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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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마을 23]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이양수 / 김영사 (2007)

[My Review MMCCVIII / 김영사 3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일곱 번째 리뷰는 정의로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탐구한 철학자 <롤스 & 매킨타이어>다. 세상은 완전하게 불공평하지만 '불평등'은 참을 수 없었던 두 철학자가 공평한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원칙을 두고 뜨거운 논쟁을 펼친 내용이 담겼다. 그렇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완벽히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원칙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 불가능에 도전한 두 철학자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맛이 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롤스 & 매킨타이어> 관점 포인트 :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철길 위에 사람을 놓아두고 몇 명을 죽여야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밴담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대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리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죽지 않는 선택'을 고르는 일이다. 그러나 달리는 열차를 멈추거나 날아오르게 할 수 없다면 1명을 죽이거나 20명을 죽이는 두 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 모두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정의롭지 못한 상황조차도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정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뭔가 원칙을 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고 1명이 죽든 20명이 죽든 '운명의 주사위'에 맞겨 놓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방법이라고 우길 수 있다면 그래도 좋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 '정의 원칙'을 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에 그런 '정의 원칙'이 무색하리만치 '각자 도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두를 위한 희생을 '평가절하'하고 어리숙한 사람 취급하는 세상이 되었단 말이다. 말이라도 그런 위대한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는 미덕이 사라지고 철저히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정의'인냥 살고 있단 말이다. 그러다 불행이 찾아와 주위의 도움을 청하지만 도와주는 이도 없다. 온세상이 '복불복'이 된 세상 같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정의론' 같은 허무한 논쟁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정의가 무너진 세상을 살고 있으니 진정 행복한가 되묻고 싶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무심한 사람들에겐 '정의'따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일테다.

그런데 새삼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의 이야기가 전세계에 주목을 끌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 이야기다. 우리가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공동체주의'다.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말이다. 힘의 논리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세계가 요동을 치며 '힘의 판도'를 예측하지 못해 모두가 불확실성에 빠져 불안해 하는 요즘, 예측 가능하고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가 부쩍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걸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도 얼마나 치열하게 '각자 도생'하며 살아가는 무한경쟁 속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외국의 현실을 살펴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이른바 초강대국이라 일컫는 '미국'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트럼프가 내세운 정책들이 도리어 평범한 미국인의 삶을 소용돌이 치게 만들었느냔 말이다. 유럽은 또 어떤가? 제국주의 시절에 싸아놓은 부와 명성으로 그동안 떵떵거리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 약발(?)이 다 떨어져서 경제가 휘청거리고 정치가 안정을 찾지 못하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러시아도, 중국도, 일본까지도 마찬가지고, 인도, 브라질 등을 비롯해서 중진국을 넘어 새롭게 위상을 세우려 했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죄다 휘청거리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단적으로 이들 나라의 '공동체주의'가 어떤가 보라. 애초에 도덕과 윤리가 명함을 내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강대국이자 선진국이라 불리던 나라들도 이 모양인데, 그 뒤를 쫓던 나라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헌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새삼 '공동체주의'가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스럽기 짝이 없던 일면이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비상계엄'이란 위기를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온 국민이 깨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각자 도생만이 유일한 해법인줄 알았다가 '공동체'를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정의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우리가 살 길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도 확실히 제시해준 셈이다. '정의'를 바로 잡지 않으면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치르게 될지 말이다.

나가는 글 : 뜬금 없이 '대한민국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다름 아니다. 이 책이 쓰여진 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양심적 병역거부', '자유무역협정' 따위가 우리가 논할 수 있는 사회 정의에 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니 '그때의 선택'이 어떻게 결정되었어야 정의로웠던 것인지 그 당시의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때 그때의 정의'는 사실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를 골머리 썩게 만드는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나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더 건전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정책이나 법 제도라도 '악용'하고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면 몇몇 소수의 이익만을 보장할 뿐이고, 더 큰 공동체를 위기로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어떤 제도를 '선택'하는 것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최대한 살려내어서 '공동체'를 위하는 결정이 더 핵심적이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이다.

그런 점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대단히 선구적인 제안을 했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지만.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런 롤스의 견해를 회의적으로 보았을 뿐이다. 심지어 매킨타이어 같은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롤스의 <정의론>은 무한한 도덕적, 윤리적 사상이 밑바탕이 되어야 겨우 실현가능한 '원초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정의실현의 가능성'조차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스가 옳았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사회에서 우리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고, 정의 구현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와서 피부로 직접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도덕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때 우리는 도덕은 누구나 당연히 지키는 선(善)이니, 경제적 풍요만 이룰 수 있다는 행복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경제성장'은 허울 좋은 숫자(통계) 조작에 불과했고,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인해 빈부격차는 심각해졌으며, 도덕은 땅에 떨어져서 모두가 행복해야 할 '공동체주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게 되었나? 정의는 사라졌고, 불공평은 심화되었고, 불평등은 일상이 되었다. 그때 '법치주의'가 살아야 정의를 살릴 수 있다며 야당 대표를 '악마화'하고 사법 정의를 '정적 제거'로 활용한 결과 어떻게 되었나? 정치는 실종되었고 몰염치가 일상이 되었으며 국민은 '갈라치기'를 당해서 심각한 사회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런 사회혼란을 일거에 불식시킨 사건은 '일 잘하는 머슴(대통령)'을 뽑은 결과였다.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새 제도'를 신설한 것이 아닌 '기존의 법제도를 준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엄정하고 공평하게 시행했을 뿐'인데, 마치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그 까닭은 바로 '도덕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똑같은 법 제도인데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사용하니 '정의'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롤스가 말했던 '원초적 입장'이 실현된 것이다. 거기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기존의 정책과 제도를 활용하니 누가 이익을 보든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무지의 베일'이 제대로 작동한 것이다. 권력자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서 꼼수를 부리지 않고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대원칙'을 세우고 실행하니 공평한 결과를 얻게 된 셈이다.

롤스는 누구나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된다면 정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하면 이득을 챙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야말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모름지기 국가정책이 이런 대원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제무역에서도 이런 원칙이 지켜진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정의는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말에 '지구촌'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니 거대한 지구도 '마을'쯤으로 느껴졌기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뿐인 지구를 더 사랑하자'는 뜻도 있었다. 그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위해 인류가 행해야 할 단 한가지는 바로 '정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주의'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도 할 수 있는 도덕적 마음가짐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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