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3
마크 트웨인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My Review MDCCCXXIII / 문예출판사 7번째 리뷰] '같은 소설, 다른 출판사'를 읽다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분명 '같은 내용'인데도 '다른 느낌'이 확 풍기기 때문이다. 물론 '첫번째'로 읽는 느낌과 '두번째, 세번째'로 읽는 느낌이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별 느낌을 받지 못했던 대목인데도,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뒤에 나올 대목'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이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을 때 '두 가지 관점'을 갖고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사회 고발'의 성격을 갖고 그 당시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판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톰 소여의 모험>의 '후속작'으로써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장난스런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 독자라면 헉 핀(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난장을 중점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도 톰 소여는 등장만으로도 온갖 못된 장난을 칠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만큼 말썽꾸러기니까 말이다.

톰 소여의 첫 번째 장난은 '무법자 갱단'이 되는 것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무시무시한 갱단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털어 부자가 되자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리 관심이 없고 그저 어른들마저 두려워서 벌벌 떠는 무시무시한 무법자로 소문이 나는 것에만 열을 올린다. 두 번째 장난은 짐이 노예로 팔려서 샐리 이모댁에 붙잡혀 있을 때 벌어지는데, 짐을 오두막에서 탈옥시키면서 벌어진다. 애초에 톰은 짐이 노예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짐을 굳이 '탈옥수'로 만들 계획을 짠다. 마치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에드몽 당테스처럼 극적으로 말이다. 그로 인해서 톰은 도망노예를 잡기 위해서 마을 어른들이 쏜 총을 다리에 맞고 큰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맬 지경에 빠진다. 그렇게 죽다 살아났는데도 톰의 장난기는 사그라들줄 모른다. 언제든 다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어마어마한 장난을 칠 다짐을 할 정도니까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톰의 장난이 여기까지다. 더 많은 장난이 궁금하다면 <톰 소여의 모험>을 권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장난을 좋아할까? 무엇보다 재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웃음소리를 들으려면 아이들이 맘껏 뛰놀게 만들주어야 한다. 그렇다고해서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따로 만들어줄 필요까지는 없다. 아이들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놀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마법을 부릴 줄 아니까 말이다. 단지 어리석은 어른들이 싸움박질만 하지 않으면 된다. 저들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으면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일삼으며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무식쟁이들만 없다면 아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맘껏 뛰놀며 까르르 웃음꽃을 피울 테니까 말이다.

사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양껏 사랑해줄 어른들이 주위에서 든든하게 버텨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욕심으로 '돈 버는 기계'를 마다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높여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순전히 저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면서 핑계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하는 것처럼 군다. 그런 어들들 밑에서 배우는 것이라곤 '돈돈돈~'뿐이고,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박제된 어린이들'뿐이다. 놀 줄도 모르고 장난도 쳐본 적이 없는 '근엄한 표정의 애어른들'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어떤 세상'을 만들까?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지옥을 만들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언제까지나 장난만 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때가 되면 아이도 어른이 되듯이 '장난질'도 칠만큼 치면 멈추기 마련이란 법이다. 그럼 언제까지 '장난'을 치도록 허용해야 할까? 정답은 '죽기 직전까지'다. 왜냐고? 장난은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장난과 '사고'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장~난~'이라고 말하는 철딱서니를 가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허튼짓도 절대 금물이다. 어디까지나 장난은 누구라도 '웃음꽃'을 피울 수 있는 정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장난으로 골탕을 먹은 사람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를 수도 있으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의 천진함에 함박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의 장난이라면 '평생'을 해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점점 웃음꽃을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저출생으로 마을 골목마다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꽃마저 사라져가는데 그나마 활기 넘쳐야 할 젊은이들마저 생기를 잃은 꽃마냥 축 쳐져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저조한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장난'만한 것이 또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장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모두가 함께 '웃음꽃'을 피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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