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2 - 천년 제국 로마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벌거벗은 세계사 2
최호정 그림, 박효연 글, 김덕수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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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단순암기가 필요한 과목임에 틀림없지만, 암기의 지평을 넓이고 깊이를 더하게 되면 '역사가 감추고 있는 진면목'이 열리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이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승자가 있다는 것은 그 상대편인 '패자도 있었다'는 증거가 되므로 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승자가 독식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굳이 패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속에 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다룬 알렉산드로스와 진시황이 승리를 거둔 뒤에 감춰버린 '역사의 진실'을 되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승자가 애써 감추고 싶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몹시 궁금하겠지만 직접 파헤쳐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공부일 것일 것이다.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면 이번 책에서 '로마와 이집트의 상관관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길 바란다.

  두 번째 책은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그리고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내용이다. 베르길리우스의 고전 <아이네이스>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은 멸망한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이아스에 후손인 로물루스가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고대 로마는 왕정을 거쳐 공화정을 이루며 크게 성장하였고, 너무나도 커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황제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비로소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룩했지만 오현제 시대를 거쳐 군인황제의 난립과 동서로마로의 분열, 그리고 게르만의 대이동 등의 영향으로 '천년 제국'도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은 이후 서양의 모든 나라의 기틀이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탁월했으며, 로마의 문화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져내려올 정도로 '서양문화의 근간'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편, 이집트는 로마보다 앞서 찬란한 고대문명을 일구어냈지만, 잇따른 침략으로 인해 고대 왕조는 무너졌으며,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다시금 융성의 기틀을 되찾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자리를 탄탄히 잡았지만, 로마제국이란 거센 물결 앞에 위태로운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로마와 손을 잡고 이집트의 영광을 재건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기의 미녀'가 바로 그녀다. 로마의 최고 집권자인 카이사르를 유혹하고, 카이사르 암살 이후 최고 집권자에 오른 안토니우스마저 홀려버린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지만 여왕의 노력은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의해 물거품처럼 허사가 되었고,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끝내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승자의 기록'이다. 서양이 그토록 잘난체를 하는 근거가 된 '로마의 영광'이 돋보이는 기록이며, 오리엔트가 졸지에 서양(옥시덴트)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된 전말이 또렷하게 보여지는 대목이다. 이런 역사를 배우고 익힌다면 '서양의 우월함'만 남게 되고 세계사를 배우는 애초의 목적인 '인류공영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도 서양쪽으로 기울어지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의 목소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짐작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로마의 역사에서 배울 점이 참 많다. 제 스스로 잘난 것 하나도 없이 남들에게서 배운 것으로 착실히 힘을 길러 정점에 올라선 '불굴의 역사'가 가장 으뜸일 것이다. 여기엔 숱한 패배를 통해서 배우고 익혀 '최상의 솜씨'를 발휘하기까지 힘 없는 약소국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바로 '로마'라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힘 없던 왕정을 고집하지 않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체제인 '공화정'으로 탈바꿈을 하고, '로마의 영광'이라고 다시 쓰게 되었던 것이다. 점점 커지는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황제정'으로 또다시 탈바꿈하게 된 것까지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등장'은 곧 '독재자의 탄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마제국은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끝끝내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결국 로마의 멸망은 '외부적인 요소(게르만의 대이동 등)'에서 현저하게 보이지만, '내부적인 요소(정치권력의 부정부패 등)'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탓이 더 크다고 하겠다. 왜냐면 로마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내부로부터' 건실한 체제를 갖추고, '로마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들이 끝없이 등장하며 로마를 다시금 영광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팍스 로마나' 이후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승자의 기록'에서조차 입에 올릴 수 있는 건덕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로마는 멸망하고 말았다.

 

  자, 이처럼 대단한 로마가 감춘 역사는 이집트의 한 여왕에 의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바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다. 그녀는 기울어져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친동생(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권력다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집권계층은 여왕의 이런 행보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자 여왕은 로마의 최고집정관인 '카이사르의 방문'을 계기로 이집트에 개혁을 시도하려 한다. 우리로 치면 구한말 개혁개방을 외치던 개화파와 같은 행보를 걸은 것이다. 즉, 외세의 힘을 빌어 자국의 개혁을 시도한 셈이다. 오직 이런 방법만이 '낡은 세력(수구꼴통)'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거라는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외세의 힘'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그 대가 치뤄야 하는 '모욕의 역사'를 우리는 너무 잘 알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허울 좋은 '동맹'이란 말 따위는 함부로 거론해선 안 된다. 북중러를 상대하기 위해 한미일 공조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굳건한 동맹관계'를 위해서 간도 쓸개도 다 내어줘버리고나면 우리가 감당해야할 '청구서'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외세의 힘'은 절대 빌어서도, 믿어서도 안 될 것이다.

 

  암튼,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힘이 필요했고, 로마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비옥한 이집트'를 탐내던 로마의 최고사령관은 손쉽게 이집트를 거머쥘 열쇠로밖에 보이질 않는 클레오파트라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을테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야심 사이에서 잉태한 아기가 있었으니 바로 '카이사리온(카이사르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겐 달가운 아이가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핏줄이었으나 '외국인 여자'에게서 난 아이를 '로마의 지배자'로 만들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버려두고(?) 로마로 훌쩍 떠나버린다. 그 사이에 이집트의 권력문제는 일단락이 되어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고 말이다. 이제는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카이사르가 로마의 권력싸움에 신경쓰고 있던 사이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로마로 행차를 하게 된다. 로마가 새로운 권력자(황제)로 카이사르를 선택하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카이사리온)를 유일하고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식민지에서 지배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허나 황제의 등장을 거리던 '로마의 원로원'은 발빠르게 카이사르 암살을 모의한다. 카이사르의 계승자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지금이 가장 적기였으며 독재자가 사라지면 로마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 자신들(원로원)이 권력을 되찾게 되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부르투스가 공화정의 열성당원이었다. 그렇게 로마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바랐던 것이다.

 

  허나 역사의 소용돌이는 카이사르를 죽게 만들었지만, '황제의 등장'은 거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또 다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부하장수였던 '안토니우스'가 등장해서 원로원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휘몰아쳐나아갔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가장 당혹했던 이는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녀의 계획은 오로지 '카이사르'에게 달려있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로마의 성난 민심으로부터 자신과 아들을 보호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포기한 것은 없다. 로마의 권력싸움이 장기화되며 권력자 중 한 명인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클레오파트라는 또다시 '외세의 힘'을 빌어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니 이번에는 '로마'를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밀어붙인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이집트의 재건을 넘어 '로마제국' 전체를 클레오파트라의 발 아래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 뒤의 결말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악티움 해전'이 승부의 갈림길이었는데, 이집트는 '안클의 사랑'이 무색하리만치 허무하게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집트의 재건'은 물 건너가게 된 셈이다. 근데 이집트의 허무한 패배가 맞기는 한걸까? 원래 해전은 '변수'가 많은 법이다. 육지에서의 싸움보다 훨씬 많이 말이다. 더구나 이집트 내륙에서의 저항의 기록이 전무하다. 바다에서의 싸움에서 패배했다하더라도 '안클, 두 사람'이 모두 살아 있는 참인데, 병력수에서도 열세였던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낙승(?)으로 급히 마무리된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안클의 자결(?)'로 일단락되는 것도 곧이 믿기 힘들다.

 

  그보다는 '이집트 내부'와 '로마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로마는 '외국인 집정관'도 용납할 수 없었지만, '황제'로 모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클레오파트라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로마시민들은 먼저 '외국인 축출'에 열성적이었을 것이다. 반면 여왕을 모시던 이집트의 권력계층은 겉으로는 복종하였을지라도 속마음까지 체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때를 보아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재집권을 노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사정속에서 로마와 이집트는 한판 대결을 앞두게 되었다. 해전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이집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내부에서부터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패주하고 돌아온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급감했고, 로마의 자존심은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앞세워 똘똘 뭉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 내륙에서의 싸움은 '이집트의 낡은 세력'에 의해 변변한 힘도 쓰지 못하고 로마의 새로운 주인에게 홀랑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을 것이다.

 

  한 편의 소설처럼 들리는 이런 정황은 분명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다른점도 있을 테지만, '패자의 목소리'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단초가 될 것이다. 아무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사라져버린 진실들을 그대로 묻어버리고 '승자의 기록'에만 매달리게 된다면, '기울어진 역사관'만 자리잡게 만들어 줄 것이다. '승자의 영광' 앞에 무릎 꿇고 마는 '패자의 진실'은 밝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너무 눈이 부신 빛은 종종 '두 눈을 멀게' 만들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만들곤 한다. 로마의 영광을 추켜세우고나니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사라져버린 이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로마는 위대하지만 역시나 '정복자'에 불과할 뿐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또 다른 힘'으로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초기 로마 역사의 발자취'는 바람직한 모양새를 취했기에 배울만 하다. 허나 황제정 이후의 로마는 '거대해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몰락하고마는 모양새라 역시 배울점이 있다. 결국 '로마제국처럼'하면 망한다는 사실 말이다. 또 하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역시, '외세의 힘'이 아닌 '자국의 힘'으로 재건을 노렸다면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낡은 세력'이 커다란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구한말의 낡은 세력도 '같은 모양새'를 취하며 외세의 힘을 손쉽게 빌려대다가 끝내 멸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로마시민의 성숙한 의식'을 본받아 '이집트왕조의 신민들'이 교양을 쌓고 성숙해지길 노력하고 기다렸어야 한다.

 

  그렇게 '자국의 힘'을 키운 뒤에야 개혁이든, 혁명이든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숱한 개혁가, 혁명가들이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은 '성숙한 시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제풀에 꺾여버리고 만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다시금 키워나가야 한다. 아직도 남아 제거되지 않은 '낡은 세력들'이 발악을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직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길 머뭇거리는 이가 있다면, 부디 깨닫길 바란다. 당신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낡은 세력들에 의해 발목이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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