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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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VIII / 민음사 19번째 리뷰] 헤세의 <데미안>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색 다른 해석'이다. 많은 이들은 <데미안>을 읽고 난 뒤에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에 꽂힐 것이다. 분명 뛰어난 경구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성장의 모티브'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나 <데미안>에서 이 문구 하나만 기억으로 남기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울 따름이다.

먼저 '두 세계'에 대한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릴 적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법이다. 그러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눈을 뜨게 되면서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간다. 그렇게 '보이지 않던 세계'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우리는 흔히 '성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 성장과정이 혹독했다. 왜냐면 선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악한 세계의 악당이 바로 '프란츠 크로머'였기 때문이다. 어린 싱클레어로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존재였고,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한 존재'인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기엔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동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싱클레어가 크로머의 악행을 부모님께 일러 받쳤더라면 '어른이 되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건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지 않고 '다른 도움'을 청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빠진 싱클레어에게 나타난 이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는 싱클레어가 경험한 바로 가늠할 수 없는 특이한 존재였다. 선한 존재도 아니고 악한 존재도 아닌 특별한 존재 말이다. 특히, 데미안이 크로머를 상대한 방법은 '미스테리, 그 자체'였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악당 크로머를 단숨에 쫓아낼 수 있게 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푹 빠져버린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느꼈던 '두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요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데미안이 던져준 질문 덕분이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도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은 것은 그가 가진 능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귀띔해준다.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는 <성경>에는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라고 낙인을 찍었는데, 데미안은 어찌 하여 그런 '살인자'에게 '능력자'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가엾은 아벨의 희생을 두고서는 '약자의 비애'라고까지 폄하하고 말이다. 정녕 우리는 카인을 능력자로 우러러보고 아벨은 착한 체하는 무능력자로 봐야 하는 걸까? 한편, 데미안은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들'에 대한 평가마저 남달랐다. 죽는 순간이 찾아오자 예수님께 회개한다고 말하며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 도둑을 별볼일 없는 존재로 치부하고, 끝까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후회나 부끄럼이 없는 도둑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은 뜻 있는 사람이라면서 추켜세운 것을 들으며 싱클레어는 크나큰 혼란에 빠져버리고 만다. 왜 데미안은 '기존의 풀이'대로 순순히 응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데미안과 같은 친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특히 '성장기 청소년'에게는 말이다. 흔히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로 평가하곤 한다.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로 표현하는 격동적인 감정을 지닌 청소년기의 특징을 짚어낸 표현이다. 청소년기에는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감정의 변화를 겪느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바라는 것은 결코 '질풍노도'가 아니다. 그저 순종적이고 순응하길 바랄 뿐이다. 이미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절대적인 가치로 놓고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말이다. 그 길로 가는 것만이 '너, 자신을 위한 길'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말라면서 말이다. 어째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가 떠오르지 않는가? 한스에게도 '하일너'라는 친구가 모범답안 같은 삶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한스에게 '자신의 길'을 걸으라 충고했었다.

암튼,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생각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아직 어른이 되기에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연히 떠난 데미안과의 석별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채, 새로 만난 피스토리우스는 신선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어느덧 싱클레어도 어른스런 면모가 보여지는 대목이다. 아직까지 데미안의 질문과 해석에 답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피스토리우스가 멋진 대답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난 첫사랑 베아트리체, 싱클레어는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사랑을 느꼈지만, 그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만 깨달았다. 그러다 만난 완벽한 여인은 다름 아닌 '에바 부인'이었다. 완전 성숙한 여인이자 '성숙한 어른'이었던 에바 부인에게서 싱클레어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문득 떠올린 얼굴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래 전에 헤어졌던 '데미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싱클레어는 대단히 충격을 받는다.

왜 충격이었을까? 싱클레어가 진정으로 꿈꾸던 '완벽한 어른의 모습'이 바로 데미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절대적으로 선한 모습'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악한 모습'도 아닌 이중성을 지닌 모호함이었다는 것에도 싱클레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어릴 적에 막연히 느꼈던 '두 세계'가 사실은 이질적인 것이 아닌 서로 융합될 수도 있고, 심지어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싱클레어는 진정한 어른의 세계로 접어들고, '성숙'이라는 것을 해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성숙'을 깨달았다고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성숙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그런 싱클레어에게 포탄의 충격과 함께 다시 나타난 데미안의 말 한마디는 결정적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말 말이다. 물론 언젠가 필요하다면 다시 한 번쯤 만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떠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접어든 이에게 숙명처럼 다가오는 현실일 뿐이다. 한 번 어른이 되고 나면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다. '자신'과 '소신'으로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스스로의 책임으로 어떤 어려움이라도 헤쳐나갈 것이다. 그게 '멋진 어른의 조건'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자신의 생각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그 결정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자,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결정을 내려보자. 카인은 '살인자'인가? '능력자'인가? 또한, 예수님께 용서를 구한 도둑은 천국을 가고, 자신이 한 일에 한 점 후회가 없는 도둑은 지옥에 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골고다 언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것처럼 예수 옆의 '똑같이' 묶인 두 도둑도 억울하게 붙잡혀 온 도둑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억울하게 붙잡힌 도둑이라면 '자신의 죄'를 고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이 더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자신이 한 일에 자부심을 갖고 당당히 죽음을 맞이한 도둑이 더 멋지지 않겠는가? 단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에 따라서 '천국행'과 '지옥행'이 갈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생'에 더 충실하고 올곧게 살아온 이의 죽음이 더 가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소신'보다 '주변의 신념'에 쉬이 흔들리는 약한 존재다. 이렇게나 약한 존재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인생은 그닥 재미 없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멋있는 법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자신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부러워만 하지 말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겨워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이것 뿐이다.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멋지게 살다가 가는 것 말이다. 누가 선한지, 뭐가 악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남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하는 것이다. 세상은 '두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며, 동시에 '선과 악은 함께 존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섣불리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말고, 나름의 논리와 공정한 기준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뒤에, 자신의 평가에 온전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멋진 어른의 조건'이다. 내가 옳으니 남은 그르다는 '절대적인 평가'를 섣불리 내리는 것은 결코 멋진 어른이 될 수 없다. 내가 옳으면 남도 옳을 수 있다는 사실, 나도 완벽하지 않으니 언제든 '그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조심성만 갖춘다면 이보다 더 멋진 어른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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