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나라 - 한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어떻게 야구를 국민 스포츠로 만들었나
이종성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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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V / 틈새책방 1번째 리뷰] 나는 스포츠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비만'인 체형이라 뛰고 달리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땀도 많이 흘리는 편이라 '땡볕'에서 뛰어노는 걸 아주 극혐한다. 그래서 난 축구도 하기 싫어했고, 야구는 더더군다나 하기 싫었다. 그나마 농구는 '실내코트'에서 하는 경우엔 조금 뛰기는 했는데, 역시나 '풀코트 경기'는 싫어했다. 그런데도 골을 넣는 실력은 좋았기에 주로 '슈팅가드'로 활약했고, 안정적인 3점슛을 작렬해서 한때는 인기를 좀 끌기도 했다. <슬램덩크>로 치면 '정대만'으로 활약했다고 상상하면 거진 맞다. 그런 내게 '스포츠를 통해서 바라본 역사'는 생소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야구(베이스볼)'라니 별로 좋은 추억도 없다.

나 어릴 적에 동네 아이들은 '테니스공'이나 '고무공'을 가지고 조막만한 주먹을 방망이 삼아 '찜뽈'이라는 놀이를 했더랬다. 왜냐면 한창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프로야구'가 개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는 꿈도 꾸질 못했다. 야구용품은 꽤나 비쌌기 때문이다. 온 동네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한 명 있을까 말까 했고, 글러브는 그나마 싼 편이어서 얼추 4~5개를 가지고 있어서 한 명이 던지고 또 한 명이 때리고 나머지 두세 명이 공을 받으러 뛰어댕기는 야구 흉내를 내곤 했지만, 결정적으로 '야구공'을 마련하지 못해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문방구에서 구하기 쉬운 '고무공'이라도 있으면 주먹으로 때리고 맨손으로 받으며 골목야구를 즐겼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것조차 잘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날아오는 공이 무서워서 잘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차례 직격으로 날아온 공을 얼굴로 받는 충격을 당한 뒤엔 더욱 그랬다. 이런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에는 손가락이 부러져가며 농구를 했으니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암튼, 스포츠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책 <야구의 나라>를 손에 펼쳐 들었다.

우리 나라에 '야구'가 소개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아시다시피 야구 종주국은 '미국'이지만, 웬일인지 '일본'에서 야구가 아주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딱히 일본이 왜 야구에 열광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탄한 뒤에 스포츠를 통해서 일제를 동경하게 만들 심산으로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전파하려 부던히도 노력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그럴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조선총독부도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에 그닥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는 '내선융화'를 기치로 삼고 조선에서 '갑자원(고시엔) 대회' 예선전을 벌이며 일본 본토에서 벌이는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선보였다. 여기에 참가한 학교는 대부분 '일본인 학생'들로 구성되었지만, 의외로 '일본+조선 학생'으로 구성된 학교도 꽤나 선전을 했고, 많지는 않지만 '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된 야구팀이 예선 1위로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도 있었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은 '야구'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축구와 달리 야구는 꽤나 비싼 야구용품이 없으면 제대로 된 경기조차 치를 수 없는 '귀족 스포츠'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인 학생으로 구성된 팀이라 하더라도 크게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제강점 당시에 그 비싼 야구용품을 갖출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있으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부모를 두어야 했고, 그런 여유가 있다면 필시 '친일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친일파가 '매국노'는 아니었겠지만 '일제의 정책'에 적극 찬성하거나 적어도 '동조'해야만 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인들의 '야구 외면'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야구를 경험한 어린 학생들은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일본인들의 텃새와 조선인들의 사나운 눈총을 견디며 야구를 해왔다.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압도하는 실력을 뽐내며 온갖 설움을 이겨내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 해방이 되자 미국에 의해 '베이스볼'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서럽게 야구를 해왔던 사람들에겐 '또 다른 해방공간'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야구는 점점 더 우리의 일상을 파고드는 매력을 뿜뿜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재일교포 선수들'이었다. 이승만 시절에는 '재일교포'들이 국내에서 야구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물론 많이는 아니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경기장 하나 없이 '고교운동장'에서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허나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경험했던 재일교포들에겐 '물 만난 고기떼'처럼 씽씽 날아올랐다.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도 이때 한국으로 귀국했고, 처음에는 '쪽발이'라는 욕도 참 많이 들었단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란 딱지로 설움을 많이 받았고, 북한은 '만경봉호'라는 북송사업을 시작하던 때라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남쪽이냐, 북쪽이냐로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시점이기도 했단다. 허나 '야구실력'이 되는 재일교포들은 주로 남쪽을 선택해서 국내 야구발전에 큰 공을 세웠단다.

이후에 박정희 시절에도 야구는 발전했다. 특히 1963년에 벌어진 '야구 한일전'에서 승리한 대가로 당시 동대문야구장에 '조명탑'이 건설되며 한국야구는 '야간경기'까지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고, 그 인기도 서서히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허나 박정희가 야구보다 축구를 좋아했다는 점이 큰 걸림돌이었다. '박스컵'을 걸고 국제경기를 치를 정도로 축구광이었던 박정희 덕분에 한국축구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했고, 월드컵과 올림픽에서도 그 실력을 돋보일 수 있었기에 국민들은 축구에 열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구는 온 국민이 열광할 수 있을 정도의 '국제경기'가 없었기에 인기가 그리 없는 스포츠였단다. 그렇게 박정희 시절에는 '남북대결'이 벌어질 수 있는 스포츠를 주로 집중지원했고, 그 결과 월드컵과 올림픽에 대한 지원은 빵빵한데 반해서 야구는 남북대결이 벌어지질 않으니 외면 받았던 것이다.

허나 '은행 야구단'에 이어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끌자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에는 '상고'를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최고의 엘리트 코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상고는 '야구부'를 만들기 시작했고, 상고에서 활약한 야구선수출신들은 '은행구단'에 스카우트 되어 최고의 월급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상고와 은행에서 야구단을 만든 까닭은 '일제강점기'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야구장'과 '놓고 간 야구용품'으로 명문야구단으로 급성장한 곳도 대부분 '상고'와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명문야구단이 성적과 실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자 야구경기는 볼 만한 수준을 이루게 되었고, 이들의 공헌으로 '고교 야구'가 급성장하게 된 것이다.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재일교포 선수 출신들'의 공험과 '야구 도시 부산'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일본야구 TV중계' 덕분이었단다. 당시 부산에서는 안테나를 높이고 TV를 틀면 일본 NTV(니혼TV)를 시청할 수 있었단다. 더구나 1964년에는 동경올림픽이 열리던 때였다. 그렇게 수준 높은 '일본야구'를 공짜로 즐길 수 있었던 부산의 야구팬들의 '관람수준' 또한 상향되었고, 이를 계기로 어린 선수들도 자극을 받아 '야구 실력'을 키울 수 있었으니, 결국 '고교 야구의 붐'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에도 '야구의 초석'이 다져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프로야구'는 열리지 못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박정희가 야구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재미 교포 '홍윤희'와 롯데 사장 '신격호'가 프로야구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홍윤희가 '프로야구 계획서'를 입안했고, 신격호가 '프로야구 창단'을 위해 재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결정적 한 방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야구를 싫어하던 독재자가 죽었으니 '문'이 열린 셈이고, 부당한 정권을 잡았던 또 다른 독재자는 국민들의 관심사를 돌려놓을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부당한 정권이나마 '충성경쟁'에 뛰어든 재벌기업들이 엄청난 돈을 출자하여 '프로야구단'을 창설하였으니, 1982년 프로야구 개막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야구의 인기비결은 바로 '지역주의'에 있단다. 고교야구 때부터 '지역 연고'에 따라 선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대도시'를 중심으로 야구 명문고와 야구단이 형성된 것이란다. 그러니 '프로야구'에서도 지역에 따라 응원이 갈리는 현상은 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렇게 서울의 MBC 청룡,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대전의 OB 베어즈, 그리고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6개 구단으로 온 국민의 열광적인 응원을 받으며 개막하게 되었단다.

이렇게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를 조명해보면, 그 밑바탕에 '엘리트 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엘리트'들은 친일파라는 불편한 딱지를 받았지만, 해방 이후에는 그런 딱지를 벗어던지고 여러 차례 국제대회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국위 선양'을 해내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매력을 온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허나 '프로야구'가 개막하면서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었다. 바로 '재벌 구단'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겐 '친일파'라는 딱지보다는 '독재 정권'에 기승해서 이권을 챙긴 '적폐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일제강점기에 부와 권력을 잡은 세력이 해방 이후에도 고스란히 부와 권력을 이어받았고, 그렇게 이어 받은 부와 권력으로 '독재정권'에 기승했으니, 그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어이 단박에 해결하고 청산할 수 있었겠냔 말이다.

어쨌든, 그런 폐단이 있다한들 오늘날의 '프로야구 인기'에 찬물을 끼얹을 까닭은 없다. 온 국민이 사랑하는 스포츠에 '친일적폐'란 프레임을 끼워 맞춰서 얻어낼 실익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근현대 역사를 망각하고서 무작정 열광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마치 나라를 빼앗기자 되찾으려는 노력은커녕 친일매국 행위를 일삼던 부류가 '한국전쟁의 영웅'이 되거나 '멸공의 기수'가 되어 명망 높은 위인 대접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러니 '야구 명문'이니 '전통이 오래된 야구단'이라면서 무작정 존경의 대상으로 삼다가는 자칫 '친일적폐의 장본인'을 머리 숙여 존경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 못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독립운동가'를 욕 보이는 행위는 죄를 넘어서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위인을 평가하는데 있어 '공과'를 따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공이 있다고 해서 과를 '아무런 개념'도 없이 묻어버리는 허튼 수작은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제발 그런 몰염치한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인간적으로 말이다.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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