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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ㅣ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채만식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DCCCXCI / 소담출판사 5번째 리뷰]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태평천하>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39년에는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일제식민지의 피폐한 하층민의 삶을 깊숙이 조명하며 '한 여인의 비극적 수난사'를 줄거리로 삼았다. 그러면서 '한 여인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사회의 문제인지를 따져 묻고 있다. 그래서 책 제목도 '탁류'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지럽게 흘러가는 흙탕물, 또는 그런 흐름'이고, 또 하나는 '무뢰한의 무리'라는 뜻이다. 덧붙여서 '무뢰한'의 뜻은 성품이 막되어 예의나 염치를 모르며, 일정한 소속이나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비슷한 말로 '건달', '쓰레기', '야만인'을 꼽고 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한 여인이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겠냐는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초봉이는 가난한 정주사의 딸이다. 성품이 착하고 예쁜 미모를 갖춘 스물한 살의 처녀다. 그런데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이 너무 많다. 먼저 남승재란 인물이다. 의사의 조수로 일을 하고 있는데 번듯한 생김새로 초봉이 은근히 맘에 두고 있는 남자다. 고태수란 남자도 있다. 은행원으로 일을 하고 있어 돈푼 깨나 지나고 있어 초봉이 아버지의 맘에 들어 초봉이를 태수에게 시집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타락한 인물이다. 초봉이라는 예쁜 아내가 있는데도 다른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 타살을 당한다. 여기에 곱사등이 장형보가 등장한다. 초봉이 남편인 고태수가 타살을 당하던 날, 장형보는 초봉이를 강간한다. 이런 참변을 당한 초봉이는 결국 군산을 떠나고 만다. 한편, 아버지 정주사의 친구인 박제호도 있다. 그는 친구의 딸, 초봉이에게 일자리를 주는 등 호의(?)를 베풀기도 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던 차에 예쁜 초봉이를 유혹해서 몸을 탐하고 동거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장형보가 다시 나타나 협박을 받자 박제호는 초봉이를 가차없이 버리고 만다. 그렇게 장형보와 함께 살다, 그의 자식도 낳았지만 고통스런 삶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증오의 대상밖에 아무 것도 아닌 장형보를 살해하고 초봉이는 자수를 한다.
어쩌면 일일연속극에서 많이 보던 '통속적인 신파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많은 여인의 굴곡진 삶을 통해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수많은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눈물로 흠뻑 젖게 만들던 전형적인 스토리로 볼 수도 있다. 그럼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많은 여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일 것이다. 일단, 초봉이를 지켜줘야 마땅한 아버지는 왜 '남승제'가 아니라 '고태수'랑 혼인을 강요했는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아버지는 아내와 네 남매를 먹어 살릴 능력이 없는 가장이었다. 이를 스스로 통감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올 생각을 해야 마땅하거늘, 정주사는 첫 딸을 돈 많은 사윗감에게 시집을 보내서 '한 밑천'을 두둑히 챙길 생각만 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승제가 아닌 부유한 태수를 사위로 점찍고 초봉이에게 혼인을 강제, 명령하고 만다. 천성이 착하고 효심 깊은 초봉이에게 '아버지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자신의 딸의 운명을 지옥구덩이로 밀어넣는 '지옥문'이었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봉이의 남편인 고태수는 타락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주사가 '돈'만 밝힌 것이 아니라 '성품'까지 고려해서 자기 딸의 혼인상대를 고르는 정상적인 인물이었다면 초봉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허나 이는 1930년대 일제식민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정주사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당시 사회분위기는 무슨 짓을 하던 돈푼 깨나 펑펑 쓰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로 치던 때였다. 이런 짓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팔아먹던 시절'인데 뭘 더 바라겠느냔 말이다. 이런 도덕적 해이가 판을 치던 시기에 정주사 홀로 '독야청청' 살아봐야 남산골 샌님 꼴을 면치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정주사의 결정은 당시 혼탁한 사회분위기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에서 비롯된 비극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식민지가 아닌 다른 시대였다면 초봉이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채만식의 <탁류>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의 대립적 시각으로 비판적인 읽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채만식은 <탁류>를 통해서 1930년대 조선식민지 사회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온통 타락한 사람들, 위선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음모를 횡행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악한 사회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채만식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소설이라는 도구로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해방이 된 뒤에 유일하게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지식인으로서 통절한 반성을 표했던 유일한 소설가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탁류>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는 혼탁하게 불투명한 흐름을 보일지라도 그 물이 더럽고 어지러운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싹쓸어버리고 나면 '미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를 것을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탁류'가 흐른 뒤에는 '청류'가 뒤따르는 법이다. 부디 대한민국의 미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청류'가 따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