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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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IX / 돌베개 4번째 리뷰] 문과와 이과를 통합하여 교육하자는 이야기는 꽤나 오래전부터 회자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2002)에서 '이과생은 셰익스피어를, 문과생은 열역학 제2법칙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똑똑한 수재들만 모아놨다는 동경대생들조차 '기본 상식'에 해당하는 것인데도 자기 분야가 아니면 전혀 알려고 들지 않는 현상을 꼬집으며 지적망국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을 받은 우리 나라에서도 서울대생을 상대로 기본 상식에 관한 질문을 던졌는데 '평균 이하의 점수'가 나왔다면서 서울대생을 '문제만 잘 푸는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푸념을 쏟아내던 때였다. 그 이후로 우리 나라의 교육과정도 많이 바뀌어서 2024년부터는 '문과와 이과의 수업내용을 통합한다'고 발표를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수험생들이 혼란스러워했지만, 이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교육부'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며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테면 아무런 대안도 없이 느닷없는 '교과통폐합'이나 '불수능'과 '물수능'으로 냉온탕을 왔다갔다하는 실험을 고3수험생을 대상으로 하는 등등 말이다.

그럼 문과와 이과의 공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저자 유시민은 단지 '수학'을 잘 하지 못했기에 '문과'를 선택했다는 경험을 밝혔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공부에 대한 매력 뿐만 아니라 '필요성'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평생을 인문학 공부에 매진하는 '문과 남자'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과학 공부'가 필요했더라는 생각에 미쳤다는 것이 이 책 핵심이다. 왜냐면 세상의 이치를 알기에 '인문학'만으론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란다. 인문학적 사고로는 답을 찾지 못했는데, 과학적 사고를 빌어오니 너무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경험을 통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답을 찾는데 그리 '깊은 과학지식'이 필요치는 않더라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애초에 저자가 '수포자'였기 때문에 과학 공부를 포기했는데, '수학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없지만, 저자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과학교양서>를 두루 섭렵하는 것만으로도 좀처럼 풀리지 않던 인문학적 난제가 스르르 해체되는 것 같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신비로운 경험담을 풀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생 문과생'일지라도 과학상식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경우는 정반대로 '천생 이과생'인줄로만 알고 수학과 과학 공부만 줄기차게 했더랬다. 그렇게 나이 서른이 되니 '문학적 소양'이 전혀 없는 무식쟁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일상을 살면서 '과학지식'이 풍부하니 매우 유용했고, 웬만한 전자제품은 고장 걱정도 없이 척척 고쳐내고, 컴퓨터도 곧잘 다루는 능력도 발휘했지만, 뭔가 많이 헛헛함을 느꼈던 것이다. 어릴 적엔 전래동화도 많이 읽고, 소년소녀문학전집도 섭섭치 않게 읽기는 했지만, 철학적 지식과 지적 교양을 짙게 풍기는 '인문학자들의 언어'에 곧잘 매료되곤 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식하지는 않았지만, 그 방면으로는 분명한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역사책'을 뒤적거리고, '철학 사상'에 빠지기도 하고, '고전 문학'도 섭렵하면서 인문학적 교양을 쌓아나가니 비로소 '나만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식만 가득했던 나에게 '삶의 지혜'가 더해지면서 내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무엇'을 깨닫는듯한 영감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저자보다 훨씬 무식하기 때문에 '그 경지'가 저자의 수준에 훠얼씬 미치지 못했겠지만, 그 감동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이 있다. 바로 '학문의 경계는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잘못된 교육 방향이었다는 점이 말이다. 저자보다 한참 실력이 떨어지는 나조차 그런 경험을 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이들이 '반쪽짜리 공부'를 하고서 제 실력을 갖추지 못했겠느냔 말이다.

물론, 저자는 '환원주의'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응과 인문학자들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는 예를 들기는 했다. 연구 대상이 다르면 따로 공부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인문학자들이 꽤나 많다는 이야기도 곁들여서 말이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연구일지라도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인문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자신도 '경제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문학자들의 경향에 십분 공감한다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말한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더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그래야 학문이 발전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과학 분야에서는 환원주의로 톡톡한 효과를 누리고 있는데, 인문학은 환원주의에 반대하고 있기에 발전이 더디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도 뒤늦게나마 과학 공부를 통해서 얻은 것이 많다고 말한다.

학문에는 정답이 없는 법이다. 저자의 주장이 꼭 맞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직된 사고'보다 '유연한 사고'를 통해서 더 많은 지식을 깨우쳐온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시도'조차 해보자 않고서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한다면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려움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선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인문학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과학은 '사실'을 다룬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데 감상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문학에선 '감상적 접근'을 폭넓게 허용한다. 어떤 사실을 끌어내기 위해서 최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서 위대함을 찾아내고, 그 위대함에 감격해서 눈물을 자아내는 경지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마치 '방정식'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학자와 방정식이 옳다는 것을 밝혀내기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모두의 인정을 받아내어 지상 최고의 영광을 누리기까지의 '과정의 아름다움'을 따지는 인문학자처럼 말이다. 분명 학문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 둘은 따로 떨어져서 논할 것이 아니다. '함께'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그림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반쪽짜리 공부'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양쪽 날개를 동시에 퍼득여야 하늘을 날 수 있는 새처럼 문과와 이과는 왼쪽과 오른쪽의 날개가 되어 비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적으로는 '비익조'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암수가 한 쪽의 날개밖에 갖고 있지 않아 둘이 짝을 짓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상상의 새 말이다. 물론, 비익조는 부부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말로 '공부'와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허나 학문의 아름다움을 '조화'에서 찾을 수 있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학문을 보다 사랑하게 된다면, 그 뜻이 무엇인들 대수겠는가. 그렇게 문과와 이과가 사랑하는 연인처럼 꼭 붙어 떨어지지 않는 한 몸처럼 활개를 치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울 것이다. 끝으로 하늘엔 비익조, 땅에는 연리지, 물속엔 비목어처럼 더는 문과와 이과로 학문을 나누어 부르지 않고 통섭된 이름이 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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