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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 ㅣ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8월
평점 :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25)
[My Review MMCLXXXIII / 인물과사상사 3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의 열두 번째 리뷰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다. 40년대는 1권에 이어 2권으로 마무리하고 있는데, 앞서도 언급했지만 마음이 무겁고 심란해 진다. 오랜 식민침탈으로 지치고 고통 받던 민중을 도탄에서 구원해줘야 할 민족지도자들이 사분오열이 되어서 이데올로기 대립만 일삼다 끝내는 '조국의 분단'하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한국 전쟁'까지 발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과연 민족지도자라고 지칭해도 괜찮을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딴에는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그들도 할 도리는 다 한 듯 보인다. 첨예하게 찢기고 갈라선 마당에 이를 봉합하고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초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탓'만 하고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남탓'을 아니 할 수도 없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누구탓'을 해야 하는 걸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관점 포인트 : 민족지도자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적어도 47년 12월까지는 둘은 한 배를 타고 있었단다. 그런데 '장덕수 암살사건'을 계기로 둘은 갈라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장덕수는 누군가? 동아일보 초대 주필로 해방 이후부터 열렬한 한국민주당의 이승만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죽자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살인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이전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은 서로 합당까지 할 의사를 보이며 타진을 보고 있었는데, 김구가 '장덕수 암살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자 이승만에게 경찰의 수사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했는데, 이승만이 이를 거절한 것이 둘 사이가 틀어진 계기라는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의 통합을 불만스럽게 지켜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결정적 호재로 활용하였고, 김구는 그럼에도 '합당'을 추진했기 때문에 한민당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것이다. 암튼 이 사건을 계기로 김구는 한민당과 척을 지게 되었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독당'은 극우노선을 버리고 좌우를 초월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해방 직후에 김구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김일성의 좌파, 이승만의 우파, 이를 통합하려는 김구의 모습은 45년이 아닌 47년에나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방직후'부터 줄곧 좌우를 초월한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우사 김규식'뿐이었다고 본단다. 그런데 김규식보다 김구가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떠오른 것은 '이승만의 입김'이 그만큼 셌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듬해인 48년 4월 3일 새벽 2시는 '제주 4·3 항쟁'을 떠올려야 한다. 30여 만명의 제주도민 가운데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아직까지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알지 못해 8만 명, 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애초에 빨갱이라고 파악된 최대 숫자는 500명이었단다. 그런데 어떻게 3만 명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경찰은 제주도민들의 조직적인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해서' 일부 주민들의 폭동을 오히려 조장하고, 확대하려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들이 폭도를 가장하며 민가를 방화하고 다니가도 했단다. 이 사건을 통칭해서 '오라리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제주도민들의 분노를 돋운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게 되자. 경비대 총사령부 소속 제11연대는 제주에서 '무차별 체포작전'이 벌어졌고, 이른바 '레드 헌트' 작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정 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승만의 학살 지시를 미군정이 '사냥'으로 명명한 셈이다. 도대체 어떻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도 학살하러 가는 것을 문명국이라고 자처한 미국이 이렇게 명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지시한 이승만도 미친 놈이긴 마찬가지다.
허나 이 사건이 밝혀진 것은 '현재의 시점'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화두는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 문제'였다. 5·10 총선거를 앞두고 김구는 남북 단일국가를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이승만은 '남한 단독국가'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5·10 총선거는 남한 단독선거로 치뤄졌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정부는 수립(8월15일)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수립(9월9일) 되었다. 이로써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공포되며 우리 민족의 숙제였던 '친일파 처단'이 시작되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친일파를 비판하면 '빨갱이'라는 소리가 나돌게 되었다. 당시 경찰의 100%가 친일파로 채워졌기 때문이고, 이들이 활개를 치니 치안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의 노고를 생각해서 그들을 처단한다는 것은 신중히 생각할 문제'라면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반민법'을 반대한 명분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반민법'에 대단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단다.
48년 10월에도 제주도에선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진압군'을 투입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에 집결했는데, 그 진실을 알게 된 국군은 한순간에 학살 명령에 불복하고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이들의 항명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하는데 자신들은 동의할 수 없다는 가장 인간적인 항명이었다. 그러니 이승만 정권은 인간이길 포기했다. 이승만은 이들을 '공산당 괴뢰의 지령을 받은 불순분자'로 낙인 찍고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뿔뿔이 흩어진 '반란군'을 색출하기 위해 '손가락총'이 동원되기도 했단다. 반란군이 민가에 숨어들자 누군가 "저 사람이 반란군이다"라는 손가락질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총을 발사해 즉결처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망자만 2600명이다. 여수에서만 3400여 가옥이 불탔으며, 이재민은 2만 명이 넘게 발생했단다. 여순 사건에는 '소령 박정희'도 체포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관동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그는 좌익(남로당)에서 우익으로 또 한 번 변신을 꿈꾸며 여순 반란 사건에 연루된 군인들을 색출하는 수사에 적극 협력하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로당원들'을 다 털어놓은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관동군 선배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기적처럼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한 때 자신의 동료를 팔아넘긴 공로를 인정받아서 말이다. 암튼 '여순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확실한 '반공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49년 6월 26일 일요일 경교장 2층 거실에서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 당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딱 1년 뒤인 50년 6월 25일 일요일에 북한은 남침을 했다. 38도선을 베고 누워서라도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던 백범이 스러졌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김구 암살을 지시한 이승만은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여의치 않자 연일 '북진통일'을 외치며 미국을 자극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회답은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의 방어 포기 선언이었다. 이 선언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대대적인 '남침'을 감행한다.
나가는 글 : 우리 민중의 염원은 명료했다. 일제의 탄압도 견뎌내며 모진 목숨을 건진 민중이었기에 '잘 살아보자'는 목적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민중들의 단 하나의 염원을 '민족지도자'들은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물론 '신탁통치'를 모의한 미국과 소련을 원망하는 것도 맞고, 패전국 일본이 받아 마땅한 '분단'이란 형벌을 한국이 대신 받게 했다는 점에서 미국과 일본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도 맞는 말이다. 허나 우리 민중의 염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우리 민중을 '자신들의 정권 탈취'에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만 가득했다는 점에서 용서가 쉽지 않다. 그들도 나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속에서 열심히 할 만큼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우리가 반만 년의 문화민족이고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본을 먼저 보여줄 수는 없었느냔 말이다. 만약 우리 민족지도자들이 이렇게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한국역사'에 무지한 미국과 소련도 감명을 받아 신탁통치안을 거둬들이고, 저들의 '군사정부의 만행'도 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 우리는 40년대 해방정국에서 그런 '부조리한 모습'을 보였고, 숱한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이대로 원망만 늘어놓을 것인가? 지난 과거는 어쩔 수 없다. 잘났든 못났든 '우리'가 저지른 행위이고, 그 결과에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처절한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40년대에 우리가 한 일 가운데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못난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간다면 분명 더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아프고 슬픈 역사를 견뎌내고 이렇게나 우뚝 바로 섰다고 말이다. 이런 고난과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낸 모습이 더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더욱더 '우리 역사'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