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가, 뭉클 - 매일이 특별해지는 순간의 기록
이기주 지음 / 터닝페이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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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XV / 터닝페이지 1번째 리뷰] 시, 에세이를 그리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그보다는 긴 '산문'을 즐겨 읽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소설도 단편보다는 긴 호흡이 필요한 '장편소설'을 즐긴다. 특별한 까닭은 없다. 그저 '한 번 꽂히면, 쭉 가는 길'을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일 따름이다. 그래서 '에세이'도 오랫만에 읽는다. 그렇지만 이 책도 '그림'이 첨가되지 않았다면 진득하니 읽지 못했을 거다. 수많은 에세이 모음집이 그렇듯이 대개 '비슷비슷한 감상이 나열되는 공식(?)'이 반복되는 일종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공식(!)'이 발견되는 순간 에세이 책을 덮어버리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한 폭의 '그림엽서'가 연상되는 거리의 풍경이 담긴 수채화가 내 시선을 사로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림 한장 한장에 대한 '감상'을 수필로 남겨 놓은 이 책에 그만..흠뻑 젖어들고 말았다. 어느덧 계절은 '가을'이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 이기주는 '그림 그리는 너튜버'로도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이 책 <그리다가, 뭉클>에도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고, 작가도 은근슬쩍 자신의 너튜브 활동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비아냥거리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난, '그림, 잘 그리는 재주'를 아주 존경하기 때문이다. 나도 글을 쓰다보면 간혹 '이건,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백에다가 깨적깨적 서툰 솜씨로 그림을 그려넣어본 적도 있지만, 언제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발꼬락'으로 그려도 이보다는 잘 그리겠다는 수준보다 한참 떨어지리는지라 두 번 다시 그런 '무모한 시도'는 하질 않았다. 그래도 여러 번 시도를 하면 잘 할 수도 있다는 조언을 십분 받아들여 노력도 해보려 했으나, 번번이 발꼬락보다 못생긴 그림을 그려놓고 후회하길 반복하니 더는 그릴 용기조차 생기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글보다 그림에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듬뿍 담아서 말이다.

그림 실력이 신통치 못하니, 한때는 '사진'을 찍는 연습을 해본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솔직하게' 찍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맘에 쏙 드는 '피사체'를 매번 찾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노출'이나 '각도와 구도'를 일일이 사진기에 '입력'해야만 좋은 사진이 찍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슬슬 귀차니즘이 발동하더니 결국 '자동카메라'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또다시 분류하고 거르는 작업도 해야 해서, 결국엔 그마저도 때려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사진'에는 '상상'을 담을 수 있는 여지가 남겨져 있지 않아 매번 불편을 겪다보니 멀리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글'에 몰두하고 있다. 결국에는 '읽고, 쓰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을 붓이나 펜으로 쓱쓱 그려내는 실력을 갖춘 사람을 정말 부러워하게 되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책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끝까지 읽어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작가의 연배가 '나'와 비슷하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감상에 해당하는 글의 내용이 하나같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고 읽은 적이 있는듯한 낯익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는 재주'를 바탕으로 인생을 철학적으로 논하는 담론들이 그 옛날 TV프로그램 중에 하나였던 <사랑방중계>를 연상시켜서 참 좋았다. 당시의 난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밤11시쯤에 시작하던 그 프로그램을 매번 시청할 수는 없었지만, 어린 나의 눈에는 어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꽤나 철학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작 철학이 뭔지도 모르던 나이에 말이다.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이 나는 대목은 '외워 그리는 그림'과 '빛은 어둠으로 그린다'였다. 인생을 살다보니 '대충' 살아지기도 했고, 터무니 없는 실수를 해서 '망신살'이 뻗치던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심히 살아야지, 물러터진 정신력으로 어찌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다그치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많았다. 나이가 어릴 적에는 더욱더 많이 그랬고 말이다. 물론 자발적인 다그침보다는 주위의 책망 때문에 그랬던 적이 많았다. 참으로 쪽팔렸다. 그런데 마흔살이 넘으니 그럴 필요가 있겠느냔 생각이 부쩍 들었다. 앞으로 '살 날'보다 이제까지 '살아온 나날들'이 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니, 사알짝 '내려놓기'를 해도 괜찮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인생 뭐 있어?'라는 철학적 질문에 나름의 답이라고나 할까. 살다보면 '대충' 살아도 괜찮을 때가 더 많고, 실수를 해야 '인간미'가 넘치는 것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번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지 느낄 때쯤에야 겨우 깨우친 '나만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철학적 깨달음과 비슷한 것이 바로 '외워 그리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일수록 '순간포착'을 잘 해서 '찰나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천재적인 재주를 지닌 것이 아니라 늘상 그리던 것을 외워서 이 화폭, 저 화폭에 '대충' 찌끄려놓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면 훌륭한 작품이 완성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또한, '빛은 어둠으로 그린다'는 것도 하얀 도화지에 새하얀 빛을 그릴 때는 엉뚱하게도 '그림자'나 '음영'을 그려넣는 것으로 빛을 표현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인생을 살면서 '화려한 성공'을 실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평범한 실수'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림 뿐만 아니라 '위인전'에서도 자주 나오는 단골 수법 아닌가 말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 항생제'가 사실은 실수로 '푸른곰팡이'를 배양했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인생을 살다보면 '어둠'만 가득한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 우울함을 '음영'으로 삼아 주위를 더 밝게 표현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 볕들듯이 희망찬 '밝음'을 그려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살면서 나름의 철학을 신념으로 삼는다. 하지만 대개는 금방 잊고 다시 원상복구되는 일상을 반복하며 산다. 누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이 '화려한 성공'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어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한몸에 받겠지만, 그로 인해서 내가 슬퍼할 까닭은 절대 없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부러운 건, 그냥 '부러울 뿐'이다. 딴에는 조금쯤 '부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내가 부족한 '욕심'을 심어주고, 그 욕심이 '내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니 마다할 까닭도 없다. 다만 '시샘'할 필요는 없다. 남이 가진 걸 못 가졌다고 배 아파하면, 결국 '내 배'만 아플 뿐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만족'을 하며 살아가면 그게 최고의 행복인 셈이다. 살짝 부족한 듯 살아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게 내 정신건강에도 좋으니까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살짝 아니라 많이 부족한 '내 그림실력' 때문에 이기주 작가가 부러운 것은 '인정'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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