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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 삼국 시대 인물들의 진짜 인생 엿보기
구청푸.성쉰창 지음, 하진이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 삼국 시대 인물들의 진짜 인생 엿보기> 구청푸, 성쉰창 / 하진이 / 시그마북스 (2012)
[My Review MMCCCXLI / 시그마북스 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일흔 번째 리뷰는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 사이를 오가며 삼국지의 참모습을 살펴보려 시도하는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다. 한중일 가운데 '팩트체크'에 진심인 나라는 한국 뿐이다. 특히 역사에서는 유별날 정도다. 일본은 '왜곡'을 일삼고 중국은 '공정'을 획책하는 마당에 왜 한국은 '진실'만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오직 '진실'만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지혜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한국의 위치는 대륙의 수혜를 받아 해양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한국은 상상 이상으로 막강했던 까닭에 대륙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고 해양은 감히 얼씬 거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 이런 '역사적 지위'가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거대한 대륙이 서구열강에 짓밟히고 해양세력이 득세하면서 열도를 넘어 반도를 거쳐 대륙까지 집어 삼키는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은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경험을 당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밑바닥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위업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업을 보여줄 근본적인 원동력은 오직 하나 '진실'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드디어 '진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고만장했던 일본은 추락 직전으로 내몰렸고, 어마어마한 덩치로 위용을 뽐내던 중국도 비실비실 휘청거리고 있다. 물론 아직 일본과 중국은 건재함을 자랑하고 '과거의 영광'을 뽐내려 든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관점 포인트 : 삼국지 책을 이야기하면서 '진실' 어쩌구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 의아할 것이다. 차근차근 그 속내를 밝힐테니 따라오길 바란다. 이 책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는 소설 삼국지에 담겨 있는 '허구성'을 찾아내 '역사적 진실'과 대조하고, 저자인 나관중이 그렇게 진실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 되짚어 볼 수 있는 책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소설'은 역사가 아닌 까닭에 모든 내용을 '진실'로 담아야만 할 필요는 없다. 독자가 재미를 느끼고 '역사'에 흥미를 가질 의도로 '허구성'을 가미할 필요성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관중이 살던 시기는 '원말명초' 였기 때문에 오랜 오랑캐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족의 자긍심'을 살리고 '민족의 위대함'을 돋울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이는 이민족에게 핍박을 받고 살았던 세대에게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우리도 일제의 폭력과 약탈에 신음할 적에 우리 '한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고 '조국의 위대함'을 돋울 수 있는 민족 정신을 찾으려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나관중은 그런 목표를 삼고 한족의 뿌리를 찾았고, 그 결과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고자 수많은 군웅들이 할거하던 '삼국시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모았던 것이다. 그 시대가 3세기였는데 원나라가 망한 14세기에 집필했으니 무려 1000년 전의 역사를 이야기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 촉한 출신의 진수가 진(晉)나라 때 쓴 <삼국지>라는 정사가 있었기에 이야기를 쓰는 것은 큰 무리가 없었다. 허나 진수가 쓴 <삼국지>는 문장이 너무 간결하다는 흠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역사서에서 꼭 필요한 '객관성'을 높일 수 있었으나, 이야기를 쓰기에는 오히려 주관적일 망정 '장황한 서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송나라 때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을 붙인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 덕분에 나관중은 '소설 삼국지'를 집필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톡톡히 살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니 '역사소설'을 쓰다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이 너무 '진실'을 추구하다보면 발목이 붙잡혀서 '허구성'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 7할의 진실에 3학의 허구성이 가미한 셈이다. 이로써 '역사소설'의 지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재미와 흥미'를 한껏 돋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를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한족의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한족 영웅'를 내세워야 했다. 역사상 삼국을 통일한 것은 '위나라의 기틀' 위에 '진나라의 결정적 한 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조를 뒤이어 사마의가 매듭을 짓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조조와 사마의는 '실리'를 챙기는데에는 충실했지만, 흩어지고 무너진 '한족의 자긍심'을 되찾기에는 적절치 못한 인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임자가 바로 '유비'였다. 전한 경제의 후예인 '중산정왕의 후손'인 유비를 정통으로 내세운 '촉한정통론'이 대두된 것이다.
이렇게 유비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뒤에 주인공을 돕는 조연도 필요했다. 관우와 장비가 있었기에 이들을 한데 엮어 '도원결의'라는 아름다운 미담으로 의형제로 삼았다. 완전 거짓은 아니다. 유비는 측근의 사람들과 '형제'처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우, 장비를 콕 집어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나관중은 그리 정했다. 그렇게 '복숭아 밭에서 형제를 맺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형제의 의리로 끈끈하게 맺어진 관우, 장비다 보니 자연스레 '오관육참장'이란 고사도 만들게 되었다. 옛 주군을 찾아 떠난 급박한 길임에도 대단히 구불구불하다. 분명 유비가 있다는 원소의 진영은 북쪽인데, 관우는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조조의 배웅까지 받으며 서쪽으로 향했다가 살짝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다시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간 뒤에 강을 건넜다가, 형님이 이미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한다는 줄거리인데, 사실 헤어졌던 관우와 유비가 다시 만난 장소는 어처구니 없게도 조조의 진영 동남쪽인 여남땅이었다. 그러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애초에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달리면 될 일인데, 그러면 이야기가 밋밋해지니 일단 때려부술 수 있는 관문이란 관문을 다 조지고 형제끼리 애뜻한 상봉을 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역사사실'에 허구를 가미한 까닭을 이해했다면, '진실'을 밝히고 '허구의 의미'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러나 이는 '공정'이나 '왜곡'과는 다른 일이다. 나관중이 허구성을 가미한 목적이 역사의 진실을 감추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모두 '역사의 진실'을 감추고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부끄럽기 때문에 '거짓 날조'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거짓 날조는 '재미'도 없다. 위안부가 사실은 '자발적 매춘'을 하고, 김치의 원조가 '파오차이(채소절임)'였다는 것에서 무슨 재미가 느껴지느냔 말이다. 감동적이기라도 한가? 그런 거 없다. 하지만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는 재미라도 있다. 그리고 역사적 흥미를 느끼고 역사의 진면목을 찾아보려는 노력까지 기울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촉한정통론'은 거짓이지만 오늘날에도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재미와 역사적 흥미를 유발시키는 장치로 옳게 작용한다.
나가는 글 : 그럼에도 독자들은 '촉한정통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 기왕에 '역사적 흥미'를 유발시켰으니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역사를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역사적 진실을 오늘날의 사람들도 흥미를 느끼고 찾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정과 왜곡한 역사에 누가 관심을 갖고 있는가? 의외로 관심을 별로 두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애써 공정을 하고 왜곡을 한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상당수다. 더구나 그런 허튼 노력이 '들통'이 나면서 쪽팔림까지 당하기 일쑤다. 그리고 그런 쪽팔림은 자신들의 '강한 국력'으로 무마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정작 속아넘어가야할 '피해자(한국)'이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나라가 아니며 점점 더 강한 국력을 갖게 되니, 속된 말로 '똥줄이 타들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애초부터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고 찾고 증명하려 애썼기에 한국은 오히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있다. 더구나 한류열풍을 넘어 'K-컬처의 붐'을 맞이하며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편'을 들고, '한국의 매력'에 푹 빠져 있으니, 도리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역풍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 이 책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한족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저자 나관중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민족의 정체성'과 '조국의 위대함'을 되새길 수 있는 초석이 되는 '역사적 진실'을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이게 뭔소리냐면, 중국 오천년 역사 가운데 '위촉오 삼국시대'만큼 빠삭하게 알고 있는 역사가 있느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삼국지'가 가진 위대한 힘이다. 전세계인이 중국사는 몰라도 '삼국지'는 알고, 그 시대를 풍미했던 수천이 넘는 군웅들의 이름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다. 최근 들어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사'에 관심을 쏟게 된 까닭이 무엇이냔 말이다. 다름 아닌 'K-드라마', 'K-영화' 덕분이다. 지금도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끝없이 시청되고 있단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런 역사드라마와 역사영화를 본 관객들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 방문을 하려 한다. 만약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만들었다면 '흥행'에도 실패하고, '관심' 유발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름답고 재밌게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 삼국지'의 인기에 힘 입어서 이 책과 같은 '진실과 허구'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관중이 소설의 재미를 추구하고 적절히 '허구'를 가미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재미를 추구하려고 '거짓 날조'를 방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애초에 관심조차 끌어낼 수 없다. 더구나 진실을 바탕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역사'는 더욱더 그렇다. 한껏 흥미를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역사'라 하더라도 '진실이 없는 거짓'을 바탕으로 한 것이 밝혀지면 가차없이 외면 받는 것이 또한 '역사'다. 그래서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소설 삼국지'조차 진실로 마주하고 싶어하는 까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