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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2 : 철학의 시작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ㅣ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5년 1월
평점 :
<채사장의 지대넓얕 12 : 철학의 시작>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5)
[My Review MMCLXXVIII / 돌핀북 1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이다. 일곱 번째 도서는 <채사장의 지대넓얕 12>이다. 이 책은 채사장이 쓴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의 '어린이책'이라고 소개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 15권까지 출간이 되어 있지만 더 출간할 것으로 보여진다. 빠르게 리뷰하면 좋겠지만 내가 좀 느린 편이다. 책 읽는 속도도 느리고 책 내용을 정리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린다. 하지만 이는 지능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정독'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만화책을 읽어도 하루에 1~2권 정도밖에 읽지 못한다. 워낙 느리게 읽어서 그 흔했던 '만화방'도 가지 않았다. 거기 가서 보는 값이면 만화책을 직접 사서 읽는 것이 훨씬 더 절약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느린 정독의 효과는 아주 좋다. 왜냐면 난 지금까지 읽은 책이 많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뭐, 책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자기마다 딱 맞는 방법이 따로 있는 법이니 '내 방법'이 가장 좋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정독의 장점'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리뷰가 좀 늦은 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쁘게 봐주셨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채사장의 책들'도 모두 리뷰할 작정이다. [이달의 작가 3 : 채사장]으로 정한다.
<채사장의 지대넓얕 12>의 관점 포인트 : 이번 책의 부제는 '철학의 시작'이다. 지난 11권에서 '과학의 역사'를 다뤘으니 이번엔 '철학의 계보'를 살펴볼 차례가 된 셈이다. 인류 역사에서 '대전환'을 이룬 사건을 다루다보면 여러 위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채사장은 과학계와 철학계의 위대한 인물을 차례대로 선보이면서 인류가 '이성의 빛'을 스스로 찾아내어 '존재의 이유'에 대해 밝혀낸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 것이다. 특히 어른책인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서는 간단한 도식과 탄탄한 설명으로 이를 증명해냈다면, 어린이책인 <채사장의 지대넓얕>에서는 '만화형식'을 통한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간단명료하게 풀어내어 설명하는 점이 둘 사이의 다른 점이다. 하지만 두 가지 버전의 책 모두 '지적대화'를 나눌 정도의 배경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한결 같다. 그러니 어느 책을 읽어도 똑같이 '풍부한 지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고, '방대한 지식'을 쌓아 지적 자신감을 뿜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책이긴 마찬가지다.
이를 테면, 채사장은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절대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회의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철학에서는 '진리'의 유무에 따라 진리가 있다고 보는 관점은 '절대주의', 그 반대쪽인 진리가 없다고 보는 관점은 '회의주의'로 설정했다. 그리고 진리의 존재유무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것보다 명백히 밝히는 관점을 '상대주의'로 놓았다. 그렇다면 고대철학에서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다.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이 바로 플라톤의 말하는 '이데아'다. 이데아는 본질이며, 이데아의 그림자는 현상이며, 절대적 진리는 '불변'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이 아닌 본질을 추구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데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절대주의적 철학'이라는 설명이다. 채사장의 설명은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럼 진리가 불변이라고 주장한 절대주의에 맞서서 진리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본질'은 질료이고, '현상'은 그 질료에 따라 나타난 형상일 뿐이기 때문에 진리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철학'을 제시했다. 그럼 철학에서 '회의주의'는 누가 주장했던 것일까? 진리 따위는 고사하고 궤변만 늘어놓기 일쑤였던 '소피스트'들이 주인공이었다. 물론 소피스트도 모두 쓰레기 같은 철학자들은 아니었다. 제논 같은 철학자는 철학의 수준을 한층 높여주는 '변론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허나 대부분의 소피스트들은 철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며 상대방의 말꼬리를 붙잡고 장난(?)하는 수준으로 보일 정도의 잡기술에 불과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는 '소피스트'라는 말이 칭찬보다는 비꼬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면 철학은 '유일신 중심의 절대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절대주의적 세계관에 딱맞는 철학은 다름 아닌 '플라톤 철학'이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는 중세시대에 '절대불변', '유일무이'한 존재인 태양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절대주의적인 철학을 이어받아 종교적 발전을 이룬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의 업적은 그리스도교에 철학을 접목해서 '교부철학'을 창시했다. 한마디로 신앙과 이성을 결합한 사상가였다. 교부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이니 그리스도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세 철학을 집대성한 이는 따로 있다. 바로 스톨라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단순히 결합하는 수준을 넘어 '조화'를 이루려 했다. 그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바로 그런 조화를 추구한 결과물이고,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힐 정도다. 아퀴나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오늘날 '학교'를 뜻하는 '스쿨'의 어원이 바로 '스콜라'에서 나왔단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덕분에, '모든 존재가 목적을 가진다'라는 그의 주장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신'까지 논리적으로 증명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영원불멸한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믿은 '절대주의 철학자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상대주의 철학자들'을 비교하면서 정리하면 어렵기만 한 철학사상이 간단명료해지면서 재밌게 느껴질 것이다. 각각의 철학자들이 벌인 논쟁은 계속 이어지고, 그 유명한 '실재론 vs 유명론'의 논쟁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정리하면 조금 덜 복잡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채사장'이 펼쳐보인 놀라운 입담이다. 내가 왜 채사장의 책을 즐겨 읽는지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나가는 글 : 여기서 궁금증 하나를 풀어보려 한다. 어른은 '어른책'만 읽어야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책'만 읽어야 할까? 흔히 '권장도서'라는 것이 있다. '나이별'로 구분하기도 하고, '학년별'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나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별로 따지지 않는다. 왜냐면 어른책이 어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른책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어린이라면 얼마든지 읽어도 좋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린이책도 어른이 읽어도 아무 문제 없다. 왜냐면 어린이를 위해서 '이해하기 쉽게 쓴 책'일 뿐이지, 어린이들이나 읽으라도 '수준 낮게 쓴 책'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나이가 50이 넘어서도 어린이책을 즐겨 읽는다. 물론 '직업병(?)' 탓도 있다. 논술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업준비를 위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린이책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내가 전공했던 분야의 어린이책에서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전공과 무관해서 생소한 학문 분야도 어린이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교양을 쌓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수업을 진행하면서 무리없이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쌓게 해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냔 말이다. 실제로 '경제'에 문외한에 가까웠는데, 어느 기간 맘을 잡고 '어린이 경제책 50권'을 독파하는 순간, 어느 정도 경제관련 지식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100권 이상을 독파하고 나니 기초이론 정도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했는데도 '어린이책'을 기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당당히 '어린이'라고 적혀 있는 큼지막한 제목의 책을 산책하면서, 출퇴근 지하철에서, 언제어디서든지 당당히 들고 다니며 읽곤 한다. 이런데도 굳이 '어른용', '어린이용'으로 책을 구분해서 읽어야 할까?
물론, '나이제한'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성적 묘사가 노골적인 에로틱한 어른책들을 어린이들이 읽으면 많이 곤란하다. 특히나 '성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신체건~강한 중고등학생 어린이들이 무분별하게 읽다보면 '이성에 관한 가치관 확립'이 제대로 자리잡는데 곤란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책들은 단편적인 '신체적, 또는 성적인 차이'를 '남녀 차별의 이유'로 절대불변 할 것 같은 고정관념을 심어놓고 '성적 착취'나 '성적 수치심', 더 심한 경우에 '성폭력'과 관련된 묘사가 너저분하다못해 너덜너덜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책들을 읽고 '모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서 목록'을 만들자고 성토를 늘어놓는 어른들도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야한 책'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야한 동영상' 아니겠는가? SNS가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이런 동영상에 노출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사실상 막을 수 있는 법도 없다시피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다. 혹시라도 '봤다'면, 그건 그저 '허구의 세계'에서 '현실에 있을 법한 거짓된 이야기'라는 점을 밝히고, 그런 일을 '현실세계'에서 비슷하게라도 따라하면 십중팔구 패가망신하는 범죄자가 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줘야 한다. 우리는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지식을 넓히고 깊이 공부하다보면 때론 '봐서는 안 될 지식의 문'을 활짝 열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고 주위의 친절한 어른(부모, 선생)들에게 상담을 요청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모든 어른이 친절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홀로 흥분하고 당황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 지 몰라서 몹쓸 짓을 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왕 '알게 되었다면, 올바른 힘으로 만들 방법'도 함께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