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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5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5
한종천 그림, 최윤정 글, 손영운 기획,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 채우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LXIII / 채우리 17번째 리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큼 읽기 힘든 책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읽기 힘든 책이라고해서 '완독'했을 때의 기쁨이 생각만큼 크지 않은 책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유명'하게 만드는데 한몫 단단히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신심리주의 소설]들이 대개 그런 유의 책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았다면, 이런 '재미없는 책들을 피해서 골라 읽는 재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의 책들이 [서울대 선정 필독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것일까? 얼마전에는 <민음사>에서 13권의 책으로 '분권'해서 출간되기도 했다. 보통 6~7권의 책으로 출간되곤 하는데, 아예 '한 권의 분량'마저 둘로 쪼개서 '읽는 부담'은 낮추고, '구매 부담'은 대폭 올리는 마케팅 전략을 썼으니 참으로 영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렇게나 재미없는 책인데도 막상 '완독'하고 나면 뭔가 '긴 여운'이 남는 책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주제의식'은 스노비즘이다. '스노비즘'은 고상한 체하는 속물근성, 즉 '속물주의'를 말하는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출신'이나 '학벌'로 평가하고, 또 그런 평가를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것을 즐기는 일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허세' 가득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살롱 세계'속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알게 모르게 이러한 '스노비즘'에 물들어 있고, 작가인 프루스트는 이러한 사람들을 은근 슬쩍 비판을 하고 있기에, 소설 속 주인공인 '마르셀'의 고뇌가 이러한 '스노비즘'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면서도 정작 마르셀 자신도 '게르망트 집안 사람(프랑스 귀족의 거물, 황족과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에)'과 어울리길 바라는 '속물적인 근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제는 '동성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바로 '동성애'에 빠져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고백을 하기에도 망설이고, 고백을 받은 뒤에도 갈등하는 까닭이 바로 '밝히기 힘든(커밍아웃) 까닭' 때문에 오랜 번민에 빠져들곤 한다. 사실 '동성애'를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비난'을 하고픈 마음은 없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성애는 '비정상'이고, 이성애는 '정상'이라는 편견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면서 '원치 않는 상대'를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소유'하려든다면, 그건 '나쁜짓'을 넘어 '범죄'다. 이 소설에서 마르셀이 침대에 누워 있는 알베르틴에게 사랑한다면서 덮치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거부하는데도 그래선 안 된다. 이를 테면, 담배를 피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인지라 누가 피우든 말든 가타부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상대가 '담배 연기'나 '담배 냄새'가 싫다는데도 담배를 강요하거나 담배연기를 내뿜고 담배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닌다면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애자'인 마르셀이 '동성애자'인 알베르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자고 강압하는 것은 19세기 시대에는 '사랑의 표현'일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철컹철컹 해야 한다.
암튼, 이런 '스노비즘'과 '동성애 코드'를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진정한 주제인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첫 부분에 마르셀의 꿈은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르셀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데, 장장 7권의 분량이 모두 '마르셀의 회상'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읽다가 지루해서 책을 집어던지는 독자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꾹 참고 읽어나가면 끄트머리에 가서 '마르셀'이 소설을 선뜻 집필하지 못하는 까닭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바로 '부담감' 때문이었다. 마치 '완벽주의자'처럼 완성된 문장으로 능숙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필력을 안타까워만 한 까닭에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콩쿠르 형제'의 소설을 접하고서, 필요 이상으로 '부담감'을 느낄 까닭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미 자신은 '나이' 들어버렸고, '천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마르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쓰여지는 '손 안의 펜'을 빠르게 놀리며 불안해 한다. 그동안 헛되이 써서 '잃어버린 시간'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말이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무얼 뜻할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시기'라는 격언도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며 살아간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허송세월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할 '학창시절'에도 열심히 공부하기는커녕 '게임과 릴스'로 시간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서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모자란 시간'을 탓하며 허겁지겁 대충 벼락치기로 인생의 중대사들을 대충 떼우고 말았으면서도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일을 늘 되풀이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하릴없이 '심각'하게 생각하며 늘 긴장된 상태로 '스트레스'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키지 못해 늘 죄인처럼 살아간단 말이다. 그렇게나 큰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말이다.
'좋음'과 '나쁨'은 둘 이상을 견주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악당'이 있어야 '정의의 영웅'이 돋보이는 법이다. 만약 '악당'만 있는 세상에선 그들의 행동이 '나쁜짓'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크고 작게 '나쁜짓'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인데 그게 왜 '나쁜짓'이며, '나쁜짓'인줄 어떻게 알겠느냔 말이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악당'이 하는 짓이 나빠보이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서도 '시간낭비' 좀 해봐야 '시간'이 소중하단 걸 깨닫게 된다. '시간낭비'를 해본 적도 없고, '시간'을 허투루 써본 적도 없으면서 어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워커홀릭(일중독자)'은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시간을 알뜰하게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무엇'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아무 생각도 없이 일만 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허송세월 좀 해본 사람만이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르셀이 뒤늦게나마 '집필'에 열정을 쏟으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인 프루스트는 이 책을 써서 '진정한 자아'를 찾길 바랐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찾아야 할 것은 꼭 '그것'이 아니어도 좋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에서 유년의 추억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통해 '집필(마르셀의 꿈)의 원동력'을 찾아냈지만, 모든 독자들이 '집필'이 최종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회상'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족할 것이다. 아니면 '영감'을 떠올리던지 말이다. 작가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내면 세계'에 있다고 귀띔해준다. 우리의 미래가 저 먼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가까운 '속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반드시 무엇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