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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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 / 위즈덤하우스 31번째 리뷰] 오랜만에 다시 <본격 한중일 세계사>다. 이번에는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다.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빡친다. 왕실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학정을 바로 잡고자 '민초'가 직접 나선 대혁명을 일으켰는데도 나라가 바뀌기는커녕 나라가 폭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물론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적도 없고,  적극적인 '민주주의'를 해본 적도 없는 '민중들'이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들고 있어났으니 난리가 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건만, 임금이라는 사람이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하고 '외세(청군)'를 끌여들여 쉽게 일을 해결해보려다가, 침략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서 기회를 엿보던 '또 다른 외세(일본군)'까지 끌여들이는 꼴이 되었고, 철저히 준비한 탓에 일사분란하게 '경복궁'을 점령한 뒤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확고부동하게 확약까지 받아내는 신속하고 철두철미함에 조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라기는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맹주라고 자부하던 청나라였는데, '청일전쟁'의 승패가 이토록 빨리 날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청나라의 '완패'로 말이다. 이로써 청나라는 '양무운동'이 실패했음을 만천하에 알려지는 꼴이 되었고, 일본제국은 당당히 '제국주의 열강대열'에 발을 내딛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직까지는 '동양 챔피언' 정도일 뿐이지만, 얼마 뒤에 벌어질 '러일전쟁'까지 승리(?)를 거두고 난 뒤에는 확고부동하게 '열강대열'에 낑길 수 있게 되고 만다. 도대체 일본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인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완패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국운이 기울게 되었고, '태평천국운동'이 벌어지자 사실상 청나라는 폭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태평천국'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면서 이홍장은 빠르게 '양무운동'을 펼치며 뒤늦게 '서구식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으나, 서태후를 비롯한 내정의 문란함에, 서구열강들의 침탈까지 청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제대로 된 근대화를 할 물적/인적 자원이 모두 고갈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찌어찌 '서구식 근대화' 흉내까지는 내어서 거대한 함정을 구축하고 신식군대로 편제를 짜는 등 나름 '근대화의 성과'가 나는 듯 싶었으나, 겉만 번지르르할따름이었고 실상은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하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엄청난 인구수로 땜질을 한 덕분에 '위용'만큼은 거대하게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편제가 여전히 섞여 있고, 이들을 훈련시킬 장수(장교)들조차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탓에 '청일전쟁'에서 일본군대에게 말 그대로 발려버리고 만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메이지이신(명치유신)' 이후로 서구열강에게 '당한만큼' 철저히 배웠다. 그리고 그 비열한 수업을 마스터하고서 '플러스알파'를 더해 더욱더 악랄하게 동양을 침탈한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물론 청일전쟁 직전까지도 일본은 '내부적 혼란'이 매우 심각했더랬다. 그때까지도 유효했던 '서양과의 불평등조약'으로 일본국민들의 '메이지정부' 불신이 높았고, '메이지정부'가 정권을 잡고서 '헌법'의 기초를 잡고, 서양식 의회주의를 본떴으나, 사실상 '천황제 아래' 헌법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고, 의회가 있었음에도 '군부'가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모두 내릴 수 있는 '무늬만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제국은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군사독재국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직 '군부'가 내세울만 한 성과가 없었기에 여러모로 '준비중'인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 처했던 일본은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약조했던 '군사지원'을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이 무리하게 정변을 일으켰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었으나, 일본의 군사지원이 가능했었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갑신정변'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양상을 띠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당시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저들만의 쿠데타'로 세상이 바뀔 것이라 철썩같이 믿었겠지만, 백성들의 근대화가 뒷받침 되지 않고서 어찌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었겠느냔 말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 '급진개화파'였던 인물들은 훗날 거진 다 '매국노'가 되었고, '온건개화파'였던 작자들도 훗날 거진 다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당시엔 '일본제국'이 이웃나라를 침탈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친일'을 하자는 것이 '근대화'를 하자는 뜻으로 통했으니 마구잡이로 매도할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고종은 왜 '외세의 힘'을 불러들이려 했을까? 성난 민심을 다스릴 대비가 전혀 없었던 고종은 도성을 지키는 '경군(서울군대)'을 농민군 진압에 내보낼 수가 없었다. 왜냐면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서 풀려나 서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도성을 지키던 군대를 내보내 '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한다하더라도 그 틈을 노리고 '대원군'이 고종의 뒷통수를 치기라도 한다면 과거 '임오군란' 때처럼 왕권을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도성에서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살아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임금이라면 당연히 '농민군의 대표(전봉준)', '동학도의 대표(최시형)'과 만나 대화로 풀어나갈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고종은 그런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감히 지엄한 임금이 하찮은 백성과 독대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고루한 '전제국가의 왕'이었을 뿐이다. 이런 고종이었으니 '개화파'들과도 대화는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왕권'에만 집착하는 못난 임금이었을 따름이다. 그 못난 임금이 해결책으로 선택한 것이 '청나라 군대 지원요청'이었다.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결심이었다.

  청나라도 '조선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칫 '일본군'을 조선에 끌어들이는 빌미를 내어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텐진조약' 말이다. 갑신정변으로 두 나라는 조선에서 충돌할 위기를 맞았으나, 다행히(?) 양측 모두 철군을 결정하였고, 유사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게 된다면 서로 통보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는 일본에 '출병'을 알릴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과 청 사이에는 전통적인 '속국'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군대를 요청했고, 청나라는 늘 있었던 '관례'처럼 출병 사실을 일본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첩보활동으로 출병사실은 빠르게 알려졌고, 일본도 '내부문제'를 '조선출병'으로 해결하는 관례(?)대로 출병준비를 서둘렀고, 그 사이 김옥균이 상하이에 가서 조선인에 의해 '암살' 당하고, 그 시체를 조선에 '인도'한 중국의 비인도적인 문제를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며 중국과 조선이 '친일지식인'을 무참히 죽이는 야만스런 행동을 일삼았다면서 '문명국 일본'이 야만스런 중국과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한론'을 앞세워 언론이 선동질을 하고, 일본정부가 못 이기는 척 '출병'을 결정하니, 동학농민군은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대역죄를 저지를 순 없다면서 스스로 해산을 결정하고, '폐정개혁안'을 제안하며 관군과 '전주화약'을 서둘러 맺어버린다. 그러면서 농민군은 '반외세의 기치'를 올리게 된다.

  이에 청군은 애초의 목적이었던 '동학농민군'이 해산되었으므로 '철군'을 주장하지만, 일본군은 애초의 목적이 '전쟁'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를 향해 '선빵'을 날릴 준비를 한다. 그에 앞서 일본군은 서둘러 '경복궁 점령'을 시도한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조청간 '속국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침탈을 본격화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종'을 인질(?)로 삼는 것이 관건이었다.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출병은 '조선이 원한 것'이어야 했고,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자주국가'임을 내세워 일본의 간섭과 침탈이 수월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 '고종'은 소중한 인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고종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싶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벗어나는 해결책도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처럼 재빠른 도망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일본군이 '경복궁'으로 들어왔을 때에도 얌전히 잡히고 만다. 충분히 경복궁 북쪽에 난 문을 통해서 달아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역시나 '대원군'이 고종이 궁을 비운 사이에 권력을 차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성탈출도 포기하고 일본군에 대한 방비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순순히(?) 일본군에게 잡히고 만다. 그렇게 세워진 '군국기무처'에서 일사천리로 국권이 피탈되는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어쨌든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선빵(?)으로 시작된다. 아산만에서 벌어진 '풍도해전'에서 청의 함대는 개박살이 나고, 이어서 벌어진 지상전에서도 청군은 일본군에게 개박살이 난다. 겨우 살아남은 병력은 압록강을 넘어 평양에 집결중인 후속군과 합류하기 위해 한양에서 벗어난 산악길로 빙돌아서 겨우겨우 합류하게 된다. 그렇게 벌어진 '평양선 전투'는 청나라의 어이없는 항복으로 인해 총알 다 떨어진 일본군의 대승으로 끝맺는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황해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압도적인 승리가 벌어진다. 전력면에서 청나라가 훨씬 우세하였으나,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청나라 해군은 제대로 된 포격훈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해군의 '전술적/전략적 사격술'에 여지 없이 당하고 만다. 마치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의 학익진에 의한 집중포격에 일본함선의 돌격전법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가 지닌 매력은 쉬이 놓치기 쉬운 '역사의 빈틈'을 확실히 메꿔 주는데 있다. 역사를 배우는데 '원인과 결과'를 확연하게 알려주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빼놓아선 안 된다. 그런데 그 인과관계의 '증거'를 수많은 사료들 속에서 찾아내기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더 힘든 것은 그 방대한 사료의 틈바구니에서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인과관계'를 너무도 쉽게 이해시켜준다. 더구나 한중일 세 나라를 중심으로 놓고 '세계사의 관점'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풀어내주니 한 눈에 쏙쏙 들어온다. 바로 이런 '역사 쏙쏙'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제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도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국권이 피탈되는 '일제의 강제병탄'이 이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시리즈가 '현재진행형'으로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자면 이 책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게 될 우려가 크다. 그래서 '해방이후의 한중일 세계사'는 본격적으로 다루기 어려울 것이고, '일제강점기와 국공내전, 그리고 태평양전쟁'까지는 다뤄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50권으로 마무리...쿨럭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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