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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7 - 초한쟁패와 한 제국, 완결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6월
평점 :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7 : 초한쟁패와 한 제국, 완결>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1)
[My Review MMCII / 휴머니스트 49번째 리뷰] <초한지>로도 유명한 초한쟁패는 항우와 유방, 둘 만의 대결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권했다는 '천하삼분지계'의 원조격으로 한신이 제나라 왕으로 있을 적에 괴통이라는 책사가 한신에게 '천하삼분지계'를 권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초 회왕이 진나라 함곡관을 공략하기 위해 항우와 유방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먼저 관중을 점령한 사람에게 '관중왕'을 내리겠다"고 약조한 이야기부터 꺼내야 한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이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는데, 초 회왕의 이런 명령은 '항우'에게 있어 대단히 모욕적이었다고 언급한다. 왜냐면 당시만해도 유방은 항우의 부하장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초 회왕은 유방을 항우와 '동격'으로 놓고서 경쟁상대로 삼게 했으니, 항우가 받은 모욕감이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이니 그 앞에서는 딴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유방의 군사보다 10배나 더 많은 병력으로 진나라를 공략해 나갔다.
그런데 이때 항우의 군대 안에 '한신'이 창고지기를 하고 있었다. 한신은 항우에게 직접 책략을 전하며 자신의 중히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항우는 번번히 묵살했다. 이에 실망한 한신은 항우의 본진에서 탈영(!)을 해서 유방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렇게 한신이 합류한 상태에서 유방은 함곡관을 넘어 '관중땅'을 먼저 점령하게 된다. 허나 유방은 '관중왕'으로 오르지 못한다. 뒤늦게 함곡관에 들이친 항우의 군대가 유방을 압박하며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유방이 항우가 연 '홍문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그리고서 항우는 유방을 '촉땅'으로 보내버린다. 그곳도 지리상으론 '관중'에 해당하는 곳이기에 초 회왕이 약속한 '관중왕'에 봉한다는 명을 아주 거역한 것은 아니지만, 첩첩산중의 험로를 지나 벼랑 끝에 길을 만든 '잔교'를 건너서 가야하는 여정이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초라한 행렬이었다. 더구나 장량은 유방군이 지난 '잔교'를 불태우라 명령한다. 항우에게 유방의 군대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갈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장량은 비옥한 촉땅에서 재기를 노리며 힘을 기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한신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병사들을 위로하며 '잔교'가 아니더라도 촉땅에서 나갈 길을 또 있다며 '장량의 지략'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의 군대에서도 찬반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날마다 신세한탄만 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중히 쓰라고 고했지만, 유방은 한신을 항우에게서 탈영한 병사쯤으로 여기고 중히 쓰지 않았다. 이에 분통을 터뜨린 한신은 유방군에서도 탈영을 하지만, 뒤늦게 소식을 접한 소하가 뒤쫓아가 한신을 만류하기에 이른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고 나서야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는다. 그리고 한신은 물 만난 용처럼 연전연승을 하는데,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를 거두면서 '항우'와 '유방'과는 또 다른 세력으로 부쩍 성장하게 된다. 특히 '배수진'의 전법으로 대승을 거둔 뒤로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세력을 뻗어나간다. 바로 이때 괴통이 '천하삼분지계'를 꺼내며 한신에게 유방과 항우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로 천하일통을 이루라고 권하게 된다. 그런데 한신은 일개 졸병에서 대장군으로 승진시켜준 '유방의 은덕'을 잊지 못하고, 자신은 그 은덕에 보은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며 '자신의 그릇'을 황제가 아닌 제후 정도로 선을 긋고 만다. 이에 괴통은 한신의 그릇을 잘못 본 것에 불안을 느끼고 몸을 감추게 된다.
과연 한신은 황제가 될 자격이 있었을까? 당시 항우와 유방의 맞짱 대결에서 승부는 '항우'에게 기울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 기울어진 균형을 유방쪽으로 우세하게 한 것이 바로 '한신의 공'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방에게 한신은 '전부'였다. 정리하면, '항우 vs 유방'에서는 항상 항우의 승리였다. 그러나 '항우 vs 한신'에서는 거의 한신의 승리였다. 그러니 한신이 또 하나의 세력으로 '거병'을 하고, 항우와 유방의 승자 중 하나와 싸우는 방향으로 틀어버렸다면, 한신이 제국을 통일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신이 끝까지 유방의 편을 들었기에 결국 승자는 유방으로 결정되었고, 한신은 유방의 견제속에 하나씩 날개를 꺾이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내 목숨마저 끊기고 만다. 그것도 '여태후'에게 말이다. 만약, 괴통의 계책을 받아들여 '천하삼분지계'를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 한신은 왜 유방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려 했던 것일까? 한신의 인간성이 항우나 유방보다는 훨씬 나아보이기에 두고두고 아쉬운 점이다.
어쨌거나 유방이 '한 고조'가 되어 한 제국이 천하통일을 해냈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백성들의 삶은 나아진다. 나중에 '문경지치'라는 태평성대가 이룰 정도로 한나라는 평안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한나라에게도 골칫거리가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여태후의 권력욕'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방민족 흉노의 침략' 때문이었다. 한 고조 유방은 흉노를 정벌하러 직접 나갔다가 개박살이 나고 겨우 살아 돌아온다. 한신에게 맡겼으면 되었을 것을 '한신의 병력'을 몽땅 뺏고서 자기가 직접 정벌에 나섰다가 화살까지 맞고 부상 당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 사이에 한신은 '여태후'의 계략에 빠져 궁궐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 유방은 자기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언을 남긴다. "유씨 이외에 다른 성씨 황제가 나와선 안 된다"고 말이다. 자신의 아내가 대단한 권력욕을 가졌다는 것을 간파한 유언이었다. 유방이 죽고 난 뒤에 혜제가 즉위했지만, 여태후는 섭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씨천하'를 만든다. 중요한 직책마다 '여씨 가문의 사람'을 심어두었고, 황족 유씨와 암암리에 대결 양상을 만든 것이다. 유약했던 어린 임금 '혜제'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자 '여태후'의 야욕은 더욱 거세졌다. 구중궁궐 뿐만 아니라 제후국에까지 '유씨와 여씨의 싸움'은 끊이지 않고 벌어졌고,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비극적 사태는 여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된다. 그리고 여태후가 죽은 뒤에는 대대적인 '유씨의 반격'이 가해졌고,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중신들도 '유씨 황족'편을 들며 여씨 가문을 멸문시켜 버린다. 이때부터 '외척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견제와 숙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가히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권력다툼의 비정함'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뒤에 태평성대를 구가하다 한 무제에 이르러 한나라는 엄청난 위엄을 세우게 된다. 한 무제가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고 강력한 황권을 세운 덕분이다. 장건으로 하여금 '비단길(실크로드)'을 개척하게 한 것도 이때다. 그러나 한 무제가 죽을 때쯤에는 한나라로 엄청나게 쇠약해지고 만다. 왜냐면 거대한 영토를 확장해서 위엄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렇게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엄청난 '국고 낭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무제가 어린 나이에 등극했을 때만해도 가득 찼던 국고가 한 무제가 제국의 위엄을 세웠을 때에는 텅텅 비어서 도리어 한나라의 경제상황이 쪼그라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으로 흥한 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는 까닭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한 무제를 끝으로 사마천의 <사기>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게 된 원동력(?)도 한 무제가 사마천에게 궁형이란 형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도 죽지 않고 항복을 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샀고, 그로 인해서 궁형을 받고 치욕스런 삶을 연장한 까닭이 바로 <사기>를 집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럼 사마천의 왜 한 무제의 노여움을 받게 된 것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흉노 정벌에 나섰던 이광리 장군이 바로 한 무제의 처남이었기 때문이다. 그 장군의 부하장수로 참전한 '이릉'이 흉노와 당당히 맞서 싸우다가 구원병의 도움을 받지 못해 중과부적으로 싸우다 '투항'을 해버렸다고 하니, 투항한 장수 이릉을 벌하지 않는다면, 흉악한 흉노와 고군분투로 맞서 싸우는 아군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이광리 장군을 벌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정황만을 논하며 투항한 장수인 '이릉'을 편들어서 벌을 주어선 안 된다고 바른소리를 하였으니, 이는 곧 무능한 이광리 장군을 임명한 '한 무제의 잘못'이라 지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사리분별이 훌륭한 임금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이라 우기는(?) 사마천을 곱게 볼 수는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사마천을 벌 주었고, 세 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째는 명예롭게 죽는 '사형'이었고, 둘째는 큰 돈으로 죄값을 '대신'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귀족이자 선비로서 치욕스런 형벌인 불알을 잘라내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대개는 돈으로 죄를 면하는 방법을 택하지만, 눈치도 없이 바른 말만 골라서 하는 '사마천 가문'에 큰 돈이 있을 턱이 없다. 그렇다면 명예롭게 죽음을 선택해야 했으나, 사마천은 아버지로부터 '역사서'를 편찬하는 '태사' 자리에 오르라는 유훈이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부끄럽지만 뿡알을 떼이는 형벌을 받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기>는 편찬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관'이 주관하여 임금의 관점에서 임금의 치적을 중심으로 서술되기 마련인데, 사마천은 관직에서 쫓겨났기에 '사적'인 관점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릉의 투항'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며, 별다른 공훈을 세우지 못한 '이릉의 할아버지, 이광'까지 들먹이며 이릉의 잘못을 두둔하는 역작(?)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광과 이릉의 평가가 그다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받으며 <사기>의 객관적 서술에 흠집을 남겼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국사 최초의 역사서라는 지위는 놓치지 않았으며, 전설적인 '삼황오제'의 이야기도 역사에 수록하였기에,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역사가 '오천년'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역사적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흠 많은 역사책이지만, 우리가 '남의 나라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까닭은 중국의 위대한 역사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이란 나라가 감히 우리 앞에서 깝치지 못하게끔 철저히 '분석'하기 위함이다.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저들이 남긴 지식이 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공영'을 위한 지혜임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직접 깨우친 뒤에 저들의 무지몽매함을 일깨워주는 방법밖에 없다. 현재의 중국이 덩치값(대국) 못하고 쫌생이(소국)처럼 굴기 때문에 '대국'이라 불리지 못하고, '소국'이라 불러야 마땅함에도 덩어리가 아까워서 '중국' 정도로 불러주고 있다는 사실을 왜 저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수고를 해줘야 한다. 저들이 남긴 '기록물'을 철저히 분석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이고, 저들의 속좁음으로 인해 저들이 남긴 기록조차 왜곡해서 '저들만 잘났다'고 잘못 해석해 우리를 해코지하려는 의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손수 '객관적으로' 해석해주어서 잘못 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 '더 잘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임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