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순의 천일야화 4 - 하렘의 여왕을 기억하라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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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눈은 '지니(정령)에게 홀린 자'라는 뜻을 지녔는데, 이 책에서는 인간의 몸에 들러붙어 정기를 빼앗는 마신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거꾸로 마신의 몸에 인간이 스스로 들러붙는다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단다. 이때 완전하게 합일이 되면 마신의 힘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만, 불완전할 경우에는 마신이 깨어나서 마신의 본성대로 인간을 잡아먹게 된단다. 이렇게 마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융합시킨 경우를 '역마주눈'이라고 부른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바로 스스로 '역마주눈'이 되어 반드시 지켜야만 할 소중한 사람이 생긴 자의 최후가 밝혀진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나일 땐 불완전하였다가 둘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하게 되는 아름다운 일체를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혹은 어느 한 쪽의 사랑이 더 큰 경우이거나 말이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채로 사랑을 하면 언젠간 한쪽이 지치고 나가떨어질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번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비록 그것이 삶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비극일지라도 사랑이었기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을 말이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격투사'다. 바로 역마주눈이 되어 끝없이 싸움터에서 목숨을 건 격투를 벌여서 돈을 벌고자 하는 사내가 있다. 그 사내에게 돈이 필요한 까닭은 한 노예소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소녀를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사내는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격투에 나선다. 그리고 비록 패배하더라도 '파이트머니'는 받을 수 있기에 소녀에게 사줄 진주목걸이를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때까지 계속 격투에 참가한다. 지고 또 지고, 또 졌지만 끝내 진주목걸이를 사서 소녀에게 건내줄 수 있었다. 비록 '모조품'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사내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아비가 도박으로 큰 빚을 지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엄마는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다. 결국 남편이 진 빚을 다 갚았지만 아비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엄마도 몸을 혹사 당한 탓에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병에 걸리고 말았지만, 소년은 아픈 엄마에게 치료약이라도 얻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만다. 사람을 죽이라는 청부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온가족이 보는 앞에서 '한 남자'를 찔러 죽이라고 말이다. 소년은 차마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지만, 아픈 엄마를 떠올리자 마음을 다잡고 죽여야할 남자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그 남자의 아내와 아직 어린 아들딸이 다 보는 앞에서 말이다. 사내는 그때 한 소녀가 자신의 아비를 찔러죽이는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돌아왔는데도 약을 먹은 엄마는 기력이 다해 죽고 만다. 사내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어느 덧 청년으로 자란 사내는 아무런 의지도 목적도 없이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 것이 더 편한 탓인지 사내는 의미없는 싸움을 이어나가는 격투사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사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 두들겨맞고 누워 있었다. 그때 노예소녀가 사내 앞에 나타나 시중을 든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진 걸까? 사내는 소녀의 시중을 받으며 처음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나날을 지낸다. 그러다 노예소녀의 목에 값비싼 진주목걸이를 보게 되었다. 사내는 소녀에게 물었다. 그 진주목걸이가 좋으냐고 말이다. 소녀는 돈 많아 보이는 남자가 선물로 주었다고 지나가듯 말할 뿐이었다. 그날로 사내는 돈을 마련하려 격투에 나섰다. 지고, 지고, 또 지고...한 번이라도 이기면 진주목걸이를 살만한 돈을 마련하련만, 사내는 별볼일 없는 실력이었던지라 계속 질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모은 돈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진주목걸이를 사서 소녀에게 건내주었다. 이거랑 그 목걸이랑 바꾸자면서 말이다. 노예소녀는 한눈에 '모조품'이란걸 알았지만 그자리에서 목걸이를 바꿔 걸었다. 사내는 두들겨 맞아 퉁퉁 부은 눈에 웃음을 걸고서 쓰려지듯 잠에 빠졌다.

 

  그날 이후 소녀는 자취를 감췄다. 사내는 소녀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노예주인에게 소녀의 행방을 물었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화가 나서 주인을 협박했지만 돌아온 것은 호위무사에게 흠씬 두들겨맞는 일 뿐이었다. 그러다 소녀가 도박장의 주인인 '검은 칼리프'에게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내는 소녀가 '검은 조직'의 손아귀에 잡혀갔다는 생각에 소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역마주눈'이 된다. 허나 형편없는 실력에 마신이 완전히 들러붙질 않았다.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에서 소녀를 찾기 위해 '검은 칼리프'가 있다는 도박장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그속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도박빚을 지고 갚지 못한 사람들이 갇혀 있고, 돈을 다 갚지 못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에는 마신들이 우굴우굴 거렸던 것이다. 사내는 그 소굴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소녀를 잡아갔다는 '검은 칼리프'를 찾아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쎈 마신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사내는 맥을 추지 못하고 헤맬 뿐이었다. 그러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한 빚쟁이 하나와 만나게 된다. 비록 잠시 도박의 꾐에 빠져 이모양이지만은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아내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간절한 남자를 말이다. 처음엔 빚쟁이 주제에 가당치도 않은 소원을 갖고 있다고 냉소했지만, 어찌어찌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사내는 남자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을 들게 되었다. 자신도 소녀를 위해서 이 모험에 뛰어든 것 아닌가. 이 남자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감옥에서 살아나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사내는 이 남자를 반드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목숨을 건 승부 끝에 사내는 마신들을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남자를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남자도 자신을 위해서 목숨받쳐 싸워 자신을 가족에게 돌아가게 해주었기에 '생명의 은인'으로 대접하며 극진하게 보살핀다. 그렇게 사내는 남자의 집에서 편하게 쉬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 가장 행복해보이는 그때 남자에게 무참하게 칼로 찌르는 '소년'을 바라보게 된다. 사내는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아 당혹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이 구한 남자를 찔러죽인 소년은 분명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그렇게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노예소녀의 행방을 쫓아 돌아다니다 끝내 '검은 칼리프'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검은 칼리프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이고, 그를 대신해서 '한 여자'가 검은 조직의 우두머리를 맡아 '검은 칼리프' 행세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얼마 뒤에 권세가의 아내가 되어 곧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그때 '검은 칼리프'를 만나볼 수 있을테니 가보라고 한다. 사내는 '검은 칼리프'를 만나 노예소녀를 풀어달라고 간청할 생각으로 결혼식이 한창인 그곳으로 향했는데, 권세가의 아내가 될 사람이 바로 그 '노예소녀'였다. 사내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은 '검은 칼리프'를 찾아왔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는 결혼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이자 그토록 찾아헤맨 '노예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소년시절 처음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던 곳에서 마주친 '소녀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자신이 무참히 파괴해버린 한 가족의 끔찍한 비극에서 마주한 눈망울을 말이다. 사내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홀로 숲으로 들어가 삶의 의지를 잃은 채 식음을 전폐하고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그순간 불완전했던 마신이 깨어나고 사내를 한 입에 먹어치웠다.

 

  세라자드의 이야기가 끝나자 샤리아르 왕은 말이 없었다. 자신의 왕국을 방문하겠다는 삼촌은 분명 '역모'가 틀림없다. 그리고 왕국 안에서는 자신에게 불만을 품었던 세력이 호응을 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도 틀림없다. 그런데 세라자드의 이야기속의 사내는 '믿었던 존재'가 다름 아닌 자신을 파멸시키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하지만 사내의 비극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만약 사내가 남자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샤리아르도 폭군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깊은 상처를 받아 스스로 폭군이 되고 말았다. 이제 반란은 기정사실이다. 샤리아르는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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