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마라, 지친다
이지풍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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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면서 제대로 드는 생각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천명을 코앞에 두고 보니 인생은 참 길고 할 일은 더럽게 없으면서 매일매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하고 내일 또 할텐데 뭘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았었는지...인생은 '장거리 달리기'와 같으니 쉬엄쉬엄 달려도 괜찮다는 진리를 인생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때로는 게으름을 피울 때 '인생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쉼없이' 달리고 또 달려서 성공을 꿈꾸는 이들 가운데, 정작 흡족할 만큼 성공한 이는 드물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야구 트레이닝 코치'다. 경력은 20여 년이 넘었단다. 그래서 야구 이야기가 참 많지만, 야구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다. 어쩌면 한국야구계에 만연한 '꼰대문화'를 적확하게 꼬집어서, 사회초년생들에겐 '맞아맞아'를 연발하게 될지도 모르고, 기성세대들에겐 뼈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아픔을 동반한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책을 읽다보면 '공감'되는 내용이 참 많을 것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닥치고 훈련'부터 시키는 감코진(감독과 코치)의 관행적 트레이닝에 대한 비판이다. 운동선수에게 체력을 기르는 훈련과 기술을 익히는 훈련은 기본 중에 기본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야구에서는 이것이 너무 심해서 탈이란다. 이를 테면, 야구선수에게 모든 선수들에게 달리기 훈련을 시키는 것, 타자에게 빈방망이 휘두르기, 투수에게 투구 훈련, 야수에게 좌우로 크게 왔다갔다시키는 펑코 훈련 따위를 새벽부터 야간까지 주야장천 시키는 것이 문제란다. 야구선수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훈련들이긴 하지만, 당장 내일 시합인데도 '야간훈련'을 시키며 몸을 혹사시키고 난 뒤에 정작 '본시합'에서 어떻게 기량을 발휘하라고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면서 말이다.

 

  까닭인 즉슨, 야구경기는 보통 3시간 정도 치루는데, 한 경기당 야구선수가 평균적으로 '전력질주'를 하는 시간은 고작 18분에 불과하단다. 다시 말해, 야구선수는 '오래달리기' 같은 훈련이 별로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기초체력 훈련을 위해서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시합 전날'에 선수들이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체력을 고갈시키는 강도 높은 '달리기 훈련'은 애당초 본시합에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차라리 '쉬는 것'이 더 시합에 긍정적인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14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는 선수들을 혹사시키는 훈련 따위는 시키지도 않는단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힘'을 기르는 웨이트 훈련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단다. 그러다 시합 전 날이 되면 그냥 '휴식'이나 충분히 취한 뒤에, 본시합에 기량을 뽐내라고 한단다. 그런데도 한국야구에서는 땀을 뻘뻘 흘리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선수들은 눈치껏 알아서 땀을 흠뻑 흘리고, 감코진도 그런 선수들을 뭐라고 탓하지 않는...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것도 같고, 잘못된 관행이 오래 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뭐, 그렇단다.

 

  다시 말해, 경기시간 3시간 동안 고작 18분만 '폭발적인 힘과 전력질주'가 필요한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힘을 비축했다가 한순간에 터트리는 고강도 집중훈련'이 더 필요하단 말이다. 꽤나 상식적인 조언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야구에서는 이런 상식이 통용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왕에 한국야구가 '선진야구'를 배우려 한다면, 14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 배울 것이지, 고작 70년 역사를 가진 일본야구에서 배우려 하는 것은 뭔가 잘못 되었다고 지적한다. 심정적으론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기량이 월등히 앞선 미국야구보다 '40년 한국야구'와 근접한 '일본야구'를 따라하며 배우는 것이 '스텝 바이 스텝'이 아닐까 하는 그런 거 말이다. 허나 저자는 딱 잘라 말한다. 그런 '일본야구'가 자신들의 문제점을 고칠 때 참고하는 것이 '미국야구' 아니냔 말이다. 결국, 일본야구는 건너뛰고 메이저리그에서 '직접 배우면 된다'고 말이다. 이게 더 상식에 가까울 거라고 말이다.

 

  허나 저자는 말한다. '진짜 상식'은 한국은 한국에 맞는 '한국야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베끼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앞서서 '대안'을 제시하고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되는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선수에게 딱 맞는 트레이닝 방법을 찾아 '한국야구'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메이저리그보다 더 매력적인 '한국야구의 맛'을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고질적인 '꼰대문화'부터 고쳐 나가야 한다고 지적질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절로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야구에 맞는 훈련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자기 인생'에 딱맞는 인생 트레이닝 방법도 반드시 있을 거라는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청춘들이 '성공'을 꿈꾸지만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를 절대 '성공'에 두면 안 된다. 야구에서도 일찍 성공한 선수들이 오랫동안 성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에 '유망주'였는데, 프로에 와서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선수들이 정말 많으며,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냈는데도 은퇴와 함께 '야구인생'을 접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으며, 오히려 선수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가 감독이나 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을 데뷔한 뒤에 명감독, 명코치로 유명해진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구인생'으로 진로를 잡았다면 '야구와 함께 하는 나날'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구와 함께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그 방법은 '야구전문가'들이 더 잘 알테고 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할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삶이 있을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행복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삶을 혹사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력질주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전력질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쉴 때는 확실히 쉬어주어야 하고, 때론 게으름을 피우며 멍 때리는 여유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생은 길다. 10대부터 무작정 달리려고만 하지 말길 바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20대를 보내겠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열을 올린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갈 30대가 찾아오겠지만, 그 역시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바쁨'일 것이다. 얼마나 지루하고 지겨울 것이냔 말이다. 적당히 요령피우며 살아도 되는 게 30대다. 그리고 40대가 되면 '체력(건강)관리' 하느라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건강이 나빠지면 '전전긍긍'하면서 체력을 되살리려 고군분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처럼 '뛰지 말길' 바란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여지껏' 잘 뛰어왔다는 것보다는 '앞으로도' 잘 뛸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할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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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 - 위대한 의학의 황금기를 이끈 찬란한 발견의 역사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이덕임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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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의학지식'이 담겨 있는 역사책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그리고 '더 알고 싶은 내용'으로 정리하면서 읽으면 충분한 책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의학계에서 획기적인 발견, 또는 발명으로 수많은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바꾼 전설적인 인물들의 삶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꽤나 감동적인 감상으로 읽어도 좋을 역사책이다. 그러나 이러나저러나 '여러 가지 지식의 나열'인 것만은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난 이런 책을 접하면 고민을 하게 된다. '지식의 나열'에 동참해서 책을 읽지 않고도 책내용의 전반적인 내용을 감 잡을 수 있도록 '친절한 리뷰'를 쓸 것인가? 아니면, 책의 내용보다 더 풍부한 지식을 자랑질하듯 '화려한 리뷰'를 쓸까? 그도 아니면, 글쓴이가 미처 다 담지 못한 몰랐던 정보를 담아 '놀라운 리뷰'를 써낼 것인가? 하고 말이다. 적어도 난 '친절한 리뷰'하고는 담을 쌓았다. 너무 식상하기 때문이다. 간혹 '화려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글쓴이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절필하였다. 그래서 종종 '놀라운 리뷰'를 쓰곤 했지만...이것도 자주 쓰다보니 이 책의 내용을 저 리뷰에, 저 책의 내용을 요 리뷰에 짜깁기하는 느낌이 들어서 자중하고 있는 편이다. 이런 까닭에 요즘에는 '내 생각'에 '충실한 리뷰'를 쓰고자 노력한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나의 솔직한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담론'은 바로 '의학이 바꿔 놓은 인류사'다. 이를 테면, 손씻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산모를 출산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마취제를 발명함으로써 더는 수술장이 비명으로 가득하지 않았으며, 소독제를 사용함으로써 더는 감염으로 인한 죽음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 말이다. 물론, 쌩뚱맞게도 철도의 발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PTSD)'라고 하는 질병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었고, 다윈의 <진화론>이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탓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데 반해서, 제멜바이스의 책은 너무나도 읽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때로는 광기에 물든 문체로 쓰여져서 의학전문가들조차 읽기 거북한 탓에 '손씻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강조했음에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산욕열'로 죽어가는 산모와 '감염'으로 인한 사망이 줄지 않았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어쩌면 '기-승-전-의학'이라는 귀결로 쓰여진...어떤 에피소드라도 결국엔 '의학'이라는 우격다짐으로 쓰여진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토록 난삽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의학의 발달'로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가운데 난 '의학의 전설들'이 하나같이 당대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주목받데 된 점이 눈에 띄었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그의 사후에 '주목'받고 걸작으로 평가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팬데믹'을 되돌아 보았다. 벌써 대유행이 시작된 지 3년째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인간과 바이러스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이 대결은 대부분 '시간'이 해결해주곤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말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삽시간에 퍼져 넓은 지역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난 뒤에 '면역력'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염병이 잦아드는 '기록'이 참 많기 때문이다. 당대의 내놓아라하는 '명의'들도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오늘날에는 달랐다. '의료계'에서 발빠르게 움직였고, '감염관리'를 전담하는 부서에서 긴밀하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팬데믹' 상황속에서도 버티고 시간을 지연시켜 '대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팬데믹과 이번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양상이 많이 달랐다.

 

  물론, 겉잡을 수 없이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응할 수 없었던 국가들은 초기에 많은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선진국에서조차 말이다. 그동안엔 돈 많은 선진국들은 가난한 후진국처럼 '질병에 의한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곤 했는데, 이번 '팬데믹'에서는 '직접 당사자'가 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허나 이렇게 선진국에서 호되게 당하고 나니 좋은 점도 있었다. 거대제약회사들이 앞다퉈서 '백신개발'에 나섰고, 보통 10년 이상이 걸리던 개발기간을 1년이내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한 백신'은 아니어서 추후에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에 처하게 되는 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조치였다. 그만큼 급박한 사태로 번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코로나 팬데믹'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손씻기'와 '마스크'였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질병' 자체를 없애거나 '죽음'을 막을 순 없다. 또한, 백신이나 항생제, 그리고 치료제 따위로 완벽하게 막아내고 되살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백신이나 항생제, 치료제가 너무나도 비싸서 '있어도' 사지 못하고 써보질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손씻기'와 '마스크'는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엄청난 혜택을 볼 수 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예방법'이다. 물과 비누, 또는 소독제로 '손'을 씻으면 98%의 감염병을 예방할 수 있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는 것만으로도 '호흡기질환'의 99%를 차단할 수 있게 된다. 단돈 천원(1달러 상당)으로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웬만해서는 병원에 갈 일도 없게 해주는 효과적인 '상식'이고 말이다.

 

  현재는 '오미크론'이 대유행을 하면서 마스크조차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냐? 하는 오해를 불러오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마스크 착용을 꼼꼼이 하면 거의 대부분 걸리지 않는다. 잠시 방심한 틈에 걸리고, 오랜 방역으로 인한 피로도가 증가한 탓에 느슨해진 틈을 타고 번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고 나면 선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마스크를 '벗을 자유'보다는 마스크를 '쓰는 배려'가 더 많은 인류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팬데믹'이 찾아왔을 땐, 분명해질 것이다. '벗을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진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는지, '개인의 이익'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그랬는지 말이다.

 

  대유행의 정점을 지나면 '집단면역'을 형성해 '백신의 효과'와 더불어서 팬데믹을 종식하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지금 대유행으로 안타까운 사망자가 늘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종지부를 확실히 찍기 위해서라도 '손씻기'와 '마스크'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의학의 전설들도 복잡한 치료법과 비싼 치료약을 만들었기에 전설이 된 것은 아니다. 의외로 가장 기초적인 방법에서 힌트를 얻어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더 획기적인 방법을 제안하는 것으로 의학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또다시 '손씻기'를 강조한 제멜바이스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련다. 의사들에게 '모든 환자와 접촉하기 전, 반드시 손을 씻을 것! 예외는 없음'이라는 문구를 전하고 실천하라고 했을 때, 당대의 권위 있는 의사들은 '권위'를 앞세워 손씻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고귀한 의사의 손을 '전염의 도구'로 전락시킨 제멜바이스를 의사들의 권위를 추락시킨 원흉이라고 비난해서가 아니었다. 당시의 손씻는 소독제(염소)가 의사들의 손을 쓰라리고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귀찮아서였다. 아직 세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아 '감염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씻기'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인 탓이었다. 그럼에도 제멜바이스는 '통계'를 이용해서 손씻기를 강조했다. 손씻기를 하지 않은 병동에서는 여전히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나갔지만, 손씻기를 한 병동에서는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사들의 손씻기가 일상화 된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바로, '단순함'과 '예방'이다. 진리를 통찰하는 힘은 '단순함'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건강은 아프고 난 뒤에는 절대로 되찾을 수 없기에 미리미리 건강을 챙겨야 하고, 모든 질병은 치료에 앞서 '예방'이 최선임을 말이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의사들이 우주의 기운이 나쁘게 작용해서 산모들이 죽어간다고 했을 때, 제멜바이스는 관찰과 통계로 '손부터 씻으라'고 명령했다. 산모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산욕열'은 '감염'에서 일어나는 질병이니 감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손씻기'라는 예방책을 내놓았다. 단순명쾌한 의학적 발견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 손씻기와 마스크가 최선이라는 진리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팬데믹이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극복할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코로나'부터 극복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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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의 세계사 - 뺏고 싶은 자와 뺏기기 싫은 자의 잔머리 진화사
도미닉 프리스비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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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을 내면서 좋아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은 꼭 필요한 것이라 세금은 '아예' 내지 않겠다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면 '적정 수준'의 세금이 존재하지 않을까? 많이 내기는 싫고 원천적으로 내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국가경제(GDP 기준)의 10퍼센트 정도가 적당하다고 제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저자는 "그 정도의 세금은 '강제'로 걷어간다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을 정도였다. 정말 그럴까?

 

  역사적으로 사료를 뒤적거려도 '그리스도교의 십일조' 정도의 세금은 언제나 매겨 왔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큰 불만을 사지 않은 평화로운 시기의 세율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한 이들조차 '그 정도'의 세금은 경제적으로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경영'이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하게 되어 '증세'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경우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 시점부터 부자들은 더 내기 싫어하고 가난한 이들은 없어서 못 내는 '조세저항'이 세진다고 말이다. 결국,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세금'에 있었다면서 '강제징수'부터 '조세형평성'까지 세금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나라의 운명조차 좌지우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대목일 것이다. 국가(정부)가 세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권력의 행방이 좌충우돌하였다는 것은 얼마전에 치뤄진 대한민국의 대선에서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극단적으로 설명할 것도 없이 '문재인 정권'의 교체를 바란 대다수의 국민들은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거론하며, '부동산세'에 대한 반감이 대통령후보의 능력검증보다 더 확실한 결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만큼 후보와 정당 모두에게 '비호감'으로 치뤄진 적이 없었으며 여러 이슈들을 모조리 덮어버리고 '부동산정책'만 제대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도 없었다. 그럼에도 선거가 끝나고나자 '하릴없는' 이슈들을 들먹이며 '부동산정책'에 대한 관심을, 아니 '부동산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희석시키려 드는 적폐언론들의 행동거지는 일찌감치 예상했던 바인지라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공작'도 1년만 지나면 고스란히 밝혀지고 말 것이다. 과연 새정부가 어떤 '세금폭탄'을 터트리게 되느냐에 따라 여론의 행방이 결정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공정하고 부정부패비리와는 손절하길 바랄 뿐이다.

 

  암튼, 글쓴이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조세정책을 정리하자면, 첫째, 세금을 많이 걷는 정부는 망하고 적게 걷는 정부는 오래 간다. 둘째, 강제로 걷는 세금보다 자발적으로 내게 하는 세금이 더 많이 걷힌다...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세금은 적게 매기고 부족한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도록 하되 세금을 많이 내는 이에게 후한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면 국가를 운영하는데 큰 지장이 없으면서도 국가경제가 성장발전하는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심지어 그런 나라를 '유토피아'로 지칭하면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런 유토피아의 예로 고대 아테네와 영국 지배하 홍콩의 조세정책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아테네가 도시국가로 성장발전하고 페르시아의 공격에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로 '강제징수'가 없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세금은 지배층이나 부자들이 모두 충당했고, 일반 평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단다. 물론 세금을 많이 낸 만큼 '정치참여'의 기회를 주었고, 일반 평민들도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게나마 세금을 내며 국가를 운영했다고 한다. 홍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홍콩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했지만 이렇다 할 '조세정책'을 내세우는 대신 '자발적인 징세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고, 마치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이라도 하듯 홍콩은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고 홍콩시민들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부담없는 조세정책'은 자유와 평화의 첫걸음이라는 공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반면에 '강제징수'와 '증세'는 어김없이 나라 안을 혼란스럽게 했고 심할 땐 망국이나 파국으로까지 치달았던 예는 부지기수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과연 '세금'은 내야 하는가? 내지 말아야 하는가? 국가경영의 시작은 '조세'에 있다.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 같은 돈을 떼인다는 생각만 해도 극렬히 저항하는 본능(?)은 어찌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세금을 내고, 충분할 만큼의 세금을 걷게 되면 아무 문제도 없지만, 내려는 자와 걷으려는 자의 갈등은 쉬이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갈등'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허나 그럴수록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일찍이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는 '대표 없는 곳에 과세도 없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세금이 필요한 만큼 '투명하게' 그 이유를 밝히면, 언제든지 얼마만큼의 세금을 낼 용의가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걷은 세금을 어따 쓰는지도 밝히지 않으면서 무작정 세금만 많이 걷으려 하면 극렬한 '조세저항'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나라의 부동산정책도 그러하다. 복잡할 필요도 없다. '1가구 1주택'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면 세금부담을 대폭 낮추고, 반대로 어기면 '세금폭탄'을 매기면 된다. 물론, 이를 두고도 저항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임대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인데, 이들에겐 '재산세'와 '소득세'로 징벌적 과세를 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징벌적 과세'가 웬말이냐 싶지만, 욕심꾸러기에겐 그래도 된다고 본다. 집이 없어 서러운 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한정된 주택'을 선점한 것으로도 모자라 '신도시 주택'까지 투기로 '가격상승'을 부추긴 원인제공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인 '부동산세법'은 더 복잡하고 많은 이유를 품고 있다. 그러나 설명하기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기득권의 이득'만 챙겨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니, 온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마당에 '부동산세법'에 대한 간소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암튼, 세금은 꼭 필요하다. 부자에게 쏠린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비용'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법'에 대한 국민과의 합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과세정책'은 언제나 '조세저항'을 불러왔다. 그런 까닭에 '세금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잘 나가는 나라에는 조세저항 따위는 없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 까닭이다. 그리고 애써 거둔 세금이라면 꼭 '투명하게' 쓰고 또 써야만 한다. 물론 막상 거둔 세금이 '이쪽'에 써야 하는데 남아서 '저쪽'으로 유용되는 경우도 있고, 갑작스럽게 예상할 수 없는 곳에 급하게 '땡겨서' 써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심성의껏 밝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고 세금에 대한 반감을 덜 수 있고, 꼭 필요한 곳에 소중하게 쓰였다는 보람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행방이 '묘연한' 세금이 엉뚱한 '그들'을 위해서만 쓰여서 '그들만의 천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더욱더 세금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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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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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한글을 쓰고 읽는 대한민국은 전세계 인류 가운데 가장 '문자학적 축복'을 넘어 사치를 누리고 있다며 전세계 언어학자들이 극찬해 마지 않고 있다. 왜냐면 전세계에 언어를 가진 국가나 민족은 많지만, 그 언어에 딱맞는 '문자'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자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단 하루만'에 쓰고 읽을 수 있으며, 영특한 사람이라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대한 문자를 가진 우리 나라인데도 '문법 체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서 웃음거리(?)가 될 지경이라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한글의 원조인 '훈민정음'이 반포된 건 1443년이지만, 이 문자를 우리가 온전히 갈고 닦으며 쓰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창제 당시에는 '중국문자'와 다른 오랑캐 문자를 쓸 수 없다며 천대를 받았고,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지독히 반감을 품은 당시 '기득권층'의 저항에 궁중의 여인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의 문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탓에 제대로 된 '문법체계'를 갖출 기회조차 없었으며, 비로소 주목받게 된 때에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에 '우리 민족'이 쓰는 '우리 문자'조차 제대로 연구할 수 없어서 조악하고 열악한 처지에 놓인 학자들에 의해 '기초문법'이나마 갖추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방이 된 뒤에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혼란스런 해방정국의 여파로 아름다운 우리 글의 문법조차 이러쿵저러쿵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고 억지로 껴맞추게 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이렇게 '국어 문법'은 어렵사리 정리되었지만, 최소한 '맞춤법 통일안'조차 일사분란하고 일맥상통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일상 생활'에서 헷갈리게 쓰이고 있는 실정이며, 심지어 '맞춤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조차 <국어사전>을 들춰보지 않으면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도 헷갈리는 점은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해본 뒤에야 겨우 쓰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 더욱 큰 문제는 '국립국어원'조차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거나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어색한 똥고집을 부리며 꼭 '그렇게' 써야만 한다고 장광설을 내놓는 경우가 허다한 문제점이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표준어'로 공표하는 통에 수많은 예외조항만 만들어 놓는 '누더기'가 된 지 정말 오래 되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이런 혼란스럽고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글쓴이는 '최소한의 맞춤법'조차 제대로 쓰지 않는 오빠는 정말 정떨어진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물론 완전 동의한다. '신조어'깜도 되지 않는 '엉터리'로 소듕한 한글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말 많기에 글쓴이의 분노(?)에 적극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난, 사소한 문자나 간단한 톡을 쓸 때에도 '맞춤법'에 맞게 쓰고, '띄어 쓰기'에 철저하려 노력하며, '전하는 내용'에 어긋나지 않는 '표준어 사용'을 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한 노력을 하게 된 까닭도 첫사랑의 영향이 크다. 첫사랑에게 최대한 귀여움을 어필하려고 '혀 짧은 듯'한 문자를 보냈다가 '맞춤법'을 지키라고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 첫사랑은 '출판사 편집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방 맞은 뒤부터는 열심히 '맞춤법 공부'를 했고, 그렇게 난 '논술쌤'이 되었다. 물론 난 '미혼'이다. 그런 비슷한 경험(?) 때문이었던 걸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어버렸고, 급기야 글쓴이에게 '공개구혼'이라도 하고픈 심정이 들었지만, 참고 있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솔로가 아닐까봐서 말이다. 나 말고 그녀가 말이다.

 

  암튼, 맞춤법을 지키면 '섹시'하다는 글쓴이의 주장에 당당히 한 표를 던진다. 맞춤법을 지킨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실수를 발견하면 실망감도 커지는...글쓴이와 비슷한 경험이 정말로 많아서 '공감'으로 충만한 책을 읽는 유쾌한 독서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았다. 맞춤법을 '이토록' 지키기 어렵다면 좀더 쉬운 맞춤법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를 테면, 있으나 마나한 '사이시옷' 같은 건 아예 없애버리고, '띄어 쓰기' 규정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 뒤에 '뜻'만 적확하게 전할 수 있다면 모두 맞게 바꾸는 것 말이다. 사실 '사이시옷'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냐면, '장맛비[장마삐/장맏삐]'처럼 발음규정도 확실히 규정하지 못하고, 뜻조차 '장마 때 오는 비'인지 '장맛 나는 비'인지 헷갈린 예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점[초쩜/촛쩜]'처럼 '한자어'인 경우에는 무조건 빼라는데, 애초부터 예외규정을 둘 요량이면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장면' 같은 경우처럼 오래도록 '자장면'만 옳고 '짜장면'은 틀렸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혼용'해서 쓰고 있으니 둘다 표준어로 허용해준 사례가 많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권고사항은 애초부터 듣지 않고 박박 우기면 해결될 일이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와 '허용'이 남발되면 혼란이 가중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허나 언어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만듦-쓰임-죽음'의 과정을 겪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 '문법체계' 또한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문법체계를 누더기처럼 깁고, 이해하기 어렵게 장황한 부연설명을 늘어놓은 것들을 싹 골라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문법'도 많이 쓰이고, 자주 쓰여야 사랑받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문법 체계'에 대한 접근이 쉽고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해서 모두가 널리 알맞게 쓰는 한글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문법책>과 <맞춤법>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만 할 것이다. 그동안에는 읽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딱딱한 책이 많았지만, 이 책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처럼 쉽고 재미난 책이 널리 사랑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글사랑을 더욱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관심'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책을 '불알이며' 읽으면 정말 누구나 '맞춤법 천재'가 되고 '뇌섹남/뇌섹녀'가 되는 특급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더는 '맞춤법'을 초등학생 때만 배우는 유치한 공부라고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작 어른들은 절대로 '받아쓰기 만점'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점을 받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우리 맞춤법'이 어렵기 때문인 것이고, '맞춤법'의 눈높이를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우리가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레 우리 모두가 수준 높은 '교양인'이 된다는...뭔가 했던 말 또 한 느낌이지만.. 암튼, 맞춤법은 관심을 가져주는 만큼 재밌고, 지켜주는 것만큼 섹시하다는 글쓴이의 말씀에 공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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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5
우용곡 지음, 전인혁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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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와 종교,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참으로 묘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선을 그을 수도 없고, 이렇게 보거나 저렇게 볼 때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싸그리 뭉뚱그려서 '낡은 것'으로 폄하되면서 '비현실적'이라고까지 매도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역사왜곡'이니 '동북공정'이니 떠들면서 '그 옛날의 것'으로 과거를 평가하고 오늘과 미래를 재고 점치는 등의 일을 여전히 벌이고 있다. 심지어 고대에 벌어진 일로 한중일 삼국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놀랄 지경이다.

 

  이를 테면, 중국의 고서에 나오는 '황제와 치우의 대결'을 이야기하며 중국인들은 끝내 황제가 이겼으니 중국이 최고라고 평가하고, 한국인은 열 번 싸워 아홉 번 이기고 겨우 한 번 졌으니 황제보다 치우가 더 위대하다면서 '동이족의 신화'를 부풀려서 현대 한국이 중국의 국력을 넘어선다고까지 평가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일본의 고서에 나오는 한 대목에 '여자천황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바다 건너 신라를 쳤으니' 한국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마땅하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허구맹랑한 논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개인적으론 신화나 종교, 역사를 통해서 제 잇속만 챙기려는 탐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나 종교, 역사는 모두 '문화의 일부분'인데, 포괄적인 문화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문화의 우월성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그 광대한 문화마저 '한국의 것', '중국의 것', 그리고 '일본의 것'으로 조그맣게 규정하려는 속좁은 심보의 결과물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다. 그런 까닭에 신화, 종교, 역사는 크게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정보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는 한 나라에만 국한 되지 않고 이웃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활발히 교류했던 한중일 삼국을 비롯해서 베트남과 대만, 유구까지 서로 비슷한 문화와 전통을 저마다 계승발전 시켜온 결과물인 셈이다. 이러한 문화에 우열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생각의 저변으로 이 책 <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를 읽으면, 우리 나라의 신화를 통해 유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등의 우리의 종교와 더불어 고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신화가 중국에서 비롯된 거였어?', '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와 관련이 없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거지?', '어? 치우는 우리 조상신인데, 왜 중국신인 황제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거야?' 등과 같은 질문은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우리에게 '신화'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의미를 파악하면서 이 책을 풀어보려 한다. 앞서 밝혔듯이 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인데, 그 까닭은 음양의 이치를 조화롭게 하여야 세상만물이 평안하게 된다고 조선사람(성리학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단 유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바라는 이치이고, 신화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까닭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유교'를 표방하였던 탓에 모든 것이 '유교식'으로 표현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화를 통해서 민족의 우월을 따지는 행위는 지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한 것이니 개무시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무속신앙에 따른 제사 뿐 아니라 도교식, 불교식 제례까지 지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조선을 건국한 이들은 숭유억불을 내세우며 전국의 사찰을 축소하고 승려들을 핍박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천주학(서학)'을 탄합하며 수많은 천주신자들을 절두산에서 목을 베던 철저한 '유학자'들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고 막으려고 막아지고 골라담으려고 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교의 나라'인데도 그 이전 왕조에서 시행되던 행사를 이어 나간 것이다. 또한, '단군제'나 '관왕묘 제례'와 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제사방식만 살짝 유교식으로 바꾸어서 '민족의 정기'를 북돋우고 '충성스런 신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요긴하게 써먹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는 중국신으로 여기는 신농, 황제, 기자 따위도 조선에서 적극 받아들여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지낸 수많은 제사와 제례를 살펴보면 '우리 고유의 신앙'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화'까지 모두 엿볼 수 있다. 먼 옛날 공자나 맹자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공맹의 도'가 무엇인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를 테면, 풍백, 우사, 뇌사, 운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날씨의 신'에게 기원을 하는 주술적인 면 뿐만 아니라 '농업'이 나라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일상에까지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점을 엿볼 수 있고, 성현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음복을 바라던 유학자들이 명산대천과 성황신에게 제사를 고하는 모습을 통해서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오래전부터 깨닫고 실천하였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신화를 품고 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단연 '홍익인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고조선의 건국신화 속에서만 '홍익인간'을 찾곤 하지만, 반만 년전에는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사상이었다. 바로 '홍범구주'라는 말인데, 바로 뒤치면 '아홉 주를 평정해 천하를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을 펼쳤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지내던 제사는 모두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어 모두가 평안하게 지내라는 뜻을 담아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선한 신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 빌었고, 악한 신에게는 제물을 바쳐 인간에게 해악이 미치지 않게 했으며, 자연신에게는 풍요를 빌고, 조상신에게는 후손들에게 복을 빌어주라는 뜻을 담아 정성스럽게 모셨던 것이다. 이쯤 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놈이 나쁜 셈이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만 떠올리지 말고, '우리 신화'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실제로 외국의 신화보다 '우리 신화'가 알고 나면 더 재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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