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고려사 4 - 대몽항쟁의 끝, 부마국 고려 박시백의 고려사 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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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VII / 휴머니스트 42번째 리뷰] '조선사'를 다룬 역사책은 참 많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려사'를 다룬 역사책은 드문 편이다. 더구나 '몽골의 침략'과 '원의 내정간섭'을 집중 조명한 책은 더 드물다. 그래서 이 책 <박시백의 고려사>는 읽을 가치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려는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무신집권기 초반 뿐이다. 그리고 '최씨 무인정권부터 원 간섭기까지'의 상당 부분은 겉핥기 식으로 스리슬쩍 넘어간 뒤에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와서야 다시금 조명을 받다가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으로 '조선 건국'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고려사를 마무리 짓곤 한다. 이런 까닭은 고려사를 다룬 사료가 '절대부족'한 상황인 탓이 가장 크다. 고려조에 쓰여졌던 '고려왕조실록'은 오랜 전란으로 유실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기에 쓰여진 탓에 '객관성'에 상처를 받았던 터라 고려의 진면목을 다잡기에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려사>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왕과 고위급 신하들의 전유물이었던 '역사기록'이 아닌 온 국민에게 널리 읽히고 뜻을 새롭게 정리할 역사책이 말이다. 그래야 역사책을 읽는 가치가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최충헌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충선왕의 죽음'까지 다뤘다. 시기적으로는 '몽골의 침략'과 그에 따른 '고려의 항전', 그리고 '항복 이후의 원 간섭기'를 다룬 셈이다. 고려 왕조로 살펴보면 '고종'부터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으로 이어졌다. 13세기 전부를 다루고 14세기 초까지 아우르는 10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의 고려를 보여주었다. 고려는 '무신집권'으로 문벌귀족사회가 무너지고 그야말로 '무인시대'가 펼쳐졌다. 나쁘게 말하면 난장판이었고, 좋게 말하면 '실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대변혁기였다. 이런 처지에 빠진 고려를 '몽골'이 발흥하여 침략해왔다. 무려 40여 년 간이나 말이다. 무신집권시기가 꼭 100년이었고, 그중 '최씨 무인정권'이 60년을 해먹었으니, 무신집권시기의 후반부는 '대몽항쟁의 시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무인정권은 몽골과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도 '팔만대장경 조판' 등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허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전쟁통에 방치된 백성들이다. 최씨 무인정권은 몽골과의 싸움에서 개경이 함락될 것 같자 '강화천도'를 밀어붙인다. 이대로 몽골에게 패배해 항복을 하게 된다면 '고려 왕족'은 볼모로 잡혀갈지언정 살아남아 '몽골의 속국'이라도 될 수 있겠지만, 최씨 무인정권(당시 집권자, 최우)으로서는 패배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지리적인 이점이 큰 '강화도'에 은거하며 권력의 동아줄인 '고려왕실'을 지켜내고, '조세'도 착실히 걷을 수 있는 최적의 입지인 강화도로 궁궐을 옮기게 된다. 그러면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어찌 되는가? 최씨 무인정권은 몽골군의 침략과 약탈로부터 백성들을 지켜낼 방안이 있었단 말인가? 당연히 없었다. 무인정권이 백성들에게 당부한 것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산으로 도망가든, 섬으로 도망가든, 그도 저도 아니면 용감히 싸우든,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지시 뿐이었다. 그러다 몽골군이 물러나고 나면 '세금'을 걷으러 고을 구석구석 싸돌아 댕겼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이었다.

그런데도 몽골군은 고려의 백성을 온전히 약탈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고려 백성들은 '침략자' 몽골군을 향해 저항을 계속했고, 실제로도 꽤나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40년을 맞서 싸웠다.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누구도,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해서 '천벌'이라고 불리던 악명 높은 군대였다. 그런 군대를 상대로 수십 년동안 대항했던 것이다. 물론 무신정권이 지키던 '강화도'도 꿈쩍하지 않았다. 연이은 침공에도 강화도는 끄떡 없었고, 몽골군은 작은 섬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패배를 밥 먹듯이 한 것이다. 그런 고려였기에 '몽골에 항복한 뒤에도' 몽골(훗날 '원')은 고려를 우대했다. 원에게 있어 고려는 분명 '속국'이었지만, '부마국(공주의 사위로 삼는 국가)'의 지위로 원 황실과 가깝게 지냈고, '조공국'으로 온갖 것들을 수탈 당하는 국가였지만, 고려의 것들을 빼앗아가고서는 '고려의 스타일이 유행하는' 고려양(樣)이 탄생했다. 오늘날로 치면 '한류열풍'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 가운데 '고려의 처녀'를 공녀로 받치라고 강요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끌려간 고려의 여자들이 원의 황실과 고관대작의 '정식아내'와 '후궁'이 되어 원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위치까지 올랐다고하니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가늠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고려의 공녀뿐 아니라 '고려 환관(내시)'까지 함께 대유행(?)을 해서 얼마가지 않아 자발적으로 '공녀'나 '환관'이 되어 출세길에 오르려는 고려인도 있었다고 하니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고려인들이 다방면에서 활약을 하며 '원나라의 황실'에서만 활약하는 고려인들이 전체의 1/4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허나 이리 출세길에 오르려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더 많은 고려인들은 '자기 딸'을 머나먼 타향으로 보내길 꺼려서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성행했단다. 그 까닭은 딸자식을 키워야 노후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란다. 이는 고려 때 '데릴사위제'가 널리 유행한 까닭이기도 하단다. 딸자식을 평생 끼고 살아야 행복한 고려인들이었기에 원의 '공녀' 요구는 들어주기 힘든 사항이었고, 원으로서도 '고려 여자'를 처첩으로 삼지 못하면 권세가로 인정 받지 못했다고 하니 '고려 여인의 활약'이 대단하던 시기였다고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편, 원에 항복한 고려왕실은 원황실의 구색에 맞춰 '격하'되었다. 폐하라는 말을 쓰지 못했고, 전하라고 불러야 했으며, 태자도 세자라고 불려야 했다. 암튼 모든 것이 원보다 낮춰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원과 고려의 관계는 낮춰진 것 같지는 않다. 왜냐면 고려의 자주성은 크게 훼손되지 않은 반면에 고려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원나라가 앞장 서서 다 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분명 고려는 원의 속국인데, 어찌하여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앞서 '원종'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몽골은 칸이 죽고 후임 자리에 '쿠빌라이'가 오르기 위해 다른 경쟁자들과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이때 원종이 한 발 앞서서 '쿠빌라이' 편을 들어 지지를 천명한다. 이에 크게 감명한 쿠빌라이는 '칸의 자리'에 오르고서 이때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임금일 뿐인 '원종'이었지만, 쿠빌라이는 원종을 극진히 대우하며 모든 면에서 고려에 후하게 정책을 펼쳤던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쿠빌라이가 마냥 고려에 퍼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로서 '숙원사업'이었던 '남송정벌'과 '일본원정'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일본원정'을 위해서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독려했던 것이 바로 쿠빌라이였기 때문이다. 이때 원종이 '원정의 불가함'을 피력하며 어떡하든 막아보려 했지만, 쿠빌라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1차, 2차 원정을 떠났지만, 얼토당토 않게 태풍(신풍, 카미카제)이 불어와 궤멸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쿠빌라이는 재차 일본원정을 추진하다가 수명이 다해 죽고, 원정길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은 끝내 고려에 남아 두고두고 고려내정의 간섭을 하는 원흉이 된다.

그렇게 원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던 때의 왕이 바로 '충렬왕', '충선왕'이다. 이들은 각각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을 해서 '쿠빌라이의 사위', '쿠빌라이의 외손자'였다. 이들은 각각 원 황실의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한 뒤에 고려에 들어와 왕이 될 수 있었다. 말이 좋아 부부이지, 원 황실의 공주들은 사실상 '원 황실의 스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 황실에서 떠받듦을 받으며 살던 공주가 이역만리 머나먼 땅으로 시집와서 '남편' 하나만 보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고달펐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 공주들은 하나같이 성질 더러웠고, 툭하면 남편인 왕과 싸웠고,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 신하들을 원 황실에 '고발'해서 죽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이런 공주의 남편인 왕도 툭하면 고려를 떠나 원 황실에 알량거리는 것이 더 편했으니 '고려의 임금'이면서 원 황실에서 더 오래 머무는 기현상도 벌어지곤 했다. 더구나 원 황실에서도 '사위'이고, '외손자'인 충렬왕과 충선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었으니 두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임금부터 천민까지 권력을 잡고 출세하기 위해 '원 나라'로 떠나는 시기가 바로 '원 간섭기'였던 것이다. 분명 원의 내정간섭은 불편한 것이었지만, 원 황실의 극진한 대접에 고려는 '원의 보호' 아래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온 백성이 출세하기 위해 원으로 떠나길 바라는 풍토가 만연했으니 '나라의 인재'가 모두 빠져나가는 공동화 현상까지 일어난 셈이다. 이런 국력의 누수는 원 황실의 다툼으로 인해 고려를 침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과거에 고구려가 당 태종을 내쫓고, 고려가 거란을 물리치고, 대몽골 항쟁에서도 밀리지 않았는데, 원 간섭기에 벌어진 '원 황실 잔당의 공격'에 고려가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일까? 그건 나라를 잃어버려 '주인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원 황실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잔당들은 '원의 구원병'이 도착하고 난 뒤에야 진압할 수 있었다. '내 나라'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쳤을 때는 어떤 국난도 극복하던 고려였는데, '내 나라'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려 임금'마저 원 황실에서 머무느라 고려에 오질 않으려 하니 백성들도 예전처럼 지키고 싸우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겠는가. 외국의 군대가 대한민국을 지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으면 그 대가로 내놓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할 때인 것이다. 또한 온 국민들이 '내 나라'라는 생각을 갖지 못한다면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배층'이 나라를 지킨 적은 거의 없다. 피지배계층이라고 온갖 핍박과 수탈을 당하던 '백성'들이 오히려 나라를 구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적이 비일비재하다. 오늘날에도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나 멋진 국민들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이런 국민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는 못할 망정 배신이나 때리는 정치인, 경제인, 공무원 등등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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