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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머큐리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My Review MDCCLXIII / 열린책들 11번째 리뷰] 뭐랄까. 아멜리 노통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우리말로는 '기괴하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천사의 얼굴을 하고선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다고나 할까? 이것은 그녀의 처녀작인 <살인자의 건강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살인자'에게 건강법 같은 걸 묻다니, 말이나 될 법 한가? 그런데도 묘하게도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말이 된다. 물론 책을 덮고 나면 찝찌입~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 <머큐리>도 그랬다.
소설속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평을 하자면 '쓰레기' 같다. 이 책 <머큐리>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바로 두 영화였다. 하나는 정지우 감독, 박범신 원작의 <은교>였고, 다른 하나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였다. 두 영화 모두 '예술성'에서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영화의 소재는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탐하는 남자의 추한 본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노통의 <머큐리>도 그런 '추한 본성'을 밑바탕에 깔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76세의 마도로스 출신의 늙은 선장이 22세의 젊은 여성을 양녀로 삼아 '외딴섬(모르트프롱티에르 섬: '죽음의 경계'라는 뜻)'에 살면서 밤마다 그녀의 침대로 들어가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하면서도, 그 행위를 '사랑'이라 표현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영화 <나쁜 남자>에서도 깡패 새끼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대생을 성폭행하고, 사창가에 팔아 넘기고서도, 그 모든 일이 '너무 예뻐서' 그랬고, '사랑했기'에 그랬다는 식으로 풀어냈다. 또 영화 <은교>에서는 칠순이 넘은 늙은 작가가 여고생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회춘'하는 듯한 행동을 일삼다가 '그녀'가 젊은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몰래 엿보고서는 시기와 질투심에 살인 충동까지 갖게 된다는 스토리는 살짝 역겹기까지 했다. 심지어 원작 소설을 쓴 박범신 작가는 실제로 '젊은 여자'에게 추근대며 "너는 나의 '은교'야"라는 말을 던지며 엉덩이와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는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이 밝혀지자, 그의 소설조차 추악하기 그지 없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이처럼 '늙은 남자'와 '젊은 처녀(18~22세)'의 육체적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며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사랑에 '나이'와 '국경'이 문제될 것은 없다.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무르익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76세의 남자와 22세의 여자가 서로 '54살 차이'를 극복하고서 찐사랑을 했더라면 오히려 응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두 남녀가 지내는 곳이 '외딴섬'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젊은 여자는 18살부터 무려 5년간이나 그 섬에서, 아니 늙은 남자가 설계하고 직접 만든 '집안'에서 한발짝도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창문'을 그녀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서 '바깥'을 전혀 볼 수도 없다. 집안 어디에도 '거울'을 찾아볼 수가 없다. 거울 뿐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물건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욕실과 화장실에도 '물'을 받아놓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사물을 비춰볼 수 있는 '매끈한 은붙이(쇠붙이)'조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그런 곳에서 무려 5년 동안 지낸 것이다. 그리고 밤마다 늙은 선장은 그녀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젊은 육체를 탐했다. 그런데도 늙은 선장은 그녀를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절대 '감금'이나 '강간' 같은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잠그지도 않았고, 그녀가 '거부했다면' 침대로 들어갔다고해도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로 그녀가 '처녀'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18살의 소녀와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녀가 뜻밖에도 '처녀'였기에, 서로 사랑한 증거라니...심지어 늙은 선장은 이 소녀가 '첫사랑'도 아니었다. 그녀 이전에 또 한 명의 소녀를 바로 '이 섬'에서 감금하고, 강간했었더랬다. 그 소녀를 범했을 때도 그는 '사랑'이었다고 당당히 말한다. '강제'는 전혀 없었으며, '그녀들'이 원했기에 사랑을 나누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 첫번째 소녀가 늙은 남자와 '사랑'을 나눈 까닭도, 두번째 소녀가 '사랑'을 나눈 까닭도 모두 '외딴섬'에서 '거울'도 없는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소녀의 공통점은 모든 남성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는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처녀가 어째서 늙고 못생긴, 뱃사람이라서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이는, 남자에게 '처녀성'을 선사하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남자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섬'을 통째로 살 정도로 가진 재산이 많다는 것이고, 칠순이 넘어서도 발딱발딱 세울 수 있는 '정력' 뿐이었을텐데 말이다. 그 두 가지만으로 '처녀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늙은 선장은 두 소녀 '아델'과 '하젤'의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하고서 다른 남자가 채가기 전에 '납치'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우연한 사고'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델의 경우에는 '화재'였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아델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다가 우연히 불이 나자, 그녀와 춤을 췄던 젊은 미남자들은 그녀를 홀로 남겨두고 저들만 살겠다고 화재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던 늙은 선장이 그 화마속에서 아델을 구해서 탈출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런데 아델을 구해낸 늙은 선장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서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불이 붙은 장소에서 벗어났는데도 아델의 얼굴을 가린 천은 벗겨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 아델은 안정을 찾았고 화재에 의해 다친 곳이 없는지 '거울'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늙은 선장은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몰래 '이상한 거울'을 마련했다. 얼굴이 일그러지게 보이는 거울을 말이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를 품고 있던 아델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간청을 하자 마지못해 거울을 건내주는 늙은 선장의 '배려심'에 살짝 감동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속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아델은 비명을 지르고 기절해버리고 만다.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델은 늙은 선장과 '외딴섬'에서 살게 되었고, 이렇게나 추하게 변해버린 자신을 끔찍하게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늙은 선장과 '첫경험'을 하게 된다.
하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일어나 폭격으로 온가족이 죽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하젤은 '야전병원'에서 얼굴을 천으로 가린채 누워 있었다. 그러다 늙은 선장은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는 하젤을 두 팔에 안아 돛배에 싣고 '외딴섬'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하젤에게 '그 거울'을 보여준다. 거울속에 비친 흉측한 얼굴에 충격을 받은 하젤은 그 뒤로 다시는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모를 잃은 고아소녀를 살뜰하게 보살핀 늙은 선장은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어디 의지할 데 없는 고아소녀에게 욕정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 늙은 선장은 '하젤'의 얼굴에서 15년 전 자살을 한 '아델'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하젤이 자신의 품으로 오게 된 것을 '신의 섭리' 또는 '아델의 환생'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런 끔찍하고 더러운 변태가학적 성행위가 이어지는데도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건 바로 '추악한 성범죄 현장'속으로 뛰어든 '간호사의 등장'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호사도 늙은 선장이 살고 있는 '외딴섬'으로 겁없이 들어가 '하젤'을 만나고, '아델의 자살'에 석연치 않은 점을 밝혀내고, 늙은 선장의 추악한 욕정과 요상한 궤변에 맞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압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고 어여쁜 간호사가 '탐정' 못지 않게 성범죄를 밝혀내고, '탈옥수' 뺨치게 외딴섬을 탈출하는 장면은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충격적인 결말'은 아멜리 노통을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찝찌~입한 것은 왜일까? 그건 '간호사'가 외딴섬에 감춰진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내면서도 때때로 성범죄자의 궤변에 "그럴 수 있죠"라면서 맞장구를 쳐주는 대목 때문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성범죄'를 '정당화' 시켜주는 도구로 전락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함께 '추악한 변태성욕자들의 유쾌한 변명거리'로 악용될까 두렵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프랑스의 성윤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참작하더라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불편함은 '노통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으로 연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바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존의 관습'에 대해 딴죽을 걸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깊은 생각(사고)을 유도한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냐고 말이다. 과거로부터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것에 대해 노통은 딴죽을 건다. 그리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서 '이래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비정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게 과거의 것이 '비정상'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정상'은 과연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큐리>에서도 76세의 남자가 22세의 여자를 사랑이 '정상'이냐고 묻는 시점이 '20세기 초'다. 15년 전에, 61세의 남자가 18세 소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어떠하냐고 묻는 때가 '19세기 말'이었다. 그리고 노통이 <머큐리>를 세상에 발표한 해가 1998년이었다. 무려 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쓴 셈이다. 우리나라도 20세기 초까지 '조혼 풍습'이 있었고, 19세기 이전에는 할아버지가 손녀뻘의 어린 처자와 혼인이 불가능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머큐리>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일들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서구 유럽에서도 18~19세기에는 돈 많은 늙은 남자가 젊고 예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큰 흠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독자들은 과연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난 꽤나 불편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늙은 남자의 추태로 보일 뿐이고, 성숙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젊은 여성을 '가스라이팅' 해서 육체관계를 허락케 하는 추악한 성범죄로밖에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추태와 추악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숭고하게 여기게끔 만든 작가의 궤변이 매우 불쾌했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고전문학'일지라도 시대와 세태가 바뀌면 '달리' 해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 시대에 걸맞게 '올바른 가치관'을 반영시켜 더욱 뜻깊은 철학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그런데도 '철학'이랍시고 꼴랑 허리하학('형이상학'의 반대말)적으로 겨우 꼬추를 세우는 일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물론 '노통의 소설'이 모두 이럴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딴에는 이 소설을 <미녀와 야수>의 '다른 버전'이라고 소개하는 모양인데, 동화속 야수는 적어도 '젊은 미남자(신분은 왕자)'가 마녀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결코 '늙고 못생긴 변태성욕자'는 아니었기에 동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