. 그들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요괴일망정' 유년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의 유약함을 지키고 보살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딴에는 일본도 '초고령화 사회'가 된 지 오래되었기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도 꽤나 많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사회는 '고독사(홀로 늙어 돌봐줄 사람도 없이 죽어서도 주검마저 거두어줄 사람 없이 그대로 방치된 죽음)'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기에, 이야기 속에서나마 어린아이를 돌보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이야기를 좀 더 읽어본 뒤에 꺼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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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꿈이 사라진 날 초등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임광희 그림 / 한솔수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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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7번째 리뷰] 어린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권장해야만 하는 걸까? 물론 어린이들 스스로 꿈을 키워나가고 어른들이 그 꿈을 이루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꿈을 가지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꿈'을 빙자해서 '장래의 직업선택'에 관한 암묵적인 강요를 하고, 자유를 박탈하고, 무한 간섭을 할 요량이라면 '꿈' 이야기조차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어린이들에게 '직업'을 강제하느냔 말이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더 크니 그냥 냅두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더 큰 문제는 채 '스무살'도 안 된 나이에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게 만드는 대한민국 사회다. 그 어린 나이에 '평생직업'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강요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어쩌면 가장 중요한 '선택'을 강제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무한경쟁으로 내몰면서 무슨 '꿈타령'을 하느냔 말이다. 그냥 솔직하게 "네 인생은 '인 서울'에 달렸으니, '인 서울'이라도 해서 정규직의 발끝이라도 잡고 싶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하고, 공부로 성공할 것 같지 않으면 '재능'이라도 살려서 돈벌이에라도 일찍 뛰어 들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테니, 한 번 사는 인생 개고생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살아봐. 그게 싫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햇!!!"라고 '현실'을 말해 주길 바란다. 괜한 '장래의 꿈 이야기'를 꺼내서 돌려까기 하지 말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어른들도 어릴 적에 꿈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어릴 땐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데, 살아보니 '그 말씀'이 맞더라는 생각뿐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릴 적 꿈'은 매우 소중하다는 것에 부정하는 어른들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만큼 꿈은 소중한 것이다. 아무리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만연하다고 하더라도 '꿈'만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책 <꿈이 사라진 날>은 의미가 깊다. 또다시 '외계인'이 등장해서 이야기의 본질을 흐려놓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소중한 꿈을 지키고 이루겠다는 어린이들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두 말 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다고 느껴지는 점은 지구인에게서 '꿈'을 사라지게 만들어서 외계인의 노예로 만드는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 외계인들의 침공에 차질을 주어 지구인에게 꿈을 되찾아주는 영웅들에게는 정작 '꿈이 없었다'는 설정이 어리둥절했다. 꿈을 갖고 열심히 잘 살던 '모범 지구인'들은 외계인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꿈을 갖는 걸 귀찮게 여긴 '불량(?) 지구어린이'가 영웅으로 설정된 것이 의아스러웠다. 이런 구성을 읽은 '초등저학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외계인이 침공할 걱정(?)에 꿈을 갖지 않노라고 핑계를 대지는 않을까?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초등생은 없을 테니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고 싶은 심정이다.

  어린이들은 '모방심리'가 꽤나 발달했다. 그래서 '좋은 말과 행동'을 들려주고 보여주면 '좋은 말과 행동'을 따라하고, 그 반대의 상황도 똑같은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그래서 '애들 앞에서 냉수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속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교육에 앞서서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고, 심지어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를 위해서도 '태교'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왜 동화책의 줄거리는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읽고, 더 나아가 전세계 어린이들이 읽을 텐데, 함부로 쓰느냔 말이다. 아무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딴에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교훈적인 내용'만을 강조하다보면 <어린이책>이 갖춰야 할 '재미'라는 가장 중요한 특장점을 놓쳐서 훌륭하지만 지루한 책이 되어 어린 독자들이 외면하는 책이 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줄거리'를 살짝 바꾸는 것은 어떨까? 꿈 많은 '모범 지구인'이 외계인의 침공에 더 취약해서 꿈도 없는 '불량 지구인'조차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데, '모범 지구인' 가운데 외계인들의 침공 방식에 '특별한 면역력'을 가지 어린이가 있어서, 외계인의 야욕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내고 '불량 지구인'과 함께 힘을 합쳐 외계인을 소탕한 뒤에, 꿈의 소중함을 인식한 '불량 지구인'들이 각성해서 온세계 지구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부풀게 만드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면 말이다. 교훈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격이 되지 않았을까.

  딴 이야기이긴 하지만...출판시장을 주욱 살펴보면, '외국작가'들의 책시리즈는 수십 편이 넘는 반면에 '국내작가'들의 책시리즈는 열 편을 넘기기도 힘든 모양이다. 물론 공전의 히트를 한 <마법천자문>을 비롯한 '교양학습만화'는 꽤 성공적인 양상으로 안착을 하며 계속 펴내고 있지만, 유독 <동화책>만큼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해리포터>나 <전천당> 등의 사례를 보아도 잘 만든 세계관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기왕에 '사라진 날' 시리즈를 만들었으면, 지구어린이와 외계인 침공이라는 '세계관'을 구축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작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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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돈이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김다정 그림 / 한솔수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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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6번째 리뷰] 고정욱 작가의 '사라진 날'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돈'이 사라졌고, 역시 나쁜 '외계인 침공'이 원인이었고, 마무리는 착한 '외계인의 도움'으로 지구가 구원되는 전개였다. 물론 초등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위해서 외계인이 등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에 매달리지 않고 단번에 해결하는 구성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조기 '경제교육'의 필요성에 늘 찬성하는 쪽이었기에 이른 나이의 독자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는 바다. 그런데도 완독한 뒤에 영 개운치가 않다. 뭔가 껄끄럽기까지 하다. 앞선 책들에서 '책'이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고, '엄마'가 사라지는 내용과는 달리 '돈'이 사라지는 배경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먼저 통용되던 '화폐'가 사라져서 원시경제인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이 꽤나 불편해서 새로운 '통화'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바코드(인식표)'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를 대신한 새로운 통화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전에 '외계인'이 등장해서 지구정복을 위해서 돈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점부터 껄끄럽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계인의 지구정복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상화폐'로 대응하며 지구인들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고, 외계인들의 정복욕을 무너뜨린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외계인들이 물러난 뒤에 '가상화폐' 사용으로 인해서 투명한 쓰임새로 인해서 '부정부패'가 싹 사라져버렸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과연 '가상화폐'만이 투명한 돈 씀씀이를 보장하는 것일까? '가상화폐'로 발생할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제점은 없을까? 그리고 '가상화폐'의 사용으로 정말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을까? 이런 '팩트체크' 없이 <어린이책>에 가상화폐의 순기능만 선보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어린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걸까? 라는 의문에 빠져들자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책>이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수많은 '동화책의 결말'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음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의 결혼을 '행복공식'으로 삼고, 바람직한 가족구성을 '권선징악'의 일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의 결말을 마냥 '좋다'라고만 평가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이 무조건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종이봉지 공주>처럼 왕자가 공주를 구하지 않고 '역발상'으로 용감하고 씩씩한 공주가 사악한 용에게 잡혀간 왕자를 구해주지만, 왕자는 용과의 결투 도중에 옷이 불타버리고 초라한 '종이봉지'로 몸을 가린 허름한 공주의 모습에 실망하고 투정하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결말을 시도한 동화책도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돈이 사라진 날>의 주제와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저축의 필요성과 합리적인 소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통화인 '인식표'와 '가상화폐'의 등장이 적절한 대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용하던 통화가 사라져서 '불편한 물물교환'을 보여주고, '아나바다 운동(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운동)'까지만 보여줬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더 뿌듯한 결말이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민지가 200만 원을 스스로 모아서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꿈'을 실현시키는 결말로 말이다. 굳이 '외계인의 지구정복'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서 괜한 '충격요법'을 써서 '돈의 소중함'을 강요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내가 완독 후에 껄끄럽게 생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한편, 시리즈의 '일관성'을 갖추려는 작가의 고민은 이해하는 바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을 한 뒤에 '결과'를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이번 책은 좀 뭔가에 쫓기듯이 급하게 썼다는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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